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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6번 말씀
제목 : 울고 있는 마리아 그녀와 함께 울고 있는 나
본문 : 요 20;1-18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쌔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아멘.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운명을 하시자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향품을 넣어서 세마포로 잘 염을 한 후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을 하셨어요.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그 부활의 날이 안식 후 첫 날이라 그래요, 그죠? 안식 후 천 날. 오늘날로 따지면 토요일 다음 날이니까 주일이죠, 그죠? 그래서 개혁교회는 주일을 예배의 날로 지키는 거죠? 안식일 교회는 안식일을 지키고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굳이 이틀도 아니고 나흘도 아닌 사흘을 무덤 속에 계시다가 부활을 하셨는가? 거기서부터 한번 시작해보죠.
마 12:38-40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당신께서 무덤에 갇혀 있어야 하는 사흘이라는 시간을 요나의 이야기에서 끄집어내어 그 요나의 사흘과 연결을 시키시죠? 그리고 당신이 이 세대에게 보여줄 수 있는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 라는 말씀을 아울러 하세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요나의 표적은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부터 출발해서 역시 방주, 테바죠, 그죠? 방주. 갈 상자가 테바, 방주에요. 그 테바를 타고 물위를 떠다니다가 저주의 물위에서 건짐을 받는 모세의 이야기. 다 죽어야 되잖아요. 근데 모세만 방주에 담겨서 동동 뜨게 된단 말입니다. 그리고 홍해를 가르고 저주의 바다를, 거기에 애굽사람은 다 빠져 죽었는데 이스라엘만 마른 땅처럼 건너죠, 그죠? 저주의 바다에 빠지지 않고 마른 땅처럼 건넜던 그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이야기, 그리고 신약으로 넘어와서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그 에피소드를 거쳐서, 다 빠져 죽어야 되는데 한 존재만 물위를 걸어서 오신단 말에요. 그 에피소드를 거쳐서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르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작은 그림으로 담고 있는 거죠. 어떻게 그 방주와 어떻게 예수가 물 위를 뜨게 되었는가? 예수를 영접한 제자들의 배가 물 위를 뜨게 되었는가? 풍랑에 안 빠지고. 그 이유를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요나의 표적이. 왜죠? 요나서에도 나오잖아요? 풍랑으로 다 빠져 죽어야할 그 배 안에서 요나가 물에 던져지자 배가 살아나는 거잖아요? 그게 요나의 표적이란 말에요.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이 풍랑에 빠져 죽어야할 상황 속에서 요나라는 사람 하나가 물속에 빠져, 요나서에 굳이 그게 스올이라는 단어로 등장하죠? 지옥이에요. 스올,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서 사흘 밤낮을 머묾으로 해서, 다른 말로 지옥과 같은 고통 속에서 사흘 밤낮을 죽었다가 살아나는 거예요. 스올에게 먹혔다가 풀려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은 거예요, 그건. 지옥에게 먹혔다가 풀려나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 스올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거죠? 그렇게 해서 풍랑 속에 빠져야할 다른 이들이 살아나는 사건. 구원의 사건이에요, 이것이. 예수님이 빠져 죽으시고 다 저주의 바다, 풍랑에 빠져 죽어야할 우리가 살아나는 거예요. 그게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부터 점층적인 그림으로 보여지는 거죠. 창세기할 때 했는데 다 잊어버리셨나보네.
그러나 요나라는 존재의 개별적 측면에서 그 사건을 바라볼 때 요나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대가를 사흘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게 된 거죠? 가라는 데로 안 갔기 때문에 그가 물속에 던져진 거란 말에요. 그 결과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어 니느웨로 향하잖아요? 따라서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이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하신 말씀,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라는 말씀은 니들이 바로 그 요나처럼 죽어야 하는데 바로 그 요나의 죽음, 너희들의 죽음을 내가 무덤 속에서 사흘간 표적으로 보여주겠다, 라는 뜻이에요. 그게 요나의 표적이에요. 너희들이 그렇게 죽을 거야. 이게 요나의 표적이에요. 근데 나한테 지금 기적을 보여 달라는 거야? 아냐, 내가 너희들한테 보여줄 수 있는 건 니들이 죽을 수밖에 없다, 라는 그 표적밖에 없어.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요나의 표적이에요.
그러니까 사흘을 무덤 속에 계시면서 주님은 어떤 ‘사흘’을 회복시키는 거예요. 그냥 무덤 속에서 그들의 죽음을 보여주는 것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너희들은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데 내가 너희들을 어떤 방법으로 살려낼 거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사흘을 무덤 속에 계시는 건데 그 사흘은 지금 인간들이 허물어버린 어떤 사흘을 회복시키는 거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복시킨 사흘이 창세기의 첫 창조 속에 첫 번째 사흘인 거예요.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의 사흘.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인 세상에 빛을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혼돈에 구조를 세우시죠? Structure. 틀을 세우신단 말에요. 혼돈은 틀이 없음이란 뜻이거든요. Structure가 없다는 뜻이에요. 공허는 Emptiness 텅 비어있다, 라는 거란 말입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그 혼돈과 공허, 그러니까 틀도 없고 내용물도 없으니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잖아요. 아무 것도 없는 그곳에 하나님이 틀을 세우시고 내용물을 채우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틀이,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틀이 세워지죠? 빛과 어두움이 갈리고 궁창 위의 물과 아래 물로 갈리고, 틀이 세워지는 거예요. 물과 뭍이 갈리잖아요, 틀이란 말이죠, 아무것도 없었던 곳에.
그리고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이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을 채우는 거 아네요, 내용으로. 네? 그러니까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은 하나님 나라의 틀이 세워지는 거고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은 그 나라의 내용물들이 채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의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에는 고런 틀이 세워지는 작업이 행해지고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에는 제자들이 모아지죠, 그죠? 열두 제자가 모아지잖아요. 열두 제자는 누굴 상징하는 거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 성도를 상징하는 거니까.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가나의 혼인잔치가 벌려지죠. 어린 양의 혼인잔치. 안식의 완성. 그러니까 창세기 1장과 요한복음 1장은 정확히 같은 걸 이야기한다. 그랬어요.
그렇게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에 틀이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에 그 내용물이 채워지는 고 상태. 그걸 성경이 뭐라 그래요? 안식이라고 하잖아요. 싸바스, 그죠? 그래서 일곱째 날 하나님이 안식하셨다, 그러는 거예요. 쉬었다는 말이 아니라 고 상태가 안식이란 뜻이에요. 하나님이 뭐가 힘들어서 쉬어요, 그죠? 힘들어서 쉰 게 아니라 고 상태가 싸바스, 안식이라고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안식이란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늘 왕의 자리에 앉으시고, 그게 싸바스의 뜻이에요, 원래의 뜻.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완료하시고 당신의 자리에 앉는 것을 싸바스라 그래요, 안식이라 그래요. 앉으시고, 그 왕에게 모든 피조물들이 이 세상에 버금 왕으로 책봉이 된 인간의 다스림 안에서 하나님께 복종하고 순종하는 상태.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 피조물은 피조물의 자리에서, 죽은 흙의 자리에서 저는 죽은 흙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은 흙입니다, 라고 납작 엎드리는 그 상태, 그걸 히브리어로 샤하라고 하는데, 그걸 예배라고 하죠? 그걸 헬라어로는 프로스크네오라 그래요. 그게 예배에요, 예배.
