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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운동
안유환
피성호는 휴대폰 액정화면에 떠 있는 소화제 종류를 세어본다. 하나, 둘, 셋……백, 이백, 삼백……. 평소 그가 사용한 소화제는 정제와 액체류를 포함해 2~3개 정도인 데, 한참이나 침을 삼켜가며 끝까지 세어보니 모두 삼백팔십 일곱 종류였다. 이런 것들이 다 팔리기나 할까? 하루 세끼 밥을 먹고 살면서도 소화가 잘 안 되는 사람들이 이처럼 많은 것인가!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프다는 것은 다 괴로운 것이지만 소화가 잘 안 되는 것만큼 견디기 어려운 것도 없다. 그의 증상은 과식했을 때처럼 더부룩하지는 않고 식도 입구에 이물질이 낀 것 같아 늘 기분이 찜찜하고 가슴이 답답했다.
“여보, 일찍 일어나 식전에 아파트 마당이라도 한 바퀴씩 돌면 한결 소화가 잘될 텐데―.”
아내는 아침 식사 때가 되어도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남편의 방문을 열고 꾸짖듯 말했다. 그는 마지못해 일어나 소변을 보고 나서 손 씻는 것도 잊어버리고 바로 식탁에 앉았다. 이제는 바쁜 일도 없으니 밥은 되도록 천천히 먹는다. 젊은 시절 회사원으로 출근할 때는 마지막 숟가락의 밥을 씹으며 집을 나설 때도 있었다.(그때는 식전에 이를 닦았다.) 그러나 요즘은 음식이 저절로 목구멍으로 흘러내려 가기까지 오래오래 씹어야 한다. 어린 시절 그가 어머니를 따라 외갓집에 갔을 때 외삼촌은 “우리 다 같이 서른 번을 씹자!”고 하면서 입술 가로 ‘국물’이 흘러나올 때까지 계속 씹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소화력이 약하신 외삼촌의 비방이었다. 피성호는 숟가락을 놓자마자 요즘 개그맨이 손을 조몰락거리며 재미있게 광고하는 소화제 한 병을 마셨다. 분리배출 쓰레기통에는 늘 소화제 빈 병이 가득하다.
아내의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는 일찍 일어나서 아침 운동을 해보려고 생각은 하면서도 늦잠을 자느라 한 번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늦게 자니 일찍 일어날 수 없었다. ‘내일은 잇달아 세 판을 이겨서 백을 꼭 되찾아야지!’ 아내가 연속극에 빠져있을 동안, 자기 방으로 들어가 바둑판을 펴놓고 고심하다 보면 어느새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회사에서 정년은퇴 후에 피성호는 거의 매일 고향 친구인 장 화백의 화실에 가서 바둑을 두며 소일했다. 처음에는 직장에서 익혔던 바둑 실력으로 피성호는 백을 쥐고 두었다.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며, 때로는 저녁내기도 하면서 재미가 있었다. 바둑에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상사’지만 질 때가 많은 장 화백은 백 돌을 잡아보고 싶었다.
“내가 세 번 잇달아 이기면 백을 쥐기로 하자.”
어느 날 장 화백이 제안했다. 그는 뜻을 이루기 위해 따로 기원에 가서 배우기도 하고 혼자서 책을 들여다보며 피성호 몰래 바둑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뭐!”
피성호는 대수롭잖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으나 얼마 후에는 장 화백에게 백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제는 아무리 애써도 그의 실력을 당할 수 없었다. 피성호가 백 돌을 잡고 둘 때는 지든지 이기든지 단순한 놀이로 여겼으나 백을 빼앗기고 보니 큰 보물이라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바둑 애호가들이 백을 잡는 것은 맞수에 대한 긍지이다. 가진 것은 없어도 백 돌의 긍지만은 지켜가고 싶은 것이 매니아들의 속셈―. 바둑 집이 쉬 허물어지지 않으려면 포석이 튼튼해야 한다. 피성호는 이창호의 『기초포석』 『기본정석』을 펴놓고 기본기를 다시 점검했다. 조훈현의 『초반 50수』로는 공격을 실습했다. 저녁만 되면 바둑판을 펴놓고 독습을 해보지만 한번 빼앗긴 백을 되찾기는 쉽지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애를 쓰면 잇달아 두 번은 이기지만 세 번째는 번번이 장 화백에게 패하고 말았다. 잘 나가다가도 끝내기에서는 아깝게 몇 집씩 손해를 보기 때문에 백 돌 잡기는 아득하게만 보였다.
