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플라톤주의와 <철학의 위안>
1.플로티노스의 생애
서로마 제국의 정치인이요,철학자였던 보에티우스(기원480-525년)가 쓴 '철학의 위안'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플로티노스의 생애와 그의 사상을 먼저 살펴본 후, 보에티우스가 신플라톤 학파로 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저 한다.
플로티노스(기원204-270년)는 이짚트에서 출생하여 청년시절 알렉산드리아에서 28세 부터 39세 까지 스승 삭카스 밑에서 공부했다. 그후 동방종교 연구 목적으로 페르샤 원정에도 참가하였다. 황제가 살해된 뒤 로마에 정주(40세)하여 학원을 세웠고, 갈리에누스 황제에게 사랑을 받았고, 한 때 이탈리아에서 플라톤노폴리스(platonopolis-플라톤의 이상국가)를 건설하려 했으나 후에 포기했다. 그것은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현실화 하려했다. 그는 49세 이후에 많은 글을 남겼다. 플로티노스는 생전에 '엔네아덴'이란 책을 남겼다. 그 중의 제6권은 "최상의 원리와 선"에 관하여 논의 했다. 신플라톤 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새학파의 창설자가 아니고, 플라톤의 충실한 제자이면서 그의 해석자라고 생각하였다. 플로티노스는 기원 270년경 이탈리아 캄파그나에서 죽었다. 오직 신 만을 탐구하였으며 일종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소임을 다 하였다. 고대 그리스는 이제 종말을 고하고, 기독교의 중세가 문전에 다다라 있었다(정영도, 그리스 로마철학-from Thales to Plotinus-,p367-370).
2.플로티노스의 사상
로마제국의 쇠퇴기에 개인의 안심입명(아타락시아)이 아니고, 초월적 신 앞에서 불안에서 해방을 얻는 종교적 경향의 철학이 나타났다. 그 대표적 학파가 신플라톤 주의이고, 플라톤의 관념론이 전형으로 제시되었다. 이러한 경향의 철학을 '신플라톤 주의(neoplatonism)'라고 부른다. 그 대표가 플로티노스이다.
플로티노스의 중심개념은 신이었다. 그는 신을 일자(一者, The one), 최초의 것(Das Erst),영원한 것(Das Ewige), 최고의 것, 선(Das Gute)이라 불렀다. 신은 일체이고, 일체가 신 속에 포함된다. 세계는 신으로 부터 유출되었다. 신의 의지적 작용에서가 아니라 오직 넘쳐 흐르는 신의 본질의 필연성에서 저절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태양에서 빛이 빛나고, 열이 발산 되듯이 흘러 나온다. 유출은 단계적으로 일어난다. 신에게 얼마나 가까운 자리에 있는가에 따라서 위계질서가 결정된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흘러나온 것이 정신(Geist/Nous)이고, 그 다음이 영혼(Psyche)이고, 마지막이 물질이다. 정신은 신의 직접적 모상(형상)이다. 마지막 존재영역으로서 물질은 절대적 소극성이면서도 순수한 결핍이며, 비존재이다. 신으로 부터 유출되어 나온 인간의 영혼은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씻고, 욕망을 버리고,물질에의 속박으로 부터 벗어나서, 신과 합일하는데서 일자(一者)에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와같이 물질에서 영혼에로, 영혼에서 정신에로, 정신에서 일자인 신에게로 돌아가는데 삶의 목표가 있다. 신과 하나되어 몰입하는 망아(忘我/ekstasis)에서 정복(淨福)이 달성된다. 극소수의 철학자들 만이 경험하며, 그것도 순간적이다. 플로티노스도 이런 신비체험을 일생에 4번 경험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보에티우스를 마지막 로마인이면서 최초의 스콜라 철학자라고 일컬었다(Man hat den letzen Romer und ersten scholastiker genannt)- (정영도,"그리스 로마 철학",p367)
3.플로티노스 사상의 평가
1)플로티노스에겐 이상과 희망의 안전한 피난처라고 할 수 있는 사상체계가 있다. 기원 3 세기에 야만족의 침입이래, 수세기 동안 서방 문명은 거의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 스토아 학파나 신플라톤 학파에게도 공통된 그리스인의 지적 노력이나 도덕적 헌신의 결과의 대부분을 보존하였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이것이 스콜라철학의 발전을 가능케 하였다. 어거스틴은 플로티노스에 관하여 "그 속에 플라톤이 다시 살아있던 사람"이라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실재의 아리스토텔레스 보다도 플로티노스에게 더 가깝다고 한다. 플로티노스는 중세기와 가톨릭 신학의 기독교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준 자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플로티노스의 글 가운데는 단테신곡의 마지막 편을 생각하게 하는 것도 있다."오묘한 우리들의 환상에 떠오르는' 혼잡되지 않은 저 순수한 조화의 노래, 청보석 찬란한 보좌 앞에 영원히 찬양되니, 곧 보좌에 앉아있는 그에게로다".
