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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통증의 시간을 건너는 법
- 박홍점, 『피스타치오의 표정』, 천년의시작, 2015
- 신미균, 『웃기는 짬뽕』, 푸른사상, 2015
박 설 희
<한국 여성 시의 문제를 짚어봐야 할 때>
올해 『유심』 5월호에 실린 문정희 시인의 대담을 읽으면서 참 통렬한 비판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일상적인 정서나 감정보다 문학적으로 표현되는 정서가 더 강하거나 과장되거나 복잡하면 좀 불편함을 느낀다”며 한국 여성 시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는 의견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신세타령과 멜로와 낭만주의와 적당한 호들갑을 감상주의와 교훈의 포장지에 싸놓는다는 것이 시인줄 알고 있다.……부엌에서 끓고 있는 찌개, 혹은 거실에 흐트러져 있는 빨래 한 토막이라도 거기에 놓여 있는 본질적 메타포나 상징과 연관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시가 안 된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런 소릴 했을까. 그는 시력 반세기에 숱한 시인들을 대해봤을 것이다. 평소 느낀 것을 그답게 감추지 않고 드러냈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지적은 여성 시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남성 시인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시가 너무 착하고 예의바르다는 비판도 있었다.
“시의 목적은 감동에 있다기보다는 매혹에 있다. 그런데 한국시는 교훈을 집어넣으려고 안간힘을 너무 쓰고 있고 너무 예의바르다.”
결국 그는 이야기 끝에 ‘생명의 목소리, 야성 속에 숨어 있는 에너지 주체로서 늑대의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고 말했다. 원형적 생명력을 말하는 것이리라. “본질적으로 모든 시인은 여성이어야 한다”고.
대담을 읽으면서 지금의 한국시, 특히 한국 여성시의 현 주소를 짚어보고 여성시의 문제가 무엇인가 곰곰이 성찰해보는 게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을 했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서 글을 쓴다는 것. 지금도 ‘여류 시인’이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남류 시인’도 있나 생각해보게 되며 관습적으로 쓰는 언어가 얼마나 고집이 센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일명 ‘아줌마 시인’들이 자조 섞어 하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최악의 조건 세 가지를 가진 시인들은 첫째, 뒤늦게 사십 넘어 등단을 하고 둘째, 지방에 거주하고 있으며 셋째, 결혼까지 한 여성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야 탁월하게 좋은 시를 써서 지면 확보와 시집 출간이 순조로이 이루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같은 조건이라면 여성 시인들이 남성 시인들에 비해 문단 활동에 여러 모로 불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박홍점 시인이나 신미균 시인처럼 불혹 무렵에 등단을 해서 꾸준히 자신의 색깔을 가지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시를 쓰고 있는 시인들이 있다.
누군가의 시집에 대해 말한다는 건 참 조심스럽고 힘든 일이다. 한 권의 시집에는 단지 그 시를 쓰는 동안의 시간 뿐 아니라 그 때까지의 생애와 선험적 생애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자가 그 시집을 읽는 시간은 몇 시간 또는 하루 이틀 정도다. 그나마 온전히 집중을 하며 읽는 시간은 형편에 따라 더욱 짧아질 것이다. 짧은 순간의 인상, 느낌, 이해를 가지고 그게 전부인 양 이야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미리 양해를 구한다. 이 글은 두 시인의 시집을 읽은 이 후 쓴 시집인상기다.
<응시와 기억, 여성적 글쓰기-박홍점의 경우>
26동과 25동 사이 맞물린 태양을 빼내려 했는데
꽃무늬 에이프런 비어 버린 정수리가 찍힌다
야외 음악당 지붕 위에 내려앉은 구름을 담으려는데
눈을 치켜뜬 내가 서 있다
바람 불 때마다 들고나는 화단
목이 긴 빨간 튤립 한 송이 찍었는데
지금 당신은 아프군요
당신은 지금 꽃받침도 없이 벌거벗은 포즈로 서 있군요
위태롭게 목이 긴 튤립은 튤립을 볼까?
후경의 소나무 둥치를 볼까?