피성호가 처음 퇴직하고 나서는 일찍 일어나 베란다에서 맨손체조도 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오후에는 갈매공원을 산책하며 생활의 리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러다 하루 서너 시간씩 장 화백과 바둑을 두기 시작하면서 삶은 흐트러지고 말았다. 이제는 장 화백으로부터 백을 되찾는 것이 유일한 꿈이 되었다. 아내와 함께 9시 뉴스를 보고 나면 피성호는 바둑판에 빠져들었다. 언젠가는 TV 바둑에서 대국을 시도했으나 속도가 너무 빨라 도무지 따라갈 수 없었다. 그는 회사에서 바둑을 익힐 때부터 책을 통해 서반전, 중반전, 끝내기 등을 익혔다. 바둑을 공부하면 할수록 새로운 수는 무궁무진했다. 백 돌을 꼭 되찾겠다는 생각으로 날마다 밤을 지새우고 늦잠을 자다 보니 속이 먹먹하고 입맛도 떨어졌다.
게다가 얼마 전 부산역에서 서울 친구를 전송할 때, 오후 어중간한 시간에 양과점에서 팥빵 한 개를 급하게 먹은 것이 체한 것 같았다. 그 증상은 아직도 낫지 않고 아무리 음식을 꼭꼭 씹어도 소화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지난 주간에는 견디다 못해 단골 병원을 찾았다. 청진기로 가슴을 훑어보던 의사가 말했다.
“가벼운 위염으로 보입니다. 우선 3일분 약을 먹어봅시다.”
피성호가 생각하기에도 우려할만한 증상은 아닌 것 같았다. 사흘이 지나도 차도가 없어 다시 병원을 찾았다. 이번에는 일 주일분 약을 처방받았다.
“위염은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음식도 꼭꼭 씹어 드시는 것이 좋습니다.”
의사의 말대로 하며 기다렸으나 결과는 여전했다. 주사를 맞아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온갖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일찍 세상을 떠나야 하는가?’ 피성호의 가정에는 장수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더 윗대 조상들은 알 수 없으나 할아버지 할머니는 50대, 60대 초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회갑을 성대하게 치르고 진갑을 맞기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제일 장수한 어머니도 65세가 되는 봄날 천국으로 가셨다. 형님은 50대 중반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기에 형수가 오늘까지 많은 고생을 하고, 동생은 군 복무 중에 수류탄 투척훈련장에서 아깝게 젊은 목숨을 잃었다. 청주에 사는 막내 여동생은 40을 넘기고부터 간경화로 투병하고 있다.
지난해 피성호는 65세를 무사히 넘기고 가문에서는 가장 장수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어쭙잖은 소화불량이 지속되면서 그는 혹시 몹쓸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불안에 떨고 있었다. 건강한 사람들은 체증쯤이야, 대수롭잖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니 체중계의 눈금은 하루가 다르게 내려앉아 눈이 퀭하고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만사가 귀찮아졌다. 지난날 노인들이 ‘뭐니 뭐니해도 건강이 최고야!’라고 하던 말이 너무도 절실하게 다가왔다. 어쩌다 몸이 불편하면 곧 낫겠지, 하다가도 증세가 지속되면 ‘이러다가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고개를 쳐들곤 했다. 네 번째로 단골 병원을 찾았을 때는 그가 먼저 물어보았다.
“선생님, 위내시경 검사를 한번 받아보면 어떨까요?”
지난해 국민건강검진 때는 약간의 위염이 있었으나 의사는 그 정도 증상은 한국인 누구나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 내시경검사를 하면 반드시 예상치 못한 무엇이 발견될 것 같았다. 저녁 8시부터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검사에 대비했다. 검사를 마치고 나서 의사는 내시경 사진을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다만 십이지장 유문이 좀 좁아진 것이 원인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엑스레이사진에 보이는 유문은 마치 입술을 꼭 다물고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십이지장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피성호는 새삼스레 자세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위와 연결되는 소장의 윗부분으로 췌장과 담낭에서 분비되는 효소의 도움을 받아 음식물을 소화하는 기관입니다.”
