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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 오준, `사람의 땅 시의 길` 원문보기 글쓴이: 해와
勺詩富林 52강
6장 시의 소재; 2. 몸, 방, 집, 무덤
2019년 5월 1일
바람의 풍경 중에서
신경림
생각해 보면
내게는 길만이 길이 아니고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이 길이었다.
나는 그 길을 통해 바깥세상을 내다볼 수 있었고
또 바깥세상으로도 나왔다.
그 길은 때로 아름답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길을 타고,
사람을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니 웬일일까.
1. 첫 번째 집; 몸, 어머니; 「부모은중경」중에서
(……)
"세존이시여, 어머님의 은덕을 어찌 보답하오리까."
"잘 들어라. 내 알아듣기 쉽게 나누어 설명해 주겠노라."
어머니가 아이를 배면 열 달 동안 그 신고가 극심하니. 첫째 달에 태아는 풀 위의 이슬 같아 이른 새벽에 모였다 정오만 되면 흩어지느니라. 잉태한 지 둘째 달이 되면 태아는 엉긴 우유를 떨어뜨린 것과 같고 셋째 달에는 엉긴 피와 같게 되느니라. 넷째 달이면 차츰 사람의 형태를 이루고 다섯 달째 이르러서야 머리, 두 팔, 두 무릎의 다섯 부분을 이루느니라. 여섯 달이 되면 눈, 귀, 코, 입, 혀, 그리고 의식[意]등의 여섯 가지 정기가 열리느니라. 일곱째 달에 이르면 3백 60개의 뼈마디와 8만 4천개의 털구멍이 생기느니라. 아홉 달째가 되면 아기가 뱃속에서 먹게 되는데 복숭아, 배, 마늘은 받지 않고 오곡(五穀)의 정기만을 받으리라. (……)
잉태한 지 열 달이 되면 아이가 태어나는데 효자가 될 자식이면 손을 합장하고 나와 어머니의 몸이 상하지 않게 되지만 속 썩일 자식이면 어머니의 태를 찢고 어머니의 심장을 움켜쥐며, 다리로 어머니의 엉치뼈를 버팅겨 마치 일천 개의 칼로 배를 휘저으며 일만 개의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는 것처럼 괴롭히느니라. (……)
"내가 중생을 보매 비록 외형적으로 사람의 모양은 갖추었으나 마음과 행동이 어리석고 어두워서 부모님의 큰 은덕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은혜를 배반하는 등 불순하고 의리가 없느니라.
어머니가 아이를 밴 열 달 동안은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행동이 불편하고 음식도 소화가 안돼 마치 큰 병에 걸린 사람 같느니라. 달이 차 해산할 때는 자칫 잘못했다가는 헛되이 죽음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피가 땅을 흥건히 적시는 고통을 당하는데 낳으신 뒤에도 쓴 것은 당신이 삼키고 단 것은 뱉어서 자식에게 먹이고, 안아주고 업어 기르시며, 더러운 것을 닦으시면서도 싫은 빛을 내지 않으시느니라. 더운 것, 추운 것도 마다 않으시고 마른 자리를 가려 자식을 누이고 진자리는 당신이 주무시기를 마다 않느니라.
3년 동안 젖을 먹으면서 자란 어린아이에게 예절과 의리를 가르치시고 장가들이고 시집 보내시며 벼슬도 시키고 일자리도 갖게 해주시느니라. 이렇게 애써서 기르고 가르치는 일이 끝나도 부모님의 은혜는 끊이지 않아 자식이 병이 나면 부모도 병을 얻고 자식이 나으면 부모도 따라서 병이 낫느니 이렇게 양육하여 빨리 어른이 되기를 기원하시느라.
하지만 자식은 성장한 뒤 도리어 효도하지 않으니 부모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데 불손하게 대꾸하며 친척을 헐뜯고 형제간에 우애가 없으며 스승 및 부모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말과 행동이 교만하여 제멋대로 일을 처리하느니라.
