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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정재은
어둑신한 토방 부엌 바닥 아궁이 앞에 치마 앞자락에 불빛을 발갛게 받으며 이모님과 나란히 앉았다. 갈비처럼 착착 재어 놓았던 콩대 불을 부풀렸다 다독였다 하시며 불길을 조정하신다. 부지깽이가 너무 짧아져서 이모님의 손등은 금시 새빨갛게 되었다. 짧아져서 못 쓰게 된 부지깽이를 아궁이 속에 던져 놓고 시렁 위에 두었던 부지깽이단을 내리셨다. 엄지손가락 굵기에 1미터의 길이쯤 될까. 마디가 없고 휘지 않는, 매촐하고 맞춤한 부지깽이감 여남은 개가 칡끈에 묶이어 있다. 소나무는 가벼우나 빨리 타 버리는 것이 흠이고, 참나무는 야무지나 무거워 다루기 불편한 것이 흠이어서 가볍고 단단한 싸리나무나 아카시 가지가 부지깽이감으로 귀여움을 받는다.
“불 좀 보겠니? 나갔다 오마.”
부지깽이를 넘겨주시고 이모님은 바지런한 몸짓으로 부엌문을 밀고 나가셨다. 잃었다 찾은 아이의 손목을 잡았을 때처럼 부지깽이는 내 손안에 착 감겨들 듯 살갑게 잡혀져 온다. 아궁이 속에는 두어 뼘 남았던 부지깽이가 전신을 던져 최후의 불길을 파랗게 피워 올리고 있다.
싱싱한 하나의 나뭇가지로 자라 오르다가 어느 날, 부지깽이감으로 점찍혀 이 집 부엌으로 들어왔겠다. 자기의 육신을 자직자직 닳려가며 임무를 지켜 내다가 이제 전신을 불태워 마지막 사명을 다하는 그 아름다운 불꽃에서 나는 이모님, 아니 모든 어머님들의 일생을 보는 것 같아 마음 속에 숙연해져 옴을 느꼈다.
새로 꺼낸 싸리나무 부지깽이는 매캐하고 독한 듯하면서도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꺼멓게 그을고 있다. 낫으로 잘려진 끝면에는 송글송글 진이 맺혀 자글자글 끓고 있다.
내가 여남은 살 때쯤, 나의 할아버님께서는 충주읍에서 삼십 리쯤 떨어진 촌에서 물레방앗간을 돌리고 계셨다. 방앗간에서 나오는 왕겨를 할머님께서는 땔감으로 쓰셨다. 나는 언제나 풍구를 돌리는 할머님 옆에 쭈그리고 앉아 구경을 했다. 왕겨 속에는 미처 탈곡되지 못한 벼 낟알들이 꽤 섞여 있었다. 그 낟알들이 불길을 쏘이며 하얀 매화송이처럼 소담스레 탁탁 튀겨졌다. 할머님은 부지깽이 끝으로 얼른 끌어내어 복지깨(주발뚜껑)에 담아 봉싯하게 모아지면 내게 건네어 주곤 하셨다. 다락에서 꺼내어 주시는 곶감이나 콩엿 따위보다 이 낟알 튀김이 더 내 입맛을 끌었었다. 우리 숙모님이 불을 때실 때면 나는 그만 심드렁하여 골목길을 뛰어나가 아이들과 어울려 버리곤 했다. 숙모님께 낟알 튀김 같은 건 안중(眼中)에도 없었다. 혈육 한 점 없이 청상(靑孀)이 되신 숙모님께서는 부지깽이를 잡고 아궁이 앞에서 앉으면 한숨부터 푸짐스러웠다. 어떤 때는 불을 붙어 버린 부지깽이를 잿속에 묻어 부벼끄다 말고 광기(狂氣)라도 치미는 것처럼 아궁이 속에 마구 휘저어 불길을 아주 죽여 버리고 마신다. 어떤 때는 불붙은 부지깽이를 그대로 설거지통에 덤벙 담가 버리신다. 푸지직 소리를 요란스럽게 내며 재티와 연기를 마구 피워 올리면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피식 웃어 버리신다. 그러다가도 끓어오르는 결을 삭이듯 다소곳이 앉아 도드락도드락 불길을 다독이기도 하셨다. 허허롭다기만 한 숙모님께 부지깽이는 용어리진 가슴을 풀어 보일 수 있는 하나의 반려(伴侶)였다고나 할까. 부지깽이를 다루는 모습으로 나는 숙모님의 심경을 가늠해 내곤 했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숙모님께서는 울면서 할아버님 할머님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친정으로 떠나가셨다.)