의사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으나 십이지장 유문이 좁아서 소화에 지장을 준다는 말은 수긍이 가지 않았다. 그가 유문이 좁다는 말을 들은 지는 오래되었다. 30대 초반에 위내시경 검사를 받을 때 의사는 유문이 좁아서 내시경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오늘까지 유문 때문에 소화가 안 된다는 진단을 받은 적은 없었다. 의사가 처방해준 한 달 치 약을 꾸준히 먹었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체증이란 참으로 이상한 병이었다. 우유나 죽 같은 유동 음식을 먹으면 속은 편해도 기운을 차릴 수 없었다. 몇 차례 약을 먹어도 효험이 없으니 아내는 그의 증상이 운동 부족 때문이라고 말했다. 2천 세대의 넓은 아파트 단지는 적당한 경사가 져서 천천히 걷기만 해도 운동이 될만한 좋은 환경이었다.
“여보, 일찍 일어나 아파트 마당을 한 바퀴 돌면 금방 거뜬해질 텐데, 이렇게 공기 좋은 아파트가 어디 있겠어요!”
아내가 매일 아침 늦잠을 자는 남편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해도 일찍 일어날 수 없었고 아내의 말을 한 번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회사에 다닐 때는 누구보다도 부지런했는데 퇴직하고 나서는 모든 것을 놓아버린 게으름뱅이가 되고 말았다. 이제는 둘이서 등산하거나 가볍게 나들이할 시간을 가지지도 못했다. 제대로 먹지 못하니 몸은 점점 말라 들었고, 이제는 남편의 건강을 염려하느라 아내마저 입맛을 잃고 있었다. 아내는 소화에 좋다는 바나나를 사다 남편이 간식으로 먹게 했고, 무나 양배추를 즙으로 만들어 공복에 마시도록 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여보, 그 한의원에 한번 가보면 어떨까요?”
아내는 초췌한 남편에게 옛날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회사원으로 일하던 어느 해 연말 재무제표를 작성하면서 그는 고심하고 있었다. 어려운 회사가 대출을 많이 받을 수 있도록, 매출도 잘 되고 부채 규모도 적당하고 자산도 튼튼한 것으로 분식회계를 하고 있었다. 그의 양심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밥줄이 달려있기에 전무의 지시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때도 심한 소화불량을 겪었었다. 내시경검사 결과는 위궤양이었고, 1주일간 입원 치료를 받았다. 퇴원 후에도 암포젤, 아루사루민 등 위장약을 장복했으나 증상은 차도를 보이기는커녕 점점 악화되었다. 밥을 먹으면 위장에는 콩알이 구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어쩌다 커피를 한잔 마시면 뱃속은 면도날에 베이는 것처럼 쓰라렸다.
설을 맞아 좀비 같은 모습으로 대구 아버지 집을 찾았을 때 온 식구들은 피성호의 수척한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걱정하는 가족들에게 그간 치료받은 얘기를 다 털어놓았다. 양배추즙을 먹어보았고, 신문에서 소개된 감초 요법도 해보았다. 그는 건재약방에서 위장에 좋다는 감초를 사다 달여서 아침저녁으로 한 컵씩을 마셨으나 위궤양은 낫지 않았다. 도리어 얼굴이 퉁퉁 부어올라 사흘간 회사를 결근한 적도 있었다. 옆에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고모가 입을 열였다.
“성호야, 자두골 한의원에 가서 집맥을 한번 받아보아라.”
혼자된 고모는 설이 되면 매년 우리 집에 와서 지냈다.
“고모님, 그 한의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내가 물었다. 자두골은 고모가 사는 영천에서 좀 떨어진 마을이었다. 한적한 시골이지만 자두골 한의원이 용하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대구나 안동에서도 찾아왔다. 날마다 그 한의원 앞에는 승용차들이 길게 늘어서고 순번을 기다려 진료를 받았다. 피성호는 고모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너무도 고통이 심해 며칠 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두골 한의원을 찾아갔다. 그는 한나절을 기다려 원장 영감에게 집맥을 받고 한약 6첩을 처방받았다. 원장은 한 첩을 커피 한잔 정도로 달여서 먹고 재탕은 저녁에 먹으라고 말했다. (그때는 한약을 약국에서 달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닭고기, 돼지고기, 가루음식은 피하라고 일러주었다. 연탄불에 한약 달이기는 아내에게 여간한 어려움이 아니었다. 하루, 이틀, 사흘째 세 첩을 먹고 났을 때 속은 씻은 듯이 편안해졌다. 마치 상처 진 피부에 새살이 돋아나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약을 다 먹고 다시 그 한의원을 찾았을 때 원장은 보약 다섯 첩을 더 지어주었다. 그 뒤로 위궤양은 깨끗이 나았다. 벌써 40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피성호는 그 한의원에 가서 다시 한번 집맥을 받아보자며 안타까워하는 아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박 영감은 돌아가셨을 텐데…… 다른 한의원과 뭐가 다를까?”