그러니까 안식, 예배, 하나님 나라는 엄밀히 말해서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 모든 건 다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절대 순종과 의존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죠? 그게 하나님 나라에요. 그게 안식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안식은 뭐죠? 여러분의 뜻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 그걸 자유라고 하죠. 군대에 가면 사람들이 살이 찌는 이유가 뭐에요? 국가에게 내 뜻을 다 뺏기기 때문에 살찌는 거예요. 그걸 자유라고 해요. 그걸 구속이라고 사람들이 착각하는데 그게 진짜 자유에요.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빼앗기고 나보다 더 크고 나보다 더 지혜롭고 나보다 더 완벽한 존재에 의해 내 삶이 구속 되는 거. 완벽하게 구속되는 상태를 자유라 그래요. 여러분 맘대로 하는 게 자유 아니에요. 맘대로,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건 고 하고 싶은 거에 여러분이 묶여 있는 거예요. 그걸 구속이라고 하는 거예요. 자유는 하나님에게 나를 다 뺏기는 거예요. 그게 안식이에요. 그게 예배에요. 그게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라니까요.
근데 여자가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피조물의 자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처럼 되어보겠다고 원래의 위치를 이탈해버렸어요. 여자가.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여자가 나오는 거예요. 그걸 다시 여자에게 회복시켜주는 거예요. 거기에서 안식이 깨지고 예배가 깨지죠, 당연히. 그렇죠?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틀리 깨지는 거예요. 물론 다 상징적인 개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다른 게 아니라 그랬어요. 피조물이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하나님 대접해드리는 거. 그게 하나님 나라에요. 그게 안식이고 그게 예배란 말입니다.
여러분 죄라는 개념부터 여러분이 잘 가지고 계셔야 되는데, 죄라는 건, 인간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개념이 아니라 그랬어요. 죄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서 통용되는 개념입니다. 왜? 인간들, 하나님의 은혜가 배제된 인간들은 뭐에요? 그냥 네페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죠? 맞아요? 죽은 상태인데 그러면 움직이긴 하는데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존재, 그걸 뭐라 그래요? 좀비라 그러죠? 강시. 콩콩거리면서 뛰어다니는데 시체잖아요? 자, 좀비가 좀비에게 어떤 해코지를 한 걸 여러분은 죄라고 합니까? 강시끼리 막 싸워서 막 팔이 뚝뚝 떨어져나가고 눈알이 막 파이고 그랬어요, 강시끼리. 시체끼리 싸웠어요. 그래서 어떤 강시가 이겼어. 심지어 그냥 한 강시를 아주 늑실나게 패갖고 못 일어나게 만들었어요. 그러면 요 강시가 죄지은 거예요? 좀비들 사이에서는 죄라는 개념이 통용되질 않아요. 그럼 진짜 죄는 뭐에요? 피조물이 하나님을 살해하는 거예요. 그것만 죄에요. 좀비가 좀비 살해하는 건 죄라고 하지 않아요. 피조물이 하나님을 살해하는 걸 죄라 그래요. 근데 하나님을 살해한다, 그래서 칼 들고 하나님께 쫓아가서 심장을 찌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분께 내 전 존재를, 피조물은 전 존재를 하나님께 의존해야 되는데 내 전 존재를 의탁하지 않고 내가 뭔가 할 수 있다, 라고 하나님처럼 되어보겠다고 나서는 걸 하나님을 죽였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자기들의 가능성을 여전히 의지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실지로 죽이는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 살해거든요. 그게 죄에요. 그게 하나님 나라가 깨진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선악구조를 갖고 죄라는 걸 함부로 판단하시면 안 돼요. 죄는 인간이 하나님을 살해하는 행위 속에서 나오는 것만 죄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사건과 상황과 처지를 내가 다 해결하고 내가 다 감당하고 내가 이끌어가고 개척하겠다고 나서는 그게 하나님 살해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여러분이 처한 상황과 사건들 속에서, 처지 속에서 원통해하고 분해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원망스러워 하는 게 뭐에요? 하나님을 살해하는 거예요. 그분을 살아계신 존재로 인정 안 하는 거니까. 그걸 죄라 그래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열심히 종교행위를 하고 착한 행위를 했음에도 그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예수님이 이야기하신 거예요.
보세요. 여자가 하나님을 하나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했어요. 그게 죄라 그랬죠? 그 죄가 하나님 나라를 깨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하나님 나라를, 틀을 깬 거죠? 내가 하나님처럼 되어보겠다, 라고 피조물이 나선 그 상태가 하나님 나라가 깨진 상태란 말에요.
그래서 다시 인간들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으로 빠진 거예요. 없음의 상태로, 처음 자리로 다시 떨어진 거예요. 그 상태를 예레미야가 이렇게 표현하죠.
렘 4:22-23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똑같이 나오죠, 그죠? 창세기 1장 2절의 이야기와 똑같이. 이 죄인들과 죄악 된 세상의 현실이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고 있잖아요. 또 다시 틀이 없어졌고 또 다시 내용물이 없어졌어요. 왜? 틀이 없어졌으니까 그 틀 안에 들어갈 내용물이 당연히 없는 거죠. 전부 다 죽어야 돼요, 이제. 그걸 흑암이라고 해요. 어둠이라고 해요.
그렇게 또 다시 처음 자리로 돌아간 인간과 인간 세상의 결국은 사망이죠? 그건 형벌이라기보다는 타락한 피조물들의 처음 자리 확인이라고 하면 더 옳아요. 타락한 인간들의 처음 자리는 먼지에요. 먼지는 죽어 있는 존잽니다. 그 죽어 있는 존재들의 현실을 지옥이라는 단어로 표현해주는 거예요.
