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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7번 말씀
제목 : 평안하십니까?
본문 : 요 20:19-23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또 여러 사람에게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이렇게 숨어 있습니다. 그리로 지금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거죠? 본문 19절을 보시면 ‘이날’ 이라고 시작이 되죠? 이날,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란 뜻이에요. 부활하신 날 저녁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이제 찾아오시는 거죠. 그때는 이미 마리아와 여자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 모두에게 전해진 후입니다. 아침에 봤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황급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제자들에게 예수님 만난 이야기를 전한 이후란 말이에요. 그들이 지금 다 모여 있는 거예요.
눅 24:31-35
저희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요]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신앙이라는 것은 이렇게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그들이 알아보자마자 사라져버리는 거라 그랬죠?]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이게 다른 거죠, 그죠?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웠다, 라는 거예요. 그게 신앙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죠?]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이렇게 시몬도 이야기를 하고 본 이들이 지금 계속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제자들은 여전히 어떻게 했다 그래요? ‘두려워하여’ 이게 중요한 단어죠. 두려워하여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다, 그러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이 그들의 두려움을 없애주지 못한 거예요. 이거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흡사하죠? 그죠? 우리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거 믿죠? 우리 안에 함께 계신다는 거 믿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미래가 두렵죠? 두렵잖아요? 불안하고.
그때 예수께서 빗장을 걸어놓은 그들의 은신처로 그림자처럼 들어온 거예요. 뚫고 들어온 거예요. 그게 부활의 몸의 특징이에요. 그리고는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고 인사를 하셨어요. 지난주에 우리가 공부했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평강, 샬롬을 전하라, 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 인사를 하시는 거예요. 평강이 있을지어다. 지금 이 그림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땅 안에 갇혀서 빗장을 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처소로 하나님께서 직접 뚫고 들어오셔서 그들의 두려움을 몰아내고 평강의 상태로 만드는 구속의 그림을 이렇게 작은 그림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이 세상에 Incarnation 성육신하여 우리 주님이 뚫고 내려오셔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 땅에 갇혀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평강을 선물하는 그런 구속의 이야기를 이 작은 그림으로 지금 간단하게 보여주는 거죠? 제자들이 문을 열어줘서 들어오신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신 것도 아니에요.
요한계시록 불찌어다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문을 여는 자는 나로 더불어 먹고 내가 그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건 우리에게 문을 열라고 요구하는 거 아니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그건 이미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이라 그랬죠? 그래갖고 뭐 성화같은 데 보면은 문 안쪽에는 문고리가 있는데 바깥에는 문고리가 없어서 예수님은 그냥 계속 이렇게 헛손질을 하고 안에서만 열어줄 수 있다! 그러니까 반응하라, 사기들 치는데 그런 거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뚫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데 무슨 문을 두들겨요, 두들기기는. 그게 구원인 거예요. 폭력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밀고 들어와서 그의 인생에 평강을 심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구원이에요.
태초에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그들에게는 원래 두려움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당연하죠, 그죠?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자기 가치를 염두에 둘 수 없는 그런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여러분 내가 내 가치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두려움이라는 게 있을 수 없어요. 내가 내 가치를 스스로 정하면 그때부터 두려움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라는 건요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잘 새겨들으셔야 돼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과 똑같은 존재라는 뜻이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또. 어디 가서 또 그 얘기만 딱 떼어서 하면 저 이단으로 또 몰립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단어 자체는 하나님과 똑같은 존재라는 뜻이에요.
고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여기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 나오죠? 그 말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란 말이에요. 근데 예수님께서 이 역사 속에서 성육신하신 상태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의 삶을 사셨습니까?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이 땅에 성육신하여 내려와 있는데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이시다, 라고 이야기를 한단 말이에요. 어떻게 예수님이 이 역사 속에서, 이 공간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삶을 사셨죠? 자기를 완전히 비우고 하나님께서 그 영광으로 예수님 안을 채우심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사신 거죠. 그거에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건, 인간이 대단한 능력을 지닌 존재로 창조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을 완전히 비워낸 상태에서, 그걸 절대 의존적 존재라 그래요. 어려운 말로. 완전히 비워낸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과 말씀으로만 그 안을 채워서 하나님의 장갑으로 살아야 되는 존재였단 말입니다. 장갑이에요. 장갑은 아무 가치가 없는데, 아무 힘이 없는데 그 속에 주인의 손이 쑥 들어가면 그 장갑이 주인과 방불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게. 장갑에는 가치 없어요. 장갑에는 힘이 없어요. 그러나 그 안에 주인의 손이 들어갔을 때 장갑과 주인의 손은 일체가 되는 거예요. 자,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에요.
그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을 보여주는 그림이기도 해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도 그런 원리로 이해를 하시면 편해요. 각자가 자신을 비우고 상대방이 그 속에서 뜻으로 능력으로 일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일체에요. 삼위인데. 뜻이 다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비워진 상태에서 상대방이 들어오는데 그 상대방들이 전부 완벽한 존재란 말에요. 그래서 뜻이 갈라질 수도 없을 뿐만이 아니라 그 자체가 완벽하고 완전한 거예요. 그게 삼위일체에요.