두 번쯤 뽑혔다가 다시 자란
멍든 검지 발톱은
고집 센 검은 개 한 마리 품고
빨강을 먹으면 깊은 우울
노랑을 먹으면 지독한 블루
-「셀프 카메라」
시집을 묶을 때 맨 앞에 실리는 시는 일반적으로 시집 전체의 방향이나 기획의도를 알려준다.
맨 앞에 실린 이 시는 바깥 풍경을 찍으려는데 내가 찍히고 마는, 의도하지 않은 찍힘(또는 찍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태양을 찍으려는데 “꽃무늬 에이프런 비어버린 정수리”가 찍히고, 튤립을 찍으려는데 “아프”고 “벌거벗은 포즈로 서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카메라의 눈을 거친 “검은 개 한 마리 품”은 “우울”한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시집에도 영화처럼 예고편이 있다면 이 시는 그 예고편에 해당한다.
신발을 바꿔 신고 오느라 늦었다
빨간 나비넥타이를 매고 오느라
어머니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느라
즐겨 듣던 음악 같은 손들에게 악수만도 해가 짧아
마당가에 열린 눈물을 닦느라 늦었다
웃으세요, 웃으세요 일제히 사진을 찍느라 늦었다
목이 긴 젊은 아내가 울었다
넓고 넓은 바닷가 눈물로 빚은 몽돌들 지고 오느라 늦었다
태풍을 예고하는 놀란 쥐 떼들 달래느라
스무 살 아기에게 불린 젖을 먹이느라 늦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이 눈치 저 눈치 제 몸이 먼저 무거워서 늦었다
노를 저어 줄 사공이 탈이 나서
겨울 지나고도 유난히 그늘이 짙었다
헐레벌떡 봄꽃 준비하던 나무들 눈을 흘겼다
-「봄날의 눈사람」
숱한 지각(遲刻)들은 어디서 오는가. 위의 시는 “봄날의 눈사람”처럼 뒤늦게 도착한 이들, 뒤늦게 도착해서 그 시간을 많이 누리지도 못하고 봄볕에 녹아내릴 일만 남은, 짧은 시간을 가진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전쟁과 같은 불가항력의 사건들 뿐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 주변인들의 눈치를 보느라 늦어버린 “어긋나버린 시절”(기혁)에 대한 이야기다. 시를 쓰는 일도 그러하고 살아가는 일도 늘 이렇게 뒷북을 치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시쓰기를 포함한 자신의 삶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는 이 시는 그렇게 늦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다. 슬픔과 연민의 정조는 이 시집에서 가장 많이 차지한다.
박홍점의 시는 친절하지가 않다. “비약과 분절의 언어로 ‘대화’를 시도”(기혁)한다는 평을 받을 만큼 그의 시는 읽는 사람에게 단초를 제공하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소통을 회피하는 듯해 보이기도 한다. 처음 읽고 한 번에 와 닿는 시보다는 두세 번 읽고 나서야 전후 맥락이 와닿는 시들이 많다. 이는 환유와 은유와 상징, 나열과 변주 등 그가 주로 사용하고 있는 표현법들로 인해 시가 단번에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난해시는 아니다. 한번 접점을 찾은 이후에는 풍부한 이미지와 다양한 표현의 묘미를 맛보며 읽을 수 있다. 그의 시가 소통이 잘 안 되는 면이 있다면 쉽게 들켜버린다는 지나친 자의식 때문이다. 제목을 『피스타치오의 표정』이라 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참 적절하다. 피스타치오는 딱딱한 표면 안에 약간의 틈이 있다. 우리는 그 틈을 통해 그 안의 어둠을 어렴풋이 들여다 볼 수 있다. 깨부수기 전까지는 그 안에 있는 것의 전모를 알 수 없다.
