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집을 찾았다가
몇 년 만에 찾은 비워둔 고향집
텃밭은 도둑고양이 놀이터가
되어 있고
감나무 가지에 걸려 있는
폐비닐 몇 조각이
나폴대며 나를 맞아 준다.
허물어진 기둥 우편함엔
빛바랜 고지서와 광고지가
부재중인 수취인을 기다리고 있고
닫혀 있는 대문 틈으로
지난여름 무성했던
풀잎더미 어지러운
마당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무심한 세월에 묻혀
이방인 아닌
이방인이 되어버린 나를
사정을 알 리 없는 이웃집 개가
나들이 가다말고 멈춰 서서
수상한 눈길을 주고 간다.
너무 깊이 잠겨 있어
안에 한 번 들지도 못 하고
밖에서만 서성이다가
인적 하나 없는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 걸음이
군데군데 새로 들어선
슬라브집 굳게 닫혀 있는
철대문만큼이나 무겁다.
찬 눈발 흩날리는
스산한 십이월의 저녁답.
어머니 묘소 앞에서
솔바람 향 피우는
자욱한 골짜구니
말없는 봉분 앞에
도래솔로 둘러서서
생전에 도탑던 손길
비에 젖어 봅니다
어머님 가꾸시던
선산先山 밑 고추밭둑
무성한 잡풀 속에
야윈 수수 두어 그루
예전엔 밭이었다며
비를 맞고 있습니다
흐르고 또 흘러도
산과 들은 그 자린데
연연한 골 능선에
강심江心으로 잠긴 연緣이
가슴속 후미진 길을
빗금 지며 흐릅니다
그리운 까치소리
이른 아침 마을회관 옆
이동통신 전신주 위에
까마귀가 와서 울고 있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고
까마귀가 울면
불길한 일들이 있다고 하는데
까치가 앉아 있던 자리에
까마귀가 올라앉아
울고 있으니
지나는 사람들마다
곱지 않은 얼굴로 쳐다보고 간다.
그러지 않아도
FTA 체결이다 뭐다 해서
농촌이 힘들게 되었다고
걱정들인데
까마귀까지 날아와 울어대니
마음이 가볍지 않다.
소리 내어 마음껏
울 수도 없는 사람들 가슴을
무겁게 파고든다.
다 떠나가고
마른 수세미 같은
노인들만 남아 있는 마을
그 많던 까치들은
다 어디로 날아갔는지
까치집이 사람들 마음처럼
텅 비어 있다.
까치가 울지 않아
손님이 오지 않는 게 아니라
찾아올 반가운 손님이 없어서
까치가 날아간 것인가.
세상 어디에서도
반가운 소식이 들려오지 않아
이제 까치가 다시 돌아와도
깍 깍 깍 경쾌한 소리로 울 수 있을지
대답이 궁한 틈 사이로
더운 바람이 스쳐지나간다.
쓸쓸한 자유
반공포로 석방 때정든 고향 부모형제 두고자유 찾아 대한민국에 남은 황씨연고 없는 이 땅에 정착하여머슴살이하며 장가들어아들딸과 행복하게 살던 모습아프게 아름답더니불유구不踰矩를 넘기면서불의의 교통사고로사랑하는 아내 먼저 보내고팔순 노구를 전동차에 의지해낯익은 마을길 오가며텅 빈 외로움을힘겹게 삼키시더니모진 추위 몰아친지난겨울 차가운 방에서쓸쓸히 가셨다.생전에꿈에도 그리던 북녘 고향아스라이 먼 그 길제대로 찾아나 가셨는지?고향 갈 때면말없이 마을 회관 되돌아오가던 모습 선연한데느티나무 정자 앞 그 길이텅 비어 있다.빈자리에도봄이라고새 잎 피어 푸르고그가 간 뒷산에서뻐꾸기가 울고 있다.뻐꾹뻐꾹저 소리고향 뻐꾸기 같다며헐겁게 웃던 황씨한 맺힌 그 모습 되살아나가슴을 적신다.
어떤 인생
꽃다운 스물다섯
죄 많은 청상靑孀 되어
눈물로 지켜 온 여든 한 평생
언제 한 번 허리 펴고
누워 볼 날 있었으랴.