그렇게 뜻과 능력과 성품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이에요. 하나님 나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가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는 거예요. 각자의 개체가 자기를 다 비우는데 그 상대방이 나를 채우는 존재양식. 인본주의의 사고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존재양식이에요.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존재양식을 따라 인간이 존재할 때 인간에게 두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까? 내 안에 하나님이 가득 차는데? 자기 안에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채워져 있는데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을 부끄러워하겠어요? 주인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분이에요. 그런데 장갑이 홀로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면 그게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자신 안을 채우고 계시던 하나님을 몰아낸 거죠. 그렇게 피조물에게서 하나님의 생명력이 차단이 된 상태를 성경은 죽었다, 라고 표현을 해요. 죽었다. 그 죽음이 두려움을 동반하여 인간에게 들이닥치는 거예요.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죽기를 무서워하고, 요 두려워하고, 같은 단업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의 두려움은 어디서 기인한 거예요? 죽기를 두려워함으로, 에요. 사망에서 기인한 거예요. 모든 인간의 두려움은 다 거기서 오는 거예요. 사망에서. 사망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에게 두려움이 다가오는 거예요.
창 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기에서 두려움이 들어오는 거죠. 뭣 때문에? 죄 때문에. 죄 때문에 뭐가 와요? 사망이 와요. 그 사망에 의해 두려움이 들어오는 거예요. 정년 죽으리라, 무트 타무트라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니까 이미 이들은 이제 사망에 던져진 거예요. 그 사망 때문에 두려움이 인간들에게 들어오는 거예요.
원래 인간은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도록 지어지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뭐 누드로 살도록 지어졌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잘 새겨들으세요. 오히려 인간은 완전히 벗은 상태에서, 그러니까 자기를 비운 상태에서, 란 뜻이에요. 완전히 벗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며 살도록 지어진 존재에요. 자기의 옷을 입으면 안 되는 거예요. 자기 뜻을 내세우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왕이 자기 옷을 입고 온 사람을 내쫓은 거죠.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라고. 그죠? 주인이 준 옷만 입어야 돼요. 그걸 예복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인간이 세상의 그 어떤 옷으로도 자신을 치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을 복종하며 수행해내는 그 상태를 싸다크, 의로운 상태라고 하는 거고, 의라고 하는 거예요, 그것을. 그걸 굳이 그림 언어로 표현을 하면 의의 흰 옷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의의 상태를. 그러니까 자기 걸 다 벗고 자기의 뜻을 내려놓고,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워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내는 그 모습을 의로운 상태라고 하고 그걸 그림 언어로 의의 흰옷을 입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천국 가면 전부 하얀 옷 입고 돌아다닌다고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옷을 입고 다닐 거예요.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나 뜻이나 소원을 가질 수 없는 존재였어요. 원래가.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에 대한 기대나 소원이나 희망을 가시지면 안 돼요. 원래 그 자리로 성숙되어 가는 거예요, 우리는요. 그 자리가 원래 우리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래야 두려움이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가치 판단에 의해서 스스로 되어지고 싶은 자리를 설정하게 되면 그때부터 불안함이 와요. 그때부터 두려움이 엄습해온단 말입니다. 그때부터 조바심이 나게 되고 상실과 손해와 실패와 상함에 대한 두려움이 찾아오는 거예요. 내가 되고 싶은 어떤 지점이 설정되면. 인간은 원래 그렇게 살도록 안 지어졌다니까요. 그래야 두려움이 없어요. 그걸 다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걸 자유라고 하는 거예요. 구속이 아니라 그게 자유라니까요. 그래서 성경이 두려워하는 자들이 둘째 사망으로 들어간다, 라고 하는 거고 그들은 반드시 형벌을 받게 된다, 라고 선언을 해버리는 거예요.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보시는 것처럼 둘째 사망으로 들어가는 자들의 일 순위가 두려워하는 자들이에요. 첫째 사망은 뭐에요?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이 첫째 사망 속에서 태어나요.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가 첫째 사망에 들어있는 상태에요. 둘째 사망은? 영원한 지옥. 영원한 사망이 둘째 사망이에요. 그 둘째 사망으로 들어가는 이들, 일 순위가 누구에요? 두려워하는 자에요. 두려워하는 자.
이렇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사망에 대한 두려움을 몰아내고 원래의 창조 목적대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께 다 맡기며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사는 자로 만들어 내는 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그렇게 만들라면 우리의 무엇이 끊어져야 돼요? 꿈과 희망과 비전이 끊어져야 돼요. 그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꿈과 야망과 비전을 심어주고 격려해주고 성취시켜준다고 그러는데 그게 교회가 맞아요? 아닙니다, 여러분. 그거는 교회라고 하지 않는 거예요.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대요.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대요. 이거는 사랑하라, 라고 이야기하는 거 아닙니다, 여러분. 여기 나중에, 바로 윗 구절을 보시면, 사랑은 하나님이니, 그래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랑이 되어 우리에게 뚫고 들어와 두려움을 몰아내는 거지 우리가 사랑하여 형벌을 모면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보잔 말에요, 요한일서 4장 16절.
