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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8번 말씀
제목 : 도마와 교회
본문 : 요 20:24-31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아멘.
저는 아르헨티나에 가서 집회를 잘 마치고 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할 부분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도마에 대한 에피소드입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분들이 도마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애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해서든 도마를 좀 올바로 조명을 해볼까 해서 많은 참고서적들을 뒤지고 또 여러 논문들을 찾아서 읽어봤어요. 심지어 혹시 우리가 오늘 공부할 도마에 대해서 뭔가 얻을 게 있을까 해서 최근에 나온 오강남 교수와 도올 김용옥 교수의 도마복음이라는 것도 제가 며칠에 걸쳐서 정독을 했어요. 며칠이라기보다는 아르헨티나 갈 때 20시간 걸리고 올 때 20시간 걸리거든요. 그런데 저는 비행기 안에서 잠을 한잠도 못자요. 그래서 무려 40시간에 걸쳐서 그 네 권을 다 읽었는데 정말 화나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단 한 줄도 인용할 게 없어요.
도마복음이라는 건 허무맹랑한 인본주의를 주장하는 엉터리 책에 불과했어요. 오강남 교수나 김용옥 교수는 도마복음이 마치 비밀스럽게 감추어져 있다가 최근에 두각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렇게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도마복음은 이미 초대교회 때 교회에서 검증이 되어서, 도마가 쓴 것도 아니에요, 또. 이미 검증이 되어서 복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런 잡서로 분류가 되었던 책이에요. 그럼에도 그 사람들은 도마복음을 넣어서 신약성경을 스물여덟 권으로 재편해야 된다고 지금 열심히 우기고 있어요. 김경재 교수까지 나서갖고 지금 사도행전 바로 앞에다가 도마복음을 넣어서 스물여덟 권으로 다시 편집을 하자, 이렇게 막 우기고 있는데. 최근에 제가 그 한신대학교 김경재 교수와 김용옥 교수와 그 오강남 교수가 대담한 글들을 읽어봤는데 아, 정말 이분들은 너무 똑똑한 천재들이지만 기독교에 정말 악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재확인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김용옥 교수의 그 몸 철학을 잘 읽다 보니까요 오늘날의 기독교가 그 양반의 그 철학적 사유 앞에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왜냐면 너무나 정확하게 기독교의 허구를 잘 짚어내고 있기 때문에 김용옥 교수 앞에서 웬만한 목사들이 성경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성경에 대해서 박식한지요. 단어 하나하나를 방대한 연구를 통하여 너무나 명확하게 꿰고 있어요. 성경의 단어 하나하나를.
그런데 지금 그는 어떤 기독교를 공격하고 있냐면 인본주의로 잘못 왜곡되어 있는 가짜 기독교, 오늘날 기독교가 표방하고 있는 가짜 기독교를 공격하고 있는 거지 그는 진짜 기독교를 몰라요. 제가 그분의 기독교에 대한 반박에 대해서 읽어보니까 오늘날 기독교를 정확히 파악하고, 지금 그분은 철학자이기 때문에 동양철학이나 서양철학을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 공부할 때부터 시작해갖고 지금까지 그 누구보다도 깊이 연구를 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그 앞에서 동양사상이나 서양철학이나 서양의 종교가 정말 맥을 못 춰요. 이게 어떤 경로를 통하여 이렇게 된 것인지를 정확히 짚어주기 때문에 그 앞에서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는 기독교를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그가 비판하는 기독교는 비판받아 마땅할 기독교가 맞아요. 그리고 헬라철학의 이원론에 아주 깊이 물들어 있는 그런 가짜 기독교가 맞는데 그건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그의 철학사상인 몸 철학이 완전한 인본주의적 사상이거든요. 그리고 그 안에는 범신론도 들어있고 아주 잡탕이에요. 그런 관점에서 그가 동양사상이나 우리 기독교를 바라볼 때 이건 뭐 너무 낮은 수준의, 철학의 걸음마도 안 되는 그런 수준의 사상이요 종교인 거예요. 그러니까 마땅히 그가 공격 할만 해요. 근데 제가 그분의 도마복음도 읽어보고 그분이 쓴 요한복음도 읽어봤는데 정말 그분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모를까? 라고 생각이 될 정도로, 본인도 웬만한 신학자들을 자기가 가르친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경에 대해서는 너무나 연구를 많이 했는데 하나님을 모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올 김용옥 교수가 갖고 있는 몸 철할 사상에 의해서 준하여 성경을 보게 되면요 도마복음이 이게 완전한 인본주의거든요. 인간도 신이 될 수 있고 인간의 노력 열심으로 개인과 사회를 구원할 수 있다, 가 도마복음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나마 발견된 도마복음이 성경의 핵심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 사람이요. 근데 많은 지식인들이 지금 그들의 사상에 넘어가고 있어요. 그래서 도마복음을 정경으로 다시 넣자. 니케아 공의회처럼 다시 공의회를 열어서 성경을 다시 67권으로 만들자. 그런 거에 많은 이들이 동조하고 있거든요. 정말 얼토당토한 이야기에요. 그가 동양사상을 서양철학으로 공격하고요 서양의 철학이나 서양종교를 동양사상으로 공격하는데 정말 기가막히게 공격을 해요. 그러니까 동양사상이나 철학, 서양철학이나 서양종교가 전부 인본주의에 지금 빠져서 그가 휘두르는 칼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너무 명확히 파악을 하고 공격을 하니까. 그러나 여러분 기독교는 그런 게 아니에요. 절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부정하고 있지 절대 인간의 가능성을 격려하고 있지 않다, 라는 것을 명심하셔야 돼요. 그런데 도올의 눈에는 오늘날 기독교가 인본주의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종교로 보이는 거예요. 그럴 바에는 이 기독교가 왜 필요하냐는 것이죠. 다른 동양사상이나 노자나 장자나 다 그 이야기하고 있는데 왜 꼭 기도교냐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를 부인하지도 않지만 기독교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일갈을 오늘날 기독교가 귀담아 듣고 과연 우리가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를 반성할 필요는 있어요. 그걸 배울 필요는 없지만.
