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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진 시인의 시세계
실존을 위한 현실적 인식 방법
<시인. 문학펑론가> 박철영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신에 대한 신분 노출이 이뤄지는 사회에 살아가고 있다.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신분증에는 인적 사항에 대한 충분한 자료가 비밀스럽게 기록되어 있어 특별한 사람에게만 그 사람을 판독 가능케 한다. 그런 자료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일반인도 관심 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노력을 조금만 기울인다면 어느 정도는 알아낼 수 있다. 김수진 시인의 시에서 은근하게 내보이는 시적 현실은 도시적인 삶에서 이루지는 일상이 아니라는 것까지 알 수 있다. 따라서 시에서 보여주는 행간은 시간에 관계없이 인간적인 충분한 사유를 공감하도록 하며 순수한 흥분까지도 기대하게 한다. 거기에다 대상의 부재에 대한 상상력으로 존재하는 현상은 과거로부터 비롯됨을 알 수 있다. 그런 경험은 누구나 갖는 일로서 낯설지가 않다. 다만 개개인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특수할 뿐이다. 하지만 김수진 시인의 경험에서 유발된 시를 통해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미지는 현실적인 감각으로 공감이 가능하다. 시편에서 드러나는 일상은 누군가와 부대끼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관계를 촘촘히 엮고 있는 관계망은 사람이 실행하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이미 있어왔던 과거에 대한 회상을 통해 실재를 단정해가는 김수진 시인의 시적 행로는 사람의 근본에서 분리할 수 없는 인간적인 근원에 대한 질문임을 보여준다. 그 근원은 항상 ‘첫’이라는 어원이 갖는 순수성을 바탕으로 시작한다. 그렇지만 그 느낌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신성한 것이어야 했다
한 번도 맛 본 적 없는 단맛의 결정체처럼
결정적인 낮의 흐름이
밤의 숨결처럼 짙어질 때에만
느낄 수 있는 맛
그래야만 했다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한 번 두어 번 마주할 때마다
점점 더 어두워지는 늪의 한가운데로
가라앉는다는 것을
모든 것이 영롱한 별빛인 것처럼
모든 것에 신기로움으로 달려들던 좀비인 것처럼 다시
나에게로 달려들게 된다는 것을
그리하여 내가 바닥인지 원래부터 바닥이 나인지 어지럽게 흩날리게 된다는 것을
아아- 울부짖으며 걷다가도 온갖 골목이 회오리치며 울린다는 것을
하지만 신비하고 아름다운 첫사랑을
그 누가 외면할 수 있었을까
첫 사랑의 달콤한 속삭임에 어느새 한 손엔 반쯤 남은 술병을 다른 손엔 새우깡을 들고 밤의 그림 자
드리운 소나무 아래로 어둡고 눅눅한 자리를 찾아 서서히 당신과 함께 녹아든다
마주보고 있으면 더 설레고 부끄럽지만
이제부터 우리는 함께인 거야
우리의 아름다운 첫 경험을 위해
짠!
하고 불빛 비추이며 갑작스레 나타난 불한당 같은 그가 말했다
맛있어?
술이 그렇게 좋아?
너 또 음주다
-<첫 경험> 전문
소외와 방기된 사회에서 대다수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이 오늘의 우리 사회다. 그런 외면을 가슴 아파하고 쉽게 잊고 살아가는 일상조차 뉴스거리도 되지 못한 곳이 도시다. 도시적 삶은 시적 심미감이나 정신적인 교감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김수진 시인의 삶 속에서 심미감은 자연을 매개로 하고 있다. 그런 환경에서 발현된 구체적인 시작詩作으로 나열된 시어, ‘신성’한 것들의 ‘밤의 숨결’이거나 ‘영롱한 별빛’은 시적 심미감을 유발한다. “그것은 신성한 것이어야 했다/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단맛의 결정체처럼”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정신에서 비롯된다고 볼 때 순수를 전제한 <첫 경험>은 유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전제되는 ‘신성’이나 ‘단맛의 결정체’는 실재하는 경험으로 근거하기에 막연한 추상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맨 처음 경험해가는 사회화 과정에서 필수인 ‘첫’이라는 행위들은 서서히 중독성을 띠게 된다. 이내 그 중독성의 폐해를 궁극적으로 알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라고 단정하게 된다. 또한 그런 행위를 반복적으로 “한 번 두어 번 마주할 때마다/ 점점 더 어두워지는 늪의 한가운데로/ 가라앉는다는 것을” 이미 시인은 경험을 통해 예감할 수 있고 아이들의 순수한 의식마저 비정하게도 망가뜨려갈 수 있다는 것까지 환기시키려 한다. 성장기 아이들이 경험해야 할 사랑이나 술이 갖는 낭만까지도 아이들을 순수라는 이름으로 마냥 금지 항목으로만 묶어둘 수는 없다. 그런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시인은 아이들에게 조금씩 사회의 체험적인 과정을 전수하고 있을 즈음 시적 화자를 깨우는 불한당 같은 타자가 등장한다. “맛있어?/ 술이 그렇게 좋아?/ 너 또 음주다”라고 일갈하지만 아이들은 순수를 무기로 이미 학습된 음주에 대한 유혹의 ‘사랑’을 빈번하게 시도할 것은 뻔하다.