이를 부모로서 훈계하고 꾸짖어야 하거늘 어린아이라 하여 감싸주니 장성해가면서 성격이 사나워지고 뒤틀려 잘못을 인정하지 않게 되느니라. 좋은 벗을 버리고 나쁜 사람과 사귀는 것이 천성이 되어 나쁜 교제를 꾸미고 남의 꼬임에 빠져 타향으로 도망, 부모님을 배반하느니라.
고향을 떠나 자식은 타관에서 결혼하여 집으로 돌아오지 않거나 횡액을 당해 형벌을 받기도 하고, 병을 얻어 고곤(苦困)하고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타관에서 죽어가고 누구 한 사람 거둬주지 않느니라.
이렇게 되면 부모는 근심과 슬픔으로 울다 눈이 멀기도 하고 병을 얻어 지쳐 죽기도 하는데 원귀가 되어서도 끝내 자식을 잊지 못하느니라.
또는 자식이 효도와 의리를 저버리고 무뢰배들이 어울려 무익한 일을 일삼아 그 과실이 형제에게 누를 미치거나 부모의 마음을 어지럽혀 항상 근본에 싸이게 하느니라. 부모의 일상생활을 돌보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부모가 나이가 많고 노쇠함을 창피하게 여겨 괄시와 구박을 서슴지 않느니라.
혹 부모 중 한 분이 먼저 세상을 떠나 홀로 남게 될 경우 마치 더부살이하는 것처럼 홀대를 하여 항상 슬픔에 젖게 하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부모에게 먼저 공양하지 않고 제 아내와 자식을 챙기는 팔불출이 짓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제 처첩에게는 약속을 지키면서 부모의 분루(憤淚)나 꾸지람은 전혀 어려워하지 않느니라.
딸인 경우 출가외인이라 하여 제 남편의 구박은 달게 받으면서 부모에게는 순종치 않고, 친가 친척에게는 소원하게 굴며, 남편을 따라 타향으로 옮겨가기라도 하면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 없이 소식 한 자 없느니 부모는 딸이 보고 싶은 마음이 목마를 때 물을 찾듯 간절하느니라.
이처럼 부모의 은덕은 한량없건만 불효의 죄는 이루다 말할 수 없느니라." (……)
가령 어떤 사람이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업고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업고서, 피부가 닳아서 뼈가 드러나고 뼈가 닳아서 골수가 드러나도록 수미산을 백천 번 돌더라도 오히려 부모의 은혜는 갚을 수가 없느니라. (……)
가족
김종해
천마산 눈썹 아래
초장동 산비탈이 있고
천마산 코딱지 같은 우리 집이 있고
충무동 푸른 바다가 있고
새벽별을 보며 생선도가로 내려가는
이모 집이 있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소리치는
외삼촌 집이 있다
이른 새벽부터 우리 집에 와서
해장술에 취한 천마산은
어머니에게 술국을 더 달라 한다
아버지와 형은 말없이
절구에 떡을 치고
누나와 나는 맷돌을 돌린다
콩나물시루에 물 주는 아우가
손을 놓을 때쯤
누더기 같은 우리의 희망이
빨랫줄에 펄럭일 때쯤
천마산은 바람과 안개를 거느리고
넌지시 산을 오른다
장독대
이춘우
장독대는 어머니의 숨결
해와 달의 온기와
별빛까지 끌어 담는 곳
믿을 만한 하늘이면
주름진 손으로 모자 벗겨
햇살, 바람 쐬고
식구 수만큼 늘어난 장독
사대(四代)가 모여 우애가 깊은
우리 집 안방 웃음마당 같다
마디 굵은 어머니의 손길
어느새 뚝배기에
정성 끓고
수많은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던
어머니의 삶 그리며
나는 이방인이 되어
시간이 드리운 객지에서
장독대에 깃든 어머니의 혼 먹으며
나를 찾아 공존하네
바람 같은 세월 속에
어머니 닮아
한쪽으로 기운 고향집
담쟁이가 안고 버텨온 흙돌담
그 장독대 곁으로
되돌아 갈 준비를 하리라.