도마복음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려했던 타락한 존재들의 마귀적 속성을 그대로 표현해놓은 그런 책에 불과해요. 그래서 저는 그런 신학자들의 견해를 그냥 뒤집어엎고 성경 안에서 이 도마의 에피소드를 그동안 제가 해석해온 그대로 해석을 해드리려고 해요. 제가 시간을 낭비함으로 해서 여러분은 시간을 벌으신거죠, 그죠? 안 읽어도 된다. 책값도 비싼데. 하여튼 쓰레기를 돈 주고 샀어요, 저는.
볼트만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요 요한에 의해 쓰인 요한복음은 우리가 지금 읽은 요한복음 20장 31절까지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이 요한복음 끝이에요, 끝. 그리고 21장은 후대에 요한 계열의 학파사람들이 첨가해놓은 거다, 라고 이렇게 이제 주장들 하는데 볼트만의 책을 보면은 이 요한복음의 어휘나 문체를 방대한 자료와 상세한 고증으로 파헤친 뒤에 21장의 그 내용을 절대 요한의 저작일 수 없다, 라고 단언을 하는데 그러한 문헌학적인 증명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거든요. 동의할만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절대적인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그런 것에 시간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왜냐? 성경의 저자는 어차피 요한도 아니고 마태도 아니고 누가도 아니고 성령이거든요. 그러니까 요한이 안 썼어도 돼요. 안 썼어도 되는데 성경에 기록돼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맞아요. 그러니까 그런 거에 여러분은 절대 흔들리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래서 저 는 21장까지 그냥 강해할 거예요. 많은 개역주의 목사님들이 21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지도 모른다 해서 20장에서 강해를 다 마치고 하는데 글쎄 그게 저는 좀 오버하는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아무튼 우린 이제 요한복음의 마지막 결론부분에 당도한 겁니다. 어느 책이든 그 책의 결론은 아주 중요한 거죠? 따라서 요한 또한 요한복음 전체의 기록 목적을 결론 부분에 기록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 30절과 31절이죠? 다시 한 번 읽어볼게요.
요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아멘.
그죠?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 뭐에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 메시아이다, 라는 걸 독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고. 이게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에요. 결론이에요, 이것이. 그러니까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우리는 뭘 배우면 되는 거예요? 이거 배우면 되는 거예요. 거기서 무슨 교훈을 얻고, 이런 게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분이 메시아다, 그리스도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믿음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있다. 끝! 요한복음이에요, 이게. 그래서 많은 분들, 많은 초신자들에게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이 요한복음을 건네주곤 하는 거죠.
그런데 재밌는 건 요한이 표적, 세메이온이란 단어를 그 결론에서 쓰고 있다는 거예요. 요한은 자신의 책 요한복음을 한 마디로 표적으로 응축하고 있는 거죠.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이 많은데 내가 표적을 요만큼만 기록한 것은, 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요한복음 전체를 표적, 세메이온이란 단어로 응축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 표적, 세메이온이란 단어는 싸인이에요, 싸인. 그러니까 이 요한복음은 어떤 것을 지시하는 싸인판 같은 책이라는 거예요. 세메이온.
그 안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에피소드들이나 강화들이 전부 다 지금 무엇을 지시하고 가리키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세메이온이에요.
그렇다면 그 요한복음의 그 기록 목적, 바로 위에 오늘 본문에 우리가 포함해서 읽었던 그 도마의 이야기 또한 도마라는 한 제자에 국한된 지엽적 사건, 저런 믿음 없는 놈, 보지 못하고는 믿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놈, 그런 도마 한 사람에 대한 지엽적인 이야기에 국한된 게 아니라 교회 전체에게 던져진 어떤 메시지, 표적으로써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잖아요? 그죠? 고 이야기의 바로 밑에 세메이온이라는 단어가 나오니까, 더더군다나.
우리는 흔히 이 도마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의심 많은 도마처럼 믿음 없는 삶을 살지 말고 보지 않고도 믿는 훌륭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고 말죠. 언뜻 들으면 아주 훌륭한 충고인 것 같지만 그건 자칫 맹종을 강요하는 억지 같이 들리기도 하지 않아요? 어느 교회 설교하러 가면 무슨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냥 전체가 합창하듯이 아멘, 아멘 하는 데 있죠? 설교시간 내내 그 ‘아멘’과 싸우려고 아주 애를 먹는데 그런 거 강요하는 거예요? 지금? 야, 뭐 보고 믿을라 그래? 그냥 무조건 믿어. 이거 강요하는 거예요? 이게? 그건 아닐 거 아네요?
