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날은 정신 차리고서 보기시 두어 편 읽는 거 말고는 아이들에게 다 맡겼습니다. 수안이가 전에 써둔 시라며 내밀었는데, 그걸 읽고나니 제가 함부로 나서면 안되겠더라구요. ^^;;;
사라진 계란꽃/ 수안
계란꽃을 예뻐했는데
다시 보고 싶다.
어디로 사라진걸까
바람에 흘러간걸까
햇볕에 시들어버린걸까
누구에게든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자유로이 시로 말해보자,한 마디만 하고서 뒤로 빠졌어요. 그랬더니 아이들이 한 시간 내내 말하고 쓰고 말하고 쓰는 거예요.
"이모 이런 말도 써도 되요?"
"그럼, 니가 한 그 말이 바로 시!"
제가 한 말은 "그럼!" 뿐이었어요. 나중에는 누구도 써도 되냐 마냐 묻지도 않고 다음 종이만 달라고 손 내밀 뿐이었어요. 결국 종이가 모자라고 배가 고파서 그만 썼답니다.
구민/ 수안
구민이모는 웃기다
생각할때면 웃긴데
또 진지해진다.
아빠/ 수안
아빠 사랑해요
아빠는 그림도 잘 그리고
설치도 잘해
너무 좋아
엄마/ 희진
엄마! 엄마는 왜
잔소리 폭탄을 왜 해
구민이모 머리/ 희진
구민이모 머리는
샴프같아요
만지면
몽글몽글 샴프 버블 같아요
상상/ 희진
만일 내가 하늘을 날면 세상을 볼 수 있을 거다.
내가 하늘을 날면 학교에 빨리 가서 놀 수 있을거다
내가 만약에 투명 인간이 되면 집에서 편하게 있을 수 있겠다.
아빠/ 희진
아빠!
아빠는 왜 사람들 많은데 부끄러워 해?
왜 그래?
그러고선 희진이 왈, 집에서 가족끼리 있을땐 너무 웃기시고 또 많이 웃는 아빠래요.
오빠/ 담희
할머니집에 갔다가
집에 있을 때
오빠가 "넌 옳은 말을 안해."
난 "나도 옳은 말 하거든."
오빠는 또 "언제 했는데? 기억 안 나지?"
난 잠시 생각했다.
"기억 안 나지? 기억 안 나면 없는 거야."
난 꾀를 냈다.
"그럼 오빠 어릴 때 무슨 옷 입었는지 알아?"
"아니."
"그럼 옷 안 입은 거내."
색탁 색탁/ 담희
우리집 장흥길 24길 대근 그린맨션 4층에
우리집이 있다.
엄마는 한없이 세탁기를 돌린다. 탈탈탈
탈탈탈탈탈탈탈탈
탈탈탈탈탈탈탈탈
탈탈탈탈탈탈탈탈
탈탈탈탈탈탈탈탈
탈탈탈탈탈탈탈탈
탈탈탈탈탈탈탈탈
쏴- 쏴- 쏴- 쏴-
캬!!!! 이렇게 생생한 시라니!!!! 읽다 보면 내 마음이 탈탈탈탈 빨리고 말려지는 느낌~!
라디오/ 담희
서울 솔샘역 대승아파트
12층으로 들어가
할아버지 인사를 받고
라디오를 튼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흐릿하고 지직거리며 나온다.
라디오에서 노래가 나오면
분위기가 바뀐다.
그렇게 분위기는
라디오 소리를 따라간다.
줄줄줄줄 좔좔좔
상상/하은
나는
상상놀이를 좋아한다.
그런데 갑자기 내 마음이
이렇게 속삭였다.
"하은아, 넌 왜 상상놀이 좋아하니?"
나는 이렇게 말했다.
"글쎄? 그냥 재미있어."
또 마음이 다시 말했다.
"그냥 아닌 것 같은데."
"아마 엄마 닮아서?"
외동/ 하은
이모,
첫째가 더 좋아요?
막내가 더 좋아요?
어떤 사람은 첫째가 더 좋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막내가 더 좋대요.
근데 나는
그냥 외동이 좋아요.
마치 보민이 언니처럼요.
잔소리/ 보민
엄마는 잔소리를
너무 많이 한다.
막 했는데
빨리 와라, 정리 해라
빨리 요거 먹어라
빨리 해라
계속 한다.
그리고 엄마가 하란 걸 하고 있는데
또 다른 걸 하라 한다.
너무 한다.
마지막으로 억지로 여기 따라 온 보민은 시로 속시원히 제 할말을 합니다. 내 잔소리가 훌륭한 글감이 되었다는데 엄청 찔리고 미안해졌어요..
이틀 동안 아이들이 써준 시를 공부 마칠 때면 다같이 읽고 나누었는데 다들 어찌나 재밌어하던지 쓸 때보다 더 즐거워보였어요. 원래 세상에서 가장 재미난 얘기는 내 이야기, 그 다음이 내 동무 이야기, 고 다음이 내가 아는 사람 얘기거등요. 큭큭큭
첫댓글 아, 혼자 읽으며 웃다가 울다가..
아이들 시 읽으니 너무 정화되네요~
엄마 따라 나서주고 모두에게 많은 영감을 준 보민이에게 너무 고맙네요~
나도 구민샘과 시쓰고싶다~ ㅎㅎ
ㅋㅋ 아이들의 시는 너무 기발해요. 킥킥거리며 읽었네요. 어른들이 마음 속으로만 생각한 것들을 바로 꼭 찝어서 표현해서 그냥 힐링이 되네요. 보민이 시를 읽으니 소율파가 생각나네요. 항상 바빠 간만에 집에 있으면 이거해라, 저거해라하면 어금니 꽉~깨물면서 "한번에 한가지만 시키세요~" 이러는데...미안합니다.
탈탈탈 좔좔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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