2. 집으로부터 나와 길 위에서 죽다; 마가복음15장
그들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받아 마시지 않으셨다. 마침내 군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의 옷을 나누고 누가 어떤 것을 가질지 제비를 뽑았습니다.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아침 9시쯤이었습니다. 예수의 죄를 적은 나무에는 ‘유대 사람의 왕’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두 명의 강도를 하나는 그분의 오른쪽에, 하나는 그분의 왼쪽에 매달았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고개를 흔들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3일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함께 예수를 조롱하며 자기들끼리 말했습니다.
“남을 구원한다더니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그리스도, 이스라엘 왕아!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우리가 보고 믿도록 해 보아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사람도 예수를 모욕했습니다.
낮 12시가 되자 온 땅에 어둠이 뒤덮이더니 오후 3시까지 계속됐습니다. 오후 3시가 되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
가까이 서 있던 몇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듣고 말했습니다. “들어 보라. 저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한 사람이 달려가 해면을 신 포도주에 듬뿍 적셔 막대기에 매달아 예수께 마시게 하며 말했습니다. “보시오. 저가 엘리야를 부르고 있소.”
그때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쪽으로 찢어졌습니다. 예수를 마주 보고 서 있던 백부장은 예수께서 이렇게 부르짖으시며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이분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여인들도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도 있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갈릴리에서 예수를 따르며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에 온 다른 여인들도 많았습니다.
길 위의 집
박성민
세월의 허벅지엔 늘 가려운 상처가 있다
주정뱅이 불빛들은 밤이 되면 흔들리고
오늘은 더 추워졌다, 참이슬도 쓰러진다
지하도나 대합실 구석마다 우리는
못처럼 박혀서 아침까지 녹슬어간다
오늘자 신문 한 장을 몸뚱이에 덮는다
구부러진 담배꽁초 허리 곧추 세우고
가슴 속 깊이 빨면 길 위의 집이 된다
눈 뜨면 젖은 눈망울, 커튼 되어 열리는 집
희고 작은 내 주먹아 창문은 어디 있나
밤마다 벌떡 일어나 몇 번이고 묻는 말에
한 번도 거만한 어둠은 답해주지 않았다
새벽까지 뜬 별들은 잠 못 이룬 것들 뿐
두 손 모은 기도는 가랑이로 모아지고
아침엔 집중사격 같은 햇살만 눈부시다
오래된 서적
기형도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 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위험한 가계(家系) 1969
1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 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우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풍병(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매셨다.
2
아버지. 그건 우리 닭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성껏 돌보세요. 나는 사료를 한줌 집어 던지면서 가지를 먹어 시퍼래진 입술로 투정을 부렸다. 농장의 목책을 훌쩍 뛰어 넘으며 아버지는 말했다. 네게 모이를 주기 위해서야. 양계장 너머 뜬, 달걀노른자처럼 노랗게 곪은 달이 아버지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이리저리 흔들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팔목에 매달려 휘 휘 휘파람을 날렸다. 내일은 펌프 가에 꽃 모종을 하자. 무슨 꽃을 보고 싶으냐. 꽃들은 금방 죽어요 아버지. 너도 올 봄엔 벌써 열 살이다. 어머니가 양푼 가득 칼국수를 퍼 담으시며 말했다. 알아요 나도 이젠 병아리가 아니예요. 어머니. 그런데 웬 칼국수에 이렇게 많이 고춧가루를 치셨을까.