제가 그림을 하나 보여드릴게요.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그림은 16세기의 천재 화가인 까라바죠의 <도마의 불신>이라는 그림이에요. 원래는 미켈란젤로죠? 조각가 미켈란젤로 말고 다른 미켈란젤로에요. 마이클 엔젤. 천사 미가엘이란 뜻이죠? 미켈란젤로가. 그 까라바죠, 그의 고향이 까라바죠인데 그냥 까라바죠, 고향 이름을 따서 까라바죠라고 불러요. 그 까라바죠가 그린 <도마의 불신>이라는 그림이에요. 까라바죠는 비록 천재적인 소질을 가진 훌륭한 화가였지만 기독교 신앙인은 아니었어요. 전 이 그림을 실제로 봤거든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너무 사실적이에요. 그래서 그 까라바죠의 성화들은요 모두 어둡고 암울한 기운을 내뿜어요. 나중에는 사람도 죽이고 결국 객사를 하고 말아요. 삼십대 나이에. 거의 그의 삶을 보면 거의 미친 사람이에요. 광인이에요, 광인. 예수도 안 믿었어요. 그런데 돈 받고 성화를 그려준 거죠.
그런데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도마가 검지손가락을 예수님의 옆구리에 깊숙이 찔러 넣습니다, 이렇게. 그리고 예수님은 그러한 도마의 손을 저지하듯 잡죠, ㅎ. 야 그만 넣어라.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야, 더 깊이 넣지 마. 그런 것 같지 않아요? 그리고 괴로운 것 같기도 하고 아주 안타까운 거 같기도 하고 난처한 것 같기도 한 그런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계세요. 내가 ㅎㅎ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이런 표정 아니에요? 여러분 오늘 본문 읽으셨을 때 정말 도마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는 대목이 나왔나요? 많은 분들이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요 그림, 까라바죠의 그림처럼 그림을 그려요, 머릿속으로.
오늘 본문을 주의 깊게 잘 보시면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대답하여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다!’ 라고 신앙고백을 한다고요. 까라바죠의 그림처럼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고 마치 시체 검시관처럼 이리저리 휘저었다는 내용이 없단 말입니다. 이 그림은 까라바죠의 상상인 것이지 절대 성경적인 것 같지 않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 그림은 까라바죠 자신의 불신을 스스로에게 들킨 그림이 아닌가 생각이 돼요. 화가들이 악마를 그리고 뭐 천사를 그리고 그러잖아요? 미켈란젤로도 마찬가지에요. 그들이 마귀를 그릴 때에는요 그 당시에 자기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을 거기다 넣는대요. 천사의 얼굴을 그릴 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 얼굴을 넣고. 그래서 그 마귀의 동상이나 아니면은 마귀의 그림을 보면은 꼭 고 사람 주변에 살았던 사람이 거기에 등장한다, 그래요.
마찬가지로 지금 까라바죠는 자기의 마음을 그대로 이 그림에서 들키고 있는 거예요. 요 의심 많은 도마, 요 이마의 주름 좀 보세요. 요런, 요런 의심 많은 도마가 바로 나다! 라는 걸 들키는 거예요. 아무리 휘저어 봐도 못 믿을 그런 존재.
제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오늘 본문은 믿음의 생성과 주도권에 대한 그런 표적인 것이지 의심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라는 그런 권고의 에피소드가 아닌 거예요. 전 어떤 면에서 오늘날 교회가 오히려 도마와 같은 구도적 열심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믿어지지도 않는 걸 억지로 믿어보겠다고, 믿습니다! 응? 그것도 그냥 경음을 써서 믿쉽니다, ㅎㅎ, 로 바꿔가지고. 더 잘 믿어지나 보죠? 어떤 분이 그렇게 한번 하는 바람에 전부 그게 구호가 돼버렸는데. 그렇게 믿습니다만 연발하면 믿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그럼에도 간혹 어떤 분들이 그렇게 성도들 가르치는 걸 봐요. 무조건 믿어. 왜 의심해? 왜 따지고 들어? 그리고 뭘 물어봐? 그냥 믿지. 지들이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 물으셔야 돼요. 찾으셔야 돼요. 그리고 공부하셔야 됩니다. 그렇게 무조건 믿는 건 자기최면이라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자가 세뇌작업이지 그건 믿음이 아니에요. 난 믿는 거야, 믿고야 말거야. 이렇게 해서, 그래 나는 믿는 걸 거야. 근데 또 의심이 들어. 막 허벅지 찌르면서 아냐, 난 믿는 거야. 이건 믿는 게 아니에요. 근데 그렇게 믿도록 유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니까요.
