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
장지성
물총새 한 마리가 언제부터 앉아있다
호수에 잠겨있는 고향과 저녁노을
일순간 낙하落下를 하며 낚아채는 먼 유년.
196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1969년 《시조문학》 3회 추천완료
가을
한분순
새벽을 깔고 지나가는
긴 은총의 숲이여
가지에 설레는 말씀
물빛은 더욱 깊고
세상을 한눈에 담아도
아프지는 않겠네.
197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낙화落花
민병도
꽃이 지고서야 나는 문득, 꽃을 보네
네가 떠난 뒤에 비로소 널 만났듯
향기만 남은 하루가 천년 같은 이 봄날
197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부적
백이운
늙어가며 자기 자신이 부적이 된 사람들
주사 빛 서로의 가슴 안쓰럽게 더듬으며
상처가 너의 부처야, 주술 아닌 주술을 건다.
1977년 《시문학》 추천완료
구절초
조동화
지난봄 눈뜬 약속
긴 여름 무사히 건너
가을도 저문 막바지
그 소슬한 말기 위에
마침내 구멍을 내고
끼우는 눈부신 단추!
197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가을 조탁
정해송
단풍 물든 감성언어
깎아 떠는 손이 있다
가을 뼈를 다듬어낸
조형들의 행간에는
이끼 낀 새벽 물소리
검기처럼 일어선다.
1978년 《현대시학》 등단
3월의 바람
정해원
유채꽃에 뒹굴다가
향기가 묻은 채로
일어선 3월의 바람
들판을 달려온다.
눈이 먼
사랑을 찾아
노란 바다서 헤맨다.
1979년 월간 《시문학》 추천 등단
가로수길
김일연
나란한 우듬지를 하늘 향해 맞대고
소실점을 향하여 두 손을 모으는 길
사라져 없어지는 곳을 손 모아 경배하다
1980년 《시조문학》 등단
절경
문무학
능성 1길 골목길을
유모차로 가는 할머니
“안녕하세요” 인사하면
볼주름 깊게 파서
“누궁고 모리겟는데
인사해줘 고맙소.”
1983년 제38회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 데뷔
불두화 한나절
신필영
꽃살문 열릴 듯 말 듯
부처님 웃을 듯 말 듯
허전한 등을 굽혀
연거푸 절 올리는
바람이
지나간 자국
뒤꼭지들 빼곡하다
198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가을, 허수아비
김소해
선 채로 늙어가는 그런 길도 있다는 걸
발목을 빠뜨린 채 한 생이 저문다는 걸
알면서 제 할 일 끝낸 저 넉넉한 파안대소
1983년 《현대시조》, 198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야바위꾼
이익주
함 들어보고 가소 돈 놓고 돈 먹기 판
호객으로 둘러앉힌 시골 장터 야바위꾼
씨암탉 날린 김서방 땡양지에 걸린 청춘
198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가랑비
전연희
마른 논 호미질로 푸석하게 뜨던 모를
사흘 내리 단비라야 달래고 어를까만
살풋한 흔적만 두고 돌아서간 뒷모습
1988년 《시조문학》 천료
만추
양점숙
진지하지도, 그렇다고 고상하지도 못했는데
끝이 보일 것 같지 않던 내 몫의 계절
단풍 진 시간의 희롱 이제야 알 것도 같네
1989년 이리익산 문예 백일장 장원
남명매 피는 날
하순희
마을이 화안하다 지리산이 웃는다
이 마음을 아느냐 어디 일러 보아라
잊혀진 그리운 이들 꽃잎 새로 다가온다
1989년 《시조문학》 천료
잔물결
홍성란
진달래 피었구나
너랑 보는 진달래
몇 번이나 너랑 같이
피는 꽃 보겠느냐
물떼새
발목 적시러
잔물결 밀려온다.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당선
꽃무릇
진순분
네 이름 혼불처럼
심장에 팍, 꽂히더니
그 전율, 온몸 태워
긴 부리 아픔 쪼더니
붉은 새
왁자그르르
하늬바람 파도 탄다
1990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있을 때 잘해
이상진
한 치 앞 모르는 게
우리의 인생 여정
언제나 중요한 건
지금이고 바로 여기
늦기 전
말해주세요
“사랑합니다” 그 한마디
1990년 《시조문학》 등단
잘못 뜬 스웨터를 푸는 시간
서숙희
실 하나로 연결된 몸통이 해체 된다
허리가 무너지고 배와 가슴이 사라지고
잠깐을 울컥하는 사이 생生은 목만 남았다
1992년 매일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당선
개양귀비
박명숙
꽃잎 한 장 떨어져 천하를 품고 있다
죽음에 지지 않는 세상 끝의 마음 한 장
눈 먼 봄 입술 한 잎이 소지처럼 일렁인다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 2024. 청도국제시조대회 거리시화전 『단시조의 향기』들풀시조문학관 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