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조가 과연 소현세자를 벼루를 던져 숨지게 했을까??.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이 신빙성이 높다는 것은 이 게시판 459번에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왕조실록 기록입니다.
2월 21일자 (20일날 귀국했음)
예조가 아뢰기를,
“세자가 돌아온 것은 실로 막대한 경사이니, 증광과(增廣科)를 설행해서 선비를 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3일자
세자가 병이 났는데, 어의(御醫) 박군(朴?)이 들어가 진맥(診脈)을 해보고는 학질로 진찰하였다. 약방(藥房)이 다음날 새벽에 이형익(李馨益)에게 명하여 침을 놓아서 학질의 열(熱)을 내리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6일자.
왕세자가 창경궁(昌慶宮) 환경당(歡慶堂)에서 죽었다.
세자는 자질이 영민하고 총명하였으나 기국과 도량은 넓지 못했다. 일찍이 정묘 호란 때 호남에서 군사를 무군(撫軍)할 적에 대궐에 진상하는 물품을 절감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제거하려고 힘썼다. 또 병자 호란 때에는 부왕을 모시고 남한 산성에 들어갔는데, 도적 청인(淸人)들이 우리에게 세자를 인질로 삼겠다고 협박하자, 삼사가 극력 반대하였고 상도 차마 허락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세자가 즉시 자청하기를,
“진실로 사직을 편안히 하고 군부(君父)를 보호할 수만 있다면 신이 어찌 그곳에 가기를 꺼리겠습니까.”
하였다. 그들에게 체포되어 서쪽으로 갈 적에는 몹시 황급한 때였지만 말과 얼굴빛이 조금도 변함 없었고, 모시고 따르던 신하들을 대우하는 데 있어서도 은혜와 예의가 모두 지극하였으며, 무릇 질병이 있거나
곤액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그때마다 힘을 다하여 구제하였다.
그러나 세자가 심양에 있은 지 이미 오래되어서는 모든 행동을 일체 청나라 사람이 하는 대로만 따라서 하고 전렵(田獵)하는 군마(軍馬) 사이에 출입하다 보니, 가깝게 지내는 자는 모두가 무부(武夫)와 노비들이었다. 학문을 강론하는 일은 전혀 폐지하고 오직 화리(貨利)만을 일삼았으며, 또 토목 공사와 구마(狗馬)나 애완(愛玩)하는 것을 일삼았기 때문에 적국(敵國)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크게 인망을 잃었다. 이는 대체로 그때의 궁관(宮官) 무리 중에 혹 궁관답지 못한 자가 있어 보도하는 도리를 잃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세자가 10년 동안 타국에 있으면서 온갖 고생을 두루 맛보고 본국에 돌아온 지 겨우 수개월 만에 병이 들었는데, 의관(醫官)들 또한 함부로 침을 놓고 약을 쓰다가 끝내 죽기에 이르렀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슬프게 여겼다. 세자년은 34세인데, 3남 3녀를 두었다.
@@@@ 소현세자는 1636년 병자호란때 청나라에게 끌려갔다가 1643년에 귀국한 후 불과 2개월만에 죽었습니다. 그가 학질이라고 하지만, 침을 잘못 놓아 죽었다든가 하는 표현으로 볼 때 무엇인가 어색한 구석이 있습니다.
고리타분한 명분론에 집착하여 가장 띨띨한 짓만 했던 능양군(인조는 무슨. 광해군을 몰아낸 것을 생각하면 왕이라고 볼 수도 없다. 인조반정을 우리 역사상 5.18사태의 대머리와 함께 대표적인 쿠테타 사건이었다)은 자신의 아들이 자기 왕위를 자식이 빼앗을까봐 두려워했으며, 후금에게 항복하고도 몰래 명나라를 섬기려는 짓을 하는 자신과, 친청주의자가 되어 온 자식과는 물과 기름사이일 수 밖에 없었지요. 게다가 무려 9년이나 떨어져 살았던 만큼 부자간에 정이 없을 수 밖에요.
