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
Ⅰ. 임시정부의 수립
1. 임시정부의 수립
기미독립운동이후 독립운동의 체계화와 조직화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3개의 임시정부가 성립되었다.
2. 임시정부의 통합
전로한족회중앙총회 | 13도대표의 국민대회 | 신한청년당 |
대한국민의회(1919.3) 대통령 손병희(연해주) | 한성정부(1919.4) 집정관 총재 이승만(서울) | 상하이정부(1919.4) 국무총리 이승만(상하이) |
| 대한민국임시정부(1919.9)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 |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대한국민의회의 조직을 흡수하고 상하이에 청사를 마련하였다. 연해주는 우리 교포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었지만 안전지대가 되지 못하였고 상하이는 교통의 요지이며 안전하였다.
3. 정부형태
가. 최초의 3권분립에 입각한 민주공화제 정부
행정(국무원), 입법(의정원), 사법(법원)
나. 비밀행정조직망
⑴ 연통제
국내외 독립운동을 지휘감독하고 자금과 국내정보를 수집하고 각 도와 연락하기 위해 마련된 임시정부의 지방행정제도였다. 서울(총판)-도(독판)-부・군(부장・군감)-면(면감)으로 구성되었다.
⑵ 교통국
통신기관으로 정보의 수집, 분석, 교환, 연락 등의 업무를 관장하였으며 주로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이북지역에 설치하였다. 사무국은 아일랜드인 George L. Shaw가 운영하는 만주 단둥의 이륭양행(怡隆洋行, 1919~1937)이었다. George L. Shaw는 신무호를 통해서 군자금을 수송하였고 1937년 매각하고 복주(福州)로 갔고 1943년 사망하였으며 1963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수여되었다.
⑶ 한계
1922년경 일본에 적발되어 와해되었다.
Ⅱ. 임시정부의 활동
1. 독립운동자금모금
애국공채발행, 국민의연금 모급하여 백산상회(1914년 안희제가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에 설립)와 이륭양행을 통해 연통제・교통국조직을 통해 임시정부에 전달
2, 외교 활동
가. 유럽
파리위원회(김규식)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공고서를 제출
나. 미국
구미위원회(이승만)는 국제연합과 각종 국제회의에 독립 청원 활동
3. 군사활동
가.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 설립
나. 군무부 직할로 만주에 광복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사하에 광복국총영을 설치하여 무장투쟁지원
다. 서간도(남만주) : 서로군정서(지청천), 임시정부 산하의 주만육군참의부(1923.8)
라. 북간도(동만주) : 중광단→북로군정서(김좌진)
4. 문화활동
가. 독립신문 간행 :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로 국내외 배부
나. 사료편찬소(박은식) :한일관계사료집, 독립운동지혈사
다. 학교 설립 : 상하이에 인성학교(초등과정), 삼일중학교(중등과정)
Ⅲ. 임시정부의 침체와 변천
1. 침체의 배경
가. 경제적 어려움과 인력난 : 일제의 탄압으로 연통제와 교통국 파괴로 국내와 연계단절되고 지원 감소로 자금난・인력난
나. 사상대립 :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
다. 외교활동 성과 미흡 및 외교활동을 둘러싼 논쟁
⑴ 이승만의 국제연맹에 대한 위임통치청원을 둘러싼 갈등
⑵ 국제회의에서 열강의 조선문제에 대한 무관심으로 성과 미흡
라. 독립운동방략을 둘러싼 갈등
⑴ 외교독립론(이승만) : 외교활동을 통해 국제적으로 강대국의 도움을 받아 독립해야 한다.
⑵ 무장투쟁론(이동휘) : 즉각적・직접적・적극적인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
⑶ 실력양성론(안창호) : 교육・산업의 발전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을 준비해야 한다.
2. 국민대표회의(1923)
가. 배경
이승만의 외교노선에 비판적인 중국관내세력(안창호)과 무장투쟁세력(신채호, 박용만)의 개최요구로 독립운동 노선의 통일과 방향전환 모색
나. 과정
1921년 2월 박은식, 김창숙 등이 상하이에서 회의촉진선언문을 발표하였다.
1922년 5월 주비위원회 소집선언서를 발표하고 회의개최를 공고하였다.
1923년 1월 국내, 상하이 및 만주일대, 러시아, 미주 등지에서 여러 단체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예비회의에서 본회의에 상정할 안건을 심의하여 1월 31일 김동삼을 의장으로 본회의가 시작되었다.
1923년 3월 임시정부 개조안이 상정되었다.
