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물고기 그리고 야만의 도시
-영화 <초록 물고기>를 보고-
초록색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 젊음, 생명, 풋풋함, 신선하다, 좌충우돌, 가능성의 색깔, 순진함, 단순하다, 흥분을 잘한다 등등. 막동이의 모습도 그랬다. 정상적인 길에서 엇가나기는 했지만 사람을 감동시키는 바보, 그래서 쉽게 성공하기는 틀린 초록빛 이미지의 사람.
막동이(한석규)는 제대하고 귀향하는 기차 안에서 우연한 사건으로 미애(심혜진)를 만나고 알 수 없는 운명을 느낀다. 돌아온 고향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는 일산 일대가 갑자기 아파트촌이 된 사실에 신기해한다. “어미나, 이제 파출부 그만하세요. 제가 돈 많이 벌어올 게요.”라고 말하자만 딱히 돈 벌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라 미애의 소개로 조직폭력배에 들어간다. 미애는 영등포일대 폭력조직 보스인 배태곤(문성근)의 애인. 깡패가 되었지만 여전히 소박하고 때가 묻을 수 없는 막동이를 배태곤도 신임하게 된다. 막동이는 미애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깡패생활로 어깨에 조금 힘도 들어간다. 그런데, 어느날 배태곤의 구역에 옛 보스 김양길이 나타나 배태곤을 모욕하고 그 구역을 점령한다. 태곤은 미애까지 갖다 바치며 굴욕감에 떨지만 분해도 참을 수밖에 없다. 그걸 이해할 수 없는 막동이는 급기야 김양길의 배에 칼을 꽂는다. 하지만 단순히 상승하기 위한 살인은 아니었다. 순수하기 때문에 선택한 카드였다면 이해가 될까?
<초록 물고기>는 90년대 후반 한국사회의 음울한 자화상이다. 뒤틀린 사회 풍경이 여기저기서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그 뒤틀림은 근래에 시작된 것이 아니고 7,80년대 경제적 상승의 시기를 거쳐오며 누적된 것들이다. 근대화의 부작용을 지금 이야기하다니 너무 낡은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만 흘렀을 뿐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징벌로 IMF라는 어려운 시대를 거쳐와야 했는지도 모른다.
문명은 그만큼의 야만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말이 있다. 급격히 개발된 일산에서, 또 환락의 거리 영등포에서 누런 이빨을 지닌 들개의 모습이 보인다. 빽빽한 아파트촌 건너편 초라한 막동이네 집이 동그마니 서있다. 거기에 착잡함이 묻어있는 가족의 모습과 화려한 영등포의 밤거리가 교차되면 답답한 현실구조의 농도가 더 짙어진다. 막동이의 꿈은 식당 하나 열어서 온 가족이 함께 사는 것. 뿔뿔이 흩어진 형제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싶지만 가족을 둘러싼 불안과 위협이 보인다. 그것은 경제적인 것에서 기인한다. 배태곤 같은 사람이 된다면 모를까 막동이에게 꿈은 소박하고 아름다워도 이루기 힘들다.
살인 후 정신박약인 형과 통화하는 막동이는 어릴 적 상상한 초록 물고기를 떠올린다. 두려워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그리고 보스를 만나러 간 그는 죽임을 당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한 살인은 아니었더라도 배태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후일담처럼 보이는 막동이네 가족. 그의 꿈처럼 식당을 열고 함께 모여 산다. 하지마 그 자리에 막동이는 없다. 부부가 된 배태곤과 미애가 우연히 그 곳에 오고 막동이네 집이란 것을 알게되지만 아는 척하진 않는다. 야만의 거리에서 순수한 초록빛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가 가족에게 돌아오지 못하고 어떻게 야만성 가운데 묻혀버렸는지 또 묻어버렸는지 알기 때문에.
<초록 물고기>는 <박하사탕>을 감독한 이창동감독의 데뷔작이다. 첫 작품의 완성도와 메시지가 그의 영화세계에 대한 기대를 부풀게 하더니 겨우 두 번째 작품을 완성했는데도 이창동은 자기만의 세계를 확고히 한 듯하다. <초록물고기>로 그는 사그라드는 듯한 우리나라 리얼리즘 영화의 가능성을 확인해 주며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고 그 해 (98년) 대종상 영화축제에서 각본상과 남녀 주연상, 음악상,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처음 이 영화를 보면서 ‘조금 더 잘 만들 수 있었는데.’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영화를 공룡 같은 헐리우드 영화와 비교하는 습관을 아직 버리지 못한 탓일까? 간혹 목적지를 의식해 짜 맞추어진 대사나 상황들이 눈에 거슬리고, 잔잔한 나머지 메시지가 확실하게 각인되지 않을 수 있지만 아쉽지는 않다. 관객들을 휘젓고 놀라게 하는 영화만 있는 요즘 두고두고 되새김질 해 볼 작품이다. 하긴 이보다 더 기교를 부렸다면 초록물고기는 빨강물고기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