그도 이것을 의식한 듯 자신의 시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시를 남겼다. 「말들의 출처」에서 보듯 그의 시는 구체적 삶에서 비롯된다. “검은 동굴을 막 빠져나온 저승 새의 울음” “참매를 기다리며 시간을 낚는 응사의 눈빛” “대인시장 골목” “짓무른 저녁의 딸기” “소시지와 어묵을 썰던 칼이 목을 겨냥하던 밤” “칼날 위에서 나비를 불러내고야 말던 눈 내리는 밤 고모의 춤사위” “껍데기 밖이 두려운 한 마리 청거북” 등이 그것이다. 전체적으로 두 번째 시집은 그가 첫 시집 『차가운 식사』의 자서에서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서 밝힌 것처럼 ‘눈과 기억에 의존한 글쓰기’에서 별로 변하지 않은 셈이다. 시선과 기억 속 떠오르는 말들을 자신의 언어질서 안에 세워둔 것이 두 번째 시집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죽은 내가 다니러 가듯 지난 생에 한 번 갈 수 있다면
영영 입맛 잃어버린 여든 어머니에게
이름만 들어도 입안에 침이 고이는 밑반찬 몇 가지 만들어 드리겠다
비린내 없는 낙지나 주꾸미를 데쳐
흰 고무신을 닦던 추억까지 납작 큼직하게 썰어
당신 한입 나 한입
밥 한 끼 환하게 먹고 오겠다
스무살이 된 딸에게는 낮잠 든 머리맡에
장미꽃 스무 송이 놓아두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꿈속에서 허기를 채우는 한 여자에게는
운동화 한 켤레 환하게 빨아 베란다 밖 난간에 널어 두겠다
한낮의 폭염이 뼛속까지 말릴 것이다
개수대 수챗구멍 락스 풀어 쨍하게 닦아 놓고
행주는 맑고 푸르게 삶고
그러고도 시간이 되면 왔다 갔소, 메모 대신에
흰 머리카락 두 올쯤 화장대 위에 남겨 두겠다
자고 올 수는 없을 것 같고
욕심이 너무 심하다 싶고
줄잡아 네 시간이면 될까?
죽은 내가 지난 생에 외출하듯 갈 수 있다면
암컷 흰동가리가 되리
세 여자를 위하여!
- 「모가리」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시간 혹은 장소라는 뜻을 가진 ‘모가리’에서 보듯 관계들, 죽음들, 그 사이에 말과 침묵, 슬픔과 연민, 그리고 모성이 있다.
박홍점의 시는 대부분 여성화자이거나 여성들의 삶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여성이 여성을 잔인하게 공격하는 시(「또다른 카피르릴리」)도 있지만 죽은 여성 화자가 세 여인을 위해 이승을 다녀가는 시 「모가리」처럼 따스한 시선과 모성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는 한시도 자신이 여성이자 딸이자 어머니라는 걸 잊은 적이 없다. 그의 시는 여성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출산, 수유, 월경, 성폭행 등의 주제들을 바탕으로 여성 고유의 미학을 구성하고 있다. “여성들이 참고 돌보고 달래고 마비시키며 멎게 하고 정화하고 흡수하며 지탱해왔던 ‘인간 고통의 역사’”(팸 모리스, 『문학과 페미니즘』, 문예출판사)가 잘 드러나 있다. 고통과 희생의 미학이랄까.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발견과 확인을 거치는 ‘여성으로서의 글쓰기’의 전형적 예이다.