태어날 때 쌍가마를 갖고 태어나는 아기가 있다. 자란 후에 두 번 혼인할 팔자의 조짐이라 했다. 이런 아이는 첫돌 날 이마에 숯검정칠을 하고 등에 붉은 고추를 달고 외가엘 간다.
외할아버지의 놋수저와 부지깽이를 훔쳐다 간직하면 영낙없이 액땜이 된다고 한다. 오줌 싸고 키를 쓴 채 소금얻으러 온 이웃집 개구쟁이에게는 소금 뿌리며 부지깽이로 아이랑 키를 훌두드려 내쫓기도 한다. 약이 귀했던 옛 시골에서는 아이들이 기침을 하면, 검은콩, 말린 인동 넝쿨, 흑임자, 부지깽이 끝을 함께 삶아 먹이기도 했다. 부지깽이를 방에 들이면 구설(口舌)이 집안에 든다는 속설도 있고, 부지깽이를 누이면 가운(家運)이 기울고 세우면 가세(家勢)가 일어난다는 믿음도 있다. 사람들이 때묻지 않았던 먼 옛날에는 눈만 뜨면 마주하게 되는 해, 달, 나무, 바위들에게서 의지의 대상을 찾았다고 전해진다. 눈만 뜨면 잡게되는 부지깽이에서 어떤 주술(呪術)적인 영험(靈驗)을 기대했던 시골 여인들의 소박함에 저절로 미소가 보내어진다. 나는 숙모님의 부지깽이 다루는 모습에서 그때그때의 심경의 변화를 느껴 온 것처럼 등갱이 너머 새벽 학교길 아침 짓는 어머니의 부지깽이에서 애틋한 사랑을 느끼고, 조상 대대의 메를 짓는 맏며느리의 부지깽이에서 정성스러운 마음가짐을 느낀다. 그러나 열네다섯 살 때의 나에게는 여자의 길을 호되게 다져 주시던 종조모(從祖母)님의 야무진 부지깽이가 있었다.
6‧25의 겨울, 나는 고향인 괴산의 종조모님댁에 그냥 머물러 있었다. 난리통에 행랑 식구들도 가버리고 따님들도 출가한 뒤라, 종조모님 손수 부엌간에 드시어야 할 때가 많았다. 때마다 아궁이에 불 때는 일이 나의 소임(所任)으로 떨어졌다. 동리 머슴애들이 갓 쪄온 청솔가지가 요긴한 땜감 구실을 했다. 가뜩이나 서툰 소임에 나는 걸핏하면 검은 연기만 뭉실뭉실 피워대곤 했다. 종조모님께서 “여자가 부엌일에 그리 손 떠서 무엇에 쓰냐”고 풀어먹인 망아지 옭아다 길들이듯 호되게 잡도리를 하셨다. “한 손에 달린 손가락도 길고 짧으며, 한 배 빌려 태어난 자식들도 성격들이 아롱이 다롱이여. 층층시하(層層侍下) 시댁 식구들, 그 보비위(補脾胃)해 가며 시집살이 옳게 휘답해 가기가 그리 수월할 줄 아느냐. 여자가 손에 부지깽이 들고 땔감하나 다스리지 못하다니…….”
나의 이마가 널찍하고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해서 갈 데 없이 종갓집 맏며느리가 될 거라 하시며 큰 살림 살 도량(度量)을 익혀 주시느라 하는 것이었다. 출가 후에 며느리 잘 보았다고 떠받들리며 사는 당고모들도 처녀적에는 종아리에 부지깽이 자국 가실 날이 없었다 한다.
“부지깽이 다루는 법 하나만 옳게 터득해도 웬만한 수신책(修身冊) 한 권 뗀 폭은 되느니라.”
고 타이르셨다.
콩대나 깻단을 땔 때에는 살살 부풀려 불길을 세우지만 보릿짚이나 밀짚을 땔 때에는 연신 앞재를 자옥자옥 다독여 가며 불길을 일구어야 하고, 볏짚을 땔 때에는 앞재를 꼭꼭 누르고 볏줌 사이를 헤집어 솔곳이 세우는 듯 들어 주어야 불길이 죽지 않는다 하였다. 부엌 세간이 아무리 많아도 불을 때어 음식을 익히는 일에 그 사명이 집약되듯 번창하고 유세한 가정일수록, 심신이 존절히 닳아가는 그 집안 주부의 극진한 지성이 밑받침되어야 한다는 게 종조모님의 지론이셨다.
더펄거리며 학교에나 뛰어다니던 어리고(종조모님께서는 다 커서 말만 한 계집애라고 하셨지만)설기만 한 나는 야속해서 눈물이 쏟아졌다. 뒤란에 아직도 수십평 좋이 재어 있는 장작더미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여 원망스러웠다.
