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만난 하하씨앗님들께
씨앗님, 벌써 가을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답답해보이던 긴팔 가디건에 선뜻 손이 가네요. 제가 사는 마을은 산밑이라 그런지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합니다. 임곡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계절의 변화를 달력으로나 짐작했을 뿐인데, 요즘은 정말인지 철이 바뀌는 것을 실감하며 삽니다. 어린시절을 농촌에서 나고 자란 씨앗님들이라면 가을걷이가 한창인 이곳에서 제가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일들에 대해 충분히 공감들 하시겠지요.
대추는 검붉게 익어가고 훈훈한 바람에 황금물결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곧 나락을 베고 콩을 타작하여 들이고... 감잎은 단풍이 들어 흙으로 돌아가고 산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온갖 곡식들은 저마다 살아온 날들의 이야기를 몸속에 갈무리하여 씨앗으로 남길 것은 씨앗으로, 살로 남길 것은 살로 응축하여 한 삶을 마무리하는 이 계절의 풍경을 말입니다. 마흔을 앞두고 이제야 제 스스로 조금씩 철이 든다 싶은 것은 자연 가까이서 눈과 귀와 손과 발과 몸으로 계절의 변화를 알아가는 것과 무관한 일이 아니겠지요?
씨앗님. 뜬금없이 갑작스런 저의 편지에 당황하셨나요? 서구문화센터에서 이계양 선생님의 ‘행복한 편지쓰기’ 강좌를 듣지 않았다면 아마 아직도 우표값이 얼마인지 몰랐을 거예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라고 어느 시인이 읊었다한들 이메일도 성가시게 생각되는 마당에 손편지라니... 그랬는데 그 강의를 통해 소중했던 인연들에게 손편지쓰기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손편지쓰기를 올해의 버킷리스트로 정하고 편지 쓸 사람들 이름을 주욱 쓰다보니까 과연 그 계획을 완수할 수 있을까 살짝 불안도 하더이다. 그러나 이계양 선생님께서 강조하신 말씀처럼 편지 쓸 사람이 적은 것이 불행할 뿐, 편지 받는 사람 앞에 나를 세워 두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다보면 좀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는 거라는 믿음으로 오늘은 특별하게 용기내어 ‘하하씨앗’ 그대들에게 저의 사랑과 존경을 고백할까 합니다.
저는 울산에서 나고 자랐지만 광주남자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고 오년 전에 광주시민이 되었습니다. 시어머니께서 며느리인 저를 ‘아가’라고 불러주실 때는 그 따뜻한 호칭에 정말 어머님의 아기가 된 것 같았습니다. 남편이 시어머니 앞에서 ‘자네’가 어쩌고저쩌고 할 때는 속으로 얼마나 웃기던지.. 이 고장의 언어풍습이 이랬소저랬소라는 건 알았지만 막상 책에서나 보아온 하오체 앞에 한동안 손이 다 오그라들더군요. 그러나 울산사람인 제가 듣기에 전라도 사투리는 참 정감이 묻어나는 문화유산이었습니다. 전라도말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주는 언어교습소가 있다면 기꺼이 배우고 싶을 만큼 말입니다. 이제는 저도 제법 종결어미에 콧소리를 넣어 남도인의 정서를 어설프게 흉내냅니다. ‘워매 잘한대끼한다이. 아따 그랬당가. 그랬는디. 이무런께 그라재. 찌끄러부러’ 그러나 아직도 끝말을 대충 뭉개버리는 그 특유의 말투는 여전히 따라하기가 허벌나게 어렵쏘이잉.