지난 생에 한 마리 자태 고운 학이었을까
열네 명의 아이를 낳은 니오베였을까
이생에서는 먹어도 줄지 않는 휴식과 집시의 시간이 주어졌나 봐요
잎의 숨결에도 몸 한 귀퉁이 녹아내려요
정원에 어둠이 내리자 한낮의 얼굴들 불빛을 좇아 서둘러 돌아가네요
서어나무 곁에 서서
창 안의 뻐금거리는 입들 바라보고 있어요
모두 제 피붙이들의 냄새 속으로 깃드는 저녁
창 안의 어미는 들어온 아이의 두 볼을 손바닥으로 데워주네요
둘러앉은 식탁의 불빛이 먼 등대로 반짝이는 밤
작별 인사도 없이 어둠 속에 세워 놓고 돌아갔네요
동심이 곁에 세워 둔 아기 눈사람의 의미를 알게 됐어요
-「눈사람에 대한 연민」 부분
감춤과 드러냄, 그 사이에 이 시집이 있다. 세 번째 시집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가 자신을 들킬까 하는 두려움을 털어내고 독자와의 소통에 좀 더 신경을 쓴다면 좀 더 많은 독자들이 그의 여성성을 읽어내고 공감을 할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웃음의 미학, 가벼운 무거움-신미균의 경우>
신미균의 시는 박홍점의 시와 여러 면에서 대조가 된다. 우선 신미균의 시는 쉽고 재미있다. 그게 장점이다. 그는 독자에게 다가서는 데 망설임이 없다. 뒤집어놓고 보면 그게 단점일 수도 있다. 시집을 들고 한번에 끝까지 읽게 하는 흡인력이 있지만 한 구절 읽고 생각하게 하고 또 한 구절 읽고 감상하는 독법이 필요치 않기 때문에 시집이 심심하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누군가 일렀듯이 그의 시는 “신미균 표”라는 수식이 붙는다. 이름을 가려도 시만 보면 누가 쓴 것인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그의 발화의 형식은 무척 개성적이다. 재치가 있어 웃음이 나오면서도 슬그머니 뒤끝엔 슬픔이 남는다. 이 “가벼운 무거움”(장석주), 슬픔을 웃음으로 바꾸기까지 그의 마음자리가 어떠했을지 헤아려보게 된다.
집이 날아갔다
새도 아닌데
새는 날아가는 것도 보이지만
집이 날아가는 것은 보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날아갔다
천둥 번개 치지 않았고
회오리바람 불지 않았는데
오, 예
한 마디에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갔다
창도 뒤란도 우물도 있고
담쟁이가 벽을 타고 올라가던 집이
날아가다니
같이 살던 하얀 토끼들도
돌들도 바퀴벌레들도
다 날아가다니
날아간 집을
어디서 찾아야 되나
남의 집 헛간에서
빗방울이 동그랗게
인감도장 찍으며
사라지는 것을
하염없이 보던 아버지는
오, 예
집 뒤 축대 위로 올라가
아직까지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예스맨」
이 시는 비극적인 가정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 예”라는 감탄사가 비극적인 상황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거부할 줄 모르고 현실에 순응하며 살던 가장이 ‘예스’라는 한 마디에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삶을 마감했다는 내용인데 두 번째 쓰인 “오, 예”는 읽는 이에 따라 각기 다른 뉘앙스로 다가들면서 아버지의 죽음이 가진 삶의 비극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세간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집이 날아갔다”는 표현이 이 시에서는 새가 날아가는 것과 대비되면서 그 무거운 집도 가벼운 새처럼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화자의 충격이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특히 “빗방울이 동그랗게 / 인감도장 찍으며 / 사라지는 것”과 같은 표현은 무척 개성 있고 참신한 표현이면서 현실에 밀착해 있는 시선이 아니면 찾기 어려운 표현이다. 그의 시를 보면서 그가 선택한 ‘웃음’에 대해 내내 생각해보게 되었다.
참깨 과자 부스러기를 먹으려고
개미들이
기어가고 있다
좁은 문 앞에서 모서리를 따라
방 끝을 넘어 마루를 가로질러
땅바닥까지 이어져 있다
줄 맨 끝에 있는
개미 한 마리를
핀셋으로 집어 올려
과자 바로 앞까지
옮겨 주었다
-「출세」
‘출세’를 별 것 아닌 걸로 희화화시켜 버리는 이 시는 3, 4연의 전환과 뒤집음, 그리고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제목이 시적 힘을 부여하면서 시와 비시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있는 그의 시의 특성을 잘 드러내준다.
이 끝없이 가벼워지려고 하는 게 신미균 시인의 동력인 것 같다. 시집 뒤쪽에 있는 몇 편의 시들이 어둡고 무거운 현실의 팍팍함이 그대로 묻어나 시를 읽는 재미를 반감시키고 있어 역시 그의 시의 힘은 발랄한 스텝으로 유쾌하게 뒤집고 비트는 데 있다는 걸 실감한다. 「마네킹」에서 보듯 “간도 쓸개도 없”는 결핍과 비극성을 “그래, 속 썩을 일 없어 / 좋다”로 뒤집어버리는 데에야 어느 독자가 웃지 않을 것인가.
