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전 폭발한 문예부흥 파워
당시 과학혁명과 현재 상황 비슷
천재적 인물들도 잇따라 탄생해
전 세계은행 총재가 보는 세계화
극빈층 줄었으나 양극화 심해져
타인·타국에 대한 열린 마음 필수
스타 역사학자 하라리의 경고
일자리 없는 잉여인간 쏟아질 듯
팩트 왜곡하는 가짜뉴스 경계를
이언 골딘, 크리스 쿠타나 지음
김지연 옮김, 21세기북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유발 하라리 지음
전병근 옮김, 김영사
거대한 변화는 거대 담론을 요구한다. 최근 출간된 『발견의 시대』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이 큰 그림을 제시한다. 새로운 사고를 자극하고 토론을 촉구하는 책들이다.
『발견의 시대』의 저자인 이언 골딘은 ‘세계화와 발전’을 가르치는 옥스퍼드대 교수다. 2003~2006년에는 세계은행 부총재로 일했다. 『발견의 시대』는 과학·역사·철학·자기개발을 한 데 묶은 것 같은 책이다.
“세계화는 단순히 하나의 트렌드가 아니라 인간상(human character)에 대한 시험이다”라고 주장하는 『발견의 시대』의 문제의식은 세계화의 명과 암이다. 50년 전에는 인류의 5분의 2가 극빈층으로 살았다. 지금은 8분의 1이다. 문맹은 세계 인구의 2분의 1에서 6분의 1로 줄었다. 1990년 4억4000만명이던 해외여행자 수가 2014년에는 14억에 달했다. 하지만 세계 각국이 경제 양극화라는 골칫거리를 안고 있다. 예컨대 미국에서 하위 경제계층 20%의 소득은 25년 전보다 줄었다.
골딘 교수는 르네상스와 마찬가지로 신 르네상스도 승자와 패자를 낳을 것으로 예상한다. 바스쿠 다가마(1469~1524)가 1497년 동양으로 가는 뱃길을 발견하는 바람에 비단길로 흥한 지역들이 몰락했다. 또 사보나롤라(1452~1498) 같은 포퓰리스트가 등장할 것이다. 사노나롤라는 1497년 ‘허영의 소각(Falò delle vanità)’ 사건으로 유명하다. 사보나롤라의 10대 추종자들이 ‘경건치 못한’ 사치품·예술품·서적을 불태운 행사였다. 저자는 도널드 트럼프를‘21세기 사보나롤라’로 지목한다. 그가 사보나롤라의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 골딘 교수는 심지어 트럼프를 당선시킨 미국은 ‘도태되기로 선택한 나라’라고 극단적인 평가를 했다.
다빈치·콜럼버스·코페르니쿠스·루터·구텐베르크를 대표적인 르네상스인으로 손꼽는 저자는 르네상스를 ‘천재성 폭발’의 시대로 정의한다. ‘리스크’의 시대이기도 하다.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대담한 진보는 대담한 실패에서만 나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저자는 내구성과 회복 탄력성을 희생을 최소화할 방안으로 제시한다. 내구성은 각 부분을 강화해 실패할 가능성을 줄이는 것. 회복 탄력성은 위험을 다각화해 어느 한 부분이 실패하더라도 전체는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신 르네상스 시대에 필요한 개인 자질은? 저자는 관용과 열린 마음을 제시한다. 새로운 언어를 학습해 다른 나라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해야 한다. 좌파나 우파 매체만 접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싫어하는 논조의 매체도 일부러 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타인의 관점으로 들어가면 우리 자신의 가치와 통찰력이 풍성해진다.”
저자에게 황금시대에 필요한 자세의 상징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다. 당시 예술가들은 흔히 골리앗의 시체를 의기양양하게 밟고 있는 모습으로 다윗을 형상화했다. 미켈란젤로는 다윗이 결단과 행동 사이에서 스스로 용기를 북돋는 순간을 주목했다. 저자는 “행동이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주저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변화가 유일한 상수다”라는 하라리 교수는 골딘 교수와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하라리 교수는 “2050년 일자리 상황은 아무도 알 수 없다”며 경제적으로 무의미한 ‘잉여 인간’이 양산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나라 전체, 대륙 전체가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
‘잉여’ 인간이나 국가가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가짜 뉴스를 피해야 한다. 하라리 교수는 “믿을 만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만큼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은 가짜 뉴스를 좋아하는 성향이 있다. 하라리 교수에 따르면 ‘포스트진리(post-truth)’ 시대가 최근 개막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팩트가 아니라 픽션을 좋아한다. 사람은 숫자나 팩트가 아니라 스토리로 생각한다. 단순한 이야기일수록 열광한다.
“권력은 픽션을 만들고 믿는데 달렸다”는 하라리는 종교라는 권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000명의 사람이 한 달 동안 꾸며낸 이야기를 믿으면 가짜 뉴스, 10억명의 사람들이 1000년 동안 믿으면 종교다.”
“가장 큰 픽션은 세상이 복잡하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라는 하라리는 단순화된 설명을 싫어한다. 그래서 예컨대 종교·민족주의의 부정적·긍정적인 측면을 모두 다룬다. 명확한 결론을 좋아하는 독자는 좀 답답할 수도 있다.
하라리에 따르면 20세기에 등장한 파시즘·공산주의·자유주의는 모두 스토리다. 파시즘·공산주의는 사라졌고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이 환멸을 느끼고 있다. 자유주의를 대체할 스토리는 어떤 자격을 갖춰야 할까. 그가 유일한 이 시대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글로벌화된 정치’를 뒷받침하는 스토리어야 할 것이다. 하라리는 경제·과학·기술·환경은 모두 글로벌화돼 있으나 정치만 그렇지 않다고 지적한다.