스트로베리 플레인 요거트 한 방울 떨어지듯
사랑을 노래하는 아이가 혼자 하는 사랑에 앓으며 방 안으로
깊어진다
연인에 취해 어둔 밤 속 내달리는 발걸음이
세레나데 되어 귓가를 파고드는 밤
어쩌면 아이의 눈동자를 따라 저 달도 휘영청 달 밝은 밤을 꿈꾸는지
그토록 바라던 연인과의 발걸음 따라
어둔 밤을 끄적이며 달은 점점 시가 되고 있다
온갖 사랑도 모든 이별도 되새김질 하듯
그 밤 다 새도록
형광등 위로 내려앉고 있다
(교태를 부리듯 수줍게, 한 점 부끄러울 것 없는 목소리로)
수줍게 웃는 ‘아, 이가’ 배시시 연신 분홍으로 빛난다
부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노트 위에 써내려가던 단어들처럼 조심스레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듯 사랑에 젖어든다
사랑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나
밤은 깊고 어두우니
아이는 어서어서 새나라 새 일꾼 되기 위해 잠이 들어야 한다
아이는 그러할 나이이고 그 나이는 그래서 아름답다
그래서,
부럽다
나도 아이인 적이 있었고
가끔은
없던 당신의 손도 마주 잡고 싶다
달빛으로 쓰인 노트가
참, 고요하다
-<그래서, 부럽다> 전문
어찌 보면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는 모든 사회 현상들이 달짝지근한 미감으로 인식될 수 있다. 사실 요거트 원액의 맛을 본다면 무미한 끈적한 액체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인간의 감수성을 유발하기 위해 고유한 향과 맛을 가미해서 만들어진 ‘스트로베리 플레인 요거트’를 비유로 들고 있다. 가미된 맛 이전 요거트의 본래 맛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아이들은 ‘사랑’이라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통해 자신만의 ‘사랑’을 찾아가야 한다는 역설일 것이다. 그런 김수진의 시에서 보여주는 아이들의 모습은 우리의 흘러온 과거의 시간이고, 누구나 개별적인 그런 경험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부럽다>라는 시제는 기성 사회인이 되어버린 김수진 시인에게는 이미 지나쳐버린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이 함의되어 있다. 근원적인 인간의 사랑이라는 행위가 순수성을 바탕으로 시작되고 무한한 행복의 가능성까지도 상상할 수 있기에 그럴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노래하는 아이가 혼자 하는 사랑에 앓으며 방 안으로/ 깊어진다”며 사랑이라는 묘약이 주는 존재론적인 고통을 전부 피해 갈 수 없음을 말해준다. 여기에서 “사랑을 앓으며” 기어이 고독한 자기만의 “방 안으로” 들어가 절대 고립감을 맛보게 된다. 거기에 더해 “깊어진다”는 유폐적인 시어 배치는 사랑이라는 것이 그만큼 기쁨보다 실패했을 때의 고통이 크다는 것을 환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장기에서 남녀 간의 ‘사랑’은 누구나 감당해야만 하는 필수이고 성장 과정에서 빠질 수가 없다. 