금방 낳아놓은 뽀얀 달걀을
당연한 듯 가져가는 손등을
부리로 찍어버리려다
슬그머니 뒷걸음쳐
발톱을 쓱쓱 갈아
땅바닥을 마구 파헤치다가
애벌레라도 한 마리 얻어걸리면
이리저리 작신작신 쪼아버리다가
마당 몇 바퀴 돌고
찬바람 좀 쐬고
물 한 모금 마시고
크게 한 번 날갯짓한 다음
횟대 아래
구석진 곳 찾아들어가
스르르 졸고
-「오래 사는 법」
자신이 보는 앞에서 알을 강탈당하면서도 감히 저항은 못하고 엉뚱한 데 화풀이하다가 “마당 몇 바퀴 돌고 / 찬바람 좀 쐬고 / 물 한 모금 마시고” 마침내 졸음에 이르기까지의 닭의 모습은 영락없이 겁쟁이요, 소시민이요, 이 시대 우리의 모습이다. 그렇게 해서 오래 산다고 해봤자 몇 달 죽음을 유예 받았다가 필경 백숙이나 도리탕으로 삶을 마감하겠지만. 매섭고 예리한 관찰력과 탁월한 묘사력이 돋보인다. 이솝 우화의 한 장면처럼 우화적이면서도 재미있다. 이러한 슬픈 해학미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생의 맨 밑바닥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웃음 속에 못나고 힘이 없고 가엾은 것들에 대한 애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는 콩 한 알, 빨대 하나에도 따스한 시선이 가 있다.
집세가 2년 넘게 밀리다 보면
어느날 갑자기
튀어야 한다
프라이팬에서 볶이던
콩처럼
잡을 새도 없이
한 번 튀면
잡히지 말고
꽁꽁 숨어라
거기서
먼지라도 붙잡고
싹 한번
틔워봐라
-「콩」
위에서 보듯 “요란한 수식어나 꾸밈이 없이 담백하면서도 간결한 표현, 그리고 선명한 이미지의 구축”(강영은)을 통해 웃음과 눈물이 한 뿌리에서 나온 것임을 깨닫게 한다. 그 웃음 속에는 유리조각과 같은 아픔이 배어 있다. “숨이 넘어가도 / 허리가 끊어져도” 웃는다는 건 웃음이 삶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웃는 자의 슬픔이랄까, 웃는 일 외엔 어쩔 도리가 없는 자의 포즈다. “감당하지 못할 바엔 / 가슴에 구멍 몇 개 뚫는 것도 / 나쁘진 않습니다”(「플래카드」)에서 보듯 그 웃음은 삶에서 ‘플래카드의 구멍’ 역할을 한다.
<미래의 여성시에 거는 기대>
지금까지 박홍점, 신미균 두 시인의 시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표현 양식은 다르지만 두 시인의 시집의 공통점은 ‘통증의 시간’을 건너왔다는 것이다. 그것을 비유와 열거 등 다양한 수사적 기법으로 여성적 글쓰기를 시도한 것이 박홍점의 시라면 재치와 유머, 웃음으로 승화시킨 것이 신미균의 시다.
보들레르가 “신이여, 지켜 보기에는 너무나 역겨운 상처의 밑바닥까지 응시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라고 말했듯이 시인은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보아야 하는 사람이다. 남들이 들여다보지 못하는 세계의 이면을 들여다봐야 하며, 바리데기처럼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어야 한다. 그 무거운 책무를 짊어질 미래의 시인들은 어떤 상상력으로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일까. 앞에 인용한 문정희 시인의 말처럼 본질적으로 모든 시인은 여성이어야 하므로 야성을 가진 생명의 목소리를 기대해본다.
첫댓글 처음 신세타령이라는 글을 읽을 때 찔렸네요. 여성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거였는지도...유복자 3대 독자 아버지와 저희 딸넷, 다섯분의 아버지 누님과 엄마의 애증의 관계... 환경이란 건 숨길 수 없어서 시가 아니라도 꼭 글을 쓰면 여자들 얘기가 되어 있더라고요. 근데, 문제는 연민이 너무 과잉되어서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 다른 방법을 취해야 된다고 늘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두 시집 꼭 읽어봐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