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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글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凡 草
열린아동문학 2013년 겨울호에 실린 글
<산왕 부루>의 작가 박윤규
먼 길을 걸어가는 황금나무 김재원(동화 작가)
1. 인연-뿌리 깊은 나무는
“너, 오늘도 일기 안 써 왔구나. 혼 좀 나야겠다.” 나는 매를 들고 종아리를 힘껏 때렸다. 아이는 입을 꾹 다문 채 맞고만 있었다. 다른 아이 같으면 잘못했다거나 소리라도 지를 텐데 묵묵히 참아내고 있었다. 초임 햇병아리 교사였던 나는 너그럽게 타이르지 못하고 매부터 손에 들었고, 아이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화가 나서 점점 더 많이 때렸다. 그래도 까맣고 작고 단단해 보이는 그 아이는 끝내 변명 한 마디 하지 않고 매를 다 맞았다. 그 아이가 바로 박윤규였다. 1974년 7월 초순, 내가 교사로 첫 발령을 받고 찾아간 부산 북쪽 끝자락 두구동의 공덕초등학교에서 우린 그렇게 만났다. 그 만남이 근 40년이 되어가니, 인연의 뿌리가 삶을 관통하리만큼 깊다고 하겠다. 게다가 문학의 뿌리마저 연결되어 있으니, 의당 나는 이 글을 쓸 의무가 있다. 그도 <이 계절에 심은 동화나무>의 작가로 선정되자 아무런 다른 생각 없이 나에게 이 글을 부탁을 해왔다. 이런 류의 글을 거의 쓰지 않는 필자이지만, 두말없이 응낙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박윤규와 그의 동화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아니 그의 삶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더 심도 깊게 알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의 삶에 대해서는 필자가 문단의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이 글의 독자는 작품보다는 한 사람의 작가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생생하게 간접 체험하게 될 것이다. 얘기했다시피 나는 처음엔 그가 불성실하고 게으른 학생인 줄만 알았다. 종종 숙제를 해오지 않았고, 내가 숙제보다 더 강조하던 일기도 안 써 오고, 가끔 무단결석까지 했다. 수업 시간에는 커다란 눈망울을 빛내며 충실한 아이가 그러니 더 이해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는 4남 3녀의 둘째였다. 아버지와 형은 일을 나가고, 어쩌다 어머니까지 일이 생기면 갓난쟁이 동생들을 돌봐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기본적인 학용품조차 갖추고 있지 않았다. 노트는 연습장 한 권으로 모든 과목을 다 감당했다. 그러니 일기장이 없어 일기를 못 썼고, 학습 준비물을 갖추지 못해 숙제를 못한 것이었다. 그런 가난을 담임인 나에게 변명하기 싫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 살면서도 자존심을 지키는 그가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그의 형편을 알고 나니 마음이 짠해졌다. 그는 그림을 아주 잘 그렸는데, 싸구려 열두 색 크레파스만 가지고도 교내 미전에서 늘 상을 받아냈고, 어느 신문사에서 주최한 미술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미술 시간마다 화구가 제대로 없어서 종종 친구 것을 빌려 쓰곤 했다. 그래서 한 번은 윤규 몰래 반 아이들과 돈을 모아 미술 도구 세트를 선물한 적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수요일 오후에 재능에 따라 배우는 특별활동 시간이 있었다. 나는 내 임의로 그를 미술부에 올리고는 거기로 가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독서부를 개편한 문예반을 맡았다. 나도 꿈꾸던 문학 공부를 아이들과 함께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한참 수업을 하다 보니 교실 밖에 그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어서 미술부로 가라고 다그쳐서 쫓아 보냈는데, 얼마 뒤 다시 복도에 서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미술 선생님한테도 특별히 얘기해 놨으니까 어서 가봐.” 내가 재차 독촉하자 그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미술부에 가고 싶어도 미술 도구를 살 돈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사주었잖아. 