그럼 보세요. 하나님과 관계없는 죽어 있는 자들을 그 죽음의 상태에 내버려두는 게 하나님의 죕니까? 하나님의 잘못이에요? 근데 왜 누구는 지옥 보내고 누구는 천국 보내냐고 왜 따지고 드는 거예요? 도대체? 인간들이. 원래 죽어야할 것들을 죽음의 자리인 사망에다가, 지옥에다가 던져놓는다는데 왜 따지고 드냐고요? 고게 인본주의에요. 왜 나랑 상의 안 하냐는 거죠. 내가 보기에는 저 사람들 저렇게, 저렇게 지옥에다 던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게 인본주의인 것입니다. 그걸 죄라 그래요. 그걸 하나님 살해사건이라고 하는 거예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해주지 않으면 인간들과 인간들의 세상은 결국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는 영원한 죽음에 거하게 될 판이에요. 그게 모든 피조물의 처음자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세상에 새 언약이라는 걸 주세요. 새 언약. 성경에서 히브리사람들의 개념에서 새것이라는 뜻은 더 이상 새것이 없다는 뜻이거든요. 새것. 그러니까 새 하늘, 새 땅이라는 건 새 새 하늘은 없다는 거예요, 더 이상. 그거 보다 더 새것은 없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새 언약이라는 것은 그것 이상의 다른 언약이 없다는 뜻이거든요. 새 하늘, 새 땅, 새 언약, 새것, 새로운 피조물 다 마찬가지에요. 그게 완성의 자리라는 뜻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주셨어요. 새 언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과 지혜로 죽어야 할 자들 중에 얼마를 당신의 은혜를 쏟아 부어 살려내겠다, 라는 거예요. 아, 그럴 거면 진작 타락하지 못할 그런 완벽한 존재를 만드시지. 그래 알았어. 이제 내가 만들게. 그게 새 언약이에요. 절대 이제 타락할 수 없는 그런 존재 내가 새롭게 창조할게. 이게 새 언약이에요. 이해 가세요?
왜 그렇게 옛 언약과 새 언약이 필요했는지는 제가 설교시간마다 누차 설명해드렸으니까 더 이상 설명 안 해요 되겠죠. 그죠? 그렇게 인간의 타락으로 또 다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되어버린 이 세상의 현실 속으로 하나님 나라의 새 언약이 떨어져서 새로운 창조가 약속으로 주어져요. 그 새 창조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창조란 말에요. 그런데 그 새 창조를 어떻게 완성해내시기로 한 거예요?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죽이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선택한 백성들의 연약함과 무력함과 어두움을 전부 아들 속에 넣어서 아들을 죽이시고 아들의 그 완전함을 그들에게 또 전가시키는 그 방법으로 우리를 살리기로 했단 말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무엇을 지금 다시 회복시키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키는 거죠? 하나님 나라의 틀은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세워졌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음으로 회복해야할 하나님 나라는 며칠이어야 되는 거예요? 사흘이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흘 동안 무덤 속에 계시는 거예요. 나흘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꼭 사흘이어야 돼요.
그렇게 사흘을 무덤 속에 머무시던 주님께서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무덤을 열고 부활하셨어요.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허물었던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완전히 회복이 된 거죠? 그래서 또 다시 새 안식이 찾아왔고 이제 절대 흔들릴 수 없는 새 안식, 또 새 예배가, 신령과 진리로 드려지게 되는 새 예배의 현실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게 되는 거예요. 이건 인제 변할 수 없어요. 그리고 영적으로 그건 이미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는 거죠? 구약이 파괴되고 신약이 성취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지금까지 안식일을 지키고 있는 건? 여전히 구약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그거는 신약에게 먹혀야 되는 거예요. 신약으로 지향되지 않는 구약은, 사도바울이 뭐라 그래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법이라 그러잖아요? 근데 여전히 안식일을 지켜요?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그날을 새로운 안식일, 즉 영원히 깨지지 않을 그러한 안식이 완성된 날. 구약의 안식일 개념이 아니에요. 그러한 안식일로 지키는 거고 그 날에 하나님 나라의 작은 모형을 교회의 모임 속에서 경험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예배의 현장은 안식과 예배와 하나님 나라가 두루 경험이 되는 현장인 거예요. 따라서 구약의 안식일은 깨어져야 되는 거고 신약의 안식일로 대체되어야 되는 거예요.
구약의 안식일, 즉 율법은 선악과 시험이죠? 율법은. 우리 인간은 그 선악과 시험에서 스스로의 힘을 발휘하여 정답을 내어놓을 수가 없는 존재잖아요. 그래서 선악과 시험을 통과하여 어, 안 되는구나? 그때 생명나무가 선악과 시험 속에 들어있는 우리를 덮쳐서 생명나무가 선악과를 먹어버리고 은혜로 뚫고 들어와 버리는 거예요. 우리에게. 그러므로 구약의 안식일은 모든 율법이 그러하듯이 엄밀히 말해 지키라고 준 게 아니라 너희들은 왜 온전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없는지를 알아먹으라고 준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은혜로 달려가라고.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 바로 다음날 진짜 하나님이 이룩하신 신약의 안식일이 구약의 안식일을 밀어버리고, 덮쳐버리고 그 다음날 서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회복이 될 것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에서 모형으로 나타나죠? 어떻게 나타나요?
마 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이 떠나가시자 휘장이 찢어져요. 휘장은 어떤 휘장이라 그랬어요?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죠? 그 휘장 안으로는 일 년에 대 제사장이 딱 한번밖에 못 들어가요. 완벽한 결례를 행하고 난 다음에 딱 한번. 그런데 휘장이 찢어졌다는 건? 이제 그 지성소, 시은좌, 속죄소 속으로 아무나 들어갈 수 있게 된 거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모든 자들이 마구 드나들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아무 때나 무릎 꿇고 하나님 부르는 거예요. 그게 지성소거든요. 하나님과 내가 대화하는 곳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아무 때나, 신령과 진리로, 성령 안에서. 어떤 장소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무슨 제물 갖고 와가지고 쪼개고 태우고 이러지 않아도 된단 말이에요, 이제는요.
이제 그렇게 해서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던 휘장이 찢어진 거고 그건 곧 창세기 첫째 날에 궁창이 찢어지고 하늘과 땅이 휘장에 의해 갈라져 있었지만 이제 하늘과 땅이 연합되어지는 은혜의 현실이 이루어졌다는 뜻이기도 해요. 창세기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은 언약을 담고 있는 거라 그랬죠? 그러니까 열심히 복습 안 한 사람들은 끝까지 설교 못 알아들어요. 아셨죠? 처음 오신 분들은 처음 설교부터 다 들으셔야 돼요. 그래야 여러분이 겨우 한 50%는 알아들을 수 있어요. 아니면 절대 못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졌다고 그러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졌다는 건 이 첫째 세상, 첫 번째 창조를 부정해버리는 거예요. 흔들어버리는 거예요. 바위가 터지고. 이 첫 째 세상은 이제 흔들려지고 새 세상이 왔다는 거예요.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자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단어 자체가 새로운 창조가 또 일어났다는 뜻 아닙니까? 새로운 피조물이 누구에요? 여러분이에요. 어떻게 여러분이 새로운 피조물이 됐어요? 옛 피조물이었잖아요. 우린 아담 속에서 태어났잖아요? 어떻게 새로운 피조물이 됐죠? 새 창조가 일어난 거예요.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분명 전도서 기자는, 구약의 전도서 기자는 해 아래 새것 없다 그랬는데 신약에 와서 ‘새것’이 나타났단 말에요. 새 창조가 일어났단 말입니다. 그게 우리에요.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 하나님이 다 낳으셨단 말에요. 다 만드셨단 말에요. 새 창조로 그래서 옛 창조가 흔들리는 거예요. 땅과 바위를 흔들어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무덤이 열리고 성도들이, 잠자던 성도들이 많이 일어나서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요. 생각해보세요. 한 이백 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가 그 죽은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살아났는지 이십 대 청년으로 살아났는지 아무도 몰라요. 그 할아버지가 와갖고 내가 이백 년 전에 죽은 니네 고조할아버지다, 이렇게 찾아왔다고 생각해보세요. ㅎㅎ. 여러분 이 일이 역사적으로 일어난 거예요. 그들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와서 몇 년을 더 그 성에서 살았는지, 아니면 곧 하나님 나라로 승천을 했는지 그건 아무도 몰라요. 그러나 왜 이 일이 일어났냐면, 예수님이 부활을 하시자,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잖아요? 고린도서에 나오죠? 부활의 첫 열매라는 건 그 뒤에 오는 나중 열매들이 이 첫 열매를 따라 줄줄이 하나님께 드려진다, 라는 이야기거든요. 그게 레위기의 율법이에요. 첫 이삭 드리는 날의 율법. 조금 이따 제가 찾아드릴게요.
