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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오래 전에 페미니즘을 처음 공부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당시 대학원에서 페미니즘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치르기로 하고, 이론적인 문제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공감대를 어느 정도 형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진행하면서 남성과 여성이 적당히 섞인 구성원들 사이에 적지 않은 의견 차이가 발생하곤 했다. 이론적으로는 타당하다고 여기지만, 당시에도 엄연히 통용되던 남성과 여성의 성차별적인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미묘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론에 대해 공부하기 전에, 나의 제안으로 각자가 느끼는 여성 문제에 대해서 에세이를 써서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발제를 하기로 했다.
이러한 방식을 취하면서, 발제자들이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의 현실을 하나씩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발제문을 통해서 서로의 입장을 공유하였고, 그로 인해 당시까지 만연되어 있는 성차별적인 습속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결국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이론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의 현실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페미니즘은 각자 맞부딪히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그려내는 여덟 가지의 에피소드가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모두 8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책의 내용은 여성들이 겪는 성차별과 그에 연관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부제는 ‘나 닯게 살아가기 위한 여덟 가지 이야기’이다.
과거 한국 사회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남자답게’ 또는 ‘여자답게’라는 말을 지겹도록 들어왔다. 그래서 남자들은 강하고 거칠게 행동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여자들은 연약하며 미모를 가꾸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남자답게’ 또는 ‘여자답게’라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이 같을 수 없는데, 왜 여자와 남자들은 각자의 개성을 무시하고 ‘~답게’ 살아야만 하는가. 그래서 나는 아들이나 제자들에게 ‘남자답게’라는 말 대신 ‘너답게 살라’고 말하고 있다. ‘지은이의 말’에서 저자는 ‘여성들은 장소와 행동에 늘 압박을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정해진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야 했고, 정해진 놀이를 해야만 했으며,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 늘 들어야 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면서 과연 ‘정해진 것’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벌어지는 상황을 제시하면서, ‘정해진 것’ 또는 ‘당연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서술하고 있다.
여자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아름다움을 위해 ‘당연히’ 귀를 뚫고, 귀걸이를 해야만 하는가? ‘귀고리’라는 제목의 글에서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최근 다양한 이름을 걸고 TV에서 이른바 ‘뷰티 프로그램’들이 방영되고 있는데, 마치 여성들의 아름다움이 화장술에서 나오는 것처럼 천편일률적으로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화장을 잘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의 바탕에는 여자는 화장을 통해서라도 꾸며야 한다는 시각이 자리를 잡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아닌,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고민하면서 찾아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운동장을 차지하며 축구에 열중하는 남자 아이들과의 갈등을 통해서, 마침내 반으로 나뉜 운동장에서 공존하는 여자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 ‘운동장의 주인’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예기치 못한 첫 생리를 겪은 아이가 ‘빨간 엉덩이’로 불리는 에피소드를 통해서도, 생리를 마냥 부끄러워할 것이 아닌 당연한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미스터리 사건 해결’은 연극의 주인공을 반드시 남자가 맡아야 한다는 연출자에게, 멋진 연기를 남기고 떠나는 주인공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고정적인 성역할을 고집하는 세상의 시선에 대해 따끔한 일침을 놓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여성성을 드러내고 싶은 남자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와 사회의 시선을 주제로 하고 있는 글(보이지 않는 여자 아이)이나, 박물관에서 학생들 스스로 역사에서 여성들의 역할을 찾아보도록 하는 내용(숨은 여성 찾기) 또한 현실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성차별의 현실을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나 역시 이 글을 통해서 역사의 현실을 전시한 곳에서 여성들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찾기 힘들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여자 친구에 대한 남성들의 독점욕을 당연시하는 것(후회하지 않아)도 역시 그릇된 행태라고 생각되며, 딸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 사회에서의 성역할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내용(딸, 너에게 배웠어)에 대해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책에 소개된 내용들은 매우 구체적인 사례를 동반하여 서술되고 있기에, 성역할 또는 성차별에 대한 이해에 큰 도움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이 존재하지만, 어쩌면 모든 이론은 이처럼 매우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고 여겨진다. 그렇지 않다면,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이론도 현실과 유리되어 공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들이 겪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그려낸 이 책의 에피소드들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고 있는 다양한 불편들이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이러한 현실로부터 나아가, 그릇된 성역할의 인식을 깨뜨리고 성차별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도록 하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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