그거 쓰면 되지.” “그거 떨어지면 또 사야 하잖아요. 선생님한테 자꾸 도움 받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저는 미술부보다 문예반에서 배우고 싶어요.” 그때 나는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훗날 그는 내가 육성회비를 내지 않아도 수업 시간에 쫓아내지 않아서 좋아하게 되었다고 했다.) “좋아. 한 달만 문예반 해보고 실력이 안 되면 미술부로 가야 돼.” 나는 다짐을 받고 그를 교실로 들어오게 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아동문학이란 한 길을 가는, 문학의 사제간이 된 첫번째 걸음이었다. 그러니 나와 윤규는 문학 공부를 같이 시작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엔 나도 문학을 잘 몰랐는데 뭘 가르치겠는가. 얼토당토않게 글자 수만 대략 맞추면 되겠지 싶어 시조를 맨 먼저 가르쳤다. 문예반은 5.6학년만으로 구성되었는데, 윤규는 대수롭지 않게 시조를 척척 잘도 지어 냈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난 가을 초입에 윤규가 일을 터뜨렸다. 부산시 교육청에서 주최하는 시조대회에서 장원을 차지한 것이었다. 그때 다른 친구와 6학년들은 차상이나 장려인데 윤규는 장원이었으므로 학교 대표로 상을 받아야 했다. 나는 그를 교장실로 데리고 가서 상 받는 연습을 시켰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이 그의 모습을 일별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아이가 정말로 우리 학교 대표가 될 아이요?” 그때서야 나는 그의 옷차림에 눈길이 갔다. 낡고 허름한 옷에 허리띠가 없어 그냥 노끈을 질끈 맸고, 검정고무신에 박박 깎은 머리털이 길어져서 볼썽사나운 꼴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돈을 주어 학교 앞 이발소에서 박박머리가 아닌 상고머리로 깎고 오게 했고, 임시방편으로 부잣집 아이와 옷을 바꿔 입혔다. 검정고무신도 만화 주인공 캐릭터가 그려진 운동화로 바꿔 신겼다. 그리고 문예반 아이들을 다 대동하고 교육청으로 갔다. 그렇게 상을 받고 돌아온 일은 나에게나 그에게나 잊지 못할 추억으로 새겨져 있다. 하나 그때까지도 나는 이 아이가 장차 어떻게 자랄지 전혀 짐작을 못하고 있었다. 나에게 일년 반을 배운 윤규는 6학년이 되는 날 뜻하지 않는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의 집이 부산과 경남의 경계에 있었는데, 학구가 조정되면서 강제로 경남 양산의 영천초등학교로 가야 했던 것이다. 그 후 윤규의 삶은 자전적 소설인 <<내 이름엔 별이 있다>>(푸른책들,2004)(이 책에서 나는 민채원이란 예쁜 여선생으로 성전환하여 등장한다)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 전학으로 인해 가뜩이나 어렵던 그의 인생은 더욱 심한 굴곡이 시작된다. 그는 전학 간 학교에서 장난을 치다가 친구의 팔을 부러뜨리는 사고를 저지르고는 치료비를 감당 못해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그해 크리스마스 즈음에 그 소문을 들은 나는 겨울 스웨터 하나를 준비하여 그와 친했던 친구를 앞세우고 자전거를 타고 송정리로 찾아갔다. 그는 집에 있지 않고 시곗줄을 만드는 조그만 가내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친구가 찾아왔다기에 반색하며 대문 앞으로 나왔던 그는 나를 보고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힘내라. 뭐든 열심히 하고, 꼭 공부를 해라.” 스웨터가 든 상자를 안겨준 나는 그의 손을 꼭 쥐었다 놔 주고는 자전거를 타고 돌아왔다. 그때의 광경을 윤규는 <<내 이름엔 별이 있다>>에서 이렇게 그려 놓았다. 선생님은 말없이 자전거에 몸을 실었다. 영록이도 자기 자전거 페달에 발을 얻고 싱긋 웃으며 인사말을 건넸다. 선생님은 입술을 꼭 다물며 고개를 까닥해 보였다. 그리고 페달을 밟으면서 서서히 눈길을 돌렸다. “아, 안녕히 가이소.” 나는 잠겨가는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는 한마디를 간신히 뱉어냈다. 체인 감기는 소리와 더불어 두 대의 자전거가 천천히 멀어져 갔다. 나는 자전거가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그것이 내가 본 어린 윤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후 나도 부산 시내로 전근을 갔고, 우리의 인연은 아주 끊어진 듯했다.