그러니까 진짜로 첫 열매가, 예수님이 부활을 하시자 성도가 진짜 무덤을 열고 다음 열매들로 줄줄이 나오더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은 종말에 일어날 그 성도의 부활을 역사 속에서 한번 꽝하고 보여주신 거예요. 야, 우리도 그런 거 한번 봤으면 왔다일 텐데, 예수 잘 믿을 텐데. 오늘 설교 내용이 그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 한 오백 명 나타나도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은 자는 못 믿는다,에요. 오늘 설교 내용이.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잖아요? 죽었다가 살아난 이가 실지로 살아나서 야, 하나님 나라 있더라. 니네들 예수 믿어라, 라고 얘기해도 모세와 선지자, 성경은 안 믿는 자, 믿음이 없는 자는 절대 못 돌아온다, 이야기하잖아요? 근데 우린 자꾸 누가 무덤 열고 살아나면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해요. 못 믿어요! 예수님이 살아났는데도 안 믿었다니까요. 제자들도 안 믿었어요. 근데 뭘 보여주면 믿을 수 있다, 라고 착각들 하는 거예요. 믿음은 보는 것에서 오지 않아요. 듣는 것으로도 오지 않아요. 아니 들음에서 난다 그랬는데요? 예, 성령이 들려주시는 그 들음에서만 나요. 무조건 듣는다고 다 신앙으로 들어가지 못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사망이 죽은 거예요. John owen의 책 있다 그랬죠? Death of death in death of Christ. 예수의 죽음에게 먹힌 죽음. 예수의 죽음 안에서 죽은 죽음. 우리의 죽음이 예수의 죽음 안에서 죽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무덤이 열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다 뭐냐고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전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준 거예요?
하나님 나라! 영생! 구원을 선물한 거예요. 그것 말고 다른 거 없어요. 그것 말고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서 우리에게 다른 유익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 현장에 그 일이 일어났어야 돼요. 로마 군병들의 은이가 금이로 다 변했어야 되고 금가루가 막 떨어져야 돼. 천정에서. 요즘 그런 거 많이 하죠? 그런 일 없었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 영생, 구원 그거 이외에 없어요. 근데 그건 눈에 보이지도 않아. 그래서 믿음이라는 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이에요. 유일한 복. 여자에 의해서 허물어진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에 힘입어서, 최초의 부활의 목격자가 누구에요? 여자란 말에요. 여자에게 다시 무상으로 주어지는 거. 최초에 에덴동산에서는 여자가 남자에게 버림받았습니다. 남자가 오히려 여자에게 죄를 다 뒤집어씌우죠? 저 여자가 그랬다고. 지도 먹었으면서. 그래서 거기에 일부러 동산 지기라는 단어가 나오는 거고 동산이란 단어가 나오는 거예요. 근데 두 번째 동산에서의 마지막 아담은 죽어야 할 여자, 막달라 마리아, 그 창녀였던 마리아, 죽어야 할 죄인인데 그 여자의 죽음을 가져가서 대신 죽으시고 살아나셔서 이 여자를 살려내시는 거예요. 자기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첫 번째 동산에서의 아담의 실패를 두 번째 동산에서 마지막 아담이 성취해내시는 거예요. 그게 복이에요, 우리에게 주어진 복. 그 여자가 바로 나라니까요. 교회! 그래서 교회를 어린 양의 신부라고 하는 거예요. 여자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마리아가 우리란 말입니다. 마라, 마리아, 미리암. 다 똑같은 말이라 그랬죠? 쓰다, 괴롭다, 고통스럽다. 그 저주의 현실에서 우리를 나오미로 뒤집어엎어버리는 거예요. 바꾸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게 십자가와 부활인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울 일이 아니라 기뻐 뛰며 춤을 추어야할 일인 거잖아요? 이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당신을 쫓던 무리들에게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수차례 반복하여 말씀하셨죠? 그런데 안식 후 첫 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날에 예수님의 최측근 중 한 사람인 마리아가, 여자가 예수님의 무덤에 와서는 예수님이 안 계신 것을 보고 슬퍼하며 우는 거예요. 굉장히 기특한 건가요? 잘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어떤 상황이면 안 울었을까요? 시체가 거기 있으면 안 울었을까요? 생각을 해보세요. 그 운 게 기특하다고 그냥 생각만 하지 마시고. 그러면 마리아가 안 울라면 어떻게 돼야 돼요? 시체가 거기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마리아가 운 건, 잘 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지금 당신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서 말씀대로 죽으신 후에 말씀대로 살아나신 거예요. 근데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통곡을 하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통곡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한계란 말입니다. 이게 구약의 한계인 거예요. 마리아가 구약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오죽하면 천사가 나타나서 너 왜 우니? 라고 달래줘요. 울지 마! 란 뜻이에요. 우는 이유를 말해 봐, 가 아니라 울지 마, 이건 울 일이 아냐, 라고 천사가 달래준단 말입니다. 그리고는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당신 말씀대로 살아나신 것이라고 설명을 해줘요. 병행구절이 있는 누가복음으로 가서 확인해보겠습니다.
눅 24:1-7
안식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자들이 [아, 여자들 무지 나와요.ㅎ]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그렇게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 왜 울어? 왜 울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당신을 쫓던 이들에게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 곳, 몇 군데만 제가 찾아드릴게요.
마 16:21-22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님이 지금 죽었다가 살아나서 너희들에게 정말 큰 선물을 주시겠다고 하는데 인간은 말리죠? 이게 구약이에요. 안 돼요, 죽지 마세요! 구약. 살아서 날 도와달라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예수님은 죽어서 은닉되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큰 선물 준다고 하는데 인간들은, 구약에 속해 있는 자들은 살아서 나에게 눈에 보이는 유익을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구약이에요.
