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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世家下(1)
許 穆
句麗ㅣ 與百濟․靺鞨兵으로 伐取新羅三十餘城하고 百濟又攻陷七城하니 庾信이 擊破之하고 攻百濟之刀比하여 克之라
고구려가 백제와 말갈(靺鞨)의 군사와 함께 정벌하여 신라의 30여 성을 취하고, 백제가 또 공격하여 7개의 성을 함락하니, 유신이 이들을 쳐서 무찌르고, 백제의 도비성(刀比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顯慶五年(660年)에 蘇定方이 以水陸兵十三萬으로 伐百濟에 帝ㅣ 勅王爲行軍摠管이라 王親帥師하여 次南川하고 遣太子法敏․上大等庾信하여 率精兵五萬하고 與唐兵으로 直趨泗沘라 百濟王義慈ㅣ 降하고 百濟亡이라
현경(顯慶) 5년에 소정방이 수군(水軍)과 육군(陸軍) 13만 명으로 백제를 정벌할 때에 황제가 칙명을 내려 왕을 행군총관(行軍摠管)으로 삼았다. 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려 남천(南川)에 주둔하고, 태자 법민(法敏)과 상대등(上大等) 유신을 보내 정예병 5만 명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곧장 사비성(泗沘城)으로 달려가게 하였다. 백제 왕 의자(義慈)가 항복하고 백제가 망하였다.
王이 攻取百濟二十餘城하고 又連戰連勝之하여 斬首二千餘級이라 王ㅣ 論功賞에 以庾信拜大角干하니 位十七等上이라 任用百濟의 佐平忠常․常永等七人하다
왕이 공격하여 백제의 20여 성을 취하고, 또 연전연승하여 2000여 명의 수급을 베었다. 왕이 공을 논하여 상을 내릴 때, 유신을 대각간(大角干)에 제수하니, 지위는 17등의 위이다. 백제의 좌평(佐平) 충상(忠常)ㆍ상영(常永) 등 7인을 임용하였다.
* 位十七等上: 신라의 관계(官階)는 17위(位)로, 1위 이벌찬(伊伐湌), 2위 이척찬(伊尺湌), 3위 잡찬(匝湌), 4위 파진찬(波珍湌), 5위 대아찬(大阿湌), 6위 아찬(阿湌), 7위 일길찬(一吉湌), 8위 사찬(沙湌), 9위 급벌찬(級伐湌), 10위 대내마(大奈麻), 11위 내마(奈麻), 12위 대사(大舍), 13위 사지(舍知), 14위 길사(吉士), 15위 대오(大烏), 16위 소오(小烏), 17위 조위(造位)이다. 1위인 이벌찬 위로 태대각간(太大角干)과 대각간(大角干)이 있는데, 김유신은 무열왕 때 대각간에 제수되고 문무왕 때 태대각간에 제수되었다. 《국역 동사강목 도하 관직연혁도》
定方이 以義慈見帝라 帝曰 何不因伐新羅아 定方對曰 其君仁하고 其臣忠하여 不可伐也라하다
소정방이 의자를 사로잡아 황제를 알현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길로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 하니, 소정방이 대답하기를, “그 나라의 군왕은 어질고 신하는 충성스러워 정벌할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句麗ㅣ 與靺鞨로 攻新羅述川이나 不克하고 攻北漢에 城主冬陀川이 力戰二十日한데 有大星隕於麗軍하고 天大雷震하니 麗人ㅣ 懼而去라 王이 以冬陀川으로 爲大奈麻하다 時百姓樂業하여 歲大熟하니 布匹이 粟至五十石이라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신라의 술천성(述川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할 때에는 성주(城主) 동타천(冬陀川)이 20일 동안 힘써 싸웠는데, 큰 별이 고구려의 군진(軍陣)에 떨어지고 하늘에서 크게 우레가 울렸다. 이에 고구려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떠났다. 왕이 동타천을 대내마로 삼았다. 이 때에 백성이 생업을 즐겁게 영위하여 그해 농사가 크게 풍년이 드니, 베 한 필 값으로 곡식이 50석에 이르렀다.
* 동타천(冬陀川): 신라의 장군. 북한산성 성주(城主)로서 대사(大舍)로 있다가 661년(태종 무열왕 8)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북한산성을 공격하자 2천 8백여 명의 주민을 격려하면서 성(城)을 수리하고, 20여 일을 방어하며 마침내 적을 격퇴했다. 그 공으로 대내마(大奈麻)에 올랐다.