왼쪽이 박윤규, 오른쪽은 친구 김태완
2. 성장-바람에 아니 뮐쌔
우리의 인연이 다시 이어진 건 그로부터 4년쯤 지난 때였다. 공덕 초등학교 친구 몇과 더불어 윤규가 나의 집을 방문한 것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나는 그가 그렸던 그림들이 먼저 떠올랐고, 불쑥 이런 질문부터 던졌다 “공부는?”. 그는 다소 민망하게 웃었고, 이미 고등학생인 친구들이 대신 설명했다. 공장을 다니다가 뒤늦게 범어사 재단의 금정중학교에 들어갔고, 구미의 금오공고 합격증을 받아둔 상태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공고의 인기가 좋았고, 전국기능대회를 휩쓸고 기능 올림픽까지 제패하던 금오공고는 영재 학교인 양 이름이 드높았다. “야, 축하한다. 너도 기술을 배워 기능 올림픽에 나가서 메달을 따 봐. 기술만 익히면 사는 건 문제없다. 넌 그림도 잘 그리니까 잘 할 거야.” 대체 그림하고 기능하고 무슨 관련인지 나도 잘 모르지만, 다시 공부를 시작한 제자가 장학생으로 좋은 학교로 간다니 대견해서 그렇게 격려해 주었다. 나는 그가 기술을 익혀 하루 빨리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저 씨익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준다니까 가는 거예요. 공고 적성은 아니에요.” 그리고 속으로는 저도 선생님처럼 작가가 되고 싶은 걸요, 했다고 한다. 당시 나는 동시로 등단하여 열심히 활동하던 때였다. 그의 말처럼 그는 공고에는 적성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사관 후보생으로 군사훈련까지 받으면서 기술을 익혀야 했지만, 그런 건 뒷전이고 문학과 기독교에 몰입했다. 문둥이 시인 한하운을 사숙하며 <<현대문학>> <<심상>>을 애독했고, 해가 갈수록 신과 진리에 대한 목마름은 더욱 깊어져갔다. 그런 차에 고3이 되자 당시 생명의 전화 상담원이던 내게 질문을 던졌다. 신학이냐, 문학이냐?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묻는 것이었다. 그 동안 주고받은 편지로 볼 때 그의 삶이 평범하지는 않을 거라는 짐작은 했다. 그렇지만 그를 가난하고 고달픈 문학의 길로 밀어넣기는 주저되었다. 나는 생각 끝에 대답 대신 간직하고 있던 원고 한 편을 보내주었다. 그가 5학년 때 쓴 산문으로 교내 글짓기에서 수상한 작품이었다. 그걸 보고 자신이 판단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문학의 길로 가라는 답으로 알아들었고, 주저 없이 문학의 길로 접어들었다. 1984년, 금오공고를 졸업함과 동시에 하사관으로 입대한 그는 동부전선 최전방 전투 사단에 배치되었다. 그는 절망했다. 탄약 주특기를 가진 기술하사관이므로 도시 근교에 배치 받아 야간대학이라도 다닐 수 있을 줄 알았다. 많은 선배들이 그랬고, 그의 동기들도 대체로 그랬기 때문이었다. 기술하사관이 최말단 부대까지 가는 건 육군 규정에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청춘의 5년을 그렇게 보낼 생각에 너무도 암담하여 처음으로 깊은 좌절에 빠진 것이었다. 그는 아무런 대책도 생각도 없이 지냈다. 책 한 줄 보지 않고 글 한 줄 쓰지 않았다. 부모에게 자신의 무사함만 알려준 채 아무에게도 편지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여러 기계 부품 중 하나처럼 하루하루를 버틸 뿐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좌절의 세월이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다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휴전선으로 전출된 그는 거기서 바닥을 치고 일어났다. 분단의 철책선에 단풍이 핏빛으로 물들던 어느 가을 날, 그는 이런 시를 썼다.