마 17:22-23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또 반복하세요. 바로 한 장 뒤에.
마 20:17-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변화산에서 내려오다가도 또 말씀하시죠? 난 죽어야 돼.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야 돼. 그러니까 수없이 말씀하신 거예요.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그런데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여자들이 무덤에 갔다가 빈 것을 보고, 그리고 천사들 만나고 막 달려와 가지고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부활하셨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뭐라 그랬어요? 누군가 하나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진짜 기다리고 있었다면, 진짜야? 야, 일어났구나! 그 일이 일어났구나! 그랬을 거라고요. 근데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뭐라 그랬어요? 헛소리 하지 마. 그랬어요. 허탄한 소리가 헛소리란 뜻이라고요. 왜 헛소리 하고 있어? 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아무도 안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죠?
눅 24:8-11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 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이게 허탄한 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레로스거든요. 헛소리, 잡담 이런 뜻이에요. 시끄러! 시끄러워. 제자들 중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인간은 하나도 없었던 거예요.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시간 선 속에서의 부활은 이 세대의 마지막, 오는 세대의 시작에야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유대인들의 시간 선을 여러분이 잘 아셔야 되는데 유대인들의 시간 선은 이 세대와 이 세대가 끝나고 나면 오는 세대가 온다고 그들은 믿어요. 그러니까 이 세대와 이 세대가 끝나고 오는 세대로 구별이 되는데 이 세상이 끝나고 또 다른 세대, 세상의 개념이 없어요. 그래서 세대라고 그래요. Age라고 하거든요. 다른 세상이 올 때 비로소 부활이 온다고 믿었어요. 그들도 부활을 믿었단 말입니다. 사두개인들만 안 믿었어요. 나머지는 전부 부활을 믿었어요. 근데 언제 그 부활이 일어날 거라고 믿었냐면 이 세상, 이 세대가 다 끝나고 오는 세대가 열릴 때 부활이 일어날 거라고 믿었단 말에요. 그래서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도 그래요, 저도 부활을 믿어요. 라고 이야기를 했던 거예요.
요 11:23-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이게 에스카테, 에스카토스가 종말이잖아요, 그죠? 에스카테 헤메라야, 종말의 날에. 그러니까 이 세대의 마지막 날에 부활이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셨는데도 이 세상은 여전히 건재했잖아요? 잠깐 어두워졌다가 금방 환해졌어요. 그리고 일상은 그대로 돌아가요. 해는 다시 뜨고 달은 다시 떠요. 이 세대가 끝나지 않았단 말에요. 종말은커녕 예수님을 죽인 이 세대가 버젓이 활기차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단 말에요.
유대교의 시간 선은 그러했지만 기독교의 시간 선은 유대교의 시간 선과 완전히 달라요. 기독교의 시간 선은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점으로 해서 오는 세대가 나중에, 오는 세대가 이 세대의 중간으로 뚫고 들어와 버린 거예요. 그래서 요 시점부터 겹쳐지는 거예요. 오버랩 되어 있는 거. 그래서 여러분은 이 세대 속에서 오는 세대를 사는 이상한 사람들이 된 거예요. 굉장히 비현실적인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비현실적인 소리를 들어야 돼요. 이 세대 속에서 오는 세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보세요, 유대인의 시간 선에서는 아직 오는 세대가 안 왔다고 믿어요. 왜? 이 세상이 건재하거든요. 그러니까 부활을 믿을 수 없는 거예요. 부활은 오는 세대 속에서 일어난다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어때요? 오는 세대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 땅에 뚫고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이 침노해 들어온 거예요, 우리를. 우리가 천국을 침노하는 게 아니라. 그게 수동태로 번역이 돼갖고 자꾸 헷갈리는데 그걸 Deponent 동사라고 하거든요. 수동태인데 능동으로 번역해야 되는 동사가 있어요, 헬라어에는. 그게 Deponent 동산데 거기서 쓰인 게 Deponent에요. 그러니까 천국이 뚫고 들어온 거지 우리가 천국을 침노하는 거 아니란 말입니다. 천국이 우리를 침노해 들어왔어요. 언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그 하나님 나라를 살아요. 그런데 개뿔이나 뭐가 하나님 나라가 이따위냐? 그런 생각 안 드세요? 하나님 나라는 되게 좋은 거라메? 무슨 개뿔이나 하나님 나라가 이 따위야? 맨날 속고 당하고 가난하고.
하나님 나라는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이 풍성하게 구비되어 있는 그런 곳을 하나님 나라라고 하지 않아요. 조금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복하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 있는 그 나라가 하나님 나라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코가 꿰어서 끌려가고 있는 중이거든요. 완성의 자리로. 그걸 하나님 나라를 산다, 라고 하는 거예요. 뭐 대단히 기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에게 주어진 자유가 일단 여러분에게는 구속으로 체감이 돼요.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은 이 땅에서 여러분에게 빈곤함으로 올 수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에 그런 말 나오잖아요? 내가 마귀를 묶어놓고 그의 세간을 늑탈하여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 그러죠. 그죠? 마귀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그 상태. 그래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십자가의 삶의 원리 속으로 계속 가기 싫어 죽겠는데 들어가게 되는 그 상태를 하나님 나라를 산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대단한 거 기대하셨죠, 이 세상에서? 뭔가 평안하고 기쁘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아 너무 힘들어. 너무 힘들어야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의 비전과 야망과 뜻이 계속 무참하게 폭격당하거든요. 그 비전과 야망과 뜻은 우리의 일상에서 그대로 실현이 되는데 그 일상이 폭격을 당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힘들어요? 그게 하나님 나라란 말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죄가, 어두움이, 더러움이 싹 사라진 상태에서 하나님에게 온전히 끌려가는 그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할까요?
온전한 선, 내가 이제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서 자꾸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그 싸움을 안 해도 돼요. 그것 때문에 괴로운 거거든요, 지금. 나는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지금 자꾸 뭔가를 판단하고 있어요. 이 세상의 선악구조로 뭔갈 판단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거 아니라고 자꾸 딴 데로 끌고 가니까 지금 괴로운 거란 말에요. 지금 여러분이 괴롭고 힘든 건 여러분이 원하는 어떤 게 있는데 그게 안 들어져서 힘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그 반발하는 마음이 싹 죽어버린단 말에요. 옛 사람의 죽음. 그 상태에서 최고의 선, 선의 근원이신 그분이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그 지점으로 나를 끌고 갈 때 그 삶이 얼마나 행복하겠냐고요? 여러분은 그 지점으로 끌려가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시자마자 무덤이 열리고 죽어 있던 성도들이 벌떡 일어나서 성 안에 막 걸어 다니는 거예요.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오는 세대가 이 세대에 지금 겹쳐 들어왔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죠? 물론 그건 실제 사건임과 동시에 하나의 상징이에요. 성경이 그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성경의 독자들인 성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오는 세대가 이 세대 안으로 뚫고 들어와서 부활의 첫 열매가 맺혀졌음과 그 첫 열매의 열납으로 말미암는 나머지 열매들의 필연적 열납의 현실을 보여주는 거예요. 왜? 첫 이삭이 드려지면 합격이 되거든요. KS마크, 요즘은 ‘품’인가요? 모르겠어요. 한국 떠난 지가 오래 돼서. 그거 맡을 때 사과를 다 따가지고 가요? 네? 사과가 과수원에서 한 오만 개 나오는데 그 오만 개를 일일이 하나하나 다 검사 맡아야 돼요? 몇 개 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합격이면 나머지도 합격이 되는 것처럼 첫 열매가 하나님 앞에 제물로 열납이 되자 어, 합격! 그 첫 열매가 품어 안고 있는 모든 다른 존재가 쭉 따라 올라가는 거예요. 천국으로.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그 현실을 이렇게 표현하죠.