이미 선험을 통한 교육자적인 관점에서 시인은 미약하게나마 그런 것을 암시해주고 있을 뿐이다. 시인은 시적 상상력을 통해 아이들의 순수한 사랑을 차원 높게 다루려고 강요하지 않는다. 시인은 그 행위가 야기하는 현실적인 가치만큼을 아이들 스스로 판단하도록 하고 있다. 어차피 아이들이 경험해야 할 ‘사랑’이라는 것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가장 순수한 바탕에다 최소한의 기교로 그려내는 수채화 같은 것으로 “(교태를 부리듯 수줍게, 한 점 부끄러울 것 없는 목소리로)/ 수줍게 웃는 ‘아, 이가’ 배시시 연신 분홍으로 빛난다”며 사실적인 묘사만으로 충분하다. 또한 그런 아이들의 행위를 방해하거나 관계를 해체해야 할 위험 대상은 더욱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시인도 아이들처럼 성장통을 겪었듯이 똑같이 감수해야만 하는 전인형 사회성을 갖게 하는 대안학교의 교육 방침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시인도 나이 들었지만, 아이들처럼 동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오래도록 바라본”이른 아침 눈 떠 벌어지는 일상은 매번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 오래도록 바라본 천장을 매트삼아 한바탕 눈으로만 요가를 해도 아무도 모르는 일
아침밥은 이것이 지청구인지 토끼풀인지 쇠고들빼기*인지 모를 풀을 똑 똑 모가지만 따 쫑쫑 쓸어 찬밥에 고추장
참기름 쓱 쓱 비벼 먹어도 되는 일
아무것도 심지 않은 텃밭에서 민들레 이파리 뜯어 찬물에 담가놓고 살짝 데쳐 된장 조금 들기름 조금 으깬 마늘
조금 조물조물 먹어도 되는
따스한 햇볕 들어 나무 아래 그림자 채워지면 그제야 옹기종기 모이시는 동네 할머니들과 농담을 밥 먹듯 먹으며
한바탕 웃어도 좋을 일
들고양이가 레오라도 되는 듯 뛰놀던 밀림이 아니라 뒤꼍에서 ‘얘들도 분명 이름이 있을 텐데 미안’을 되뇌며
흙색으로 바래 버린 목장갑에 생을 마감하는 풀들을 정리하느라 오후 내내 시간을 보내도 괜찮은
그러다 문득 읽고 싶은 책 들고 지붕 아래 접시꽃 가득 핀 초록으로 촘촘히 박힌 뽕나무 아래에서 읽어도 할 일
없어 보이지 않은 그런
저녁 일곱 시 가벼운 차림에 빠른 걸음으로 동네 산책 가듯 저녁노을 내릴 때까지 풀들과 하이터치 일하시는
동네 분들께 나를 알리듯 인사하며 운동해야 보람찬
저녁엔 TV도 없으면서 인터넷으로 영화 한 편 봐야지
작년에 담근 대추주가 달큼하게 익었으니 우리 집 담벼락으로 몰래 넘어 온 옆집 호박 하나 따 부침개를 해야지
알싸한 앞집 부추 서리하듯 뜯어다 썰어 넣어도 되는
그래도 되는 일
늦도록 별빛 밤하늘에 새겨지는 것도 모른 채 옆집 할머니 끌끌대시던 도시 것들 깜짝, 와― 놀래던 은하수도 한 잔,
그렇게 달큰하게 물드는 일
시골에 산다는 것은 이토록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일
*쇠고들빼기=왕고들빼기. 나의 어머니는 어릴 적 지청구 혹은 토끼가 먹는 풀이라 하여 토끼풀이라 고도 했으며
내가 사는 제천시 수산면 오티리에서는 쇠고들빼기라고도 한다.