요일 4:16-17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그렇죠? 오늘 본문이 바로 이 전체 구원의 이야기를 작은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주님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된 자들이 빗장을 걸어놓고 두려움에 휩싸여 있을 때에 홀연히 그들의 두려움을 뚫고 그들 가운데로 들어오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고 두려움의 그 멸망, 사망의 멸망을 선언해버리는 거예요. 인간의 두려움, 그 두려움의 멸망과 인간의 사망, 그 사망의 멸망을 선언해버리는 거예요. 그 두려움의 멸망과 사망의 멸망을 평강, 에이레네, 평화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의 감정이 기뻐지고 편안해지고 이런 걸 평화, 평강이라고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강은 우리가 처해지게 될 그 종국의 사망, 그게 하나님에 의해 멸망 받았다. Death of death in death of Christ. 예수의 죽음 안에서 죽은 그 죽음, 그걸 믿으므로 받아들이는 그 상태를 평강이라고 해요.
편안과 평강을 여러분 구별하셔야 돼요. 성경이 주는 평강은 세상이 말하는 평화나 세상이 말하는 편안함이 아니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는데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라 그랬단 말이에요. 세상이 줄 수 있는 편안, 세상이 줄 수 있는 평화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그 평강, 그 평화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다른 종교에서도 다 줄 수 있는 거예요. 지금 여기에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평강은 그러한 유의 평강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이란 죄와 사망의 그늘 속에서 두려워하고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불가항력적 은혜로 찾아오신 주님의 값없는 은혜를 의지하고 믿는 것, 이걸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거예요. 거기에 인간들이 보탤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두려워하고만 있었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신 거예요. 그리고는 평강을, 사망의 멸망을 선포해버리는 거예요. 그게 구원이에요, 여러분.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여느 종교와 다를 바가 없는 그런 이상한 집단으로 변질이 되고 말았죠? 기독교가 우리의 열심과 정성을 하나님께 드려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이상한 잡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절대 그런 건 기독교가 아니다, 라고 딱 잘라 이야기를 해줘요. 그런데도 문을 나서면서 잊어버려요.
롬 11: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만물, Everything! 모든 게 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대요. 근데 니네 게 뭐가 있다고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얘기냐? 이 말이에요. 그리고 보상을 받겠다고? 이런 뜻이에요. 근데 우리는 뭔가 하나님 앞에 기특한 걸 내어놓고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기를 원해죠. 그보다 조금 나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상을 받기를 원해요. 이 세상에선 안 줘도 되지만 하나님 나라에선 내가 상급 받아야 된다는 거죠?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에요.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보상을 받겠느냐? 란 뜻이에요. 니네 게 어디 있다고. 너희들 안에서 나오는 선행도 다 하나님이 너희들 안에서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거고. 니들 소유도 다 하나님이 준거고 그러면, 뭘 주겠다는 거야 니들이? 이런 뜻이에요. 근데 그거 받고 내가 너희들에게 상 줘야 돼? 이런 뜻입니다. 근데 그거 하겠다는 아니에요? 오늘날은?
사도행전 17장으로 가서 바울의 설교 일부를 한번 읽어보죠.
행 17:24-25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사람이 지은 전에 하나님이 머무시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를 성전이라고 하시면 안 돼요, 여러분. 성전은 어디에요? 여러분 몸이 성전이에요. 하나님이 좌정하시는 곳. 여기는 예배당이에요. 우리 어렸을 때는 이 위에 신발신고도 못 올라왔어요. 애들이 만약에 놀다가 여기로 올라왔다, 그럼 걔는 맞아 죽어요, 장로님들한테. 거룩한 성전에 애새끼들이 올라와서 장난친다고. 얼마나 두들겨 팼는지 말이죠, 응? 그냥 예배당이에요, 여기는. 예배드리는 장소. 우리는 지금 신약시대에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리죠? 구약 때는 성전에서 예배드렸지만 이제는 성경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성령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든 예배처소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성전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전, 성전 그러지 마세요. 성지순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에요? 거기가? 아니에요. 성지순례는 여러분이 성지라니까요, 성전이에요. 서로 더듬으세요. 성지순례, 여기. ㅎㅎ. 네?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예수님께서 두려움 속에 있던 제자들에게 평강을 말씀하시면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세요. 두려움을 몰아내는 도구 치고는 너무 초라하죠? 뭐 좀 우리가 원하는 대단한 거를, 로마 군대를 한 이백 영 데리고 오던지 이백 여단 정도 몰고 오던지 아니면 뭐 그냥 솔로몬 시대에 한 백배에 달하는 은과 금을 갖고 오던지, 갖고 와서 척 내려놓으면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러면 너무 평강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근데 고작 손을 보여주고 옆구리 보여주면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 이러고 있어요. 그럼 그게 뭐에요? 그게 왜 평강이에요? 우리에게 평강의 근거가 돼야 돼요? 제자들이 안 그랬을 거 같으세요? 여러분?
우리도 그러잖아요? 우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기뻐하라!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미는 게 뭐에요? 십자가에요!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뚫린 구멍은 십자가를 모형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에요. 인간의 평강의 근거는, 평화의 근거는, 평안의 근거는 십자가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평강을 기원하면서 십자가를 내놓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의 평강을 위해 돈과 명예와 관계와 인기와 건강, 이런 것들을 챙기잖아요? 근데 그걸 평강의 근거요 조건으로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고작 벽을 뚫고 들어와서 내민 건, 십자가란 말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평강을 느낄 수 있어야 돼요, 여러분. 절대 평강은 여러분의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기뻐지고 이런 걸 평강이라고 하지 않아요. 그게 평강이라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해서, 고 짧은 구절에, 두 번 반복해서 말씀하시는데.