“당신, 고모님의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도 반신반의하며 차일피일했지만 약을 먹어보니 금방 달라졌잖아요!”
소화력을 잃은 피성호에게는 엎친 데 덮친 일이 생겼다. 외환위기 이후 부도가 난 사업장을 닫고 나서 아직도 일어서지 못하는 아들을 생각하며 잠 못 이루는 날이 계속되었다. 다니던 회사에서 누구보다 유능한 일꾼으로 인정받던 아들이 벤처기업을 시작하고 한창 자리를 잡아갈 때쯤 외환위기로 타격을 입었다. 아내는 며느리에게 손주 하나를 데리고 세 식구가 고생하지 말고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살도록 여러 차례 권유했으나 아들은 끝내 듣지 않았다. 아무리 어려워도 나이 드신 아버지까지 어렵게 하고 싶지는 않다는 효심이었다. 뛰어난 머리에 선한 양심을 가진 아들이 겪는 어려움에 신경 쓰는 것이 위장장애와 소화불량을 부채질했다. 아내는 남편의 고통을 보면서 다시 한번 자두골 한의원에 가보자고 졸랐다. 지난날 자두골 마을은 입구에서부터 가로수처럼 자두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집안에는 물론 나지막한 산자락에도 온통 자두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박 씨 집성촌인 마을에서는 여름철 인기 과일로 자두를 대량출하 했으나 최근에는 자두 잼, 자두 주스, 자두 청을 가공생산하여 지역경제에 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두골 한의원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박호진 원장의 증조부는 그때 대구의 감영객사 주변에서 봄가을에 춘령시, 추령시로 나눠 정기적으로 열리던 약령시장의 한약국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독학으로 약초를 연구하고 집맥을 부지런히 공부했다. 집안의 장손인 증조부는 결혼한 지 3년이 지나도록 대를 이을 자녀를 얻지 못해 부모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공부한 것을 토대로 시험 삼아 한약을 지었다. 부부가 함께 그 약을 복용 하자 거짓말 같은 효험으로 증조모는 임신하고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대가 끊어질 것 같았던 가문이 자손을 얻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널리 널리 퍼졌다. 그때부터 자두골 한의원에는 환자들이 줄을 이었다. 예나 오늘이나 불임은 여성들에게 무거운 죄 짐이었다. 옛날의 여성들은 며느리로서의 일보다도 한집안의 대를 잇는 것이 더 큰 덕목이었다. 증조부는 찾아오는 불임여성들을 거절할 수 없어 한두 명씩 약을 지어주게 되었고, 그것이 ‘자두골 한의원’의 시작이었다. 그 한의원 약을 먹은 여인들은 신기하게도 대부분 자식을 얻을 수 있었다. 입소문을 듣고 불임여성들은 멀리서 가까이서 찾아들었다. 그때 증조부는 하루에 소 한 마리 값만큼이나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 엄청난 돈은 아들에게 유산으로 물려 지지는 않았다. 자두골 사람들은 증조부가 어떤 종교에 빠져 지구 종말론을 믿었고, 그 많은 돈이 그쪽으로 빨려들어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버리는 탕약 찌끼를 얻어다 먹여 불임의 며느리가 아이를 낳은 일도 있었다. 자두골 한의원 뒷골목에는 새벽 6시 만 되면 초라한 한 노파가 나타났다. 행색은 볼품이 없었으나 노파의 눈길은 어스름 속에서도 언제나 빛나며 간절히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쯤 한 중년 남자가 골목에 들어서면 노파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졌다. 순진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그 남자는 한의원 약탕실에서 30년 동안 약을 달이며 일하는 직원이었다.
“할매, 참 대―단 하니더!”