龍朔元年(661年)에 王薨하고 太子法敏立하니 是爲文武王이라 帝ㅣ 遣任雅相하여 合諸胡兵三十五軍하여 伐句麗하고 帝ㅣ 諭王하여 出兵與大軍會라 蘇定方이 破麗兵於浿江하고 進圍平壤이라
용삭(龍朔) 1년에 왕이 훙(薨)하고, 태자 법민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문무왕(文武王)이다. 황제가 임아상(任雅相)을 보내 여러 호병(胡兵) 35군(軍)을 합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고, 황제가 왕에게 유시를 내려 출병하여 대군(大軍)과 회합하도록 하였다. 소정방이 패강(浿江)에서 고구려의 군사를 격파하고 진격하여 평양(平壤)을 포위하였다.
* 문무왕(文武王): 신라의 제30대 왕(재위 661∼681). 성은 김(金), 이름[諱]은 법민(法敏), 시호는 문무(文武)이다. 이름을 따서 법민왕(法敏王)이라고도 하며, 《삼국유사》에는 ‘문호왕(文虎王)’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庾信이 以精兵數萬으로 直抵平壤이나 會有詔班師한데 句麗追躡之라 庾信이 擊破之하여 斬首虜萬五千이라
유신이 정예병 수만 명으로 곧장 평양에 당도하였으나, 마침 조서가 있어 군사를 돌리는데, 고구려가 추격하여 뒤를 밟았다. 유신이 고구려의 추격병을 격파하여 머리를 베고 사로잡은 군사가 1만 5000명이었다.
百濟公子福信ㅣ 起兵하여 迎義慈子豐하니 西北部皆應之라 圍劉仁願於熊津하니 帝詔郞將劉仁軌하여 發羅兵救之라 連克支羅․大山․沙井하니 福信이 退保眞峴이라 羅兵이 又擊破之하니 豐이 忌福信하여 斬之하고 乞兵於倭하여 以拒唐이라
백제의 공자(公子) 복신(福信)이 기병(起兵)하여 의자의 아들 풍(豐)을 영입하자, 서북부 지역이 모두 호응하였다. 웅진(熊津)에서 유인원(劉仁願)을 포위하자, 황제가 낭장(郞將) 유인궤(劉仁軌)에게 조서를 내려 신라의 군사를 일으켜 구원하게 하였다. 이어 연달아 지라(支羅), 대산(大山), 사정(沙井)을 함락하니, 복신이 후퇴하여 진현(眞峴)을 보전하고 있었다. 신라 군사가 또 진현을 쳐서 무찌르니, 풍이 복신을 의심하여 그의 목을 베고 왜에게 군사를 요청하여 당나라에 대항하였다.
仁願이 請益兵하여 得淄靑兵四十萬하고 又與庾信等二十八將軍으로 急擊之라 遇倭兵於白馬浦口한데 庾信等이 四戰四捷하고 連燒鬪艦四百하니 倭人悉降하고 豐兵은 敗奔句麗라 王이 前倭降者數之曰 我與倭修好하여 無所失道한데 與百濟謀我는 何也아 我不忍殺汝하니 歸語爾主라하고 縱遣歸國하다
유인원이 군사를 더 청하여 치주(淄州)와 청주(靑州)의 군사 40만을 얻고, 또 유신 등 28명의 장군과 함께 세게 몰아쳤다. 왜의 군사를 백마강(白馬江) 포구에서 맞닥뜨렸는데, 유신 등이 네 번 싸워 네 번을 이기고, 연달아 전함(戰艦) 400척을 불태우니, 왜인이 모두 항복하였다. 풍의 군사는 패하여 고구려로 달아났다. 왕이 항복한 왜인을 앞에 불러 놓고 죄를 따져 말하기를, “우리가 왜와 우호를 닦아 도리를 잃은 바가 없는데, 백제와 더불어 우리를 도모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우리는 차마 너희를 죽일 수 없으니, 돌아가서 너희 군주에게 말을 전하라.” 하고, 풀어 주어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獨任存城險糧多하여 攻之不下하고 又得黑齒常之別部沙吒하여 互爲形勢하여 旬日에 復二百餘城이나 帝下詔에 乃降하여 百濟悉平이라 王以百濟旣平에 大赦하고 命有司하여 大酺라 令國中男女로 被服을 皆從唐制라
이때 유독 임존성(任存城)이 험하고 군량이 많아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았고, 또 저들이 흑치상지(黑齒常之)와 별부장(別部將) 사타(沙吒)의 호응을 얻어 서로 형세를 이루어 열흘 만에 200여 개의 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조서를 내리자 마침내 항복하여 백제가 모두 평정되었다. 왕이 백제를 평정한 뒤에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고, 유사에게 명하여 연회를 크게 베풀게 하였다. 나라 안에 영을 내려 남녀의 의복을 모두 당나라 제도를 따르게 하였다.
