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自我)라는 방벽
무언가를 오래 붙들고 있다가 문득 알겠다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아, 이거였구나. 이제 보인다.
기분이 아주 좋은 순간입니다. 공부한 보람이 있고 애쓴 값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행학은 바로 그 순간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지난 호에서 세상이 하나의 근원과 세 갈래 이치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사람이 알아본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삼리로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다만 거기서 끝났어야 했습니다. 이 큰 존재가 나를 그렇게 느껴지게 하고 있구나 — 여기까지였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한 걸음을 더 갔습니다.
도를 닦다 보니 큰 깨달음이 왔다고, 천태만상을 보니 셋으로 되어 있더라고 말했습니다. 거기까지도 맞습니다.
그다음 한마디가 문제였습니다.
"내가 세상을 밝혔다. 내가 봤다."
솜털 같은 존재가 천리를 어떻게 봅니까. 그 큰 혜택 속에 한 생리로 묶여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알았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거룩하고 엄청난 것을 적은 존재가 알았다고 마음먹은, 내가 알았다는 하나의 그 존재를 '교만'이라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여기가 중요합니다.
교만이 무엇인지 우리는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잘난 척하는 것, 남을 깔보는 것, 목소리가 큰 것.
책은 그것이 아니라고 못 박습니다.
"교만이란 상호 간에 과시하는 불손한 작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본뜻은 일원삼리의 원리적 사고를 망각하게 한 동기를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실수를 나타내는 모습을 보게 된다."
교만은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위치의 문제였습니다.
받는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아는 자리로 옮겨 앉은 것. 그것이 교만입니다.
그렇게 옮겨 앉으면 무엇이 생기는가.
벽이 생깁니다.
내 한계를 세상의 기준으로 삼고 그 안에 머무는 순간, 자기를 중심으로 둘러친 벽이 세워집니다. 책은 이것을 자아(自我)라는 방벽이라 부릅니다.
벽은 밖을 막기 위해 세웁니다. 그런데 이 벽은 안에 있는 나를 가둡니다.
벽이 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내게 갖추어져 있어야 할 하늘 쪽 생리가 내 소견 기준 아래로 뚝 떨어집니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밀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이 나옵니다.
"이 순간이 죽는 순간이야."
지난 호에서 내 안의 셋 중 가운데 자리가 위쪽과 끊어지고 아래쪽과 붙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하늘 쪽과의 연결이 끊긴 그 대목 말입니다.
그 끊어지는 순간이 바로 여기입니다.
교만이 곧 그 단절이고, 그것이 병이 시작된 자리입니다.
책은 그 결과를 인상적인 문장으로 씁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조물주적 사관을 통해 천리를 바라보게 됨으로써 병인이 되어있는 자신을 통해 발병시원의 고리에 묶여있는 자아를 보게 되었다. 이는 마치 광명한 거울 앞에 서서 반영된 자신의 모습을 통해 병들어 부식되어 죽어가는 자아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거울이 무엇인지를 짚어야 합니다.
거울은 천리입니다. 그래서 '광명한' 거울입니다.
몸은 멀쩡합니다. 거울도 맑습니다. 그런데 그 맑은 거울에 비친 내가 부식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이 서늘한 것은 여기입니다.
교만이란 천리를 배격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병들었다는 사실은 바로 그 천리 앞에 서야만 보입니다.
밀어낸 그것에 비추어야 내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거울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교만은 어떻게 치유됩니까.
여기서 뜻밖의 답이 나옵니다.
교만의 반대말은 겸손이 아니라 감사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상태가 공간과의 소통을 막습니다. 그래서 치유의 방향은 교만을 꾸짖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감사를 회복해 막힌 쪽을 다시 여는 데 있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이미 한 번, 감사는 예절이 아니라 생리적 필요라고 했습니다. 그 말의 뿌리가 여기 있었습니다.
다음 호에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그래서 병의 최초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발병시원자는 누구인가.
첫댓글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