행 17:11-12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바울이 실라와 함께 베뢰아로 가서 베뢰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어요. 11절의 그 ‘말씀’이 로고스거든요. 그러니까 바울이 설교를 하고 복음을 전하자, 로고스를 전하자, 예수 그리스도가 로고스로 오셨잖아요? 예수가 전해지자 베뢰아 사람들이 그 마음으로 로고스, 말씀을 받았대요. 근데 받았는데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면 프로디미아, 준비된 마음이란 뜻이거든요, 이게. 준비된 마음, 간절한 마음이에요.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간절한 소원이 그들에게 있었단 말이에요. 무언가가 알고 싶은데 자기의 실력으로는 그 앎에 대한 소원이 채워지지 않을 때 그 사람의 마음이 프로디미아거든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있는 그들에게 말씀이 전해졌어요. 전해졌더니 그 말씀을 받았대요. 근데 말씀을 받고 그냥 땡이 아니라 이게 진짜 성경에 근거하여 옳은가 하여 또 가서 상고했대요. 연구했다는 거예요. 이런 구도적 열심이 모든 성도에게 있어야 되는 거예요. 무조건 믿어! 이거 아닌 거예요, 여러분. 아멘 오만 번 하면 된다? 믿어진다? 천만의 말씀이에요. 뭐 주여, 주여! 오백 번 하면 믿어진다? 아니에요. 의심이 사라져요? 의식이 사라져요, 힘 빠져서. 그렇게 맹종하라는 그런 의미가 아닌 거예요.
저는 지금 여기에 나오는 도마의 의심을 그렇게 보고 싶어요.
생각해보세요. 잠깐 어디에 다녀왔더니 다른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봤다, 그래요. 그런데 그 제자들은 여전히 다락방에 숨어서 문을 잠그고 두려워서 덜덜 떨고 있어요. 자기 생각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으면 제자들이 이렇게 남아 있으면 안 되거든요. 여드레 후에 예수님이 다시 찾아왔을 때도 그들이 문을 잠그고 모처에 숨어 있었단 말입니다.
도마는 그런 의심이 든 거예요. 진짜 예수님이 살아났다면, 우리 스승이 살아났다면 그리고 니네 앞에 나타났다면 왜 너희들은 아직도 이 모양이냐? 라는 의심이 들었을 거 아닙니까? 이들은 지금 우리의 스승인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입을 맞춘 듯 주장하고 있다. 근데 왜 이들은 아직도 이렇게 두려워 떨고 있을까? 그리고 그 부활하셨다는 그분은 왜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으시고 계속 이렇게 침묵하고 계실까? 왜 숨어계실까? 아, 알고 싶다. 정말 알고 싶다. 이런 마음에서 도마가 나는 그분이 진짜 살아났는지 그분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 그분의 손을 만져보기 전까지는 안 믿을 거야, 라고 이야기를 했다면 그게 정말 ‘의심 많은 도마‘ 라고 매도될 만한 일입니까? 눈에 보이는 게 부활한 예수님을 봤다는 이들의 연약한 모습밖에 없어요. 그리고 예수님도 안 나타나는 거예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아요. 그때에 아냐, 나는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셔서 우리 앞에 나타났는데도 우리가 이 모양이라면 도대체 예수님의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난 알고 싶어. 그게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건지 나는 알고 싶어, 라는 의미에서 나는 그분의 옆구리에 손 넣어볼 거야, 라고 말을 했다면 그게 정말 ’의심 많은 도마‘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만한 행위냐고요?
전 어떤 면에서 그게 구도적 열심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많은 이들이 이게 맞는 거야, 라고 이야기했을 때 나는 수긍이 가지 않는데 니들이 다 맞다고 하니까 나도 맞다고 그럴게, 이렇게 안 간 도마가 오히려 저는 더 위대해보인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읽어놓고 의심하면 안 된다, 무조건 믿어라? 그리고 그런 설교를 하면 또 굉장히 은혜도 받아요. 그런 아닌 거예요, 여러분.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예언을 하면서도요,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어전 회의에 올라가서 말씀을 직접 받아서 땅에다 내리 꽂았던 사람들이거든요, 그걸 선지자라 그래요. 구약 선지자. 그런데 그들도 그렇게 말씀을 전해놓고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하여 연구했단 말에요.
벧전 1:10-11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더니 그들 안에 있던 성령이 가르쳐주셨다는 뜻이에요]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 하니라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도마와 같은 구도자의 열심을 반드시 갖고 있어야 돼요. 믿어지지 않는 걸 무조건 믿으려고 하시면 안 돼요, 여러분. 배우셔야 돼요. 궁금해 하셔야 돼요. 더 많이 궁금해 하셔야 돼요. 더 많이 물으셔야 되고. 그러한 구도자의 열심과 불신은 당연히 구별이 되는 개념이에요. 구도자의 열심은 의심이라 불릴 수도 있는 것이지만 참된 믿음에 대한 열망에서 나오는 것인 반면에, 불신으로 향하는 의심은 믿겠다는 의지가 전제, 믿지 않겠다는 의지가 전제된 개념인 거예요. 저는 전자의 열심을 내어놓으라고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Unbelief 와 Doubt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란 말입니다.