지는 광주에 와서 새로 짓끙게 겁나 많지라이. 알토란알토란 써옴씨롱 정작 알토란을 본 적이 없어 궁금했는데 광주 시댁에서는 추석날 아침에 토란국을 먹더군요. 미나리와 들깻가루가 듬뿍 들어간 오리탕도, 육전이라는 야들야들한 쇠고기전도, 쫄깃한 홍어찜도, 목넘김이 부드러운 병어도 광주에 와서야 처음 맛 본 음식들이었당께요. 콩국수에 소금 대신 설탕을 쳐 먹는 것도 아따 그거 솔찬헙디다. 순대나 족발을 초고추장에 찍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팥죽에 새알심 대신 칼국수면이 들어 있는 것도 신기했었죠. 큰일에는 돼지고기와 홍어와 꼬막이 꼭 있어야 한다는 것도, 어른들 생신에는 팥시루떡을 준비한다는 것도 제가 몰랐던 풍습이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광주 사람이 되어가나했는데 저희 부부는 곧 광주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고백하건데 광주를 떠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하하랑께요. 책읽기를 좋아하고 소외된 이웃을 나누고 섬기는 일에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는 그대들처럼 따뜻하고 넉넉한 사람들을 어디에서 만날 것이며 나라꼴이 어찌나 기가 막히고 슬픈지 제정신으로 멀쩡하게 살아지지가 않는다고 누구를 붙잡고 마음 편히 하소연하겠습니까!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를 늘 강조하시는 이계양 선생님의 시 수업도 소설 강의도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도 편지쓰기도 함께 할 수 없고 집밥나누기 체육대회 언니네 봉사 무등산 산행 체육대회 하하씨네 비누만들기 하하모두나누제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니... 이번 학기가 마지막이라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하하씨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고 온 날은 보약을 먹은 것처럼 얼마나 힘이 나던지요. 하하는 지금껏 제가 적을 두었던 어떤 공동체보다 스스로를 정직하게 되돌아보는 겸허한 곳이었고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배움터였으며 좀 더 나은 사람 되기를 결심하는 재생의 공간이었습니다. 광주사람으로 사는 동안 하하에서 사람되는 보약을 먹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도 여전히 개인의 지적 허영이나 관념의 유희를 충족시키기 위해 독서라는 고상한 취미를 가졌을 테며, 평생의 동지요 도반으로 선택한 사랑하는 남자와의 동행도 내 깜냥으로 벅차다 엄살 부리며 그렇게 내 가정의 높다란 울타리 안에서만 허겁지겁, 우물쭈물, 겨우겨우 살아갔을 겁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배운값 하라는 선생님의 준엄한 가르침에 책임감을 가지며 제 눈에는 하나같이 믿음직스럽고 튼실한 하하씨앗들로 영글어가는 그대들에게 큰 동지애를 느낍니다.
스스로 하하씨앗되기를 자청하신 씨앗님들이여. 가을의 초목들이 씨앗을 남기고 떠나는 이 계절, 당신은 동백나무의 열매처럼, 은행처럼 그렇게 바닥으로 툭! 통낭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실 참이군요. 이왕이면 지렁이가 우글우글한 텃밭에서 땅심이 좋은 땅에서 영하의 겨울을 나소서. 그리하여 새봄이 오면 하하의 새싹이 움터서 우북해지고 저마다 제 태깔을 드러내어 한창 자라다가 내년 가을에는 더 실한 하하씨앗으로 한 해의 삶을 마무리하십시다. 아! 올해는 청각으로 가을을 느낄랍니다. 가을밤 누군가의 가슴을 두근거릴 온갖 풀벌레 소, 툭! 투둑 밤송이 떨어지는 소리, 풀씨 떨어지는 소리, 소슬한 바람소리, 달빛이 내려오는 소리 그리고 하하씨앗 내려오는 소리...
2013년 시월. 전통한옥마을에서 달빛에 흥건이 젖은 몸을 가누며 하하씨앗 이정순 올립니다.
첫댓글 하하씨앗 이정순 님, '하하'의 잘 영근 씨앗을 만나 '참 오지네요'(허술한 데가 없이 매우 야무지고 실속이 있다). '수나'님의 좋은 편지가 '하하'의 밭을 더욱 기름지게 할 것 같아 고맙고 감사하답니다. 그리고 '하하'의 운영자로서 한편으로 마음 든든한 동지애를 느끼고, 또 한편으로는 더욱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수나 님, 그래도 저는 그냥 '지금 이대로' 작고 적고 소박하고 낮은 모습 그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일부러 지어서 하는 일은 아무래도 남의 옷 입은 것마냥 걸리적거릴 테니까요. 또 수나 님을 비롯한 소중한 씨앗 님들이 여러분이 계셔서 든든하고 힘이 된답니다. 영근 '하하 씨앗'으로 우뚝 서신 수나님,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