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돼지, 돼지- 동호(東湖) 이문세
낭독-이의선
K형!
얼마나 비통하고 가슴 아픈 일입니까. 형의 그러한 아픔도 몰랐던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 머리를 들 수가 없군요.
지하철 1호선 소요산 방면 보산역 아래 외국인 관광특구 노상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며 들을 수 있었던 K형의 삶의 발자국에 얹힌 이야기…. 그것도 도시인들과는 거리가 먼 “아프리카돼지열병” 침입으로 한때 극한적 선택까지 생각하였다는 사연은 나의 모골을 섬뜩하게 만들었답니다.
처음 들어보는 아프리카돼지열병(ASF. African Swine Fever)은 아프리카 대륙이 진원지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아르메니아 등 동유럽 국가에서 2007년부터 발생하여 서유럽을 경유, 아시아에서는 중국 심양에서 백두산, 북한을 거쳐 DMZ를 넘나드는 야생 멧돼지에 의해 전염되어 한강 하역 경기도 파주에서 처음 발생한 것이 2019년 9월 6일이었죠.
K형의 양돈 사업장이 있는 연천군에까지 번졌고, 며칠 후에는 휴전선을 따라 강원도 양구까지 초비상에 들어갔고, 곧이어 금강산 가는 길 등산로를 폐쇄하기에 이르렀지요. 조류인플루엔자는 양계 농가를 초토화하는 사례가 빈번하였는데 이번 “아프리카돼지열병”은 양돈 농가를 무참히 무너뜨리는군요.
K형의 아픔을 확인하기 위하여 동두천에서 대중교통을 이용, 초성리 간이역을 지나 한탄강을 건너서 청산면 백이 리(里)를 경유 일부 현장을 답사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한반도를 덮은 50여 일의 긴 장마가 끝나고, 전국적으로 수마가 할퀴고 간 마을과 들녘은 마치 6.25 전쟁터를 방불케 했습니다. 특히 연천의 경우 북한 황강댐 무단 방류로 필승교와 군남댐 수위조절 악화로 비무장 지역 내에 있는 이기리 마을 등은 흙탕물에 잠기는 재난으로 주민들의 피해는 망연자실 그 자체였지요.
통일 한국의 심장으로 꼽히는 연천군의 역사는 고려 시대 공성현(功城縣), 연주(漣州), 연천(漣川), 조선 마련현(麻漣縣), 연천현(漣川縣), 1895년 연천군으로 개명되었고, 행정구역은 2읍(邑) 8면(面)에 인구 41,091명(2024. 6월 기준). 지명에 내 천(川)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물이 항상 흘러가는 지형이란 뜻을 떠올려 볼 수도 있더군요. 유교적인 사념에서 풍수에 능숙했던 옛사람들은 곧잘 해당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지명을 정하는 경우가 흔했으니까요.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뜻하지 않게 양돈업을 잃어야 했던 연천군 내 90여 세대의 피해액은 환산 불가로 보아야 합니다. 적게는 2백에서 3백, 많은 경우에는 1만 마리가 넘는 돼지를 사육한 농가에서 어느 날 갑자기 살처분하는 청천벽력 운명을 겪었던 구슬픈 현실!
아침, 저녁, 먹이를 주는 시간이 아니어도 주인의 발걸음과 헛기침 소리만 들려도 이곳저곳 누워있던 튼실한 돼지들이 다투어 꿀꿀 소리를 내며 귀를 쫑긋 일제히 달려들던 꿈의 보물들이 아니었던가. 갓 태어난 어린 새끼들은 꼼지락꼼지락 어미 젖을 입에 물고 머리를 치받는 것만큼 쑥쑥 성장하는 모습은 얼마나 대견스러웠을까요. 그토록 토실한 생물들을 매몰하기까지 양돈가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새끼돼지와 어미돼지, 그 값을 살처분 집행과정에서 녹록하게 매겨지는 것도 아니어서 민원발생도 많았다죠. 양돈 사업자 대부분이 축협에서 10억 이상의 대출금으로 경영합리화를 이뤘는데 상품이 없어졌으니 수입은커녕 빚에 이자까지 더하여 줄 파산했다고 통분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더군요. 돼지의 재입식을 포기한 살처분 현장의 텅 빈 돼지우리는 1년여 가까운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이곳저곳 허물어지고, 폭삭 주저앉은 곳도 많아 마치 사람 없는 빈집이 풍상에 힘겨워 허물어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유령의 산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 6월 방역 시설 기준을 현행보다 대폭 강화한 ′가축전염병 예방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 예고하고 있지만, 법에 앞서 바깥세상에서 스며드는 바이러스가 문제이지요.
밝은 태양을 막아선 산허리에 비구름은 드넓은 쉼터의 장막을 거둘 눈물로 절규하는 형상인 듯싶습니다. 원인이 아닌 결과에 함몰된 조령모개(朝令暮改)식 법치보다는 모든 생활인이 필요한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과 신뢰의 정치가 최선임을 왜 모를까요.
양돈 농가들은 당국의 살처분 이후 각자 생의 어려움을 떨치지 못하는 슬픔을 안고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서글픈 인생길의 방랑자가 되는 모습입니다
K형!
불행하게도 타의에 의해 삶의 터전을 잃었지만 인명은 재천이라 하지 않았던가요. 가장으로서 아내가 있고 사랑스러운 자녀가 있어서 생계를 위해 불볕 건설현장에서 잡일도 하고, 후접한 여름밤 잠들기 어려우면 이슬 내리는 찬연한 별빛 하늘에 은하수를 바라보며 긴 호흡과 함께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본다는 그 다짐을 굳게 믿으렵니다.
꿈속에서도 탱글탱글 생동하는 돼지의 꿀꿀 소리는 분명 만복으로 환생할 것입니다. 돼지, 돼지, 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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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세
수필가. 작사가(한국음악저작권협회 정회원)
계간 ⟪서울문학⟫. 월간 ⟪문학세계⟫ 등단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때 이렇게 피참한 삶이 있었는 줄 몰랐습니다
이북에서 내려오는 임진강물을 아무 예고도 없이 헐어 피해가 많았지요
이래도 일부 우리 국미들은 이북을 찬양하는 것 보면 머리에에 구멍난 것이 분명하지요
그때 철원에 갔더니 한탄강가에 미루나무에 걸린 쓰례기를 보고 얼마나 만은 물이 흘러간 것이란걸 알았지요
더위가 사람을 해칠수가 있습니다 몸조심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