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생달/김강호
그리움 문턱쯤에
고개를 내밀고서
뒤척이는 나를 보자
흠칫 놀라
돌아서네
눈물을 다 쏟아내고
눈썹만 남은
내 사랑
#단추 구멍/강경화
단단히 채운 단추가 자꾸만 풀린다
얼마나 많은 날을 닫았다 열었을까
어렵게 풀지 않아도 읽히는 암호 같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단추가 풀리는 건
실밥 풀린, 땅에 뒹구는 단추만의 탓일까
내 가슴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여며주던
더럽고 냄새나는 날들을 견뎌내느라
옷은 낡아가고 구멍마저 헐거워져
아무리 붙잡아봐도 예고 없이 손을 푼다
#내소사 솟을연꽃살/강영임
어둠과 빛의 무늬 수없이 반복되다
우레도 막지 못한 당신에게 가는 길
나는야 살아 오백 년 또 태어나 수백 년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건 아니다
돌아갈 수 없는 그적, 지금 나를 이어보면
그 시간 입술 터지고 신열 앓다 가벼워진 것을
한생 바쳐 연화를 얻을 수 있다는 말
내 거친 숨소리조차 정 끝으로 깎아냈을
옹이진 그 손끝에서 세상을 본다, 온몸으로
#모과의 재구성/구애영
상처 난 까닭을 우린 서로 몰랐어
도마에 올려놓은 초록초록 네 몸빛
최대한 얇게 저밀 때 고백은 시작되었어
유리병 속 쟁여도 차갑게 빛나는 눈
끈적인 진액이 되어 빼곡히 마주 봤지
완벽히 스러지는 것, 이 지상에 있는 걸까
원형은 사라져도 쌓아가는 은유들
꽉 여문 씨앗의 힘은 칼날보다 완강했지
이쩌면 이별을 겪고 풀향기 껴입다니
#가을 산 연가/권혁모
나를 훔치다 들킨 속마음이 미쳤다
시인도 부정도 없이 제 속을 못 이겨
한 번만 믿어보라며 분신을 하신다
한때는 그랬으리 낙엽의 베갯모도
미치도록 달치도록 붉게 쓰는 만지장서
말아서 힘껏 던지면 미리내가 흘렀다
이제 보니 일기장이네 너를 건너간 잎새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넘기며
한 닢 또 사랑이 지면 가벼워서 좋겠다
#부활/김계정
겨울을 신으로 모신 눈꽃이 피었습니다
시리도록 간절한 하늘 향한 기도가
꼿꼿이 선 채로 바친 얼음 꽃밭입니다
바람벽에 기대어선 나무가 흔들려도
고작 한 시절이 남아 있을 뿐이라며
어떻게 견디며 살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눈꽃을 녹여야 사는 치열한 햇살의 임무
천년만년 변함없이 살아나고 살아나서
헛되이 언 땅 위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부장품/김소해
중간 과정 생략하고 완성하란 급한 지시
열흘 넘게 걸릴 공정 하루 만에 끝내라니
한두 번 점검도 없이
그냥 살아온 나처럼
저승 너머 이승 뜰은 어이없이 가벼워서
틀니 주인 아버님 어젯밤 돌아가셨다
외모를 다듬어 보고
음식 맛의 꿈을 두고
맞춰보지 못한 생을 마무리할 때가 있다
목숨의 일이란 어디서든 먹는 일
먼 길에 시장하실까
오롯한 의치 한 쌍
#아버지는 목수다/김수엽
나무는 제 몸속에 집 한 채 기른다
갑옷을 벗겨내고
기둥과 서까래도
어버지 톱과 대패로 땅 위로 빼낸다
긴 세월 젊음을 허물면서 지어온 집
아들이 대들보로 커가길 기도하며
닳아진 지문으로 쓴
문패에 두 이름
번지가 늙어가고 걸음도 고장 나서
쥐고 온 손재주 숲속에 풀어놓고는
비석에 성호 새기고
그 뒤편에 쉬신다
#아침 산행/김연동
-숲에 들다
시혼을 내려놓은
방목의 영혼이다
숲에 든 솔개처럼
재생의 깃 털어본다
새 부린
발톱 자라면
활강하는
꿈을 꾸며
#진도 홍매/김영란
마지막 봄눈 속으로
스미는 붉은 눈물
눈물이면 되었지
무엇을 또 품을까
그 눈빛 헤프지 않아
여기까지 온 것을
#먼데 산이 다가와/나순옥
금빛 아가미 뻐끔거리며
찾아든 봄날 오후
잎새들이 가만가만
하늘을 들어 올리자
먼 산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마주 앉다
#코드/류미월
카트에 수북 담긴 물건들이 긴장한다
포장지에 찍혀있는 세속적인 쓸모의 값
숫자를 입에 물고서 출구를 찾고 있다
카운터 앞 지날 때면 숨소리가 잦아든다
내 몸도 스캔 한 번에 가격이 읽힐까 봐
얼룩말 초원을 달리듯 발걸음이 빨라진다
바코드 QR코드 암호처럼 숨겨진 정보
친구도 옷차림도 코드를 맞추듯이
식당 앞 줄 선 무리들 뒷배경이 보인다
#양파의 집/배경희
햇빛을 주시겠어요 죄송한데 없어요
몇 분 전에 구름까지 사가지고 갔어요
회색빛 어둠이라도 지금 남았을까요
문 열면 눈보라 치는 겨울이 있어요
끝이 안 보이는 기다란 복도 끝에
고독의 달팽이들이 허물을 벗어요
끝없이 번식을 해도 뿌리내리지 못해요
사과가 익어가도 색종이를 접어대도
어디로 향해 가는지 구름은 알까요
#파도/서연정
기도도 무거우면 욕망의 탑이란다
안으로 세운 절벽 철썩철썩 부수며
하늘이 거절한 슬픔 종일 울어 주었네
#매화 한 그루/윤정란
매화 한 그루가 벼랑 끝에 서 있다
언제 비바람이 몰아칠지 모르는데
햇살을 풀어내면서 꽃을 피우고 있다
그에게 가는 길이 얼마나 사무치면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한 땅에서도
풍문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저 자존
허기진 나의 시도 저런 꿈 있었을까
진화하는 쳇봇에 휴지가 된다 해도
첫 마음 살아 숨 쉬는 푸른 향기 있었을까
#물길/이 광
큰비에 파인 땅이 웅덩이가 되기까지
서로서로 부여잡고 물이 길을 트기까지
아픔을
넘치도록 받아낸
진흙창이 깔려 있다
#뫼밥타령/이남순
잠시도 울새 없이 그 시상은 존는갑더라 너거가 댈고갈 수도 없는 노렷인대도 니 아베 이날꺼정도 날 댈러 안 오는 거봐라
걸타꼬 내 발로 자사서 내가 가랴, 그래도 저승길은 아무도 모르는기라 올밤에 너 아베 기별에 훌쩍 따라 가뿔모는,
화장대 빼다지에 봉다리 두 개 있느니라 하나는 베적삼과 꼬신 두 째기 깝시고 또 하난 뫼밥 갑씨다, 에미 엄써도 굼찌마라
#무언/임영석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 있겠지만
가끔은 끄덕끄덕 고개를 저었을 때
천 마디 말로 못 푸는 마음이 오고 간다
별들이 깜박깜박 반짝이는 밤하늘은
누군가 외로워서 울고 있는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어주는 소리이다
강물을 건너가는 물수제비 조약돌은
퉁퉁퉁 튕기면서 참아왔던 말을 하고
물속도 물 밖의 소리
천만 번은 들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