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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오늘 75주년을 맞는 광복절 아침이다.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과연 우리 사회는 일제의 잔재를 말끔히 청산했는가라는 물음에 긍정적으로 답하기가 쉽지 않다. 주지하듯이 해방 정국에서 친일파들을 청산하기 위한 ‘반민특위’가 설치되었지만, 당시 친일파들의 비호를 받고 있던 대통령 이승만에 의해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다. 그리고 이후 한국 사회에서 친일파들과 그 후손들은 사회 곳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류의 위치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반일민족주의’ 운운하면서 ‘신친일파’를 자처하는 인물들이 ‘이승만 학당’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을사오적'의 한 사람이자, 대표적인 친일파인 이완용에 대한 평전이다. 구입을 한 이후 나중에 읽으려고 한쪽에 밀어두었다가, ‘신친일파’들의 책이 화제가 되면서 최근에 읽기 시작했다. 실상 이완용에 대해서는 이미 냉엄한 역사적 평가가 확고하게 내려져 있고, 그의 일대기를 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신친일파'를 자처하면서 일본 극우의 이념을 앵무새처럼 지껄이고 있는 이들의 논리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광복절을 맞은 오늘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고 있다.
저자는 이완용을 일컬어 '극단의 시대, 합리성에 포획된 근대적 인간'이라는 부제로 평가를 하고 있다. 그가 살던 시기가 '극단의 시대'이고, 그의 정치적 행보 하나하나가 모두 '합리성에 포획된 근대적 인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리라.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그 의미를 면밀히 따져 불행한 과거가 다시 반복되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이 책을 집필하기 전에, 이승만의 평전을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역사학자로서 이미 우리 역사에서 ‘배제된 자의 봉인을 열어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으로 시작했으나, 막상 ‘시작은 가벼웠으나 끝은 무거워졌’음을 고백하고 있다. 심지어 나 역시 독자로서 그러한 생각이 들었는데, 저자의 입장은 왜 그렇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곳곳에 뿌리를 박고 있는 또 다른 ‘이완용’들이 발견되고 있기에, 저자 역시 ‘매국노의 모습에 깃들어 있는 우리의 모습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광복절을 맞은 시점에서, 그의 행적을 냉철히 돌아보며 역사의 오점을 더듬어보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이 책을 완독한 결과, 그의 정치적 행적은 '합리성'이 아닌 철저히 기회주의적인 면모가 잘 드러난다고 생각되었다. 이완용의 비서였던 김명수가 쓴 <일당기사>라는 일대기가 전하고 있지만, 철저히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도 간혹 인용되고 있지만, 그 내용은 비판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참고로 ‘일당(一堂)’은 이완용의 호라고 하는데, <일당기사(一堂紀事)>는 이완용의 행적을 기록한다는 의미이다.
여타의 평전과는 다르게, 이 책의 내용은 이완용의 개인적 행적이 아닌 당시 역사적 흐름을 중심에 두고 전개되고 있다.앞에서도 논했듯이 <일당기사>라는 그의 호를 딴 일대기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아마도 저자는 그의 개인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끌어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미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는 평가와 함께 '을사오적'으로 통칭되는 인물들 가운데 하나이기에, 그의 삶은 어떻게 규정하더라도 이러한 수식어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완용을 비롯한 주변의 인물들, 그리고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조망하면서 저자는 그의 기회주의적인 처신이 나름의 ‘합리성에 포획된’ 것처럼 여겨졌을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저자는 그가 살았던 시대를 통하여 그의 행적을 짚어보면서, 역사학자로서의 객관성을 조금이라도 유지하고자 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얼마 전에 이 시기의 역사를 다룬 정교의 <대한계년사> 번역본을 읽었던 터라,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쉽게 다가왔다. 가난한 양반의 후예였던 이완용은 먼 친척의 양자가 되어, 당시 권력의 중심부로 서서히 진입하기 시작한다.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처음에는 왕권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다가. 시류에 따라 영어를 배워 친미파로 그리고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옮긴 이른바 ‘아관파천’ 당시에는 친러파로 변신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친일파로 변신해서, 나라를 팔아넘기는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주도하여 1926년 죽을 때까지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톡톡히 하였던 것이다,
이제 그의 이름은 항상 '을사오적'의 대표적인 인물로 거론되고, 우리 근대사의 부끄러운 흔적으로 뚜렷이 남아있다. 이완용이 역사적 수치임을 드러내는 반면에, 고종과 순종 등의 왕실 인물들은 그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인식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고종과 순종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마지막 왕조의 구성원들 역시 일제의 침탈 아래 자신들의 안위만을 타진하며, 무능하고 졸렬한 행태를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그 후손들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보호를 받으며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이완용을 일컬어 ‘왕과 왕실에 대한 의리’를 무엇보다 우선시했고, 그에 따라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주도하면서 ‘현실에 분노하기보다는 현실을 조망’하는 입장에서 처신했다고 정리하고 있다. 그러한 시대상에서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그 현실에 저항하기도 했지만, ‘기존 체제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그로서는 ‘분노해야할 현실이 없었다’는 평가가 정확하다고 하겠다. 그의 행적을 통해서 저자는 ‘분노할 현실이 없거나 또는 그것을 외면하려 하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실상 ‘신친일파’를 자처하면서 일본 극우주의의 논리를 답습하는 이들이 발호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냉철히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앞으로의 과제에 대한 확실한 교훈을 얻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광복절 아침에, 또 다른 '이완용'들이 서서히 기지개를 펴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철저히 인식하고 극복할 필요성을 다짐하게 된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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