시월이었다 휴전선이었다 단풍의 감옥이었다 성내천에 사태진 단풍잎 소양강으로 한강으로 바다로 흘러가고 비무장지대 방책선 불모지 너머 키 작은 관목들 산불처럼 타는 계곡 사격 표지용으로 남겨둔 소나무 한 그루 발기한 성기처럼 시퍼렇게 우뚝 서 있었다
-<시월의 강> 부분
그의 정신은 시퍼렇게 살아났고, 그날 이후 그는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휴전선에서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책은 종교 경전밖에 없었고, 보안 관계상 개인 노트를 가질 수도 없었다. 그는 중학 시절 뜻도 모르고 외었던 <<반야심경>> 해설서를 구해 거듭 읽으며 탐구하는 한편, 영어 <<신약전서>>로 짬짬이 공부를 했다. 떠돌이처럼 수송부, 포병부대 등을 전전하던 그는 1985년 말에야 주특기에 맞는 양평의 탄약부대에 배치되어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치열하게 시를 쓰면서 틈틈이 대학입시 준비를 했다. 그러던 1987년 초입 어느 날 밤, 느닷없이 그가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합격했습니다.” 나는 크게 기뻐하며 그의 장도를 축하해 주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그가 범상치 않은 작가가 되리라는 걸 예감했다. 그래서 뭔가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지금도 나는 동화 제자들이 등단하면 호를 지어주는 걸 큰 기쁨으로 여기는데,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심곡(深谷)’이란 호를 편지로 전해 주었는데, 크고 깊은 산이란 뜻이니 문학에 더욱 정진하여 큰 산을 이루라는 뜻이었다. 훗날 내가 그의 작업실인 <월악산 동화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때 선생님께서 그런 호를 지어 주신 덕분에 이렇게 크고 깊은 월악산 골짜기에 들어와 살게 되었나 봅니다.” 그는 1989년 봄에 제대하여 중앙대 문창과에 복학했다. 대학 새내기였지만, 이미 스물일곱 살이었던 그는 3년간 사귀어오던 연인과 막 결혼한 가장이기도 했다. 그는 호구지책을 위해 군대 퇴직금을 털고 빚을 내어 안성 시내 외곽에 문구점을 열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사회에 나와 대학을 다녔으나, 사회는 녹록치 않았다. 그 이듬해는 장남 민혁이 태어났고, 영세한 문방구는 간신히 먹고 살기에도 빠듯하여 대학 생활은 생계마저 위협했다. 그런 아슬아슬한 차에 그는 다시 현실의 벽을 깨뜨리고 비상했다. 199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 <슬픈 바퀴>가 당선된 것이다. 그 신춘문예 상금과 더불어 학교에서는 전액 장학금을 받게 되어 무난히 대학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오월에 소설 <처낭대>가 오월문학상에 당선됨으로 비로소 박윤규는 작가로서 한국의 문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당선작의 한 대목처럼 그 자신도 삶의 한계령 하나를 가까스로 넘어선 셈이었다.