첫 번째 예수님이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까 제자들이 기뻐했다, 그러죠? 그러면 그들이 평강을 느낀 거예요? 그때? 그렇다면 곧바로 또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할 필요가 없잖아요? 근데 예수님이 금방 또 그들이 기뻐하고 있는데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신단 말이죠.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와서 이제 이 로마를 물리치고 다윗 왕국을 재건할 것이다, 라는 막연한 추측과 기대 때문에 기뻐한 거거든요. 그건 평강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금방 또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이야기를 하세요. 그러면서 다른 그림 언어로 또 보여주세요. 평강이 뭔지를. 못 알아들으니까.
평강은 우리가 일시적으로 느끼는 편안함이나 안전함이나 안락함이 아닌 거예요. 평강은 하나님이 이루신 역사적이며 객관적인 사실에 의한 어떠한 완료, 그 상태를 그냥 평강이라고 해요. 그리고 그게 나에게 뚫고 들어와서 이 완료된 상태, 이게 내 삶 속에서 이미 이루어졌다, 라는 것 때문에, 그것 때문에 내가 사망에 의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 그걸 평강이라 그래요. 그래서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거죠
여러분이 예수를 조금 알았을 때, 아예 몰랐을 때, 그리고 지금 이렇게 많이 알 때 비교해보세요. 여러분에게 있어서 변한 점이 뭐에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좀 성숙되어진 분도 계시겠지만 그건 뭐 다 도낀개낀이고 진짜 변한 거? 죽음에 대한 관점이 달라지는 거예요. 얼마나 무서웠어요? 옛날에 그게? 근데 이제는 죽으면 하나님 나라 문 열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는데 뭐? 이런 마음이 뭐 줄곧 들지는 않지만 그런 마음이 나를 평강 속으로 이끌잖아요. 완료 돼 있는 어떤 현실이 있단 말에요. 하나님에 의해 완료 돼 있는 현실. 내가 그걸 이루어가는 길이라면 여러분은 절대 평강을 못 느껴요. 왜냐하면 나는 늘 실패하기 때문에, 자주 넘어지기 때문에 절대 그걸 평강이라고 하지 않아요. 나를 전혀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이 완료해놓으신 역사적, 객관적 사실 그것만을 붙드는 걸 그걸 평강이라고 하는 거예요.
민 6:22-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평강, 우리가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가는 목적, 일차적인 목적이 평강이에요. 그래서 모세가 출애굽 한 이스라엘, 교회를 상징하는 거죠? 그 교회의 목적지를 평강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바울서신의 인사말 중에 평강이 안 들어간 책이 있으면 저한테 얘기해주세요. 은혜와 평강이라는 단어가 안 들어가 있는 책이 있으면. 평강은 다 들어가 있어요. 그게 평강, 성도들에게 반드시 와야 할 평강이에요. 다른 평강이 아니라. 평화나 평안이, 편안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평강.
그러면, 그렇게 우리의 도달해야할 목적지가 평강, 평화라면, 그러니까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거예요. 의지하는 거예요. 그걸 평화라 그래요. 그분이 다 이루시는 거니까. 그런데 왜 구약에서는 거짓선지자들이 평안하다, 평안하다, 그거 평강이거든요. 왜 구약에서는 거짓선지자들이 평안하다, 평안하다, 라는 말로 사람들을 미혹했을까요? 그거 좋은 말 아니에요? 예수님이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이야기한 거와 거짓선지자들이 평안하다, 평안하다, 한 거랑 뭐가 달라요? 근데 왜 구약에서 거짓선지자들의 특징을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는 자들이라고 이야기 할까요?
렘 6:12-14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렘 14:13-14
이에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시리라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
뭐라고? 평강하다, 편안하다, 라고 예언했다는 거예요. 나는 그런 놈들 보낸 적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뭐가 다른 겁니까? 여러분? 이런 거짓선지자들의 평강과 예수님이 전한 평강이 어떻게 달라요? 같은 예레미야서에서 진짜 선지자 예레미야도 평강을 약속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 둘을 비교해보면 진짜 평강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죠?
렘 29:3-9
유다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보내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가게 한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의 손에 위탁하였더라 일렀으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 선지자들에게와 복술에게 혹하지 말며 너희가 꾼바 꿈도 신청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거짓선지자, 예언, 꿈 이런 얘기 제발 좀 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말씀하시잖아요? 꿈 얘기 좀 하지 마세요, 제발. 심지어 목사에게 해몽해달라고 전한테 전화하는 사람이 있어요. 거짓선지자들도 평강을 전하고 예레미야도 지금 평강을 전하는데 예레미야가 전한 평강에는 전제가 포함돼 있죠? 뭐에요? 바벨론 포로라는 형벌이 전제돼 있단 말입니다, 형벌.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가서 형벌을 받은 후에, 즉 공의가 채워진 후에 평강이 임할 거라는 얘기거든요. 그 평강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거예요. 하나님의 공의가 채워진 이후에, 완료된 이후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 평강. 근데 그 공의가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평안하다, 평안하다, 너희가 열심히 한번 해봐. 평안에 이를 수 있을 거야, 라는 그 평안, 이건 거짓선지자들이 하는 이야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지는 평안은 일차적으로 누가 완료시킨 거예요? 하나님이 완료하여 우리에게 선물해주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하여 챙겨 가시고 그리고 완료된 그 상태. 그 언약의 성취의 그 현실, 그게 평강이에요. 그걸 우리에게 주겠다는 거예요. 예레미야가 이야기한 건 바로 그건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우리에게 해결해주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성육신 하여 오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신 거예요. 그래서 부활의 현장에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가 나오는 거예요. 구약에서 이야기한 바로 그 평강. 모세가 이야기한 그 평강. 예레미야가 이야기한 그 평강. 내가 공의를 충족시키고 그 평강을 완성해냈으니까 이제 너희가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걸 여러분이 확실히 믿음 안에서 꼭 붙드는 거예요. 그걸 신앙생활이라 그래요. 붙들면 붙들수록 여러분은 사망으로부터 자유로와지고 그 상태를 평강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 미가는 예수가 바로 인류의 평강이다, 라고 명확하게 선포한 거예요. 예수님이 평강이다, 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어떤 현상이나 상황이 평강이 아니라 예수님ㅇ리 평강이다, 라고 이야기한다니까요. 볼까요? 미가서 5장이죠.