고전 15:20-24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우리가 ‘붙은 자’에요. 잘난 척 하지들 마세요, 그러니까. 붙어서 겨우 구원 받았으면서]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므로 이 세대 속에서 오는 세대를 여신 거예요. 그리고 첫 열매가 되어서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해서 그 첫 열매에 속한 다음 열매들도 역시 부활에 참여하게 된 것임을 확증하신 거예요. 그 이야기가 레위기에 나와요.
레 23:9-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고스톱 생각하지 마세요. ㅎㅎ]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찌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첫 이삭 드리는 날에 대한 규례인데요. 첫 이삭 드리는 날은 정확하게 유월절 3일 후에요. 예수님이 유월절에 죽으시고 삼일 후에 부활하셨죠? 첫 이삭이 그때 드려지는 거예요. 하나님께 온전히 그게 드려지면 나머지가 다 합격이 되는 거예요. 이건 하나님께 다 바쳐진 거야, 라고 쳐지는 거죠. 그게 바쳐지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 열납이 온전히 되지 않았을 때 그걸 먹으면 죄에요. 큰일 나는 거예요, 그거는. 부정한 자가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보세요. 예수님이 첫 열매로 부활하셨어요. 이제 승천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열납이 되었다, 라는 인정을 받아야 돼요. 물론 상징이지만. 근데 승천도 안 했는데 마리아가 붙들라 그랬죠? 먹으면 안 된다 그랬어요. 그래서 못 만지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 나라에 올라갔다가,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합격 판정을 받아야 너희들은 비로소 그때 나를 가질 수 있다, 라는 뜻이에요, 그게. 그래서 못 만지는 거죠. 바로 그 현실이 오늘 본문에 그대로 그려지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첫 이삭 드리는 날에 첫 열매로 하나님께 드려져요. 바로 지금 예수님이 부활한 그 날이 첫 이삭 드리는 날이었어요. 고때 드려진단 말입니다. 근데 아직 승천을 하지 않으신 상태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 그분의 부활이 적용이 안 되는 거예요, 아직까지.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첫 이삭 드리는 날에 첫 열매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형국으로 인한 예수님의 부활은 첫 이삭인 예수님에게 속한 나머지 이삭들이 전부 하나님께 드려지게 되는 연합의 교리를 담고 있는 거죠. 그게 Union Christ에요. 첫 열매로, 첫 이삭으로 예수님이 드려지고 거기에 그냥 우리는 연합되어서, 접붙임 받아서 거저 구원되는 거예요.
제가 지난주에는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를 예로 들어서 선악과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자는 절대 생명나무를 만질 수 없다. 그룹과 화염검으로 막혀있었으니까. 고거 갖고 설명해드렸죠? 똑같은 얘기에요. 선악과의 시험은 예수만이 통과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그 예수가 이 선악과 시험을 통과했다는 것을 알려면 성령이 내려와야 되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여 성령이 내려오셔야 아, 예수님이 우리의 선악과 시험을 다 통과하시고 우리에게 생명나무를 거저 주신 거구나! 알게 되니까. 그전까지는 생명나무를 못 만지는 거죠? 똑같은 이야기란 말에요. 예수님이 첫 열매로 하나님께 드려지고, 열납이 온전히 되어져야 마리아가, 우리에요, 마리아는. 마라들, 이 세상의 마라들. 그 마라들이 예수님을 내 것으로 연합되어 가질 수 있는 거. 바로 그러한 연유에서 예수님 무덤 안에 천사 둘이 있었던 거예요. 오늘 본문 11절과 12절을 보세요.
요 20:11-12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았더라
여러분 지금 이 구절을 잃으시면서 조금 이상한 생각이 안 드세요? 예수님은 지금 그 자리에 없으세요. 그리고 그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만 놓여있는 상태거든요. 근데 어떻게 발쪽, 머리 쪽이 어떤 쪽인지 어떻게 알고 이렇게 썼을까요? 여러분?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가 그 자리에 고대로 마치 몸이 기체가 빠져나간 것처럼 쏙 빠져나간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어, 여기가 머리 쪽이고 여기가 발쪽이구나? 를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거예요. 머리 쪽엔 수건이 있었거든요. 거기서 수건이 개켜있었다 그러죠? 예수님이 쑥 빠져나와서 어이구 얼굴에 수건은 내가 이거 또 쓰고 있었네? 그러고 이렇게 벗어서 개고 나온 게 아니라, 그 개키다, 라는 단어 자체가 감싸다, 라는 뜻이거든요. 감싸 있었던 게 내용물이 쑥 빠짐으로 폭 주저앉은 상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개켜있다, 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세마포로 꽁꽁, 염하는 거 어떻게 하는지 아시죠? 꽁꽁 싸는 거예요, 세마포로. 싸고 얼굴을 수건으로 감아놨단 말에요. 그런데 마치 기체가 빠져나가듯 몸은 쏙 빠져 나가고 그 예수님을 쌌던 수건과 세마포만 그 자리에 고대로 남아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거죠.
유대인들이 뭐 도적설, 기절설 여러 가지 학설들을 많이 내놨죠? 예수님의 시체 누가 훔쳐간 거다. 아니다, 예수님이 잠깐 기절했다가 깨보니까 무덤 속이라서 다시 기어 나와 갖고 저 유럽 어딘가에 다서 누구랑, 막달라 마리아랑 결혼해서 뭐 자식을 낳았다고? 그런 논리들을 많이 펴잖아요?