1923년 5월 개조파인 만주대표들이 사임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창조파 인사들은 윤해를 의장에 추대하고 회의를 계속 진행시켜 개조안을 부결처리하였으나 개조파가 회의를 전면 거부하였다.
다. 주장
⑴ 개조파(안창호) : 임시정부의 대표성을 인정하여 임시정부의 존속과 개편주장, 실력양성 및 외교활동 강조
⑵ 창조파(신채호, 박용만) : 임시정부의 대표성을 부정하며 임시정부 해체후 새로운 정부 수립하고 만주나 연해주로 옮기자고 주장, 무장투쟁론
⑶ 현상유지파(김구, 이동녕)
라. 결과
⑴ 이승만 탄핵(1925년)
⑵ 독립운동세력의 분열심화 : 창조파와 개조파의 분열로 대부분의 민족운동가 임시정부 이탈하여 일개단체로 전락
⑶ 지도체제의 개편 및 한인애국단의 활동
① 지도체제의 개편 : 대통령제→집단지도체제(국무령중심제→국무위원중심제)
② 한인애국단의 조직 : 1931년 10월 김구(金九) 등 민족주의자・애국청년들이 상하이에서 결성한 비밀독립운동단체로서 이봉창(1932년 토쿄 일왕 마차 폭탄투척), 윤봉길(1932년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일왕 생일・상하이 사변전승 축하기념식 폭탄투척)
③ 의의 : 한반도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 고조, 한국독립운동의 의기 고양, 중국 국민
당정부의 임시정부 지원 본격화, 한국광복군 창설(1940년)
Ⅳ. 개편노력과 한국광복군
1. 개편노력
가. 임시정부의 이동 : 윤봉길의거이후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 상하이에서 중칭에 청사마련(1940년)
나. 임시정부내 여당결성 : 1940년 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 김구, 한국독립당 조소앙, 조선혁명당 지청천)(야당 민족혁명당 김원봉)
다. 주석중심제 : 김구 주석 중심의 단일지도체제
라. 대한민국 건국강령(1941년) : 조소앙의 3균주의 수용하여 민주공화제
마. 민족주의 좌파와 연합 :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흡수 통합(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변천
개편 | 정부형태 | 정부수반 | 활동 |
제1차(1919) | 대통령중심제 | 이승만 | 민족운동통합, 외교활동 |
제2차(1925) | 국무령중심의 내각책임제 | 이동녕, 김구 등 | 정부내부의 혼란 수습 |
제3차(1927) | 국무위원중심의 내각책임제 | | 좌우이념 대립 통합 |
제4차(1940) | 주석지도 체제 | 김구 | 대일・대독 선전포고 |
제5차(1944) | 주석・부주석 지도체제 | 김구, 김규식 | 광복 대비 |
2. 한국광복군
가. 창설 : 1940년 9월 중국 국민당정부의 지원을 받아 충칭에서 창설(총사령관 지청천, 부사령관 김원봉, 이범석)
나. 군대조직을 위한 노력 : 시안에 군사특파단과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조직하여 파견
다. 구성 :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한국독립군 간부와 조선의용대의 일부
라. 활동 : 대일선전포고(1941년), 인도, 미얀마에서 영국군과 연합작전 전개, 국내진입작전 계획으로 광복군과 미국 전략정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과의 국내진공군 편성했으나 미실행
임시정부의 이동과 정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후 일본의 압력으로 오랫동안 중국 내륙을 편력(遍歷)해야 했다. 임시정부는 일본의 중국 본토 침략에 따라 다음과 같이 이동을 하였다. 상하이(1919)→항저우(1932)→전장(1932)→난징(1937)→창사(1937)→광저우(1938)→류저우(1938)→치장(1939)→충칭(1940)이다.
지명 | 기간 |
상하이(上海, 상해) | 1919년 4월~ 1932년 5월 |
항저우(杭州, 항주) | 1932년 5월 ~ 1932년 10월 |
전장(鎭江, 진강) | 1932년 10월 ~ 1932년 11월 |
난징(南京, 남경) | 1932년 11월~1937년 11월 |
(피난) 자싱(嘉興, 가흥) | 1935년 10월~1936년 2월 |
창사(長沙, 장사) | 1937년 12월~1938년 7월 |
광저우(廣州, 광주) | 1938년 7월~1938년 11월 |
류저우(柳州, 유주) | 1938년 11월~1939년 5월 |
치장(綦江, 기강) | 1939년 5월~ 1940년 9월 |
충칭(重慶, 중경) | 1940년 9월 ~ 1945년 11월 |
(피난) 구이린(桂林,계림) | |
위의 유적지 중 임시정부 유적지가 복원된 곳은 상하이, 항저우, 충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