미 5:2-5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그러므로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누가? 베들레헴에서 나는 그 아기가.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평강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누군지 알아야 평강을 누리죠. 두려워하는 거예요.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 거예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까 두려운 거예요. 무서운 거예요. 그러니까 빗장을 걸고 숨어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하늘과 차단된 상태에서 이 땅에다가 빗장을 걸고 숨어 있는 상태를 지옥이라고 한다 그랬죠? 거기에 하나님이 뚫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당신의 백성만 싹 골라서 데리고 가시는 거예요. 평강을 주어서. 그들을 덮치고 있는 사망을 죽여 버리고 그들을 싹 건져서 올라가는 걸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 그 복음의 현실을 믿는 이는 이제 두려울 것이 없어지죠. 심지어 육신의 몸이 죽는다고 해도 그 죽음 속에서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된 게 성도에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죽음의 현장, 육의 죽음의 현장에서 바로 그 평강의 모습을 보이고 가게 될 겁니다.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몸의 죽음이 아니라는 거죠? 그거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잖아요. 진짜 두려워해야 될 게 뭐래요? 영혼을 영원히 지옥에서 멸하시는 하나님. 그게 두 번째 사망이거든요. 지옥을 두려워하라는 거예요. 근데 우리의 몸이 죽어도 하나님이 우리의 편인 이상 우리의 영혼은 영원 속에서 평강을 누리게 된다는 영적 현실을 이해한 사람은 몸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거예요. 죽음은 정말 무시무시한 겁니다, 여러분. 731부대에서 애기엄마들하고 애기들을 같이 그냥 철로 된 방에다 넣고 불을 땠다 그랬죠? 그때 애기 엄마들이 백프로 다 애기를 밟고 올라섰대요. 죽음은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모성이고 나발이고 없어요. 죽음 앞에서는. 몸이 타는데 그 죽음이 얼마나 두려운지. 그 젖먹이 애기를 엄마들이 밟고 올라갔었다는 거예요. 아이 뜨거, 아이 뜨거. 그만큼 무서운 거예요. 사형수들이요 교수대로 향하는 길에 계단을 삐끗 잘못 밟으면 아이고 죽을 뻔 했네, 그런대요. 그러니까 무의식 속에서도 그 죽음은 무서운 거예요. 이제 곧 죽으러 가는데 살짝 삐끗했다고 아이고 죽을 뻔했네, 그런다고요. 무시무시한 거예요. 근데 성도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어요. 네, 여러분이 그 자리로 지어져 가는 거예요. 그걸 평강이라 그래요. 평강에 들어가 있는 사람.
그러한 평강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줬던 인물이 베드로죠? 사형집행 바로 전날 감옥에서 코를 골며 자는 거예요. 천사가 와서 옆구리를 냅다 발길로 찼죠. 열 받아서 ㅎ, 내가 널 깨워야 되겠냐? 이 시점에서? 응? ㅎㅎ. 평강이에요. 다음 날 죽어야 되는데 잠이 와요? 여러분? 아니, 약을 멕이지 않고는 어떻게 그 시점에 잠이 오냐고요? 근데 쿨쿨 자고 있었어요. 그걸 평강이라 그래요. 이렇게 하나님의 평강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함으로 해서 그 선한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당신의 약속대로 영원 속에서 영생으로 살리실 것을 믿기에 평강할 수 있는 거예요. 그 평강이라는 단어 히브리어 샤롬이, 샬롬, 샤롬이 동사로 쓰인 곳이 있는데 그것을 보시면 좀 더 이해가 쉬우실 거예요. 왕상 9장 25절.
왕상 9:25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단 위에 해마다 세 번씩 번제와 감사제를 드리고 또 여호와 앞에 있는 단에 분향하니라 이에 전 역사가 마치니라
[성전 짓는 일이 완료됐다, 이런 뜻이에요]
<표준새번역>
솔로몬은, 한 해에 세 번씩 주님의 제단에서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드리고, 또 주님 앞에서 분향하였다. 이렇게 그는 성전 짓는 일을 완수하였다.