중년 남자는 토요일 새벽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노파가 반가웠다. 노파는 허리를 숙이고 손을 마주 비비며 굽신거렸다. 약탕실 남자는 알겠다는 듯이 한의원 뒷문을 열고 삐걱거리는 낡은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잠시 후에 그는 꽤 무거운 포대 자루를 어깨에 메고 나왔다. 그것은 한 주 동안 약을 달이고 모아놓은 찌끼로 거름이나 쓰레기로 처리될 것이었다. 그의 손에는 따로 조그만 봉지가 들려있었다. 그것은 불임여성들의 약을 달인 약 찌끼를 따로 모아둔 것이었다. 가난한 노파는 자두골 한의원이 불임여성들을 치료하는 용한 의원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불임의 며느리에게 약 한 첩 지어다 먹일 형편이 되지 않았다. 노파는 외아들을 장가보낸 지 3년이 되어도 손주를 안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자두골 한의원이 새벽 일찍 뒷문으로 탕약 찌끼를 버린다는 말을 듣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용기를 내었다. 그리고 그 직원에게 집안 사정을 얘기하고 불임을 고친다는 한약 찌끼라도 좀 주면 좋겠다고 간청했다.
약탕실 남자는 어차피 내다 버릴 것을 노파에게 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나름대로 하루 세 번씩 달여 먹는 방법도 일러주었다. 노파는 그 직원이 건네준 약 찌끼 봉지를 두 손으로 얼른 받아 마치 큰 보물을 얻은 것처럼 가슴에 안고 새벽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일주일에 한 차례씩 그런 일이 두어 달 계속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노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 날 새벽, 뜻밖에 그 노파가 그 골목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할메, 참 오랜마이시더.”
약탕실 직원은 노파에게 반가이 인사를 건넸다.
“아이구 고맙심더! 고맙심더!”
노파는 허리를 굽혀 절하며 고맙다는 말만 잇달아 늘어놓았다. 영문을 알지 못한 약탕실 직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노파는 다짜고짜로 손에 든 꾸러미를 들어 보이며 원장님에게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노파는 집에서 가져온 토종꿀을 전달하고 그동안에 생긴 일들을 원장에게 털어놓았다.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정성으로 달여준 찌끼 약을 먹고 임신이 되었고, 한 달 전에 기다리던 손자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맛 좋은 장을 담그는 집안은 오래된 장독과 묵은장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거 아입니꺼. 사람들이 자두골 한의원, 자두골 한의원, 하는 이유를 인자 안 알았능교. 원장님, 고맙심더, 고맙심더……”
증조부 원장은 노파의 사연을 듣고 해산한 며느리가 먹을 수 있도록 돈을 받지 않고 보약을 한 재 지어주었다. 몇 년 후 자주골 한의원을 이어받은 조부는 더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주고 싶은 마음에서 영천역에서 가까운 약전 거리 북쪽으로 자리를 옮겨 병원 건물을 신축했다. 사람들의 왕래가 붐비는 곳에 새로운 터전을 잡자 ‘그 한의원’ 소식은 더욱 널리 퍼졌다. 증조부로부터 손자 대까지 4대를 이어온 자두골 한의원은 오늘까지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피성호는 초대 한의원의 증손자인 젊은 한의사에게는 좀처럼 신뢰가 가지 않았다.
몸이 아프면 누구나 귀가 얇아지는 법이다. 월요일 아침 피성호는 아내와 함께 영천으로 자두골 한의원을 찾아 나섰다. 삼거리 로터리를 끼고 있는 자두골 한의원은 큰 간판 옆으로 넓은 주차장도 따로 마련되어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로비의 신발장에 구두를 벗어 넣고, 슬리퍼를 신고 마루로 올라갔다. 먼저 온 환자들이 탁자를 중심으로 소파에 둘러앉아 있고 다른 이들은 벽 쪽에 놓인 벤치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성호는 아내와 함께 벤치 끝 쪽에 나란히 앉았다.
환자들은 들어올 때 접수한 순서에 따라 한 사람씩 원장실로 불려들어갔다. 어떤 이는 잠시 후에 그 방을 나왔고, 어떤 이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했다. 진료를 받은 사람들은 달인 약을 배달할 집 주소를 간호사에게 알려주고 돌아갔고, 뒤이어 들어온 사람들이 의자의 빈자리를 메웠다. 피성호는 한 시간 반이 넘게 기다려 원장의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젊은 원장은 황토색 개량 한복 차림으로 자세히 보니 목덜미 쪽은 낡아서 너덜너덜했다. 숱이 많고 반백의 긴 머리는 자연스럽게 이마와 귀를 덮었고 굵은 검은 태 안경을 낀 그의 모습은 얼핏 도사 같은 모습이었다.