* 흑치상지(黑齒常之): 삼국시대 말기 백제의 장군.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부흥운동을 펼쳐 군세를 떨쳤다.
句麗貴臣淵淨土ㅣ 見國內大亂하고 以諸從官及十二城戶口三千五百四十來降하다
고구려의 귀신(貴臣) 연정토(淵淨土)가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러운 것을 보고 여러 소속 관원 및 12개 성의 호구(戶口) 3540명을 데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摠章元年(668년)에 帝ㅣ 遣李世勣하여 伐句麗하니 王이 令諸道摠管으로 領兵助攻句麗하고 王은 次漢城한데 兵二十萬人이라 遣諸將이 與唐兵圍平壤하여 克之라 句麗王臧이 降하니 句麗亡이라
총장(摠章) 1년에 황제가 이세적(李世勣)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니, 왕이 제도총관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고구려 공격을 돕게 하고, 왕은 한성(漢城)에 주둔하였는데, 군사가 20만 人이었다. 파견한 장수들이 당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포위하여 이겼다. 고구려 왕 장(臧)이 항복하니 고구려가 망하였다.
唐將李謹行이 擊破句麗餘衆於瓠瀘河하니 諸敗兵이 皆降新羅라 王이 加庾信太大舒發翰하니 位ㅣ 角干上으로 食邑五百戶라 上殿不趨라 以句麗俘虜七千으로 告祖廟하고 遂賚死事者帛한데 有差라
당나라 장수 이근행(李謹行)이 고구려의 남은 무리를 호로하(瓠瀘河)에서 쳐서 무찌르니, 패잔병들이 모두 신라에 항복하였다. 왕이 유신에게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을 더하니, 지위는 각간의 위이다. 식읍은 500호이고, 전(殿)에 올라서도 추창(趨蹌)하지 않았다. 고구려의 포로 7000명을 데리고 조묘(祖廟)에 고하고, 마침내 나라를 위해 죽은 자들에게 비단을 차등 있게 주었다.
*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이칭으로 대각간의 위이다. 대각간은 대서발한(大舒發翰)이라고도 하고, 각간이라고도 한다. 《국역 동사강목 도하 관직연혁도》
* 상전불추(上殿不趨): 趨는 추창(趨蹌)이니 걸음걸이가 절도에 맞는 모양. 곧 신하들이 임금이나 종묘를 진퇴할 때 예절에 맞도록 허리를 굽히고 총총걸음으로 빨리 걸어가는 것을 말한다.
咸亨元年에 倭自言其國近日之所出이라하여 更國號曰 日本이라하고 遣使來聘하다
함형(咸亨) 1년에 왜가 스스로 자기 나라가 해 뜨는 곳에서 가깝다 하여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고치고 사신을 보내 조빙(朝聘)하였다.
* 함형원년(咸亨元年): 함형은 당 고종의 일곱 번째 연호로, 1년은 서기 670년이다.
王이 旣多取百濟城邑하여 欲請和於熊津이나 都督不聽이라 乃分遣諸將하여 攻百濟八十餘城皆下之하고 又發兵하여 踐百濟田禾하며 遂與唐兵으로 戰於石城하여 斬首五千級하고 置所夫里州하고 以阿飡眞王으로 爲都督하다 又戰於平壤이나 大敗하니 王遣使還虜獲將士七百人하고 以謝之하다
왕이 이미 백제의 성읍을 많이 취했으므로 웅진에 강화를 청하고자 하였으나 웅진 도독이 들어주지 않았다. 마침내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 백제의 80여 개 성을 공격하여 모두 함락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백제의 농작물을 짓밟았으며, 마침내 당나라 군사와 석성(石城)에서 싸워 5000명의 수급을 베고, 그곳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한 다음 아찬(阿湌) 진왕(眞王)을 도독으로 삼았다. 또 당나라 군사와 평양에서 싸웠으나 크게 패하자 왕이 사신을 보내 사로잡은 장수와 병사 700명을 돌려보내고 사죄하였다.