“유념성(留念性) 없는 여편네 집안 들어먹기 십중팔구여.”
장작더미는 숫제 바라보지도 말라고 몰강스럽게 나무라시었다.
“난세(亂世)일수록 트는 아이들 옳게 가르쳐 놓아야 바라볼 앞날이 있는 법이여.”
종조부님께서는 서당 비슷한 것을 차리고 피난 온 사내아이들에게 장죽(長竹)으로 놋재떨이를 땅땅 치며 글을 가르치시었다. 난세를 한탄하시며 충효 정신, 어진 마음, 바른 행실들에 역점을 두시는 것 같았다. 어쩌다 담배 대통으로 정수리를 얻어맞은 동생이
“누나야, 우리 충주로 달아나 버리자 야.”
하며 커다란 눈에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기도 했다. 야속하기만 했던 부엌에서의 가르침, 사랑방에서의 담뱃대 가르침, 땔감따라 부지깽이를 요령껏다루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안존(安存)해지고 슬기로워지느니라고 일러 주시던 종조모님. 그 꾸지람 속에 간직된, 자라가는 우리의 앞길을 바라보신 깊은 사랑을 철없던 내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었으랴.
여자로서의 마음 쓰임 쓰임새를 종조모님께서는 부지깽이를 통해 일러 주시더니, 지금 못쓰게 되어 아궁이 속으로 던져진 부지깽이는 사랑과 희생으로 일관된 옛 여인들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손끝에 구정물 마를 새 없고, 젊어 배 비어 볼 날 없고, 늙어 한 세상 등 비어 볼 날 없고.”
하시던 할머님의 군소리를 나는 뜻도 모른 채 귀흘려 들은 기억이 난다. 오랜만에 돌아올 자식을 위해 즐기는 음식을 만들다가, 부지깽이를 치켜든 채 뛰어나가 아들을 맞는 모정. 그 모정은 금의환향(錦衣還鄕)이거나, 잠시 잠깐 들렀다 떠나 버릴 탕아(蕩兒)이거나를 가릴 줄 모른다. 워싱턴이 대통령이 되어 귀향하는 날, 밀가루 묻은 손으로 부엌에서 뛰어나와 아들을 맞은 그 어머니의 꾸밈없는 사랑은 모정의 귀감(龜鑑)으로 동서에 회자(膾炙)되어 내려오지 않는가.
솥에서 된김이 푹푹 오르더니 울컥 밥물이 넘치며 솥전을 허옇게 칠해 놓는다. 부엌 바닥을 쓸어 붙인 후 부지깽이를 나무광 구석에 세웠다.
부지깽이를 잊고 살았던 오랜 세월 동안 내 손에는 연탄집게가 쥐어져 있었다. 제 몸을 야금야금 닳려가다가 마지막 일푼까지도 불꽃 속으로 스러지는 부지깽이와, 연탄을 바꾸는 동안 빨갛게 달구어졌다가 이내 본 모양으로 돌아와 조금치의 손해도 용납하지 않는 연탄집게. 종아리를 맞으면서도 따끔한 아픔 속에 안쓰러움을 느끼게 하던 부지깽이와, 흉기처럼 비정하고 살벌하게만 보이는 연탄집게.
요즘 들어 부쩍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청소년 문제가, 부지깽이에서 연탄집게로 바뀌어진 모정의 변형에 혹 그 책임이 있는 게 아닐까 돌이켜본다.
이제는 연탄을 갈고 구멍을 맞추는 수고조차 번거로워서 스위치 하나로 불길을 사르고 지우며 사는 나는 어떤 모습의 사랑을, 어떤 색깔의 가르침을 나의 아이들에게 새겨 주고 있는 것일까.
“촌에서 무어 차반거리가 마땅해야지, 인절미나 한 됫박 쳐줄 터이니 언눔언년들 싸다 주어라.”
찹쌀을 일어 담그고 들어오시는 듯 이모님 손에는 콩바가지가 들려 있었다.인절미를 만들기 위해 오늘밤, 나는 또 모처럼 맷돌을 갈고 절구질을 해야겠다.
문설주에서 수건을 벗어 머리와 어깨에 얹은 재티를 탁탁 떨며 부엌문을 밀고 뜨락으로 나섰다. 산마루 위 하늘가엔 아직도 주황빛이 역력한데 동리는 포도빛 저녁 연기로 자욱하고 헛간채 구석구석엔 지싯지싯 땅거미가 기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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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름답고 아련한, 따뜻하고 찡한..뭐라고 표현해 버리기에도 아까운, 흑백영화 한편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기분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