뿐만 아니라 소현세자는 천주교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아담 샬과도 교분을 맺는 등 새로운 지식에 눈을 떠 조선을 변모시키려고 했지요. 더욱이 소현세자는 무사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명분론을 따지는 신하들이 나라를 망쳤다는 생각을 했지요. 즉, 자신이 청에 끌려갔던 경험이 그를 새로운 군주상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소현세자는 릉양군과 신하들에게 모두 경계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소현세자를 죽이고, 그 동생인 봉림대군을 왕으로 삼는 것이 집권층에게는 이익이 되는 셈이지요. 오죽하면 청나라 사신이 그의 죽음을 의심하여 소현세자의 무덤에 가보자고 했을까요.
그가 벼루에 맞아 죽었는지, 아니면 독살 당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해도, 릉양군은 소현세자에게 침을 놓은 어의 박군과 이형익 등을 벌주지 않은 것은 그가 소현세자의 죽음을 바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식이 문제가 아니었지요. 릉양군의 정체성과도 직결되는 문제인 만큼 그가 소현세자를 죽이는 것은 충분한 개연성이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소현세자는 광해군과 같이 현실적인 인물이었는데 비해, 릉양군과 그 똘마니들은 헛된 명분론에 의거해서 이들 진취적 인물들을 죽이고, 조선을 망치게 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명분론에 빠진 것의 근본원인의 하나는 임진왜란때 이들 집권층이 한 일이라고는 도망가는 일과 명나라에 도움을 주는 일 뿐이었지요. 따라서 몸으로 싸운 의병과 의병장들에게 면목이 없었지요.그래서 내세운 것이 재조지은(다시 나라를 세우준 명나라의 은혜)과 예학, 보학이엇지요. 그래서 광해군이 현실을 내세운 것이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허구성이 드러나는 것이기에 불안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인조반정을 일으켰던 것이지요. 따라서 소현세자 정도 죽이는 것이야 일도 아니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다음에 왕위에 올랐던 효종이 북벌론도 명분론에 얽매여 제대로 실행을 하지 못했던 것이고, 송시열 등이 득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소현세자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은 100%라고 하겠습니다.
2.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노론의 협박을 받았기 때문에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죽였다고 본다면 오해가 아닐까??,
그것보단 나주괘서사건과 토역경하정시(討逆慶賀庭試)에서
재차 나타 난 변서사건(變書事件) 때 소론의 처리방법에
이견을 보여 사이가 급격히 나빠진 것과 노론의 세자의
비행 고발에 대로하였기 때문이란 말이 맞을 것 같다.
만약 영조가 군권을 장악한 노론의 협박을 받았기에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면, 사도세자의 비행을 낱낱이 고발한
나경언은 이런 나약한 왕이 어떻게 죽일 수 있었을까?
여기에 대한 질문 입니다.
→ 나중에 능력이 닿으면 답변. 다른 분도 답변 부탁합니다.
3. 경신환국이란 단 하나의 사건만 가지고 남인이 물러났다고
볼수 있을까?
장희빈의 악날한 면을 감지한 숙종이 인현왕후를
다시 불렀다는 것이 남인이 물러난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고 본다.
→ 물론 당연히 아닙니다. 경신환국은 1680년의 일로 이때 남인이 실각했다고 하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은 부활했습니다. 하지만, 1694년 인현왕후를 복귀시키면서 장희빈(왕비가 되었음)이 다시 축출되고, 노론과 소론이 다시 권력을 잡은 것이 진정한 남인의 몰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4. 정조가 수원성으로 과연 수도를 옮기려고 했는가?
하지만 그렇지 안다 고 봅니다.화성을 신도시로서 건설하고,
이 곳에서 상공업을 발달시키고, 정조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세력을 키우고자 하기 위함이었지. 수도를 옮기기 위함이란 극단적인
표현은 아니였을 것이다!!
