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웃음은,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감정의 벽에, 전혀 엉뚱한 딱성냥을 그었을 때 발생하는 불꽃이다. 그 접점에서 웃음이 터진다.
한 사람의 감정이 기후가 다른 사람의 기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안다. 나의 일기가 쾌청하면 상대의 기분도 더불어 좋아진다.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울음 섞인 표정을 드러내 보이면, 금방 상대의 얼굴도 어두워진다. 아내가 물기에 젖은 부드럽고 맑은 눈으로 쳐다보면, 나 역시 까닭 없이 슬퍼진다. 함께 일하던 동료가 권태를 이기지 못해, 손으로 입을 막으며 하품을 몰아치듯 해대면, 누구라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것이다.
웃음이야말로 찰나지간에 분위기를 일신하는 힘이 있다. 소나기가 지나간 뒤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햇살처럼,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깨뜨리며 누군가가 예고도 없이 재치 있는 말 한 마디를 툭 던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는, 정말이지 믿기 힘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
필적
나의 일기에 봄바람이 부나 보다. 필적을 살펴보니 문장의 진행방향으로 한결같이 글자들이 약간 기울어져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부는 탁월풍이 글자를 쓰다듬고 있는 듯. 일기 한가운데 풍향계를 꽂아 놓으면 부단히 까불대면서도 대체로 한 방향을 지시할 것이다. 탁월풍 또는 항풍으로 불리는 것은, 종잡을 수 없는 변덕 속에서도 거칠게나마 유지되는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보았던 언덕 위의 보리밭이 떠오른다. 봄이 되면 이랑을 따라 푸른 물결이 넘실거렸다. 밭둑 언저리에서는 흑염소가 아지랑이를 호물호물 뜯어먹었고. 어디 그뿐인가. 노고지리도 청보리밭에서 하늘 높이 솟아오르며 노래 불렀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곳은 할머니의 일기장이었다.
왜일까? 나는 글자들이 바람에 어지럽게 비틀거리는 필체로, 즉 난필로 일기를 쓰는 반면, 할머니는 푸른 활자活字들이 바람을 타면서 춤을 추는 생동감 넘치는 필체로, 즉 달필로 쓰셨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첫댓글 웃음이야 일상에서 뺄 수 없는 예찬의 대상에 들겠지만
필체에서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작가의 예리함에 놀랐습니다.
'탁월풍'이 뭔지 검색도 해 봤답니다.
하기야 피붙이의 글씨체에서는 체취도 나겠네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