2)한편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밖을 내다보게 하기보다 속을 들여다 보게 만드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과학은 연구되지 않게 되어있다. 덕만이 중요한 것이라고 보게 되었다. 후기 세기에 이르러서는 점점 덕이란 도덕적 의지만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생각되었다. 플로티노스는 그리스주의의 끝이요,기독교주의로서는 시작이었다. 플로티노스에게 창조된 세계는 영원한 세계의 모사(copy)이다. 신플라톤주의는 악을 결여로,비존재로 묘사했고,육체를 비존재로,영혼을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영혼을 그 유한한 껍데기(육체)로 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목표가 되어있다. 플로티노스는 로마 역사상 가장 비참한 시기의 사람으로서 로마제국의 현실을 외면하고,영원의 세계를 명상했으며저 저 세상만이 전심으로 찾을 가치가 있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럿셀 서양철학사/한철하 역,p429-431).
4.<철학의 위안>속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위안"을 쓴 보에티우스는 신플라톤 학파의 대표인 플로티노스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책(정의채 역/ 철학의 위안)에서 찾아보자. "~아카데미학파(플라톤)의 연구로 탁마한 이 사람(보에티우스)을 유혹 하러드는 것은 만부당하지 않느냐(p14)"."또 플라톤 자신이 증인이듯이(p20)". "또 당신은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 국가를 다스리거나 혹은 국가의 통치자들이 철학을 연구하기에 이른다면 그 국가는 행복되리라고 플라톤의 입을 통해 확언했습니다(p23)". "당신의 친근자 중 한 사람(plato)이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악은 어디서 온는 것이며,신 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선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고 한 말은 지당합니다. 철학이라는 여인은 보에티우스에게 "모르긴 해도 너의 생각 속에는 그 무엇 보다 결핍된게 있음이 틀림없다(p37)"라고 말했다.플로티노스는 악은 비존재이고, 비존재는 결핍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인간 이성이 자기를 옳게 인식하고 이 지상 감옥(생활)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천상의 것을 찾게 된다면(p72) 그 정신은 쓸데없는 이 세상의 모든 영위(營爲)를 천히 여길 것이다". 최고선은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플라톤이 그의 저서 <티메우스(Timaeus)>에서 말한 바와같이 ~최고선의 좌(座)를 찾으려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으로 너는 생각하느냐(p110)?". 보에티우스의 핵심사상은 만물의 최종목적은 그것을 선(善)이라고 보는 것이다. 신은 최고선이다. 보에티우스는 "플라톤이 말한 진리대로, 배운다는 것은 바로 망각한 것을 회상하는 그것뿐이리라(p125,126)"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보에티우스가 플라톤의 회상설(回想說)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제5서, 시3 전체에는 플라톤의 영혼선재설의 색채가 농후하다. 예를 들면 p195에서 "이전에 인간 정신이 드높은 정신을 우러를 적엔 사물의 전체와 개체를, 완전히 인식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정신이 사지(四肢) 육체의 구름으로 가려져 있구나"라고 했다.
플로티노스는 그리스 철학의 마지막이면서 기독교주의로서는 시작이다. 보에티우스는 마지막 로마인이면서 최초의 스콜라 철학자 라고 일컬었다. 플라톤 주의는 기독교 신학의 핵심적인 구조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다. 보에티우스는 플로티노스의 사상에 매료되었고, 단테는 보에티우스에게서, 정치인으로서(사형/유배), 시인으로서, 영원의 세계(천국)를 실재로 여긴 점에 대하여 공감을 얻었고, 위로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2016. 9. 3 홍 응 표 편집 토요클래식 강의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