→ 정조독살설과 함께 정조 천도설이 나도는 것은 정조가 화성에 축조하여 수원을 친위 지역화하여 본격적 개혁의 진원지로 삼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조의 화성 축조의 정치적 의도는 장용영으로 5군영 통합, 수원 읍치의 이전, 수원 상권 부양책의 추진, 장용영 외영의 화성 편제 등으로 구체화됩니다.
하지만 정조가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천도가 필요한 조치였는가는 의문이 많이 갑니다. 정조가 구상한 것은 적절한 시기에 세자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이 되어 배후에서 정치상황을 조정하며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 했다고 보는 것이 옳으며, 천도설은 오히려 그것에 큰 위기를 느낀 노론 벽파 쪽에서 상정한 하나의 가설이고, 화성에 관한 정조 자신의 직접적인 언급은 오히려 왕권강화의 배후거점설에 가깝기 때문이다.
정조는 화성 천도 가능성을 내비추면서 정국운영에 활용은 했지만, 노론 벽파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하지 않고, 다만 자신에게 동조해 오기를 유도했습니다. 따라서 반대파에 대해 정치적 조정이 가능하다면 굳이 화성으로 자신의 거처를 옮기지 않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천도는 정조 자신의 정치 명분에 부담이 많이 가고, 새 도읍지를 조성하는데 큰 자원이 들어 무리한 점이 많습니다. 따라서 천도설은 오히려 노론쪽에 위기의식으로 강하게 느낀 것이라고 봅니다.
5. 정조가 노론에게 독살당했을까? 노론에게 독살당한게 아니라,
부스럼 이 피부까지 스며들어 유언까지 남기고 죽었다.
과연 어느날 갑자기 생을 마칠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다...
→ 정조의 독살설은 소설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에서 사실인 것처럼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2001년 유봉학 님은 <정조는 독살당하지 않았다>, 신구문화사 간행을 냈습니다. 개혁의 화신 정조가 노론 벽파에 의해 독살되고 이로 인해 자주적 근대화가 좌절되었다는 것이 정조 독살론자들의 견해인데, 유봉학님은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소설적 상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차라리 반역사적 의식의 소산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합니다. 왕조 실록에는 당연히 독살설이 없습니다. 나는 아직까지 여기에 대해서는 뭐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대신 유봉학 님의 정조 독살설의 오류에 대한 글을 붙여봅니다.
정조 독살설의 오류
유 봉학
정조는 1800년 음력 6월 28일, 삼복의 더위 속에 거의 한 달간을 투병하다가 심신의 고통 속에 한스런 죽음을 맞이하였다.
{조선왕조실록} 등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순전(旬前)', 곧 6월 초순에 병환을 얻었다고 한다. 오늘날 악성 종기, 또는 등창이라고 하는 이 병은 정조로서는 과거에도 앓은 적이 있어서 처음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약들을 써보는 가운데 점차 병세가 악화되었으며 급기야 보름이 지나서는 종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가 곪게 되었다. 밤에 자리에 눕게 되면 종기가 터져 피고름이 쏟아지는 통증과 음력 6월의 무더위에 시달리면서
정조의 투병은 계속되었다.
과거에 비슷한 상황에서 써본 바 있던 여러 처방과 연훈방까지를 정조의 동의 하에 다시 시도하게 되었던 것은 이러한 병세 악화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으며, 백약이 무효인 가운데 탈진한 정조는 6월 28일 오전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 결국 발병 20여 일만인 그날 오후 늦게 창경궁 영춘헌에서 정조는 백관과 백성들의 안타까움과 애도 속에 서거하기에 이르렀다.