3
방죽에서 나는 한참을 기다렸다. 가을 밤의 어둠 속에서 큰누이는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왔다. 이번 달은 공장에서 야근 수당까지 받았어. 초록색 츄리닝 윗도리를 하나 사고 싶은데. 요새 친구들이 많이 입고 출근해. 나는 오징어가 먹고 싶어. 그건 오래 씹을 수 있고 맛도 좋으니까.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누이의 도시락 가방 속에서 스푼이 자꾸만 음악 소리를 냈다. 츄리닝이 문제겠니. 내년 봄엔 너도 야간고등학교라도 가야 한다. 어머니. 콩나물에 물은 주셨어요? 콩나물보다 너희들이나 빨리 자라야지. 엎드려서 공부하다가 코를 풀면 언제나 검뎅이가 묻어나왔다. 심지를 좀 잘라내. 타버린 심지는 그을음만 나니까. 작은누이가 중얼거렸다. 아버지 좀 보세요. 어떤 약도 듣지 않았잖아요. 아프시기 전에도 아무것도 해논 일이 없구. 어머니가 누이의 뺨을 쳤다. 약값을 줄일 순 없다. 누이가 깎던 감자가 툭 떨어졌다. 실패하시고 나서 아버지는 3년 동안 낚시질만 하셨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너희들을 건졌어. 이웃 농장에 가서 닭도 키우셨다. 땅도 한 뙈기 장만하셨댔었다. 작은누이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이 스웨터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는 채소 씨앗 대신 알약을 뿌리고 계셨던 거예요.
4
지나간 날들을 생각해 보면 무엇하겠느냐. 묵은 밭에서 작년에 캐다 만 감자 몇 알 줍는 격이지. 그것도 대개는 썩어 있단다. 아버지는 삽질을 멈추고 채마밭 속에 발목을 묻은 채 짧은 담배를 태우셨다. 올해는 무얼 심으시겠어요? 뿌리가 질기고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심을 작정이다. 하늘에는 벌써 티밥 같은 별들이 떴다. 어머니가 그만 씻으시래요. 다음날 무엇을 보여주려고 나팔꽃들은 저렇게 오므라들어 잠을 잘까. 아버지는 흙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셨다.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 심으시려고.
5
선생님. 가정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돌아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서 석유 냄새가 났다. 글쎄, 자전거도 타지 않구 책가방을 든 채 백 장을 돌리겠다는 말이냐?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6
그 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 하시고 굳은 혀. 어느 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반듯한 불들은 꺼지지 않았다. 아주 추운 밤이면 나는 이불 속에서 해바라기 씨앗처럼 동그랗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가계(家系)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저 동지(冬至)의 불빛 불빛 불빛.
3. 他人의 집
아버지의 죽음
김동호
사진첩 속 사진이 퇴색할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기억이 있다.
六 .二五 전쟁, 一四후퇴 때 빙판길 미끄러지며 미끄러지며 찾아간 첫 피난 마을
피난 간 빈집, 안방 차지하고 쌀독이며 김치독이며 마구 허는 재미에 전쟁도 잠시 잊은 듯 마냥 흥겹기까지 한 피난민들 그 속에 우리도 끼여서 하룻밤을 잤지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튿날 아침, 우리 소 우리 소가 없어진 것을, 우리 여섯 식구의 전 재산을 실은 우리 소
놀란 아버지 찾아나섰지만 소는 이미 어떤 집 마당 큰 가마솥에서 끓고 있고 소의 머리통, 버젓이 전승물처럼 걸어놓고 무법천지 음미하고 있는 그들“이 소, 우리 소요”채 입이 떨어지기도 전에 대 여섯 장정 우루루 몰려나와
“무슨 개수작이냐”며 소주인도 소처럼 요절낼 듯한 아-그 험한 얼굴들
나는 그 때 보았다. 아버지의 하얗게 질린 얼굴 하얗다 못해 파아래진 안색
그 안색은 그 후에 회복이 되지 않았다.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 하시고 자조 자조 깨시던 아버지
의사들은 주사바늘 꽂으며 “신장염입니다. 만성 신장염입니다.”꽤나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들은 모른다.
그 후 십년 동안 곯다가 곯다가 가신 우리 아버지의 정말 병명을 그들은 모른다.
바람의 내력
박재삼
천 년 전 불던 바람과
지금의 바람은
다른 것 같지만
늘 같은 가락으로 불어
변한 데라곤 없네
언뜻 느끼기에는
가난한 우리집에
서글피 불던 바람과
저 큰 부잣집에
너그럽게 머물던 바람이
다른 듯하지만
결국은 똑같네
잘 살펴보게나
안 그렇던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어차피 이 테두리와 같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