* 진왕(眞王): 관등은 아찬(阿飡)에 이르렀다. 661년(태종무열왕 8) 2월에 백제의 부흥군이 사비성(泗沘城 :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을 공격하였으므로, 왕명을 받고 잡찬(迊飡) 상주장군(上州將軍) 문충(文忠)을 지원하였다. 672년(문무왕 12) 신라가 백제의 옛땅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자, 그 도독(都督)에 임명되었다.
遣水軍將徹川하여 鎭海西라 與唐將及契丹․靺鞨兵으로 九戰하여 皆克之한데 諸敗軍溺河死者를 不可計數러라 帝ㅣ 怒奪王爵하고 以劉仁軌로 爲鷄林道大摠管하여 伐新羅하며 以王弟在京師者仁問爲王하여 遣歸라 劉仁軌ㅣ 攻七重城克之라
수군장(水軍將) 철천(徹川)을 보내 해서(海西)를 진압하였다. 당나라 장수 및 거란(契丹)ㆍ말갈의 군사와 아홉 번을 싸워서 모두 이겼는데, 하수(河水)에 빠져 죽은 패잔병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황제가 노하여 왕의 작위를 빼앗고, 유인궤를 계림도 대총관(鷄林道大摠管)으로 삼아 신라를 정벌하게 하였으며, 경사(京師)에 머물고 있는 왕의 동생 인문(仁問)을 왕으로 삼아 돌려보냈다. 유인궤가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 敗軍溺河死者 不可計數: 《국역 동사강목》 제4하 계유년 9월 조에는 “당나라 군사로 호로(瓠濾)와 왕봉(王逢) 두 하수에 빠져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라고 되어 있고, 주에 “왕봉현(王逢縣)은 지금의 고양(高陽) 덕양현(德陽縣)이다.” 하였다.
王이 遣使乞罪하고 貢方物에 乃赦王復王爵이라 詔李謹行하여 屯買肖以經略之하다
왕이 사신을 보내 죄를 빌고 방물(方物)을 공물로 바치고서야 마침내 왕을 용서하고 왕의 작위를 회복시켜 주었으며, 이근행에게 조서를 내려 매초(買肖)에 군사를 주둔시켜 경략(經略)하게 하였다.
奈麻德福이 作新曆이라
내마(奈麻) 덕복(德福)이 새 역서(曆書)를 만들었다.
令僧義相하여 作浮石寺於太白山하다 治宮室하고 聚四方珍禽怪獸하다
승려 의상(義相)에게 영을 내려 태백산(太白山)에 부석사(浮石寺)를 짓게 하였다. 궁실(宮室)을 짓고, 사방에서 진기한 새와 괴이한 짐승들을 모아들였다.
薛仁貴ㅣ 攻泉城하니 將軍文訓이 逆擊大破之하고 又擊破謹行二十萬衆於買肖하며 又與唐兵十八戰하여 斬首六千級이라 沙飡施得이 與薛仁貴로 連戰數十合하여 皆勝之하니 斬首虜甚多라
설인귀(薛仁貴)가 천성(泉城)을 공격하자, 장군 문훈(文訓)이 맞이하여 쳐서 크게 격파하고, 또 이근행의 20만 군사를 매초에서 격파하였으며, 또 당나라 군사와 열여덟 번을 싸워 6000명의 수급을 베었다. 사찬(沙湌) 시득(施得)이 설인귀와 연달아 수십 합(合)을 싸워 모두 이기니, 머리를 벤 자와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 시득(施得): 관등은 사찬(沙飡)에 이르렀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뒤 당나라 세력의 축출을 위하여 대당투쟁을 벌였다. 676년(문무왕 16) 11월에 그는 선병(船兵)을 이끌고 소부리주(所夫里州 :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 기벌포(伎伐浦 : 지금의 장항)에서 당나라의 장군 설인귀(薛仁貴)와 대적하여 크고 작은 전투 22회에 걸쳐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4,000여 명을 목베어 당군을 격퇴하는 데 공헌하였다.
王立二十一年(681年)에 日無光如夜하고 天狗隕이라 王薨하고 太子政明立하니 是爲神文王이라 遺命葬東海石上이라
왕이 즉위한 지 21년에 해가 밤처럼 빛이 없고 천구성(天狗星)이 떨어졌다. 왕이 훙하고, 태자 정명(政明)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신문왕(神文王)이다. 유명(遺命)에 따라 동해의 돌 위에 장례하였다.