여기에 평강이란 단어가 숨어 있어요. ‘완수하다, 마치다’, ‘성전을 완수했다’, ‘성전을 마쳤다’. 라는 고 단어가 샤롬이에요. 평강이란 뜻이에요. 평강하다, 평화롭다,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평강이라는 단어 샬롬이라는 단어는 하나님 측에서 완료하시고 마치시는 것에서 기인하는 하나님의 선물의 개념인 거예요. 아, 내 마음에 이렇게 평강이 없어? 평화가 없어? 이런 말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여러분 마음 편안하게 해주고 기쁘게 해주는 게 평강 아니란 말입니다. 평강은 하나님이 성진 짓기, 새 성전, 우리를 얘기하는 거예요, 성전 짓기를 하나님께서 완료하시는 그 상태를 평강이라고 한단 말에요. 하나님 측에서의 완료. 그게 평강이에요. 여러분이 그걸 믿으시냐고요? 그러면 여러분 평강을 가지신 거예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 왜? 세상은 아무도 안 믿어요, 그거. 바보냐? 그런 걸 믿게? 안 믿죠? 세상은 못 받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은요? 여러분만 그걸 믿어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여러분만 받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완료의 그 주도권을 하나님이 쥐고 계시다, 라는 것이 그 백성들에게는 평강인 거예요.
어떠세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기 위해서는 너희들은 계속해서 업그레이드 돼야 되고 계속해서 발전해야 되고 계속해서 성숙되어져야 돼. 착한 일은 일 년에 한 열 개씩 늘어나야 돼. 그러면 자신 있으세요? 불안하고 두렵죠, 들? 그걸 평강이라고 하지 않아요. 구원받은 이들은 평강이 뚫고 들어온 거거든요. 그 평강이 뚫고 들어왔다, 라는 건 내 구원의 시작과 진행과 완료를 하나님께서 다 이루신다, 라는 확고한 믿음을 붙들고 있는 걸 평강을 가진 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 자들의 삶 속에서 진정한 성숙이 일어나고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고 진정한 발전이 일어나는 거예요. 아니면 껍데기만 변해가는 거예요. 아니면 모양만 열매로 바뀌어 가는 거고요.
주일날도 말씀드렸지만 과일을 제철에 자연스러운 자연 속에서의 온도와 햇빛이 아닌 비닐하우스에서 인공적인 온도와 빛을 주어서 만들어 내면은 풋과일의 꼭지 부분에 독소가 들어가 있다 그러죠? 그래서 그걸 많이 잘라내고 먹잖아요? 풋과일 같은 거는. 그러한 독소들이 그 과일 전체에 골고루 함유가 된다고 그래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건 진짜 참 과일이 안 된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 주님이, 하나님이, 원 가지이신 그 참 감람나무이신 하나님이 맺으시는 그 열매, 그게 진짜 열매인 거예요. 그게 진짜 과일인 거예요. 그렇지 않고 내가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들 있잖아요? 간디처럼 슈바이처처럼. 그렇게 막 만들어내긴 했는데 그래서 근사한 열매처럼 보여요. 멋진 수박, 멋진 포도가 열렸는데 독이 들어 있어요. 하나님은 그런 거 안 받으신단 말입니다.
자, 그걸 염두에 두시고 여러분이 요한복음 19장을 이미 다 배우셨죠? 거기에서 이 샤람, 샤롬, 샬롬 이 평강이라는 단어. 하나님께서 성전 짓기를 완료하신다, 라는 의미에서 이 평강이라는 단어와 요한복음 19장에서 가장 비슷한 단어를 하나만 찾아보세요. 뭐겠어요? ‘다 이루셨다’. 테텔레스 타이. 그게 평강인 거예요. 다 이루었다. 누가 내가 다 이룬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이 이룬 것도 아니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다 이루신 거예요. 그게 평강이에요. 여러분에게 닥쳐온 평강. 그런데 본문 21절에 나오는 두 번째 평강의 기원은 조금 다른 전제를 함의하고 있어요. 21절 보세요.
요 20:21-22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게 20절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고런 구절이에요.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제자들의 평강을 기원하시면서 그 평강의 근거로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라는 사실을 대세요. 그게 뭐가 평강이에요?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그러니까 평강하라. 이게 평강할 일이냐고요? 그리고는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고 성령을 받으라, 라고 말씀하세요.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는 것이 내가 비는 평강의 근거라고 말씀하고 계신데 그게 어떻게 평강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 한번 고찰해보잔 말에요.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으로 보내진 분이 맞죠? 그것을 요한복음 1장이 이렇게 묘사를 하는데요,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자, 하나님이 예수님을 말씀으로 보내셨다, 라는 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육신이 되어서 내려와서 그 하나님의 뜻을 담고 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자로 살았다는 거예요. 그게 말씀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 보내졌다, 라는 것을 함의 하고 있는 게 이 ‘예수님이 말씀이다’ 라는 거거든요. 근데 그 말씀이 이 땅에 내려와서 무얼 했느냐 하면 창조를 했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말씀인 예수님께서 태초에도 뭘 하셨는데 그 말씀이 뭘 하셨느냐 하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한단 말입니다.
시 33:6-9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찌어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여호와가 말씀하셨더니 이루어졌대요. 그런데 성경은 또 예수님이 말씀으로 보내졌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이 말씀이 되셔서 그 뜻을 성취하는 자가 되셔서 예수가 모든 걸 창조하신 거예요. 그게 말씀으로 보내진 예수님이라는 뜻이에요.
