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으면 그것들이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들판 한가운데 서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위에는 하늘이 있고 아래에는 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내가 서 있습니다.
너무 당연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풍경입니다. 그런데 옛사람들은 이 장면 하나를 놓고 세상 전체를 설명했습니다.
삼재(三在)입니다.
문헌도 책자도 없던 시대에 전해진 것이라고 합니다. 배워서 안 것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느껴서 알게 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늘을 봅니다.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도 못하고 만져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땅을 봅니다. 이건 만져집니다. 나무구나, 돌이구나, 먹는 것이구나 — 손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 둘이 서로 다릅니다.
하늘은 끝이 없습니다. 한도 없고 끝도 없어서 그저 영원할 뿐입니다.
땅은 넓습니다. 지평선 너머에 또 지평선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넓어도 물질이라서 끝이 있습니다. 언젠가 닳고 언젠가 무너집니다.
주행학은 이 둘에 이름을 붙입니다. 하늘은 기능계, 땅은 물질계입니다.
지난 호에서 무한한 쪽과 유한한 쪽이 늘 짝으로 온다고 했습니다. 생(生)과 명(命), 기(氣)와 역(力) 같은 짝들 말입니다. 그 짝이 세상 크기로 커진 것이 하늘과 땅입니다.
그러면 세 번째 자리가 남습니다.
나입니다.
여기서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하늘은 영원하고 땅은 광대합니다. 나는 그 사이에 잠깐 서 있다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 셋 중 하나가 됩니까. 어떻게 3분의 1일 수 있습니까.
강연자가 이렇게 되묻습니다.
"암만 거룩하고 영원 무쌍하고 큰 하늘이 있고, 광대무비한 큰 지반이 있다. 하지만 그 안에 내가 없으면 그게 존재해요? 존재 안 해요?"
"내가 없는데 그게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하늘이 아무리 영원해도, 그것을 하늘이라고 알아보는 자가 없으면 그냥 있을 뿐입니다. 땅이 아무리 넓어도 밟는 발이 없으면 넓다는 말조차 성립하지 않습니다.
내가 미립자처럼 작은 줄 알았는데, 하늘과 땅을 이어 주는 자리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셋입니다. 크기가 같아서가 아니라, 하나만 빠져도 나머지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유가(儒家)에서도 말했습니다. 천문·지리·인사라고 했고, 노자에도 잠깐 나옵니다.
그런데 동양의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갑니다.
삼재를 말로 정리된 사상으로 두지 않고, 내가 그 안에 한 몸으로 들어가 있다고 봅니다. 하늘의 사정과 땅의 사정이 내 몸 안에서 그대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돌아가는 모습에 이름을 붙입니다.
"그 순환하는 그 모습을 가지고 생명이라고 이야기한다."
생명이란 내 심장이 뛰는 동안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늘과 땅과 내가 하나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 — 그 전체가 생명입니다. 그래서 셋 중 어느 하나만 어긋나도 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셋이 내 몸 안에서는 어떻게 나뉘어 있을까요.
다음 호에서 봅니다. 99호에서 다룬 칠정, 곧 기쁨과 노여움 같은 감정들이 그중 어디에 속하는지도 거기서 밝혀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