정조의 죽음과 관련하여 항간에는 '정조독살설'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 세간의 막연한 추측이 {영원한 제국}이란 소설의 상업적 성공 이후 이제 일반에게는 통설이 된 셈이다. 소설적 허구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도 않으며 또 일치할 필요도 없다는 점을 흔히 간과하는 가운데, 정조독살설은 역사적 사실인 양 받아들여지고 있다. 심환지 등 노론벽파들의 음모에 의해 정조는 독살되었으며, 이들이 집권하여 세도정치를 함으로 인해 정조가 주도하던 조선의 진보적 개혁과 자주적 근대화가 좌절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소설은 원래부터 작가의 상상력에 의지하는 허구의 산물인 까닭에 역사소설에서 제시된 내용이 모두 역사적 사실과 일치할 필요는 없다. 다만 역사소설이 기왕이면 사실적 역사 상황을 바탕에 깔면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야기를 전개할 때, 소설적 허구는 소설가의 통찰력 이상의 설득력을 발휘하고 감동을 줄 것이다. 때로는 문학적 상상이 사료만으로는 불가능한 역사적 상황을 구성해 내어 숨어있던 역사의 진실을 끌어낼 수도 있다.
따라서 역사소설에서 제시된 세세한 내용의 역사적 사실 여부를 따질 필요는 없지만, 소설적 허구로서가 아니라 이제는 우리역사 어떤 시기에 대해 통설처럼 된 역사인식과 영향력있는 역사관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이에 대해 역사학은 소설적 허구와 역사사실의 경계점을 분명히 알리고, 이 역사관의 정당성을 엄밀히 검증해 주어야 할 것이다. 역사관이란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의 관점이며, 이는 현실 인식과 직결되어 있어 잘못된 역사관은 현실에 대한 인식을 호도하기 때문이다. 정조 독살설과 그 배후의 역사관, 그리고 그를 정당화하는 역사적 사실과 논리는 그 영향력이 커진 만큼 우리의 현실 인식태도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마치 통설처럼 되어버린 정조독살설, 그로부터 도출된 역사상과 역사관을 검증하는 일은 우선 정조독살설이 어떤 근거로 어떤 논리 위에서 나오게 되었는가를 따지는데서 출발한다. 사실에 대한 검토로부터 어떤 논리구조를 가지고 어떤 역사상을 구성하는지, 나아가 이런 역사상의 근저에 있는 역사관이 현실인식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적 사실의 차원에서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정조독살설은 그 근거로서 제시된 핵심적 사실들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정조의 독살 이후 정조를 제거한 노론벽파가 세도정치를 하게되고, 이에 따라 조선에는 역사의 단절이 와서 암흑시대로 추락한다는 설정도 역사적 사실과 엄청난 거리가 있다.
우선 정조의 죽음이 심환지 등 노론벽파의 흉계에 의한 독살이라는 주장에 대하여서는 20여 일 간에 걸친 정조의 병세와 처방을 자세하게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명백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정조의 죽음과 관련하여 독살이 시도될 정황은 존재하지 않았다. 독살이라면 이는 일거에 추진되어 정조는 어느날 갑자기 급서하여야 하는데, 실상 정조는 거의 한달에 가까운 투병 끝에 서거하였던 것이다. 정조 자신이 의학에 관한 책을 저술할 정도로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서거하던 날까지 투약과정에서 정조는 직접 약처방에 관여하였고, 마지막까지 약방도제조로서 정조 간병을 지휘하였던 사람도 정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던 소론 시파의 우의정 이시수였다.
정조를 독살한 배후 조종자로 흔히 지목하는 노론벽파의 심환지는 정조의 투약과정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연훈방을 처방한 의관 심연도 심환지와 성은 같은 심씨이나 일가친척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1806년 시파의 김조순 등에 의해 벽파가 일망타진되었던 이른바 '병인경화(丙寅更化)'의 시기에도 그와 벽파들은 정조의 서거와 관련하여 어떠한 의심도 받지 않았다.
만일 정조 죽음에 조금이라도 독살의 혐의가 있거나, 정조독살설이 당시 서울에 유포되어 있었다면, 정조의 심복이었던 김조순 등 시파들이 벽파 정권을 전복시킨 이후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당연히 이를 문제삼았을 것이다. 벽파를 일망타진하기 위하여 정조독살 혐의 이상의 더좋은 명분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인경화 당시, 그리고 이후 60년간 지속된 안동김씨 등 시파들의 집권기간과 그 이후까지도 적어도 서울에서는 이와 관련된 어떠한 문제제기도 나온 적이 없었다.