그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인 오스크니스는 회의하는 용기, God in the dark라는 책 있죠? <회의하는 용기> 라는 그 책에서 불신앙과 의문을 명확히 구별해줘요. 불신앙은 믿지 않기로 선택을 한 것을 말하고 그건 죄에요. 그걸 성경에서 성령 훼방죄라 그래요. 목사가 하는 일을 반대하는 게 성령 훼방죄가 아니라 불신앙이 성령 훼방죄인 거예요. 그러나 의문은요 믿으려 하지만 믿어지지 않은 걸 말하는 거예요. 그것은 죄가 아니에요. 오히려 진리에 대한 열정일 수 있단 말입니다. 자꾸 궁금해 하고 더 많이 알고 싶어 하고 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열정일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러한 진리와 구도에 대한 열정을 절대 책망하지 않으세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조금 아까 보여드린 그 까라바죠의 그림 속에 그 예수님의 난처한 듯한, 짜증난 듯한 표정은 잘못 그린 거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구도의 열정을 절대로 짜증난 표정으로 받지 않으세요. 기쁘게 받아들이시지.
우리는 진리의 본질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열심히 물어야 하고 공부해야 하고 상고해야 돼요. 하나님은 그러한 성도의 열정과 열심에 반드시 반응하세요. 그 안에 있는 성령이 선지자들에게 예수에 대해서 알려준 것처럼 반드시 반응하세요.
그렇다고 제가 지금 과학적인 증거나 역사적인 근거등을 찾아서 호기심을 충족하여 믿음에 도움을 받으라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에요. 라에리안 교회에서 끌로등 보디롱인가요? 하여튼 이름도 괴상한데 UFO 믿는 그 사람들 있죠? 전 세계의 지식인들의 많은 퍼센테이지가 지금 그 UFO를 믿는, ET를 믿는 그 종교에 지금 흡수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강의해놓은 것을 보면은 현대의 과학으로 우리는 정말 알지 못하는 그런 현대의 과학으로 그걸 잘 풀어놨거든요. 그러니까 지식인들은 그러한 과학적인 어떤 근거로 대어서 성경을 풀어주면 되게 좋아해요. 그리고 나는 이런 거는 믿어주겠다, 라고 그렇게 너스레를 떤다고요. 제가 말하는 건 그런 식의 호기심, 그런 식의 의심을 가지라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요즘 뭐 터키의 아라랏산 위에서 노아의 방주가 발견됐다고 신문에 연일 나오고 있는데 발견 됐으면 어떻고 안 됐으면 어때요? 뭐 그렇게 신기합니까? 다 썩은 나무가? 있었다는 거 믿잖아요? 근데 그게 신기하다는 건 나는 그동안 안 믿고 있었다는 거예요. ㅎㅎ. 믿을까? 말까? 지금 고민하고 있었는데 진짜 뭔가 비슷하게 발견이 됐다 그러니까 그럼 믿어줄까? 이런 식의 열심 말고. 과학적으로 뭔가가 증명이 되어서 내가 그걸 믿는다는 건 믿음이 아니라 그걸 현실 인식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실 인식. 그건 믿음이 아닌 거예요, 여러분.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니까요. 보이지 않는 게 실제로 받아들여지는 것, 그게 믿음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뭔갈 보고 난 이제부터 이걸 믿기로 했다, 라고 결단하는 것은 절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닌 거예요. 그런 식의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아도 얼마든지 세상적으로 얻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잖아요?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어서 그게 절대 그 증명된 현실, 울타리 안에서 밖으로 못 나간다는 것을 과학이 입증해주었을 때 그래 맞아! 라고 하는 건 세상이 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과학이 우리에게 준 거 아니에요? 그 믿음은. 그러니까 그건 믿음이 아니란 말이에요. 믿음은 그렇게 과학으로, 역사로 증거를 대어서 설득시키는 게 아니에요.
제가 말씀드리는 긍정적 의미에서의 도마의 의심은 믿고자 하는 마음이 열정으로 뿜어 나오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그건 오늘날 교회에 꼭 필요한 것이다, 라는 말씀인 거예요.
이 도마의 에피소드는 그러한 구도의 열정에 관한 이야기를 밑그림으로 담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진짜 중요한 메시지는 구원의 본질과 믿음의 본질에 대한 구체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그게 오늘 본문이 담고 있는 주 메시지에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표적, 세메이온과 똑같은 단어가 마가복음에도 등장을 하는데 거기에서 오늘 본문과 조금 다른 맥락에서 사용이 되고 있거든요. 한번 볼까요?
막 8:11-13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분명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고 표적을 기록했다고 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표적을 행했고 표적을 기록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마가복음에서의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절대 표적을 안 주겠다 그래요. 너희는 표적을 봐도 못 알아먹을 거니까 안 주겠다, 라고 이야기하세요.
이게 바로 믿음의 본질에서의 그 표적의 역할과 신앙의 여정 속에서의 그 표적의 역할의 차이를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그 신앙의 여정 속에서의 표적은요 우리의 구도의 열정 안에서 하늘의 비밀을 배우는 데에 큰 도움이 되는 것들이에요. 신앙의 여정 속에서의 표적은. 그래서 주님은 표적을 주어서라도 그들의 의문과 의혹을 메워주시는 거예요. 근데 그 표적들은요 전부 말씀 속에 담겨 있어요. 그게 요한복음 20장 31절인 거예요. 내가 그 표적을 말씀에 다 담아 놨다. 라고 이야기해요.