불같은 시부모님 지성으로 봉양하고
억새 같은 시누이 형제
가슴 삭여 인정 잇고
두 아들 딸 하나 금지옥엽 키워
하늘같은 손주 손녀 사랑에
등 굽는 줄 모르시더니,
철들자 제 갈길 다 떠나가고
넓은 방 뼈만 남은 다리 움켜쥐고
홀로 누워 계시다기에
소문 듣고 달려가 거친 손 모아 쥐자
더운 눈물 떨구시며
사무치는 회한에
차라리 눈 감으시고
울먹울먹 이르시는 말씀.
웬 목숨 이리 질긴 줄 모르겠다는
한 배인 한 마디뿐.
등 굽혀 지켜 온 한 많은 세월이
종가집 안방 댓마루에 걸려
아슬아슬 정지해 있더니,
텅 빈 그 자리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사람들 속에서
가을이라고
감이 저리 붉다.
먼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는데
자식들 모두 도회지로 떠나보내고
혼자서 고향을 지키는 삼종형님.
고향이란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곳.
그러나 이젠 마음 놓고 함께 울 언덕마저
무너져 가고 있다.
먼 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는데
길 위에 혼자 서 있다.
추석낙수秋夕落穗
추석 앞두고 고향 마을 뒷산에 올라 보면 안다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왜 그리도 자식 낳기를 소원했는지를
어디까지가 산이고 무덤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억새와 상수리와 아카시아가 숲을 이룬 무덤과
말끔하게 이발을 하고 은근한 술 냄새까지 날리며
한껏 여유로운 모습으로 누워 있는 봉분들
하나는 쓸쓸한 풀숲에서 잔뜩 풀이 죽어 있고
다른 하나는 절로 위세가 당당하다
그 쓸쓸함과 당당함의 거리를 오가다 보면
자식은 그저 거추장스런 짐일 뿐이고
중요한 건 어제가 아니라 오늘이라고 우기는 젊은이들도
세상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머니의 스냅 사진
그 흔한 독사진獨寫眞 한 장
안 남기시고
가신 지 마흔두 해
아껴 두신 무명 저고리 속에서
기적같이 찾아낸
빛바랜 스냅사진 한 장
희미한 풍경 속에
작은 점 하나로 남은 모습
얼굴만 몇 십 배 확대해 놓고
그 앞에서 마냥 행복한 늙은 아이
몇 번을 보고 또 보고
눈이 붙어 버렸다
말 없는 말씀으로
한없는 사랑 주시던 그 모습
다시 살아오신 감격에 꿈만 같다
이젠 할머니를 모르고 살아온
내 아이들에게
나도 너희들 같이
어머니가 계신다고
마음껏 자랑을 하고 싶다
그래서 그런지
이 밤엔 별빛이 유난히 밝다
어머니 어머니
얼굴을 익히기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얼굴이 보고 싶다는 K.
'어머니'라는 말만 들어도
금세 눈시울이 젖는다.
사진이라도 남아 있나 해서
집 안 곳곳을 뒤져보나
찾을 수 없어 10리 길
면사무소까지 찾아가 봐도
주민증도 없던 시절이라
사진이 없다는 허망한 대답뿐.
혈육인 외삼촌과 이모님 모습에서 어머니 얼굴 윤곽이라도
찾아보려 하나,
그 또한 사진 한 장 못 남기고
저 세상 가신지 오래라
허탈한 중에 60년 전
내가 그 어머니 얼굴을
안다고 하니
연고도 없는 내게 기억을 되살려
윤곽만이라도 그려 달라고 애원한다.
꿈에라도 나오시면
눈 속 깊이깊이
새겨 두고 싶은데
야속하게도 어머니는 꿈에도 나오시질 않는다며
하염없이 먼 하늘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시는 K.
바라보는 가슴이 아프다.
세상에 이보다 더한 아픔이
또 있을까?눈시울이 젖는 K 앞에서
가신 지 50년 만에 유품인
어머니 무명저고리에서
기적처럼 찾아낸
작고 희미한 스냅사진 속
점 하나로 남은 어머니 얼굴을
몇 십 배로 확대해 놓고
행복해 한 내가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