정조사후 노론벽파가 정권을 잡아 세도정치를 해나간다는 설정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의 후원 아래 벽파가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지만 그것은 불과 5년간에 불과하였고, 더구나 이것도 정순왕후의 경주김씨와 순조 외가 반남박씨, 순조의 처가로 내정되었던 안동김씨 등 세 외척이 서로 대치하는 이른바 '삼척정립'의 형국 위에서였다.
벽파의 입지를 강화하려던 우의정 김달순의 시도가 좌절되어 대대적 옥사로 전개된 1806년의 '병인경화' 이후, 벽파는 일망타진되고 정권은 안동김씨와 반남박씨 두 시파 외척의 차지로 돌아갔으며, 이후 1863년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지속된 본격적 세도정치는 벽파가 완전히 제거된 위에 일찍이 정조에 의해 양성되었던 시파 관료와 정치인들이 이끌어 갔던 것이다. 순조대 이후 세도정치를 이끌었던 김조순, 심상규, 남공철 등과 그 이후의 세도가들은 정조의 후광으로 정치적 입지를 마련하고 그를 기반으로 정권을 끌고나간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영남 일각에서의 정조독살설이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한 구석에서의 막연한 수근거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남인들이 중앙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난 갑술환국(1694년) 이후 100년만에, 정조에 의해 중앙정계 진출이 가능하게 되었던 영남남인들의 희망적 상황이 정조의 서거로 일거에 무너지자, 여기에 충격받은 영남 일각에서의 좌절감과 의구심이 이렇게 표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의 죽음을 둘러싼 일각에서의 이 막연한 의구심은 이를 소재로 삼은 소설과 영화의 상업적 성공에 의해 오늘날 엄청나게 증폭되었으며 우리의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문학적 허구와 역사적 사실을 혼동하면서 일반인들이 정조독살설을 근거로 정조시대 역사상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역사의식을 갖기에 이른 점은 우리 시대 후진성의 일면이기도 하다. 이는 전근대적인 영웅사관에 입각하여 그 연장선상에서 독재를 용인하며, 나아가 폭력적 방법에 대한 신봉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정조독살설은 근대로의 개혁이 과단성 있는 지도자 정조 1인에 의해 진행되다가, 독살이라는 폭력적 방법에 의해 지도자가 시해되자, 이후 그가 추진한 근대로의 개혁이 좌절되었다는 상황 설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개혁이 시급하고 그 목적이 옳다 하더라도 어느 시대에서나 1인 독재적 방법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근대로의 개혁이 정조 1인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설정은, 국왕의 '전제체제'가 아니라 엄연히 '양반관료체제'였던 조선에서 군주의 위상과 역할을 과대평가하여 영웅사관을 답습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역사발전과정에서 양반관료와 사, 민 일반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결과이다.
분명한 것은 역사가 어떤 일 개인에게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조대의 역사 발전과 근대로의 발돋움은, 정조는 물론 당대의 수많은 지식인과 민의 요구였고 이들의 노력에 의해 급속히 추진되고 있었다. 정조는 이 시기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으므로 그의 죽음이 큰 파문을 일으키고 정조 개인의 정치적 지향을 중단시켰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큰 물줄기는 도도하게 새로운 시대를 향해 흘러갔던 것이다.
정조를 죽인 폭력에 의해 근대로 향하던 역사의 물줄기가 끊겼다는 설정이 역사에서 폭력의 위력, 또는 효력에 대한 무의식적 신봉을 전제로 하고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역사가, 설사 잘못된 1인 독재정치라 할지라도 그 해결 방법이 살인과 같은 폭력적 방법이 되어서는 안되며, 또 이런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는다. 이는 해방 이후 근래까지 우리의 역사적 경험, 예컨대 김구의 암살이나 박정희의 살해 사건 등에서도 이미 확인된 바 있기에 더욱 위험한 발상이라고 하겠다.