여러분, 옆구리를 찔리고 그리고 십자가에 하루 종일 매어있던 분이 그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굴리고 그 앞에 있는 군병들을 피해서 도망갈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황급히 도망가시는 분이 시마포를 다 풀은 다음에 고대로, 자기가 쌌던 대로 그렇게 싸서 고 자리에 놓고, 수건도 고 자리에 놓고 벌거벗고 도망갔단 말에요? 누가 훔쳐간 거라는 그 도적설도 그래요. 훔쳐갈라면 밖에서 군병들이 지키고 있는데요. 싼 채로 짊어지고 냅다 뛰어야지. 그걸 전부 벗겨서 ㅎㅎ, 그 자리에 갖다 놓고 수건도 그 자리에다가 그냥 잘 이렇게 개놓고 그리고 알몸만 가지고 도망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한 거다, 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요런 단어들을 쓰는 거예요. 그 자리에 폭 주저앉아 있는 거예요, 세마포가.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에, 머리 쪽 발끝에 천사가 둘이 딱 마주보고 서 있었어요. 어디서 봤어요? 이런 그림? 법궤위에서 봤잖아요, 그죠? 시은좌. 시은좌가 뭐에요? 은혜가 베풀어지는 자리. 그 자리를 다른 말로 속죄소라고 하죠? 죄가 사해지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의 현장에 그룹이 둘이 딱 마주 보고 앉아 있어요. 바로 여기에서 이렇게 속죄가 일어난다, 라는 거예요. 그 안에 예수가 함께 계셨습니다. 돌아보니까 예수님이 계셨었잖아요? 거기가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거예요. 천사들과 예수가 계신 곳. 그러나 그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무덤 문을 열고 그 무덤 문 너머를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무덤 속으로 열심히 들어가셔야 되는 거예요. 옛 사람의 죽음, 옛 사람의 무덤 속으로 한발 한발 가셔야 돼요. 그 무덤을 통과해야 여러분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몸을 갖고 살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성도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는 거예요. 죽는 게 유익함이죠. 그 죽음의 문을 딱 열자마자 영원한 나라가 날 기다리고 있으니까. 근데 성도라는 사람들이 그걸 두려워한다니까요.
그 이야기가 출애굽기 25잘 7절에 나오는데 그거 잠깐만 읽어드리고 갈게요.
출 25:17-19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한 그룹은 이 끝에, -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하게 할찌며
끝이라는 단어가 똑같이 나오죠? 그죠? 끝에 그룹이 서 있는 거예요, 천사가 서 있는 거예요. 네, 그런 거예요! 실은 예수님의 시신이 놓여있던 자리,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의 양쪽에 천사가 앉아있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할 하심으로 인해 일어난 하나님의 백성들의 속죄의 현실이 요 그림 속에서 선포되고 있어요. 그런데 마리아가 계속 울고 있단 말입니다. 이게 문제인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인제 믿음으로 그걸 다 알아요, 그 현실을. 우린 영화를 미리 다 본 거예요. 그죠? 다 봤어요. 근데 이 여자가 지금 괜히 울고 있는 거죠? 절대 여기서 울 일이 아닌 거예요. 기뻐 뛰며 찬송을 해야 될 자린데 울고 있단 말에요. 제가 가끔 여러분의 인생을 볼 때 그런 기분이 들어요. 지금 울 때가 아닌데 가슴을 치며 울고 있어. 제가 보기엔 절대 울 때가 아니에요. 근데 가슴을 치며 울고 있어요. 그리고 목사님 어떻게 해요? 나 죽고 싶어요. 나 내일 목매달 거야, 말리지 마. 막 이러고. 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이라면서요? 근데 왜 눈에 보이는 현실을 보고, 마리아처럼, 그 미련한 마리아처럼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 거기서 펼쳐지고 있는데 왜 거기서 울고 있냐고요? 여러분 지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면서요? 오는 세대에서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여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다메 왜 자기가 원하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거기서 울고 있냐고요? 바보들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나오미로 지금 바꿔놨다고 그러는데 아니에요, 난 아직도 마리아에요. 자기가 우기고 있는 거예요. 아냐, 내가 죽었다 살아났다니까.
그렇게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자기의 감정대로 통곡을 하고 있는 그 마리아를 때때로 우리가 굉장히 기특하게 보기도 해요.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놓여 있고 자신이 죽은 예수님의 시신에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걸 보람이요, 감사요, 애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그 수준을 뭐라 그러죠? 우리가? 유대주의라고 그래요. 그걸 율법주의라고 해요. 그게 인본주의인 거예요. 내가 예수님께 뭔갈 해드리고 싶다는 거예요. 근데 없어서 섭섭하다는 거예요. 우리 주일날 배웠잖아요. 그 염소들. 아니, 내 앞에 거지로 나타나지도 않았으면서 왜 나보고 안 했다 그래요? 이거거든요. 나타나기만 했으면 내가 다 했을 텐데. 아이 안타깝다는 거죠? 그거 못하고 와서. 딴 건 다 했는데 고거만 못하고 왔다는 거죠? 고걸 유대주의라 그래요. 그게 바리새인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마리아는 무덤이 빈 것을 보고 부활을 믿었다, 그래요. 그리고 제자들도 달려와서 보고 부활을 믿었다, 그러죠? 오늘 본문에 보면? 믿었다 그래요. 근데 고 밑에 굉장히 재밌는 말이 나와요. 한번 보고 가죠. 본문 8절.
요 20:8-10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뭘 믿은 거예요? 도대체?]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각자 집으로 그냥 가버렸어요. 믿었다메? 그냥 집으로 가버렸어요. 그리고 성경이 뭘 부연설명 하냐면, 그들이 아직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라는 의미가 뭔지 모르고 있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뭔가를 보고 내가 이건 믿는다! 라고 내 의지를 발동하여 나는 믿어, 나는 확신해, 라고 하는 것, 그거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구원의 확신 마찬가지에요. 내가 자꾸 구원의 확신을 내가 가지려고 하는데 여러분 그거 큰 오산이에요. 누가복음 24장에 보면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손도 보여주시고 옆구리도 보여주시고 손도 넣어보라 그래요. 그리고는 그래도 못 믿을까봐 생선까지 드세요. 그리고 ‘나는 영혼이 아냐, 나는 부활한 몸이야, 난 살도 있고 피도 있다, 만져봐’ 만지게까지 했단 말이죠. 제자들이 만졌습니다. 그리고 여드레 후에 도마에게 안 보여줬다고 또 나타났어요. ‘도마야, 어디 갔다 왔니? 날 봐. 옆구리에 손 좀 한번 넣어볼래? 옆구리가 뻥 뚫렸어요. 손을 넣어봤단 말입니다. 제자들이 또 봤어요, 그거. 그리고 사십일을 수시로 나타나셨어요. 그리고 한 번에 오백 여 형제에게도 나타났어요, 예수님이. 근데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베드로가 나 고기 잡으러 간다, 그랬더니 머리 긁적이면서 다 쫓아갔잖아요. 네?