시 147:12-19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찌어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할찌어다
저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너의 가운데 자녀에게 복을 주셨으며
네 경내를 평안케 하시고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
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그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 추위를 감당하리요
그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말씀, 말씀을 들고 뛰는 자를 사자라고 하죠? 제가 요한복음 중간쯤에 한번 설명해드렸어요. 여호와의 사자.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의 사자는 다 누구라고요? 예수 그리스도라 그랬습니다. 여호와에게 보내심을 받는 여호와잖아요? 그게 여호와의 사자거든요. 그거 누구죠? 예수님이에요. 그러니까 사자, 말씀을 전하는 자. 예수님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은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역할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 뜻은 위대한 창조사역의 성취에요. 이 세상에 원래 있었던 건 아무것도 없어요. 혼돈과 공허였어요. Structure도 없고 Emptiness, content도 없었으니까 무란 말에요, 무 그러니까 거기에서 뭔가가 존재가 생겼다는 건 전부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일환이에요.
지금도 과학이 발전하고 여러 가지 새로운 게 개발이 되는 거? 라하프, 성령이 수면위에 운행하시는 그 상태에서 성령의 장중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인간들이 머리가 좋아서 만들어내는 거 아닙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의학이나 과학문명 이런 거 나쁜 거 아니에요. 인간들이 그걸 자기들의 유익만을 위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그걸로 무기도 만들고 여러 가지 해로운 데에 쓰고 그러니까 나쁜 거지 그건 다 성령의 창조사역 아래에서 계속 창조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프면 병원 가야 돼요. 쓸데없이 기도원에 가갖고 그냥 기도로 나을 거야, 그러지 말고. 그건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거부하는 거예요.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역사라니까요. 의술 이라는 것 자체가. 병원가세요.
그렇게 모든 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금 창조되고 있는데 그 창조사역의 대리인으로 말씀으로 오신 예수가 달리고 있단 말이에요. 예수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분이란 말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지 않은 게 없다, 라는 것은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씀하시되 빛이 있으라 하니까 창조가 일어난 그 1장 전체를 고 한 줄로 딱 줄인 거예요. 하나님이 ‘말씀’ 하시니까. 말씀을 보내셨더니 창조가 일어나더라. 그래서 첫 번째 날에 빛이 있으라, 하고 예수라는 빛이 등장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에는 빛이 오셨는데 그 빛이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고 새 창조를 또 이루시러 오셨다, 이게 요한복음이잖아요? 고걸 원시적인 모형으로 보여주는 게 첫 창조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 하시니까, 가라사대 하니까 빛이 대리인으로 첫날 딱 서더니 거기서부터 창조가 쫙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은, 예수는, 빛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런 일을 하시는 분이에요.
근데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가 시키는 말만 했고 시키는 일만 했다, 그러잖아요? 그러면 도대체 무슨 창조를 한 거예요? 다시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으로 돌아가는 거죠.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은 내가 뭘 능력을 발휘해서 뭘 하는 게 아니라 나는 비워지고 하나님이 내 안에 채워져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게 하나님 나라의 존재 방식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일을 하신 거예요.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데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내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요. 말씀을 받아서 말씀이 되어 성취의 현장에서 달리는 거예요. 그랬더니 하나님의 역사로 일이 막 일어나요. 그리고는 결국은 자기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라는 것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게 뭐냐면은 십자가에서 죽어버리는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죽었어요. 그런데 다 이루었대요.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이란 말에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나는 다 비워졌어요. 근데 하나님이 내 안에서 이루셨어요, 가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와 ‘다 이루었다’ 의 화해인 거예요.
하나님에 의해 다 버려진 것 같았는데 나는 완전히 비워지고 다 털린 것 같았는데 하나님이 내 안에서 이루어내시는 거예요. 그게 이 세상에서 말씀이 하는 일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나는 말씀을 담는 그릇일 뿐이란 말입니다. 예수가 그렇게 사셨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능력을 담는 그릇. 고걸 자기부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도가 이 세상에서 바로 고 지점으로 가는 거예요. 그렇게 성도가 부인이 되고 예수님이 이 땅에서 내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훌륭한 존재인지 알어? 내가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 알어? 이거를 단 한 번도 안 보이셨어요.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이 땅에서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얼마나 깨끗하게 잘 사는 줄 알아? 이걸 보이는 게 아니에요. 그 삶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 삶이 목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그 삶을 좇아가는 거예요. 그냥 나는 세상이 어떻게 평가를 해주던 거기에 여념치 않는 거예요. 그리고는 나는 계속 무시되어지고 비워지는데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안에 당신의 뜻, 말씀을 부으셔서 당신의 일을 이루어가시는 거예요.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잠 8:22-30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막 헷갈리죠? 하나님이 하셨다, 나는 그 옆에 있었다. 조금 있다간 내가 창조했다. 내가 창조자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거에요. 이게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이에요. 나는 비어져요.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일을 하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걸 아들아 네가 했다, 라고 쳐준단 말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아들에게서 비롯되고 아들로부터 말미암고 아들에게로 돌아간다는 거예요.