물론 정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그게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했어요. 그게 정경에 기록되기 위해서는 현상으로, 역사적으로, 사실적으로 발생이 돼야 되는 거니까. 정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그게 분명히 역사 속에서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요. 그 표적이. 그러나 그 현상들과 사실들도 전부 복음을 상징으로 담고 있었던 거였어요. 성도는 그러한 표적 속에서 예수와 십자가를 읽어낼 수 있었잖아요.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신 사건.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남자 오천 명을 먹인 사건, 이게 전부 예수와 십자가를 그리고 있었던 거잖아요. 우리는 그런 표적을 통하여 예수를 읽어낼 수 있었잖아요.
그러나 구원의 그 본질, 그 본질의 측면에서의 그 표적 구함이라는 건 구원의 획득에 절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표적을 주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 어떤 표적도, 그 어떤 너희들의 경험도 너희들의 구원에 있어서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거예요. 고 이야기가 도마의 이야기 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해석의 본론으로 한번 들어가볼게요.
예수님께서 도마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에게 부활의 몸으로 나타나신 후에 도마가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들어요. 그런데 도마가 예수님의 손을 만져보고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마치 예수님이 그 자리에 함께 계셨던 것처럼 여드레 후에 나타나시더니 도마가 한 말을 그대로 하세요. ‘네가 전에 내 손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 넣어보기 전에는 안 믿겠다. 그랬지? 한번 넣어봐’ 라고 이야기를 하세요. 깜짝 놀랐겠죠? 누가 가서 일렀나?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너무 똑같은 말씀을 하시니까, 예수님이.
그러니까 뭐에요? 예수님은 지금 우리가 감지를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에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가 어디로 사라졌다가 여드레 만에 나타난 게 아니라 예수님은 항상 도마와 함께 계셨고 항상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거예요. 마찬가지에요. 여러분과 예수님은 항상 함께 계세요. 그리고 예수님이 정하신 그때에, 하나님이 때에 여러분에게 어떤 것을 교훈하시기 위해 그때 감지가 되기도 하고 또 침묵 속으로 숨어버리기도 하시고 그러는 거지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는 게 절대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
자 그때에 예수님께서 손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가락이라도 넣어보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믿는 자가 되라, 그래요. 그건 마치 믿는 자가 되는 건 어떤 것을 우리가 경험하고 보아서 우리가 결단하고 우리가 갖게 되는 그런 어떤 것으로 여겨지죠? 지금 이 말씀만 보면은. 그런데 아니란 말에요. 잘 보면. 자,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자 도마가 갑자기 바로 당신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라는 대답을 해요.
지금 어떤 상황이냐면 도마가 나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못 믿겠어. 나는 그러니까 예수님이 내 앞에 나타나셔서 그분의 상처에 내 속을 넣어봐야 그분이 부활하신 것을 인정할거야.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보여주셨어요. 그랬는데 손가락을 넣어보기도 전에 도마가 뭐라 그러느냐면 ‘예수님, 당신은 진짜 부활하신 예수님이 맞네요!’ 가 아니라 ‘나의 주시네요!’ 그랬어요. 너는 내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 그랬더니 도마가 ‘당신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지금 이런 얘기에요. 도마는 지금 자기의 신앙에 어떤 몇 가지 결핍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앙의 과정 중에 많은 훈련과 노력과 지식이 필요한데 자기에게는 지금 다른 제자들과 다른 결핍이 하나 생겨버렸어요. 뭐가 생겼나면, 다른 제자들은 다 본 예수님의 부활의 몸을 나만 못 본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그것만 보면 나는 너희만큼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 지금 도마가 ‘나는 손가락을 넣어보기만 하면 너희 자리로 금방 올라갈 수 있어’ 라고 믿음을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그 손가락을 넣어보기 전에 예수님이 나타났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만났던, 모세를 만났던 그 만남,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만남이 이루어지자 이 도마가 당신이 믿음의 주인이군요!를 깨달은 거예요. 내가 그걸 하나 보고 손가락을 넣어서 후벼봐서 내 믿음이 성숙되어지고 완성되는 게 아니라 당신이 믿음의 주인이시군요!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시니까 당신은 하나님이 맞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손가락을 넣어보기 전에 예수님이 나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입니다, 라는 걸 이 도마가 알았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거기에 Kyrios 란 단어가 나오는 거예요. 당신이 믿음의 주인이시군요. 믿음의 주도권의 문제란 말입니다. 단순히 의심을 하지 말라, 라는 아니란 말에요.