“저는 40여 년 전에 박 영감님이 계실 때 위궤양으로 이곳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피성호는 그때의 일을 털어놓았다.
“예, 저는 그 할아버지 손자입니다. 한의원을 이어받은 아버님도 10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나는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유명한 자두골 한의원 장손이라는 이름은 이 지역 어디를 가든 알아주고 통했습니다. 한때는 어린 마음에 우쭐했지만 자라면서 그것은 나에게 속박의 사슬이었습니다. 대학을 마쳤지만 마치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저 박호진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젊은 마음에 족쇄를 벗어버리려 혼자서 무턱대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야 했습니다. 재일교포를 대상으로 침을 놓는 아르바이트를 했지요. 입소문이 점점 퍼져 나중에는 일본인들도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일본의 전통 과자인 와가시(和菓子)를 만드는 장인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나의 치료가 마음에 들었는지 일주일에 한 번씩 빠짐없이 나를 불렀습니다. 그분 역시 가업을 이어받아 5대째 와가시를 만들며 전통을 이어간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분이 너무도 존경스러웠습니다. 과자를 만들면서 5대를 이어오다니……. 저는 6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침내 자두골 한의원의 120년 역사에 내가 끼어드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피성호를 집맥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는 잠자리에 들기 전 ‘휴지통’을 비웁니다. 컴퓨터에 저장된 쓰레기를 비우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마음에 가득한 휴지(욕심)를 비우는 것이 건강을 지키는 첫걸음입니다. 모든 병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심리학자 유진 젠들린은 우리 몸은 일종의 생체 컴퓨터로 날마다 그 사람이 했던 생각이나 행동을 그대로 기억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삶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순간, 몸은 상처를 받기 시작합니다. 쌓인 스트레스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면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이런 것을 잘하는 사람들은 종교인입니다. 자신의 걱정 근심 무거운 짐을 신에게 다 맡겨버리는 것이지요.”
“원장님은 종교를 갖고 계신가요?”
피성호는 혹시 그가 기독교인인가, 하여 물어보았다.
“굳이 말하자면 저는 원시종교를 갖고 있습니다. 일월성신(日月星辰), 해와 달과 별을 믿습니다. 그리고 나무와 바람과 자연을 믿습니다. 자연의 순리에 맡기는 것이 삶의 비법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연을 우상처럼 섬기고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묘지는 절대 만들지 말라고 유언할 것입니다. 화장해서 수목장처럼 유골을 뿌리되 하나의 나무에 뿌리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어느 한 나무에 뿌린다면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가 계신 나무인데 하며 자녀들이 그것을 신주처럼 모시고 집착하겠지요.…….” 그의 얘기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이때 격자 미닫이문을 노크하고 간호사가 들어와 쪽지 하나를 원장의 책상에 놓고 나갔다.
“……그리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 습관은 평소 우리의 건강을 지켜줍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모두 그렇게 살았습니다. 할 수 있으면 새벽이나 이른 아침 산책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침 운동은 신체의 호르몬 변동을 더욱 잘 조절해줍니다. 더욱이 아침에 생성되는 코르티솔 호르몬은 식욕을 돕고 소화력을 촉진합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입니다. 달인 약은 내일 오후나 늦어도 모레쯤은 도착 될 것입니다. 치료 약이 아니라 보약을 먹는다는 생각으로 정성스레 복용해야 합니다.”