한계령 정상, 이젠 내리막이다 기하급수로 따라붙는 가속도를 조절하느라 조심조심 브레이크를 잡으면 단풍 설악은 풍랑 일렁이는 바다가 된다 산동네 식당 앞에 두 바퀴를 세웠을 땐 향로봉에 찔린 하늘 피가 번지고 몇 채 안 보이는 인가엔 저녁 짓는 연기가 환각제 같다
-<슬픈 바퀴> 1연
3. 작가 활동-꽃 둏고 여름 하나니
1993년에 대학을 졸업한 박윤규는 도서출판 <열린책들>에서 얼마간 편집 사원으로 일했다. 프랑스 소설 <<개미>>, 러시아 시인 <<마야코프스키 전집>> 등을 간행하며 편집 일을 배웠다. 그러나 출판사 일은 정신적으로 매우 피곤했고, 자기 글을 쓸 여유가 없었다. “젠장, 내가 남의 책이나 만들자고 지금까지 문학를 공부했던가?.” 집필에 대한 갈증을 이기지 못한 그는 결국 사표를 던지고 오대산으로 산행을 떠났다. 단풍이 진 산은 이미 겨울이어서 노인봉 산장에서 자고 나니 첫눈이 내렸다. 소금강으로 내려오던 그는 얼음이 언 계곡 웅덩이를 발견하고는 홀로 자신만의 의식을 거행한다. 첫눈 내린 산에서 첫날밤을 치르듯 그는 알몸으로 얼음을 깨고 웅덩이에 뛰어들어 몸과 마음을 씻었다. 장차 어떤 고통과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작가의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시와 소설을 쓰던 그가 동화의 강에 몸을 던지게 된 건 ‘자유로움’ 때문이라고 했다. 첫 장편 소설인 『물속 나라1.2(답게, 1994)』를 쓸 때였다. 환경 문제로 투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쓸 때는 가슴이 아프고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물고기들의 이야기는 마치 자신이 물고기인 양 술술 풀려나왔다. 상상력이 용천수처럼 샘솟았고, 속이 후련했다. 그는 그것이 동화적 감수성이요 상상력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소설을 넘기고 곧바로 써 본 것이 <<초록댕기와 눈사람 투비투비>>(웅진, 1995)였다. 환경동화로서 반응이 괜찮았고, 그 책은 <<투비투비를 지켜라>>로 재출간하여 오늘날까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86년도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어 동화 작가의 길을 가던 나는 첫제자의 동화판 데뷔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때까지 따로 동화 공부를 해 본 적이 없던 그는 열정적으로 동화를 탐구하며 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부루가 간다1. 2>>(비룡소,1997 <<산왕 부루>>로 개작)와 이미 환경 생태동화의 고전이 된 <<버들붕어 하킴>>(1998, 현암사) 같은 역작을 펴냄으로 동화작가로 기반을 구축하였다. 그 후 그는 충주의 월악산에 집필실을 마련하고는 치열한 탐구와 창작의 세월을 보냈다. 우리 역사와 전통 철학과 신앙, 국선도를 위시한 선도 문화를 탐구하며 매년 한 두 권의 장편과 그림책과 역사, 민담 이야기책을 펴냈다. 2003년에 박윤규는 아이들 교육 때문에 월악산에서 하산하여 청주로 나왔다. 때마침 서울예술대 문창과에서 외래교수로 초빙되었고, 이를 기화로 여러 대학에서 문학도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때 강의록으로 펴낸 것이 바로 <<태초에 동화가 있었다>>(현암사, 2006)이다. 동화의 개념과 바탕 철학, 문학 예술적 기초, 그리고 창작의 실제까지 다룬 이 책은 동화 습작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동화작가들에게도 큰 도움을 주었다. 그 중에 아동문학의 철학적 바탕이 되는 동심을 탐구하여 체계를 세운 <동심론>은 그의 사상과 문학이론이 집결된 결정체였다. 그래서 글나라에 그를 초청하여 특강을 듣기도 하고, 글나라 수강생들을 월악산까지 데리고 가서 도움도 받게 했다. 한 작가의 탄생 과정은 이 정도로 하고, 이제 작품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사실 그는 지금까지 내 보인 작품과 활동량에 비해 문단의 관심을 별로 받지 못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찾기가 어려웠다. 