마찬가지에요.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어떤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기특한 일을 내어놓는 건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근데 그걸 우리 것으로 인정해주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걸 절절하게 깨달아야 돼요.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럴라면 나는 아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선한 것을 요만큼도 내놓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아주 처절하게 폭로당해야 돼요. 자기 자신한테.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폭로될 때 굉장히 힘들다는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창조사역을 완료시키기 위함인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러한 방식으로 제자들을 보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금방 인제 이해가 가시죠?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건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일을 도우러 온 게 아니라 자기를 완전히 비우는 일을 하여, 예수님이 하신 건 그거예요. 다 비워 하나님이 일을 하시게 한 거잖아요. 그것처럼 내가 너희를 보내니까 너희들은 평강해라. 그 말이 무슨 말이에요? 니들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내가 들어가서 할 거야. 그렇게 가. 그러니까 평강하죠. 그래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근거로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처럼 내가 너희를 보낸다,를 대는 거예요. 이해가 가세요? 여러분? 그러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이 뭐를 애써서 이룰 것이 없어요, 사실은요. 그런데 성령이 내 안에서 소원을 두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자꾸 내 안에서 보여주시고 드러내시기 때문에 내가 열심을 부려보지만, 그래서 때로는 성공하기도 하지만 그게 사실은 내가 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이 하시는 거란 말에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시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신 후에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는 장면이 나오죠? 그게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장면과 똑같은 장면이에요.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주님은 지금 바로 이 장면은 제자들 앞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가 하라는 말만 하고 아버지가 하라는 일만 하셨잖아요?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이라 그랬어요. 자신을 비우고 상대방의 뜻을 자신 속에 담아서 그 대상의 뜻을 이루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존재 방식이에요. 그랬더니 ‘다 이루었다’, 즉 평강이 성취가 됐어요. 그 성취의 모습을 제자들을 향해서 숨을 내쉬는 모습으로 간단하게 보여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기 전에 그건 죽은 흙이었죠? 니들은 지금도 죽은 흙이라는 거예요. 내가 부활한 걸 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은 흙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생기를 불어넣지 않으면 너희들은 절대 산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이에요. 내가 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평강이라 그랬잖아요. 주님 측에서 완료하시는 게 평강이라 그랬잖아요. 그래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에요.
제자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새 창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저 완료가 된다는 구속의 현실을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는 장면에서 간단한 그림으로 보여주시고 그들을 똑같은 새 창조의 동역자로 부르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서 새 창조의 동역자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는 일차적으로 어떤 새 창조에 투입이 되는 거예요? 이제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을 마구 새 창조의 현장으로 끌어들여야 되나요? 일차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 안으로 투입이 되는 거예요. 보내심을 받는 거예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보내는데 세상으로 보내세요. 근데 그 세상의 그 축약이 뭐냐면 ‘나’ 란 말에요. 나. 그 내 안으로 하나님에 의해 보내져요. 예수님에 의해 보내져요. 그런데 나를 보내시는 예수님이 내 안에서 그 새 창조를 완성하세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그때에 내 마음에 드는 게 뭐겠어요? 평강! 그렇게 나에게 보내진단 말에요. 내 안으로 내가 보내진단 말에요.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뭐가 잘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이렇게 구원했습니다, 라는 은혜의 현실을 몸으로 입으로 삶으로 증거 하는 삶을 살게 돼요.
그때 그걸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받는 거고 안 받아들이는 자는 심판 받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 절이 뭐에요? 너희들이 죄를 사하면 사하여 지고 놔두면 그냥 놓여지게 된다는 뜻이에요. 심판은 이미 완료되어 있어요. 저희가 심판을 받았느니라, 그러잖아요? 이미. 받았어요. 받았는데 뭘 우리가 또 심판을 선포해요? 우리가 죄를 어떻게 속해요? 내 안에서 예수님께서 창세전에 택함 받은 어떤 존재들을 나의 입과 몸과 삶을 통하여 구별해내신다고요. 그걸 믿고 따라오는 자들은 창세전에 선택을 받은 자들이에요. 그들은 구원을 받는 거예요. 근데 모양새로 볼 때에는 우리가 마치 그들의 죄 사함에 기여하는 자처럼 보이잖아요? 내가 전도했으니까. 그리고 내 삶이 그에게 보여졌으니까. 근데 사실은 그게 내 안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이란 말에요. 그래서 평강하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이 별로 쉬운 그런 내용은 아닌데 그래도 아주 쉽게 이해하기 쉽게 제가 설명을 해드렸잖아요? 그죠? 다 이해가 가시죠? 네.
왜 예수님께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면서 성령을 받으라, 라고 이야기했는지. 또 숨을 내쉬었는지 그리고 너희들이 가서 죄를 사하는 자는 죄가 사해질 거고 죄를 그대로 두는 자는 죄가 그대로 있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그리고 왜 몰래 벽을 뚫고 들어오셨는지. 문 열고 들어와도 돼요, 사실은요. 괜히 멋있게 보일라고 벽 뚫고 들어온 게 아니라 구원이라는 거, 평강이라는 거. 새 하늘과 새 땅과 새로운 피조물의 완료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로 이루어진다, 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그 모양으로 들어오시는 거예요 나중에 여러분이 원고를 읽어보시면은 훨씬 더 이해가 쉬울 거예요. 오늘은 제가 이걸 다 이렇게 해드리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갖고 뚝뚝 끊어서 액기스만 설명했거든요. 그래도 이해가 다 되시잖아요? 더 이상 설명할 거 없죠?
기도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