보세요. 여러분이 예수님이 여러분 눈앞에 나타나면 여러분이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자꾸들 이야기들 하시는데. 그래요, 예수님이 눈앞에 나타나도 고기 잡으러 가는 인간들이 인간이에요. 그런데 무슨 기적을 보고 여러분이 예수를 믿겠다는 것입니까? 어떤 기적이 여러분을 신앙 안으로 끌어 들어올 수 있을 거 같애요? 착각들 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나타나서 옆구리에 손까지 넣어줬는데도 고기 잡으러 가는 인간들이에요. 그리고 예수님 승천하실 때 와갖고 예수님, 그냥 올라가시면 어떻게 해요? 아 이 땝니까? 참? 요 때가 이스라엘을 회복할 땝니까? 왜? 영의정 돼야 되거든요, 내가. 좌의정, 우의정 돼야 되는데 예수님 그냥 가면 어뜩하냐고? 그게 뭘 보여주는 거예요?
너희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또 너희들이 들어 지식으로 갖고 있는 것으로 절대로 예수 못 믿는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시죠? 그래갖고 이십오 리를 같이 갑니다. 이십오 리 면은 10Km죠? 10km는 꽤 먼 거예요. 계속 같이 가는데 제자들이 뭐라 그러냐면은 ‘아이, 그가 이스라엘 나라를 구속하실 자로 바랬다’ 라고 이야기해요. 그 바라다, 라는 말이 희망이란 뜻이거든요. 이스라엘 나라, 다윗의 왕국으로 회복해주실 것을 내가 희망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근데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들은 제자들이에요. 듣고도 여전히 이 세상눈에 보이는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세상의 가치와 힘, 그것을 공급해주는 분이 메시아다, 라는 그 사상. 민속 메시아사상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계속 듣다가 너무 답답하시니까 모세와 시편을 비롯하여 모든 성경에 자기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설명해줬다, 그래요. 그러니까 구약성경 전체가 누구에 대해 기록돼 있는 거예요? 예수에 대해서. 욥처럼 무슨 뭐 고난을 열심히 이기면은 나중에 열배로 튀겨준다더라. 신명기 28장,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와도 복을 받고. 이런 거를 여러분이 똑 떼서 적용하시면 안 돼요. 공식처럼. 구약은 전부 예수의 필연성, 십자가의 필연성을 설명하는 거거든요.
보세요.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땐 제자들에게 희망이 있었어요. ‘바랬더라’ 그러잖아요? 근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그러면 그들에게 이제 진짜 소망이 이뤄진 거거든요. 하나님 나라가 주어진 건데 소망이 주어지게 되니까 그들의 희망이 작살나는 거예요. 내가 이스라엘 나라를 우리 주님이 회복할 걸 바랐는데 그분이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희망이 작살났다. 그런데 그 이면에 있는 그 소망이 그를 덮고 있는 모습을 우린 보잖아요? 근데 왜 여러분의 삶의 현실에서는 그걸 못 보냔 말에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 희망이 자꾸 폭격을 당하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이 여러분을 지금 점령해갖고 있는 중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어요. 그리고 은닉되어 계셔야 돼요. 여러분 눈에 보이면 안 돼요. 근데 눈에 보이게 해달라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도와달라고 계속 울고 계시지 않습니까? 기도하면서 통곡하는 주된 이유가 뭐에요? 눈에 보이는 거 나에게 안 줘서 그러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그렇게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서 설명해주자 그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래요. 예수님을 봤을 때도 몰랐어요. 만졌을 때도 몰랐어요. 근데 예수님이 떡을 떼어서 주고,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거잖아요, 몸이 그들에게 먹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게 해주셨어요. 그랬더니 눈이 딱 뜨여져서 어, 예수님이네? 알아봤어요. 그 즉시 사라지시는 거예요. 왠지 아세요? 신앙이라는 건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이 눈이 뜨이자마자 사라지는 거예요. 구약 때까지는 예수님이 나타나세요. 기적으로 나타나세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까지는 구약이에요. 기적이 많이 일어나야 돼요. 그러나 성령이 오시고 믿음이 왔잖아요? 믿음은 보이지 않은 걸 실체로 받아들이는 거라면서요? 그럼 내 안에 믿음이 왔다, 라는 증거가 뭐에요? 하나님, 예수가 은닉되어서 부활해서 없어졌는데 나에게 그분이 이룬 형광의 현실이 보여야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현실 속에서 예수가 안 보이고 예수가 가시적으로 여러분을 안 돕는다할지라도 여러분이 울어야 돼요? 안 울어야 돼요? 안 울어야 되는데 왜 울고 있느냔 말에요. 말은 잘해, 아주 그냥. 대답은 또박또박 잘하시는데 삶 속에서 그게 안 나타나잖아요?
여러분 예수님은 살아계세요. 안 죽었다니까요. 근데 왜 예수님이 죽어 있는 것처럼 사세요? 살아서 여러분 안으로 지금 뚫고 들어와서 은닉되어 있는 상태에서 여러분을 끌고 계세요. 그러면 지금 여러분의 현실이 안 보이는 그분이, 살아계셔서 안 보이는 그분이 죽었으면 보여야 돼요. 근데 살아계시기 때문에 안 보여요. 지금은 믿음의 시대이기 때문에. 오는 세대거든요. 그게 나중에, 이제 종말의 때에 이 지금은 안 보이는 그리고 지금 오는 세대와 이 세대와 섞여 있는 그 하나님 나라가 나중에 극치, 종말에 때에 극치에 이를 거예요. 그때 확 드러나는 거예요. 지금은 아니라니까요. 그러니까 울면 안 돼요. 네? ㅎ, 울면 안 돼. 산타할아버지가 우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안 주신 다잖아요.
여러분 신앙은 다른 종교인들처럼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얻어내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사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모르니까 그냥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라도 나를 위로 하려고 자꾸들 그러는 건데. 그러니까 말씀을 배우셔야죠. 천사들이 뭐라 그래요? 눈으로 예수님을 봤는데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너희들에게 하셨던 그 말씀을 다시 생각하라고 그러잖아요? 그리고 예수님도 말씀을 풀어주시잖아요. 말씀 속에 뭐가 들어 있어요? 안 보이잖아요? 그러나 말씀 속에 하나님이 이 세상에 말씀으로 오셨잖아요? 말씀 속에 하나님이 들어 있다고요. 어떻게 알아요? 믿음으로 안다니까요. 그건. 아니 어떻게 믿음이 왔죠? 성령이 내려오셨잖아요. 첫 열매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러면 여러분은 그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분이 되셔야 돼요. 자꾸 보여 달라고 울지 마세요.
오늘은 좀 짧게 할라고 그랬는데, 다음 주에 하죠. 내용은 다 이해하셨죠? 요한복음 20장 1절부터 18절까지 내용. 한 줄도 안 빼놓고 다 설명해드린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예배와 안식과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어 있는 그 영광된 현실 속에서 그 보이지 않는 현실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존재여야 돼요. 그럼 여러분은 일상에게 휘둘리시면 안 돼요.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여러분을 괴롭게 하는 뭐 사람들, 그런 것으로 일희일비 하지 마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이루어놓은 그 현실을 바라보세요. 그때마다. 그리고 일어나세요.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에요.
기도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