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고 삶 쓰기 (2) 24
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아.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농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알 한 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의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묻은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
핵심정리
성격: 자기 고백적
특징: 고백체의 대화 형식을 사용함. 삶과 함께 깊어 가는 원숙한 사랑의 모습을 진솔하게 표현함
주제: 세월이 흐를수록 깊어 가는, 아내에 대한 사랑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로 잘 알려진 황지우 시인이 ‘늙어 가는 아내’에 대한 깊은 고마움과 사랑을 고백체의 대화 형식으로 노래한 작품이다. 과거에 대한 회상, 현재에 대한 다짐, 미래에 대한 약속을 아우르고 있는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자신의 ‘늙어 가는 아내’를, 병과 싸워 이길 의지를 불태우고 삶의 의지를 깨우쳐 준 사람,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며 많은 일을 같이 겪은 사람, 서로 의지하며 아름답게 늙어 가야 할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따라서 마지막 부분에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먼 미래에나 할 수 있는 말이라는 표현은 ‘옛날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대를 사랑한다’는 감동적인 고백의 반어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