* 신문왕(神文王): 신문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81~692년이며 문무왕의 장자이다. 즉위하던 해에 일어난 귀족세력의 반란을 진압하고 철저히 숙청함으로써 왕권을 공고히 했다. 이를 바탕으로 중앙관제의 정비, 5소경제와 9주 및 군현제의 완성 등 지방통치체제 정비를 통해 전제왕권 중심의 통치질서를 완비했다. 9서당제 군사조직을 완성했고, 녹읍을 폐지하고 해마다 세조를 차등 있게 지급해 관리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동해에서 얻었다는 만파식적은 일체의 정치적 불안을 진정시키려는 왕실의 소망이 담긴 평화의 상징물이다.
置醫學博士하고 又置律令典博士라 立國學이라 遣使如唐하여 請禮典하다
의학 박사(醫學博士)를 설치하고, 또 율령전 박사(律令典博士)를 설치하였다. 국학(國學)을 세웠다.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가서 예전(禮典)을 청하게 하였다.
薛聰이 作九經訓義라 時東海出萬波息笛한데 吹律而東海無波라 置州․郡․縣百濟舊地하니 熊川․武珍二州와 泗沘․發羅二郡과 石山․馬山․孤山․沙平四縣이라
설총(薛聰)이 《구경훈의(九經訓義)》를 지었다. 이때 동해에서 만파식적(萬波息笛)이 나왔는데, 이 피리를 불면 동해에 파도가 없었다. 백제의 옛 땅에 주, 군, 현을 설치하였으니, 웅천(熊川), 무진(武珍) 2주(州)와 사비(泗沘), 발라(發羅) 2군(郡)과 석산(石山), 마산(馬山), 고산(孤山), 사평(沙平) 4현(縣)이다.
* 만파식적(萬波息笛): 만파식적설화에 전하는 일종의 가로피리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은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어 추모하였는데, 죽어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金庾信)이 합심하여 용을 시켜 동해(東海) 중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는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하여 하나가 되는지라 왕은 이 기이한 소식을 듣고 현장에 거동(擧動)하였다. 이 때 나타난 용에게 왕이 대나무의 이치를 물으니, 용은 “비유하건대 한 손으로는 어느 소리도 낼 수 없지만 두 손이 마주치면 능히 소리가 나는지라, 이 대도 역시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나는 것이요… 또한 대왕은 이 성음(聲音)의 이치로 천하의 보배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사라졌다. 왕이 곧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나라의 모든 걱정 ·근심이 해결되었다 한다.
彗星이 出五車라 嗣聖元年(684年)에 王薨하고 太子理洪立하니 是爲孝昭王이라 薨無嗣하여 國人立其母弟隆基하니 是爲聖德王이라 王立하여 赦復諸州․郡․縣一年租稅하다
혜성(彗星)이 오거성(五車星)에 나타났다.
사성(嗣聖) 1년에 왕이 훙하고, 태자 이홍(理洪)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효소왕(孝昭王)이다. 훙하고, 뒤를 이을 자손이 없어 나라 사람들이 효소왕의 동모제인 융기(隆基)를 세우니, 이 사람이 성덕왕(聖德王)이다. 왕이 즉위하여 죄수를 사면하고, 여러 주, 군, 현의 1년치 조세를 면제하였다.
* 효소왕(孝昭王): 신라의 제32대 왕 (재위 692∼702).
* 성덕왕(聖德王): 신라의 제33대 왕(재위 702∼737). 성은 김(金), 이름은 흥광(興光), 시호는 성덕(聖德)이다.
王作官箴하여 戒百官하고 令群臣하여 各言闕失하다 置典祀署하다 唐勑으로 王改名興光하니 避開元諱也라
왕이 〈관잠(官箴)〉을 지어 모든 관원을 경계하고, 뭇 신하들에게 영을 내려 누락된 정사와 잘못된 정사를 각각 말하게 하였다. 전사서(典祀署)를 설치하였다. 당나라의 칙명으로 왕이 이름을 흥광(興光)으로 고치니, 개원(開元)의 휘(諱)를 피한 것이다.
* 避開元諱也: 개원은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이다. 현종은 예종의 제3자로 이름은 융기(隆基)이다. 성덕왕(聖德王)의 이름도 융기(隆基)로, 《삼국사기(三國史記)》 권8 〈신라본기 성덕왕〉에 개명한 시기는 선천(先天) 연간(713)으로 되어 있다. 선천은 현종이 예종에게 전위(傳位)받고 개원한 연호이다.