원장은 직원의 메모를 보고 나서도 한참이나 얘기를 계속하고 진료를 마무리했다. 피성호가 원장실을 나오자 마루를 가득 메운 환자들이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기다리는 환자들은 자기들도 자주 그런 경험을 하기에 진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진료를 빨리하면 더 많은 환자를 받을 수 있고 수입도 더 늘어날 것이지만 원장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이 복잡한 세상에서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를 더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저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휴지통을 비웁니다.’ 자두골 한의원장의 말은 집에 돌아와서도 피성호의 귓전에 맴돌고 있었다. 그는 은퇴 후에 한 번도 ‘휴지통’을 비우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머리와 가슴속에는 지난날의 온갖 생각들과 여러 가지 걱정 근심과 엉뚱한 욕심이 가득 쌓여있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건강을 지키는 길이라지만 피성호는 그 반대로 살았다. 빼앗긴 백을 되찾기 위한 전략을 세우며 거의 매일 자정을 넘기고 아침에는 아내가 깨우는 소리에 겨우 일어났다. 그리고 오후에는 장 화백의 화실에 출근해서 해 질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먼 거리를 다녀왔기에 피성호는 몹시 피곤했다. 9시 저녁 뉴스를 보는 데도 눈꺼풀이 내려와 덮였다. 피성호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인지 아내가 깨우기도 전에 일어났다. 생각만 하던 아침 운동을 시작해보고 싶었다. 추리닝을 입고 그 위에 점퍼를 걸치고 출입문을 나서자마자 아침 공기는 산소통처럼 그를 감쌌다. 아파트 정원으로 조성된 소하천에는 개울물이 졸 졸 졸 흐르고 파란 안개가 무대 장식처럼 아름답게 피어오른다. 테니스장 옆길을 걸어 내려가자 노인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젊은 부부 두 사람은 가벼운 조깅을 하며 공원으로 가는 후문 쪽으로 빠져나갔다. 외곽 펜스를 끼고 시험 삼아 아파트를 한 바퀴 돌았다. 혈관 속으로는 피가 왕성하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파트 뒤쪽 돌담 축대에는 어느새 개나리꽃이 노랑 커튼을 드리우고, 아침 해는 갈매공원 산꼭대기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피성호는 젊은 시절 아내와 함께 눈 덮인 덕유산을 종주했다. 결혼 10주년을 맞아서는 단풍이 절정인 설악산 대청봉에 올랐다. 공휴가 되면 회사원들과 함께 찾았던 이름있는 산들이 그리워졌다. 그는 고향을 방문하듯 차례로 그 산들을 찾아 추억을 복습하고 싶었다.
산 위에 오르면 언제나 높고 큰 것만을 생각하던 그의 마음은 한없이 작아졌다. 장난감을 쌓아놓은 것 같은 마을이나 개미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겸손을 가르쳐주었다. 요즘은 신문을 펼치면 자주 부음란에 눈길이 간다. 세상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사람들도 80이나 90이면 세상을 떠났다. 피성호는 난치병이 아니라도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을 쟁취하려고 밤을 지새우는 그의 모습이 부질없어 보였다.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에서 홀로 생활하면서 욕심 많던 부자를 떠올렸다. 4년째 되는 날 아침을 맞으면서 그는 사물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세상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기대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그곳(육지)에 살았으나 이제는 딴 세상처럼 보였다. 날마다 호화롭게 살던 부자가 음부의 고통 중에 아브라함에게 긍휼을 베풀어주도록 간청했을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16:26) 세상 욕심은 모두 헛된 것이었다. 젊은 시절 로빈슨 크루소의 끝없는 모험심은 일종의 욕심이었다. 그는 비로소 물욕도, 명예욕도 다 내려놓을 수 있었다.
피성호는 오늘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일찍 자니 일찍 일어나졌다. 그는 어제 아침처럼 아파트 단지를 두 바퀴나 돌았다. 식탁에 앉자마자 시장기가 돌았다. 답답하던 속이 조금씩 트이는 것 같았다. 피성호는 자유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월든 숲으로 달려간 헨리 D. 소로우의 말을 떠올렸다. “모든 지성은 아침과 함께 깨어난다. 그리고 사람의 가장 아름답고 기억할만한 행동은 아침의 한 시간으로부터 기인한다.……지금 우리 자신에 대한 그 수많은 걱정 근심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다른 일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피성호는 이제 겨우 이틀간 아침 운동을 했는데 식욕이 살아났다.
사흘째 날 오후에는 한약 택배를 받았다. 세어보니 39봉지였다. 복용 방법과 주의사항을 알리는 글 맨 끝에는 “가장 중요한 것은 정성을 다해 복용하는 것입니다.”란 말이 추신처럼 붙어있었다. 정성은 어디에나 필요한 것이다. 아침 운동을 계속하며 하루 3회씩 이틀째 약을 복용 했는데 몸은 벌써 다 나은 것 같았다. 자두골 한의원 젊은 원장은 약만 짓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비틀어진 삶의 자세를 바로잡아주는 용한 의사였다. 피성호는 약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약을 먹고 있었다. 백을 되찾으려는 욕심이 차지하던 자리에는 새로운 꿈과 평강이 조용히 깃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