여러분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요한이 예수님을 묘사할 때 어떻게 묘사를 하냐면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는데 끝까지 사랑했다, 그러죠?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여러분 이 끝까지라는 단어가 굉장히 중요한 단어에요. 예수님의 구원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시작되어 예수님의 사랑으로 끝나는 거예요. 끝까지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하셔야 그들이 구원 받아요. 한번 택하신 당신의 백성은 끝까지 함께 하시면서 당신의 주되심을 그의 심장에 각인시켜버리는 거예요. 바로 이 ‘끝까지 사랑하심’ 이라는 그림이 도마와 예수님의 그림 속에 나타나는 거예요. 도마가 의심할 때도 끝까지 같이 계셨고 그의 믿음이 하나님에 의해 완료되고 종결이 되어 그에게 주어졌다, 는 것을 그에게 인식이 될 때까지도 끝까지 같이 계세요. 아니, 부활의 몸으로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같이 계세요. 아니, 그 이후에 영원을 살 때도 끝까지 같이 계세요. 연합되어서.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과 헤어지려야 헤어질 수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어요, 지금. 그게 끝까지 사랑하심이에요. 그 끝까지라는 단어 안에는 완료와 종결의 의미가 들어 있어요. 끝까지, 예수님이 끝까지 다 하는 거예요. 거기에 도마가 뭐 하나 보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끝까지라니까요. 근데 도마가 지금 나는 나에게 있는 어떤 결핍만 채우면, 요 몇 가지만 보면 나는 나의 믿음에 내가 일조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다, 라는 것을 예수님이 이 그림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도마는 지금 예수님에게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이시다! 라는 고백을 하고 있어요. 그 말은, 믿음이라는 건 내가 무엇을 보고 안 보고에서 발생되고 격발되는 게 아니라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주인이라는 단어가 등장 하는 거예요. 믿음의 주인. 거기에서 아주 중요한 믿음의 원리가 하나 도출이 되죠? 믿음은 우리 인간 측에서 결핍의 부분을 찾아내서 채우는 방식으로 완성이 되는 게 아니라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의해서 거저 한 번에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에요. 그걸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표현합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똑같은 개념이 나와요, 그죠? 믿음의 주인은 누구에요? 예수님! 믿음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니까요. 여러 번 제가 설명해드렸어요. 믿음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믿음이에요. 아버지의 믿음. 그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와 주관적 믿음을 격발시키는 거라 그랬어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완성하시는 이에요. 그러니까 믿음의 주인이시고, 믿음의 시작이시고 과정이시고 완성하시는 자가 누구?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예수를 바라보자 -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바라보자! 에요. 바라보자. 거기에 도달하자, 가 아니라 바라보자에요. 놋 뱀이 되어서 장대에 달린 예수, 그 예수를 그냥 바라보는 거예요. 그 장대에 달린 예수가 놋 뱀이 되어서 죽어야 할 우리의 운명이 되어서 우리 대신 죽었다는 그 사실을 그냥 바라보는 거예요. 그게 구원이에요. 그게 믿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도마는 지금 보고서 믿겠다고 부활의 주님을 기다렸어요. 그런데 그 ‘봄’의 행위에 앞서 만남이라는 게 이루어지자 믿음이 도마에게 들어와 버린 거예요. 믿는 자가 되라. 어떻게 그가 믿는 자가 됐나요? 예수님이 이야기하잖아요? 니가 보고 믿느냐? 그 말은 이제 믿는 자가 됐다는 뜻이에요. 보고서 믿느냐? 라고 이야기하죠? 그건 엄밀히 말해 그거는 도마가 보고서 믿었단 뜻이 아니에요. 그렇잖아요? 도마는 보고 믿은 게 아니에요. 손가락 휘저어보고 믿은 게 아니라니까요. 도마와 예수님의 그림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는 거예요. 믿음은 보고 믿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근데 그 도마 안에다가 교회를 전부 집어넣고 얘들아, 교회들아 믿음은 보고 믿는 게 아니란다. 라고 말씀해주시는 거예요. 도마는 보고 믿었고 우리는 안 보고 믿어서 우리가 더 복된 자다, 이게 아니란 말에요. 이 세상 그 누구도 봄이라는 그 어떤 오감의 인식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런 능력이 있는 인간은 한 사람도 없어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거든요. 도마 할아비도 그렇게 못 믿어요. 모든 인간은, 모든 성도는 다 하나님의 선물로 믿음을 받아야 믿어요.
믿음은 실력으로 결정이 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보여주는 방식으로써의 구약적 믿음 수여 방법을 철수해버리시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해요.
요 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게, 도마는 보고 믿은 자고 도마는 보지 못하고 믿은 자라는 잘못된 구별이에요. 잘못된 구별이요. 이 세상 그 누구도 자기의 오감의 인식을 근거로 해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랬어요. 예수님께서 지금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고로 믿지만 그건 한 수 아래의 믿음이야. 이제 보지 못하고도 믿는 사람들이 나올 텐데 그들이 진짜 복 받은 사람들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게 아니에요.
도마도 예수님의 부활을 못 본 상태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 거고요 모든, 도마 이외에 모든 성도도 예수님의 부활을 말씀을 통하여 전해만 듣고 믿는 자가 된 거예요.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그냥 다 전해들은 거예요. 전해 듣고 믿는 거예요.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도 고기 잡으러 갔어요. 못 믿어요.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여 그들에게 뚫고 들어갔더니 그때 믿음이 오는 거예요. 믿음은 그런 방식으로 오는 거란 뜻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보고 경험하여 오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골백번 봤어요. 사십일 동안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믿지 못했어요. 계속 고기 잡으러 가고 계속 문 잠그고 두려워 떨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성령이, 믿음으로 예수가, 지혜가 뚫고 들어와 버리니까 그들에게 믿음이 생긴 거예요. 도마의 그림은 바로 그 그림을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예수님이 지금 도마에게 ‘니가 지금 나를 본고로 믿은 게 아니라 내가 너를 만나러 오자 내가 너의 주인이며 하나님인 것을 고백했다.’ 그것이 본고로 믿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니가 더 잘 알 거야.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로 그러한 모양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고서 믿는 믿음, 그 방법을 철회해 가시는 거예요, 지금. 이제 십자가에 의해, 성령 강림에 의해 보지 못하고, 보지 못해도 믿는. 너희 인간들 중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에, 실력이 있는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보고서 믿음에 도달할 수 있는 자가 하나도 없어서 그 방법으로밖에는 못 가. 그래서 내가 너희들에게 성령을 보내어, 믿음을 보내어 믿게 할 거야. 그게 복이란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복을 받은 자에요, 여러분들이.