그를 탐구한 작가론도 없고, 작품론도 별반 없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가 산골에 오래 칩거하며 세상과 두루 교류하지 못한 상황과, 처음에 시와 소설로 데뷔하여 전통적인 동화 작가 반열에 끼지 못한 탓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는 남다른 열정을 지닌 동화작가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그는 시공을 가로지르는 폭 넓은 상상력과 소설로 단련된 탄탄한 구성력을 지녔고, <<황금나무>>(시공사, 2007) <<천년별곡>>(푸른책들, 2008)이란 시동화에서 보여주었듯이 매우 감성적이면서도 다양한 문체를 구사한다. 생활동화가 많은 우리 동화 문단에 보기 드물게 깊고 큰 주제와 거대 서사를 잘 다루는 개성적인 작가이다. 그런 한편, 내가 보기에 그의 동화는 주제나 문장이 무겁고 어려운 편이다. 그래서 나는 작품을 아이들 기호에 맞게 쓰고, 좀 더 쉽고 가볍게 쓰라고 충고해 준 적이 있다. 이때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저는 동화를 아이들만의 전유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어른들도 함께 봐주기를 바라지요. 하지만 쉽고 가볍게 쓰야 하는 건 지당하신 말씀인데, 아직 문학 말고도 공부할 게 많아서 섬세하게 쓰질 못해 그런가 봅니다. 공부가 좀 더 무르익으면 차차 가벼워지겠지요.” 청주로 나갔던 박윤규는 큰 아이가 대학생이 된 2009년에 혼자 월악산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당호를 <관영재>에서 <월악산 동화의 집>으로 개명하고, 대학 강의도 접은 채 창작에 몰두했다. 그런 지 2년이 된 2011년 어느 여름날, 그가 차를 몰고 부산의 범초산장까지 찾아와서는 그해 출간한 7권의 책을 우루루 쏟아놓았다. 동화, 소설, 그림책 등 다양했는데, 모두가 주목해 볼 만한 것들이었다. 그의 공부가 한층 익었는지 견고한 주제를 유지하면서도 이야기가 이전보다 확실히 경쾌하고 발랄했다. 이 때 나온 책 가운데 하나가 <<주문을 외자 아르케옵테릭스!>>(2011, 시공주니어)인데, 2012년 한국아동문학상 수상작이 되었다. 그 심사평에 그의 작품성이 잘 드러나 있다.
수상작품 <주문을 외자, 아르케옵테릭스>는 파충류와 조류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시조새를 통해 태양이의 자존감을 활기차게 찾아가는 그 행보가 흥미롭고 문학성이 옹골진 우수한 작품이다. 문장과 주제가 튼실하고, 이야기 전개가 오순도순하여 강한 설득력과 묘한 감동을 안겨주는 작품성이 뛰어난 문제 작품집이다. 다시 부언하면 재미의 살과 뼈와 작가의 역량과 기량이 뛰어나 한국 동화문학의 재미와 문학성을 한 품격 걷어 올린 수작이다. (김은숙, 임신행)
<월악산 동화의 집> 대문 옆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는데, 가을이 되면 황금색 단풍이 들고 은행알이 조롱조롱 많이도 달린다. 나는 윤규를 생각하면 그 나무와 더불어 황금나무라는 그의 닉네임이 떠오른다. 그가 지나온 인고의 세월과 더불어, 시집 소설 그림책 장편동화 역사책 등 40여 권의 저서를 가진 그가 가을날의 은행나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려서도 꿈만 먹고 자랐고, 이제는 어느 정도 꿈을 이룬 듯이 보이지만, 그는 아직도 꿈이 많다고 한다. 그가 가고자 하는 나라를 나는 잘 모른다. 앞으로 또 어떤 작품을 들고 불쑥 나타날지도 짐작하지 못한다. 다만 문학의 뿌리가 깊은 만큼 갈 길이 멀고 문학의 성도 크리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그랬듯이 황금나무 박윤규가 가는 먼 길을 지켜보며 응원할 것이다.
2012년 창원 세계 아동문학 축전에서 만난 김재원과 박윤규
* 글쓴이; 김재원
부산교육대학을 나와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면서 처음에는 동시를 쓰다가 <소라>라는 동시집을 한 권 낸 뒤부터 동화를 쓰기 시작하여 계속 동화만 쓰고 있다. 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하느님 우산은 누가 고칠까?>라는 동화가 당선되었고, 동화집 <꿈을 날리는 곰보아저씨>, <하느님 우산은 누가 고칠까?>, <공룡박사와 개미박사>, <똥쟁이, 너도 진돗개니?> 등을 펴냈다. 해강아동문학상과 이주홍 문학상을 받았고, 지금은 부산 화명동에서 <글나라 아동문학연구소 ( cafe.daum.net/qwer3 글나라 ) >를 운영하면서 동화작가를 양성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