開元十九年(731年)에 下詔褒仁義之邦하고 賜綵綾五百․帛二千五百하며 又賜紫羅繡袍․瑞文錦三百하다 太大舒發翰金庾信이 滅句麗六年卒하다 其妻爲尼하니 太宗女也라 封夫人하고 歲給金城租一千하다
개원 19년(731)에 조서를 내려 어질고 의로운 나라라고 표창하고 채릉(綵綾) 500필과 백(帛) 2500필을 하사하였으며, 또 자라수포(紫羅繡袍)와 서문금(瑞文錦) 300필을 하사하였다. 태대서발한 김유신이 고구려를 멸하고 6년 만에 졸하였다. 그의 처는 비구니가 되었는데, 태종의 딸이다. 부인(夫人)으로 봉하고 해마다 금성(金城)에서 거두는 조미(租米) 1000석을 지급하였다.
渤海․靺鞨叛하니 唐召兵이라 王遣將하여 與唐兵會하여 伐渤海라 天寒大雪에 山深阻阨하여 士卒多死하여 無功而還이라 作漏刻하고 置漏刻典博士라 改詳文司하여 爲通文博士하고 掌詞命이라
발해(渤海)와 말갈이 반란을 일으키자, 당나라가 군사를 소집하였다. 왕이 장수를 파견하여 당나라 군사와 회합하여 발해를 치게 하였다. 날씨가 춥고 눈이 많이 내린 데다 산이 깊고 험준하여 사졸(士卒)이 많이 죽었다. 그리하여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물시계〔漏刻〕를 만들고, 누각전 박사(漏刻典博士)를 설치하였다. 상문사(詳文司)를 고쳐 통문박사(通文博士)로 하고, 사명(詞命)을 관장하게 하였다.
大鑄佛鍾於皇龍寺한데 重四十九萬七千五百八十斤이라 賜孝子向德租三百斛하고 命有司하여 立石紀之라 向德은 熊川州板積鄕人이라
황룡사에서 범종(梵鍾)을 대대적으로 주조하였는데, 무게가 49만 7580근이었다. 효자 상덕(向德)에게 조미 300곡(斛)을 하사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돌을 세워 이 일을 기록하게 하였다. 상덕은 웅천주(熊川州) 판적향(板積鄕) 사람이다.
* 효자상덕(孝子向德): 신라 경덕왕 때의 효자로 효순(孝順)으로써 부모를 받들었다. 755년(경덕왕 14) 큰 흉년이 들고 유행병이 번져 그의 부모도 굶주리고 병까지 들었다. 더욱이 어머니는 악창[癰]이 나서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나, 먹을 것이 없어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임으로써 병이 낫게 되었다.
開元二十三年(735年)에 帝賜以浿南句麗舊地하다 明年에 王薨하고 太子承慶立하니 是爲孝成王이라 四年薨하고 太子憲英立하니 是爲景德王이라
개원 23년(735)에 황제가 패강 남쪽의 고구려 옛 땅을 하사하였다. 이듬해에 왕이 훙하고, 태자 승경(承慶)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효성왕(孝成王)이다. 4년 만에 훙하고, 태자 헌영(憲英)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경덕왕(景德王)이다.
* 효성왕(孝成王): 신라의 제34대 왕(재위 737∼742).
* 경덕왕(景德王): 신라의 제35대 왕(재위 742∼765).
置國學에 諸業博士助敎하다 置貞察하여 糾正百官하고 又置天文博士라 定九州하니 曰尙州 曰良州 曰康州 曰漢州 曰朔州 曰溟州 曰熊州 曰全州 曰武州라 小京五요 郡縣은 四百五十이라
국학(國學)에 여러 과목의 박사와 조교(助敎)를 설치하였다. 정찰(貞察)을 설치하여 백관을 규찰하고 바로잡게 하였다. 또 천문박사(天文博士)를 설치하였다. 구주(九州)를 정하였다. 구주는 상주(尙州), 양주(良州), 강주(康州),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溟州), 웅주(熊州), 전주(全州), 무주(武州)이다. 소경(小京)은 5개이고, 군현(郡縣)은 450개이다.
永泰元年(765年)에 王薨하고 太子乾運立하니 是爲惠恭王이라 才八歲로 母太后ㅣ 聽政이라
영태(永泰) 1년에 왕이 훙하고, 태자 건운(乾運)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혜공왕(惠恭王)이다. 나이가 겨우 8세로, 모태후가 대신 정사를 처리하였다.
* 혜공왕(惠恭王): 신라의 제36대 왕(재위 765∼7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