-<시골에 산다는 것은> 전문
자의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사회가 팍팍한 도시 생활이다. 그와 반대로 자연에서의 일상은 도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무기력 같은 느림을 만끽하고도 생의 예찬까지 이르는 여유를 보여준다. 아무렇지 않게 하루의 시간을 소박한 풍요로 채우고 있는 일상은 덤이 된다. 시행 전체가 전원 예찬이고 전원에 사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행복한 찬가를 읊고 있는 듯하다.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 위에서 눈만 멀뚱멀뚱 든 채 천장을 바라보는 아이를 연상케 하는 순진한 모습 그 자체가 김수진 시인의 지향하는 시적 세계라는 것을 부분적으로 보여준다. 그 어디에도 시 행간에서는 도시의 경쟁에 찌든 사람들의 피로감을 찾아볼 수 없다. “따스한 햇볕 들어 나무 아래 그림자 채워지면 그제야 옹기종기 모이시는 동네 할머니들과 농담을 밥 먹듯 먹으며 한바탕 웃어도 좋을 일”에서처럼 오히려 사람들과 부대끼기 위해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진풍경이 시인의 삶에서 일어난다. 의식주의 안전을 담보하려는 과정이 자연 속에서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반복되어도 지루하지 않다. 그것은 경쟁이라는 도시적 삶과는 전혀 다른 소일하는 자발적인 삶이어야 가능하고, 자연처럼 자생하는 법을 터득해가듯 소일하는 삶이 전혀 낭비라고 단정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김수진 시인의 시적 세계는 주변의 모든 것에 동화되어가며 되레 단조로움을 여유로 전환해낸다. 따라서 “시골에 산다는 것은 이토록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일”이라며 시적 발화원을 인간 근원의 심미적인 순수 지대인 자연 지대로 확정하고 종착지도 그곳임을 다시 확인해준다. 문명의 이기에서 벗어난 순간부터 고립의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 현대인에게 기율처럼 준수하는 자연성의 상실을 은근히 빗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장 인간적인 삶을 살고 싶다면 “충북 제천시 수산면 오티리”로 와보라는 유혹을 은밀하게 덫으로 놓아두고 있다. 시인은 자연 속에 묻혀 사는 단조로움에서 사유의 자유를 만끽하는 여유를 보여준다. 불편마저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차원 높은 시적 상상력을 붉은 <수국> 꽃송이로 환생하듯 피워낸다.
모기를 기록한다
가벼웠지만 지난 새벽 내내 내 곁을 맴돌던 그의 삶을 기록하는 것이다
나도 가끔은 슬펐으리라
가까이 봐야만 아픈 상처를 휴지로 닦아 주고 나니 다리를 가지런히 포개어 밤새
아른거리던 문장 위에 마침표를 찍는다
흐려지는 흔적을 안고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으리라
생의 끝 찰나처럼 스친 어제의 필름으로 얼룩진 자국 남기며
그렇게 스스로 기록되었다
봄과 여름 사이 날씨 어둠
어제 내렸던 비가 밤 속에 새겨져 새벽으로 잊히던 그해
첫 수국이 붉은 쑥스러움으로 노트 위에 피었다
아무런 체취도 남기지 않은 채
한 송이 아름답게
-<수국> 전문
옛 선비들은 여름을 넘기는 수단으로 지필묵으로 난을 치거나 글을 썼다. 김수진 시인도 자연 속에 묻혀 살다 보니 시대를 거슬러 그런 선비적인 기질을 닮아간다. 도시의 소외된 생활 속에서 불편을 마다하지 않고 스스로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려는 정신적인 소양이 돋보이는 시다. 우리는 흔히 포장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실존적 존재를 숨기거나 아예 투명하게 포장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김수진 시인은 자신의 시적 세계를 통해 신분 노출을 최대한 방기하고 있다. 그 이미지는 복사본이 아닌 원본으로 최대한 노출시켜 자연이라는 근원에 시적 의미를 충실하게 하여 독자로부터 은근한 절제와 풍류미를 내보이고 있다. 시적 상황도 그렇다. 간단히 모기약을 뿌려버린다면 처치가 될 모기 한 마리와 사투를 거듭한 긴 밤의 시간이었지만, 낭비하지 않고 철저하게 시인의 시, 공간 속에서 시적 서사를 수행하고 있는 존재로 편입되었다. 자연현상이라는 순리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알게 모르게 자연으로 성원된 생명체에서 생과 사의 구성체가 되어 스스로 기록물처럼 무화 과정을 거친 뒤 완벽하게 소멸까지 감당하여야만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여름 한철 피다 지는 <수국>마저도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닌 것이다. 화려한 그 수국도 죽음이라는 혹독한 체벌(매)을 통해 피어났음을 상기해야 한다. 파상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재앙적 체벌이 또 다른 시적 의미로 다가왔다.
