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볼 수 없는 쪽에 하늘이 있었다
거울 앞에 서면 내 얼굴이 보입니다. 몸을 조금 틀면 옆모습도 보입니다.
그런데 등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자리가 하나 있습니다.
오늘 그 자리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먼저 조금 돌아가겠습니다.
지난 호에서 하늘과 땅과 나, 삼재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늘은 끝이 없고 땅은 만져지며, 그 사이에 내가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주행학은 그 삼재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도 똑같이 들어와 있다고 봅니다. 작아진 삼재라 하여 소삼재성(小三在性)이라 부릅니다.
내 안의 셋은 이렇게 나뉩니다.
격위 무엇이 몸의 어느 면
| 천격위(天格位) | 일영(一靈) — 하나 | 인체 뒤 |
| 인격위(人格位) | 삼혼(三魂) — 셋 | 인체 옆(중심부) |
| 지격위(地格位) | 칠백(七魄) — 일곱 | 인체 앞 |
숫자를 눈여겨보십시오. 하나, 셋, 일곱입니다.
하나 — 맨 위는 영(靈)입니다. 하나이면서 셋 전체와 통하는 자리입니다.
셋 — 가운데는 혼(魂)입니다. 셋이라는 숫자가 관계를 뜻합니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만 있습니다.
일곱 — 맨 아래는 백(魄)입니다. 그런데 이 일곱, 어디서 본 숫자입니까.
99호에서 다룬 칠정입니다. 기쁨과 노여움과 근심과 생각과 슬픔과 놀람과 두려움, 그 일곱입니다.
책은 칠백과 칠정이 같은 것이라고 못 박습니다. 칠규를 통해 일어나는 그 감정들이 곧 칠백이고, 칠백은 지격위에 속합니다.
감정이 왜 하필 '땅 쪽'인가 — 답이 여기 있었습니다. 물질계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몸의 방향을 봅니다.
셋에 각각 앞뒤옆이 붙어 있는 것이 뜻밖입니다.
땅은 앞입니다. 내가 보고 만지고 딛는 쪽입니다. 굳건한 지반처럼 나를 받쳐 안정을 줍니다.
사람은 옆입니다. 관계는 마주 보고 서는 자리가 아니라 나란히 서는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옆면이 친교와 화해의 축이 됩니다.
그리고 하늘은 뒤입니다.
"천의 격위성은 후면성(後面性)으로서 공심의 전체성과 교통하는 체위를 형성하여 인간의 전체성을 포용하는 능적인 것의 주격이 된다."
공간과 통하는 자리가 등 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래는 어떤 상태였는가.
발병시원을 거치기 전, 가운데 있는 인격위는 위쪽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천격위와만 화합하면서 하늘의 품성을 받아 자라던 중이었습니다.
아래쪽 칠백은 그때도 있었습니다. 다만 가운데가 그쪽을 보고 있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방향이 뒤집혔습니다.
위와 이어져 있던 인격위가 하늘 쪽과 끊어지고, 아래쪽인 지격위와 붙어 버렸습니다.
책은 그때를 발병시원이 시작된 시점이라고 씁니다. 병이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96호부터 여기까지 흩어져 있던 이야기가 이 표 하나에 다 들어옵니다.
반신반인의 '신적 요인 반'이란 천격위와 이어져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것이 끊어지고 그 자리에 칠백이 들어앉은 것이 반인반수입니다. 감정이 나를 지배하는 것도 인격위가 아래와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가 분명해집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해결이 아닙니다.
칠백은 원래 있는 것입니다. 짐승에게도 있고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 가운데가 어느 쪽과 붙어 있느냐입니다.
위와 붙으면 삼재가 회복되고, 아래와 붙으면 감정이 나를 운영합니다.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이제 처음의 거울로 돌아갑니다.
앞은 늘 보입니다. 옆도 돌아보면 보입니다. 등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보이지 않는 쪽이 하늘 자리였습니다.
96호와 97호에서 같은 창을 두고 등을 돌린 그림을 나란히 놓았습니다. 잃어버린 것은 앞이 아니라 뒤였습니다.
그러면 어쩌다 그 방향이 뒤집혔을까요.
책은 그 순간을 한 단어로 부릅니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무거운 말입니다.
다음다음 호에서 그 단어를 다룹니다. 먼저 한 호를 사이에 두고 원리와 이치가 어떻게 다른지를 정리하겠습니다. 그 구분을 알아야 다음 이야기가 제대로 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