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박상우 (by 초상화가 )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가수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의 마지막 부분이다. 낭만이란 무엇인가? 흔히 알려진 바로는 낭만은 현실과는 멀어 보이는 것, 그리고 이상적인 것이다. 그러기에 최백호에게 낭만은 우리의 현실에서 잠시 지나칠 뿐이며 다시 비어있는 가슴 속에도 다시 오지 못 한다. 최백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낭만은 그저 추억거리이며, 철없을 때에 하는 어리광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낭만이란 무얼까? ‘대학생의 낭만’은 하나의 관용어처럼 쓰인다.
80년대를 겪은 386세대에게 그 당시 대학생의 낭만은 뚜렷했다. 그 중엔 오늘날에도 간간히 남아있는 것도 있다. 풀밭에서 먹는 막걸리, 기타를 들고 동기들과 떠나는 여행, 그리고 풋풋한 연애가 그나마 오늘도 볼 수 있는 낭만이겠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낭만이라는 것은 이걸로 그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군부 독재를 향해 던졌던 돌과 화염병들이 낭만이었으며, 끝없는 토론은 이상을 향한 몸짓이었다.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민주주의는 그 당시 그들이 최루탄과 곤봉을 맞아가며 염원했던 꿈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에 민주화 이후 그들이 느꼈던 허무함은 클 수밖에 없다. 민주화 이후에 집권한 노태우 정권은 그들이 꿈꿔왔던 체제가 아니었다. 박상우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에 나오는 ‘우리’가 느끼는 고독감은 이러한 허무함에 비롯된다.
그렇게 꿈꾸었던 민주화가 몰고 온 결과는 엉뚱하게도 연대의 해체였다. 연대의 해체는 두 가지 원인에서 이뤄졌다.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민주화 이후에 원치 않던 정치적 결과에 대한 허무함,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순응, 굴복, 그리고 이에 따른 파편화된 개인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원인은 사실 서로 엮여있다. 그들이 느꼈던 허무함은 결국 이상적 낭만보다 현실적 삶을 택하게 만들었다. 박상우 소설의 ‘우리’들은 이러한 선택에 따른 해체를 겪게 된다. 정치 이야기를 하며 뜨거웠던 연대는 ‘폭설’이 와야만 만나는 사이가 되고, ‘우리’는 앉아서 예전의 뜨거움이 아닌 차갑기만 한 지겨움으로 시간을 보낸다. 벽제로 이사를 해야 되서 떠난다는 친구의 이야기는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이사는 거짓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가득 찬다. 하지만 대놓고 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다른 마음이 아니기에.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지식인, 대학생들이 겪은 허무함은 박상우의 이 단편만 봐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때 당시 느낀 허무함은 오늘에는 느낄 새도 없다. 오늘날 사회는 애초에 ‘이상적’이라는 단어에 인색하다. 젊기에 이상적이어야 할 청년들은 높은 취업의 벽을 넘지 못하고 현실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들은 가혹한 현실을 이겨내려고 현실 앞에 굴복한다. 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경쟁이 난무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흔히 낭만이라 불렸던 ‘불필요한 이상’보다 현실에서 원하는 ‘효율 높은 행위’들만 하는 수밖에 없다. 낭만과 효율성은 거리가 멀다는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다 알 수 있다. 이렇게 우리 세대는 이상과 낭만을 거세당했다. 아니 스스로 거세하고 있다는 것이 어울리겠다.
소설의 ‘우리’는 결국 두 명만이 남게 된다. 그들은 마지막에 들렸던 술집에서 만난 여자를 따라 ‘샤갈의 방’에 가게 된다. ‘샤갈의 방’은 그녀에게 이상적 공간이지만 샤갈의 마을에 있는 붉은 태양과 흰 염소, 그리고 한 다발의 꽃과 두 여인, 올망졸망하게 눈 덮인 마을과 헐벗은 겨울나무의 풍경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샤갈의 마을에서 무엇인가 기다리고 있다. 그것을 ‘우리’ 역시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연대라는 것을 느끼기 힘든 사회다. 같이 무엇을 꿈꾼다는 것이 불가능한 사회일 지도 모른다. 개인주의와 경쟁의 심화, 이상이 거세된 사회에서 연대라는 것을 꿈꾸는 게 가당키나 할까. 하지만 ‘샤갈의 방’은 비워져 있을지라도 방 자체는 존재한다.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 할 뿐이다. 우리는 이상과 낭만을 버리고 현실을 택한다는 이유로 오히려 현실을 더 외면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상과 낭만이 비워진 현실은 오히려 각박하고 처참하다. 그곳에 무엇이 채워져야 하는 지는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 우리가 현실을 택할 것이면, 그리고 각박한 현실을 더 좋은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오히려 이상적이고 낭만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샤갈의 방’을 놓지 않고 있다면, ‘왠지 한 곳에 비어있는 내 가슴’에 낭만은 ‘다시 못 올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