가끔은 잊고 싶던 기억이
젖은 뼈처럼 내내 일렁일 때가 있다
그날도 나는 이유 없이 맞았다 생각한 날이었다
왜 맞았을까를 생각하며 길길이 날뛰고 분통했다
하늘을 가리키던 손바닥이
두 눈에서 툭툭 눈물 털어내 버릴 때
나는 이유도 모른 채
형은 나를 붙잡고 빌고 또 빌었다
왜 그래야 하는 건지 이유를 몰랐다
언제나 당당하고 또 당당했다
잘못했어도 무조건 아버지 앞에서는 항상 당당했다
지난 세월 동안 아버지 잊은 세월 근 이십 년을 제하고 나니
그때 맞았던 이유와 빌던 이유를 깨닫는다
이제 다시 한 번이라도 아버지의 손바닥에
내 볼 한쪽 내어드리고 싶다
가신 아버지의 손바닥 끌어당겨 두 눈 비비며
울어보고 싶다
-<매 맞던 날> 전문
인간의 감정으로 수렴되는 오감의 나열 순서를 볼 때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학습된다면, 가장 늦게 체득하게 되는 곳이 촉각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성장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상태에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일 것이다. 오히려 가장 먼저 발달하는 곳이 아기 때부터 엄마와 빈번한 접촉에 의한 촉각일 것이다. 그 피부 감각이 어느 순간부터 자아라는 주체를 형성하면서 철저하게 자기 보호라는 본성에 갇혀 노터치라는 금기어를 갖게 된다. 더 부연한다면 접촉에 의한 감각의 전이는 상대방의 저의底意와 그 이면에 담긴 비의秘義를 판단하는데 필수임을 익히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은 정신적인 성장이 육체만큼 완전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런 민감한 성장기에 시인은 아버지로부터 ‘매’라는 혹독한 체벌을 경험하게 된다. 그 체벌의 강도가 극한 아픔을 자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린 그 당시는 자아라는 자기 보호 본능이 철저히 자존심으로 무장되었을 시기였기에 반감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런 분노와 섭섭한 마음마저도 행복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시점은 안타깝게도 많은 것을 잃은 후에나 찾아온다. 그곳까지 이르기에는 과거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과 비망록적인 치열한 성찰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 그런 시점은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가 이 세상 사람이 더 이상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시인이 가졌던 증오는 따지고 보면 작은 상처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때는 너무 늦어 돌이킬 수 없을뿐더러 가슴에 대못처럼 콱 박혀버렸다. 성장기 시인의 삶의 좌표를 제시하기 위해 행해진 아버지에 의한 체벌이라는 그 자체가 비인간적인 행위로써 받게 된 상처가 작다고 할 수 없지만, ‘사랑’이라는 비의가 더 크다고 본다면 그것마저 모두를 부인할 수는 없다.
김수진 시인이 시 다섯 편을 통해 보여주려는 의도는 인간적인 삶의 근원을 헤아려 보려는 시적 의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모두冒頭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우리는 철저히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불신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시인은 스스로 ‘첫’ 경험이라는 육화된 체험을 순순히 드러내며 인간 근원의 순수성으로의 회복을 바라고 있다. 그 첫 경험은 아이들의 모습으로, 때로는 시인의 모습이기도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것이기도 하여 공감의 여지가 크다. 따라서 김수진 시인의 시적 지향은 명백하다, 우리 사회가 위장된 사회라면 스스로 드러내는 행위를 통해 인간 본성의 회복을 위한 순수한 충동과 심미적인 인식에서 복귀를 공감해야만 한다. 시인은 스스로 복제된 삶의 이야기가 아닌 원본적인 삶을 담담하게 시로써 보여주기를 마다치 않는다. 또한 시인이 갖고 있는 교육자적인 환경을 시로 발화하면서 자연스럽게 훼손된 인간관계의 회복을 위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첫 경험’이라는 건강한 항체를 사유하고 행위할 때에야 가능하다는 의미까지 담고 있다. 즉물적 사유 안에서 발화된 김수진 시의 실감에서 시적인 상상력은 앞으로도 확장될 것이다. 그것은 서정시의 위의에서 빠트릴 수 없는 자기 동일성에 대한 확인과 타자에게 전이될 공감이 더 정치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마저도 머지않아 울림은 크고 짙어 깊어질 것은 자명하다. 자연은 스스로 푸르러 숲을 이루기 때문이다.
첫댓글 읽다보니 눈이 빠질라 하느만, 고생했네. 거짓말이 넘 늘었어. ㅎ.
ㅎㅏ ㅎ ㅏ
그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