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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세대에게 헬조선의 미필적 고의를 묻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제목만큼이나 내용도 자못 도전적이다. 나 역시 저자들이 지칭하는 이른바 ‘386세대’의 한 사람으로, 이 책을 읽고 뭔가 내 나름의 답변을 해야 할 것이라고 예단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른바 ‘386세대’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비장한 어조로 다양한 관점에서 비판을 가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저자들이 묻지 않은 것을 애써 답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자못 비장하게 느껴지는 광고 문안과는 달리, 내가 보기에는 저자들의 글쓰기 방법에 오류들이 책의 곳곳에서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고 느껴졌다.
분명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대한민국 민주화의 한 축을 담당했던 386세대 엘리트와 이들의 동료 네트워크는 2019년 현재 대한민국을 이끄는 가장 강력한 집단’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대한민국을 이끄는 가장 강력한 집단’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것은 단지 이른바 ‘386세대’이기 때문만은 아니며, 현재 그들이 주로 50대에 포진해있어 물리적으로 현 사회의 중심적인 세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이전 세대와도 다르고, 이후 세대와도 다른 특별한 ‘혜택’을 누리고 살아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의 집약된 모순들을 온전히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저자들의 태도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이른바 ‘386세대’의 한사람으로서 왜 그렇게 판단하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먼저 저자들은 여의도의 정치권에 포진한 일부의 정치인들과 그 주변인, 사교육 시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강남의 학원 운영자들과 학부모들이 이른바 ‘386세대’를 ‘대표한다고 단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에서 주로 언급되고 있는 이들이 이른바 ‘386세대’의 한사람인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386세대’를 대표하는 존재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생각한 것보다 이른바 ‘386세대’의 스펙트럼은 훨신 넓고 다양하다. 여전히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 몸을 돌보지 않고 투쟁하는 이들도 적지 않으며, 서울이 아닌 전국 곳곳에 작고 큰 공동체를 꾸리면서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고 이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에 비해 저자들이 거론하고 있는 이들은 그 가운데 아주 일부로서, 이른바 386세대'의 사회현상에 편승해 지금의 자리에 오른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들은 정확히 서울의 여의도와 강남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일부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논하면서, 그들이 마치 386세대를 대표하는 것처럼 단정하고 있다. 다시 말하건대 그들은 386세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표상을 이용하거나 혹은 편승해서 활동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른바 ‘386세대’는 대단히 불명확한, 어쩌면 실체가 없는 허상이기가 쉽다. 아마도 출판사에서는 이른바 ‘386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써 몇몇 정치인들의 추천사를 활용해서, 그들의 ‘자성의 변’을 통해서 저자들의 논의가 타당성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우리 사회의 주류로 편입되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의 반성은 386세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의사 표시라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그렇다면 왜 저자들은 다양한 통계수치를 활용한 ‘확증편향’과 몇몇 표본들을 마치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서술하면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자행하고 있는 것일까? 책날개에 적혀진 저자들의 이력을 보니 , 저자들은 기자와 정치인의 보좌관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이들의 시야가 서울의 여의도와 강남에 갇혀있었던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한때 기자들의 칼럼이 글쓰기의 교본처럼 통용되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자들의 글은 일단 비판적인 시각에서 읽게 된다. 교본처럼 여겨지는 글보다는, 부정확한 정보로 확증편향을 내세우는 내용들로 채워진 것이라는 의심을 받으면서 일단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대상이 되었다.(정치인들의 글도 마찬가지다) 이 책의 저자들은 마치 단죄되어야 마땅할 ‘386세대’를 대표하는 이들을 거론하면서, 일찍부터 정치에 입문한 정치인이거나, 1990년대 사교육 시장에서 성장한 막강한 학원 재벌들, 그리고 이에 편승해 강남의 큰손으로 성장한 부동산 부자들을 주로 거론하고 있다.
또 하나 해제를 쓴 우석훈은 저자들을 일컬어 ‘보수적인 시각이 아닌 진보 내부의 시각’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들의 책을 읽으면서 ‘누군가는 억울할 것이다’라고 위로하는 척 하고 있다. 그러면서 ‘억울하지만, 세대라는 분류 자체가 워낙 그렇게 ‘엄벙덤벙’ 넘어가는 거라서 방법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일단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켰던 그의 전작 <88만원 세대>라는 책을 보면서 기대와 달리 실망했던 것이 바로 그가 내세우고 있는 ’엄벙덤벙‘한 시각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마도 우석훈의 '이름값'에 힘입어 ’유명세‘타려는 출판사와 저자들의 시도는 결과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른바 ’386세대‘의 한사람인 나에게는 이 책의 기획은 그다지 성공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실상 비정규직을 백안시하는 대기업의 정규직 노조, 그리고 일반 기업체에서 ‘갑질’을 하는 중견 간부들의 태도에서 중요한 것은, ‘386세대’라는 범주가 아닌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찾아야만 한다. 하지만 저자들은 슬그머니 그들이 주로 50대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것은 ‘386세대’의 문제라고 치부하고 있다. 드라마 ‘스카이캐슬’로 상징되는 강남의 사교육 열풍도 결국 우리 사회의 교육정책과 망가진 공교육의 시스템의 문제와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그러나 역시 저자들은 그러한 현상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물리적인 나이가 386세대이기 때문에 당신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거듭하고 있다. 다양한 통계 정보는 50대를 대상으로 하고 잇으면서, 저자들의 눈이 향하는 곳은 서울의 여의도와 강남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나는 저자들의 논리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지닌 미덕은 분명히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이른바 386세대라고 칭하는 현재의 50대들은 이전과 이후의 세대들에 비해서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교육을 받고 사회에 진출했다. 그리고 민주화의 과정에서 한 역할 이상으로 보상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논리적 비약이 적지 않지만, 현재의 한국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더 많이 노력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당위를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추천사를 썼던 이들과 유사한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현재 50대의 독자들은 저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386세대’의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느 사람은 드물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저자들의 시선이 ‘서울의 여의도와 강남’을 벗어나, 전국 각지에서 여전히 헌신하는 이들을 조명하면서 ‘386 세대 희망’을 아울러 집필한다면 그 비판의 균형이 어느 정도 맞춰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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