한편 정조독살설과 관련하여 일반인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정조의 우상화가 현재의 정치에서 무단적 통치, 독재의 효율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연장된다면 이 또한 문제이다. 지금도 군사독재체제에서의 일사불란함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문민정부 이후의 민주화로의 과정이 혼란으로 비춰지고, 그래서 '구관이 명관'이라는 식의 독재 옹호론을 펴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러나 어떤 상황, 어떤 시대에도 권위주의적 통치, 또는 독재와 정치적 폭력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설사 전근대사회라 할지라도 이를 지양하고자 노력할 때에만 성군(聖君)이라는 칭송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정조가 진정 훌륭한 군주였던 것은 그가 무단적이거나 독재적인 정치 스타일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깨려 노력하고 고민하는 모습이 어떤 군주에게서보다 진실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조독살설이 독재와 폭력의 효율성을 인정하는 역사관의 확산으로 귀결되는 현상과 관련하여, 이런 논리와 설정에 손쉽게 매료되는 우리나라 지식인과 대중의 역사의식, 그리고 그와 연관된 현실 인식의 논리를 먼저 문제삼아야 할 것 같다. 사실 이는 그동안 우리가 목도하곤 했던 민주화운동 투사들의 손쉬운 변절, 아니 우리들 자신의 마음 속에서의 손쉬운 변절과도 직결된 문제이다.
한편으로는 저항을 하면서도 때때로 우리는 급속한 발전을 위해 독재가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경우에 따라 마음 한 구석에서 대체로 용인하고 말았던 군사독재에 대한 우리의 가식적 대응과 자포자기, 방황, 이런 것들이 독재와 폭력의 효율성을 주장하는 논리들을 쉽사리 받아들이도록 이끌었던 것은 아닐까. 정조독살설에서의 정조의 지도자상은 이런 대중적 의식의 기초 위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졌다고 생각된다.
개혁과 발전을 위해서는 단결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때로는 지도자의 전권이 불가피하다는 독재자의 선전에 공감하였던 우리는 비운의 주인공이었던, 그래서 당연히 정의의 편인 정조에 대하여도 마찬가지 지도자상을 요청하였다. 정조가 추진한 시책은 모두 개혁과 발전을 위한 것이었으며, 이 영웅적 지도자는 악당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에 맞서서 과단성있게 전권을 휘둘러 개혁을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악당들은 이 영웅적 지도자만 제거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정조는 악당들의 음모에 의해 독살을 당하고, 안타깝게도 이 비극적 사건에 의해 개혁과 역사발전은 중단되었다.
이와 같은 정조독살설의 전개는 대중들이 원하던 이야기의 과정과 결과를 흑백논리에 따라 정확히 제시하고,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했던 원인에 대해 늘 궁금하였던 지식인들에게 통속적인 감은 있지만 공감할 수 있는 해명을 제공하였다. '경우에 따라' 혹은 '때로는'이라는 전제를 달면서 독재와 폭력의 효율성을 인정하는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이 우리 내면의 공감대였으므로, 정조독살설은 여기에 호소하여 대중적 공감을 얻고, 지식인들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그리하여 이제 이는 정조와 정조시대를 설명하는 핵심적 개념이 되고 역사적 사실인양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현실에 대한 인식 수준은 언제나 역사 이해의 수준과 나란히 나아간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 독재와 폭력을 배제한 자유와 민주의 사회를 구현하고자 한다면, 참된 개혁과 발전을 원한다면, 우리들 내면에 도사린 이러한 공감대를 직시하고 그를 청산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정조독살설의 사회적 확산은 이러한 노력이 시급한 문제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2백년 전 정조시대의 역사적 실상과 정조의 지도자상, 그의 고뇌와 꿈, 비원은 새로이 조명되어야 하고, 현재적 관심 위에서 올바로 해석되어야 할 역사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첫댓글 선생님 정말 감사드립니다..더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