민족국가 시대의 종언은 낌새조차 없다. 개인은 각자도생(各自圖生)할 수밖에 없다. 자라나는 세대에 무엇을 교육할 것인가. 하라리는 코딩 교육에 부정적이다. 그는 많은 교육전문가가 주장하는 것처럼 ‘4C’ 즉 ‘비판적 사고, 소통, 협업, 창의성(critical thinking, communication, collaboration, creativity)’를 배우는 가운데,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자질인 ’정신적인 융통성과 감정적인 균형‘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라리는 이를 위해 명상이 효과가 크다고 주장한다.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알고리즘이 우리 마음을 결정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며 “명상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과 접촉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김환영 지식전문기자 whanyung@joongang.co.kr
[정재승 칼럼] 이제 경제성장 만능에서 국민행복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 과대평가하고
측정 못 하는 건 과소평가하는 경향
GDP를 중심으로 한 경제성장은
우릴 행복하지 않게 만들 위험 있다
그래서 신경과학자들도 행복을
해부해보려는 첫걸음내딛고 있다
하지만 행복은 즐거움 그 이상이다. 편도체를 비롯해 변연계에서 분비되는 세로토닌은 내 삶의 만족감을 고양시킨다. 우울감에 빠지지 않고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며, 우리를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고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엔도르핀 역시 행복감에 기여한다. 열심히 일하고 나서 흘리는 땀과 함께 엔도르핀은 우리에게 힘든 순간을 이겨내는 진통제 역할을 한다.
옥시토신도 제 몫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편안하고 안정적인 시간을 보내는 동안 옥시토신은 관계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준다. 타인의 간섭 없이 스스로 결정하거나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것도 행복에 중요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맺기 없이는 행복에 도달하기 힘들다. 행복은 나에 집중하는 시간과 타인과의 건강한 관계 맺기 모두를 필요로 한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고, 행복은 즐거움이나 안정보다 훨씬 복잡한 개념이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신경과학 연구자들은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과학적으로 해부하고 분석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유는 하나다. 인간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인 행복을 체계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다.
국가의 존재가치도 국민행복에 있다. 뜻맞는 사람들과 그저 무리 지어 모여 살지 않고 국가라는 체제를 운영하는 건 그것이 우리의 안녕과 행복에 더 크게 기여하리라 믿어서다.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예산을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는 경제성장이었다. 덕분에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가난을 탈출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스털린의 역설’이 말해주듯, 물질적 풍요로움이 행복을 보장해주진 못한다. 국내총생산(GDP)이 낮을 때에는 소득이 늘어날수록 행복감도 늘어나지만, 어느 정도 생활수준이 되고 나면 더 이상 경제성장이 국민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한국은 비슷한 수준의 GDP를 가진 나라들 중에서 가장 불행한 나라 중 하나다. 직장인들은 사회적 자아로만 생활하다가 일과 삶의 균형을 잃어버렸다. 건강도, 가족관계도, 지인들과의 따뜻한 우정도, 내가 왜 사는지에 대한 건강한 질문도 책상 위에 쌓인 일더미 속에 묻혀 버렸다. 그래서 직장이라는 우산에서 나오면, 나 혼자서 세상이라는 모진 폭풍우를 이겨낼 능력을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 치킨집이나 편의점을 차리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을 생각하기 힘든 존재로만 늙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경제가 성장한다 해도 그 과정이 양극화와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면 결국 그것이 경제 성장에 방해가 된다.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고 타인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증폭되며 신뢰 같은 사회적 자산을 망가뜨린다. 결국 어떻게 경제를 성장하게 할 것인지가 중요하며, 그 판단 기준과 최종 목표는 국민행복이어야 한다. 국민이 행복한 방식으로 경제도 성장하고 정책들도 집행돼야 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경제성장보다 국민행복이 우선’이라는 이 자명한 명제를 그동안 간과해 왔던 것일까?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최고마케팅 책임자 존 헤이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측정할 수 있는 것을 과대평가하고, 측정할 수 없을 것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경제성장은 GDP라는 하나의 숫자로 표시 가능하며 측정 가능해서 강력한 목표의식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안에는 우리 행복에 매우 중요한 쾌적한 환경이나 창의적인 교육, 국민 건강, 혹은 민주주의 같은 중요한 지표가 거의 반영돼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이 소중한 것들을 희생하면서 경제성장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국민총행복’ 같은 행복지수는 부탄 같은 작은 나라의 독특한 시도가 아니라, 유럽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개념이 되었다.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은 조셉 스티글리츠, 아마티아 센, 쟝 폴 피투시 같은 세계적인 경제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을 제대로 측정할 수 있는 새로운 지표 개발에 나선 바 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GDP는 틀렸다』(동녘, 2011)는 개발도상국이 적절한 규제 없이 환경 훼손이 심한 광산개발권을 저가의 사용료를 받고 허가한다면, GDP는 증가하겠지만 국민들의 복지는 저하되는 예들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만약 우리나라가 재화를 소비하는 대신 여가를 선용하면서 지식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생산성을 높여 보겠다고 하면, 지금의 GDP 계산 방식은 이를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로 간주할 것이다.
GDP를 중심으로 한 경제성장은 우리 삶을 행복하지도 지속 가능하지도 않게 만들 위험이 있다. 물질적인 풍요로움도 국민행복이나 국가의 지속가능성을 훼손하면서까지 얻어내야 할 목표는 아니다. 측정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소중함을 알아채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선 안 된다. 그래서 신경과학자들도 행복을 해부해보려는 첫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문술미래전략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