근데 자꾸 뭘 보여달라고 그러시죠? 지금이라도 예수님이 저 천장을 열고 한번 이렇게 나타나주셨으면 참 좋겠죠? 아니면 내일이라도 태평양이 쫙 갈라지면서 예수 믿는 자들만 건너가라! 한번 걸어봤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의 삶 속에 기적이 일어나서 여러분의 문제가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죠? 뭘 봤으면 좋겠죠? 그럼 내가 더 믿을 것 같애. 하나님 내일까지 내가 이천 불이 필요해요. 이거 없으면 우리 당장 집에서 쫓겨나요. 내일까지 보여주세요. 안 보여줘. 보여주면 믿음이 더 커질 거 같애. 그 하나님을 더 신뢰할 거 같아요, 그죠? 그게 안 된단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이 한번 도와주면요 계속 그 하나님을 이용하지 절대 믿음의 성숙으로 못 가져가는 사람들이에요. 우리는요.
제가 경험해봐서 알아요. ㅎㅎ. 진짜 하나님이 그렇게 몇 번 주니까 그 다음에 그렇게 안 해주니까 원망이 되더라고요. 이번 달에는 어디 가셨나? ㅎㅎ.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되면 나중에는 그 예수님이 우리 안 도와줄 때 미워져요. 그러니까 여러분 사람들 도와줄 때 조심해서 도와주세요. 한 십년 도와주다가 십일 년째에 그 사람의 자립심을 키워주기 위해서 안 도와주잖아요? 십년 도와준 거 다 날아가고 원수 돼요. 그러니까 상대방을 나의 유익에 어떤 근거로, 방법으로, 도구로, 수단으로 보게 되면은 그와의 관계는 절대 영원히 못 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분이 아니에요, 여러분.
한번 우리가 잘 생각해보자고요.
주님은 지금 보여주지 않고도 믿게 하는 거를 복이라, 그러세요. 복. 그렇다면 복이라는 거 안에는 종결성과 완료성이 함의돼 있는 거죠? 왜? 믿지 않고 보는 게 복이라 그랬으니까. 복은 내가 뭔가 기여해서 받는 게 아니란 뜻이죠? 보지 않은 상태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게 복이랬으니까. 그러니까 복 안에는 이 종결성과 완료성이 함의돼 있는 거예요.
보여주지도 않은 상태에서 복이라는 것에 의해 믿음이 들어가는 것이라면 그 복은 그 자체로써 완료 적이란 말이에요. 근데 도마는 지금 그러한 완료 적이며 종결적인 복을 쥐고 계신 분 앞에서 미완료 적이고 미 종결적인 모습으로 어떤 결핍을 스스로 채우려고 하고 있는 거예요.
쉬운 말로 말씀드리면 미완료되고 미 종결되어진 그 상태, 그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뭐죠? 발전, 부흥, 성공. 미완료니까. 개혁주의는 그걸 성화로 알아요. 복은 분명히 완료 적이고 종결적인 면을 갖고 있는 거예요. 전제하고 있는데 도마가 지금 하나님, 나는 뭔가가 보여지면은 나는 한발 더 올라갈 수 있을 거 같은데 그거 한번 해주세요, 하고 미완료로 다가가고 있단 말입니다. 미종결로 다가가고 있어요. 거기에서 예수님이 종결, 복을 선언해버리는 거예요. 보지 못하는 게 복이다! 그건 복 자체가 완료와 종결을 함의하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우리가 어떤 성숙이나 발전을 보탤 이유가 없는 거예요. 필요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복은, 믿음은 그 자체가 완성품이며 완료 적이에요. 종결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게 복이에요. 그러니까 성황의 개념 또한 우리가 발전되어지고 향상되어지는 게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써의 원래의 우리의 모습을 찾아가는 거예요. 내 안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그 복, 그 복의 실체, 새 생명의 실체를 이 옛 사람의 껍데기를 폭로당하면서, 부인당하면서 하나, 하나 껍데기가 벗어지는 만큼 드러나는 거지 내가 노력을 하여, 많은 체험을 하여 믿음을 완성시키고 또 내가 더 나은 존재로 향상되는 게 아니란 말에요. 그걸 성화라고 하지 않아요, 성경은요.
그러니까 이런 것을 우리가 성화라고 하고 있고 기독교가 이걸 추구하고 있으니까. 그러면, 범신론, 불교나 힌두교나 이슬람이나 뭐가 다르냐? 하고 도올이 마구 난도질 하는 거예요, 기독교를. 더더군다나 이 동양사상이나 서양철학을 왕창 끌고 들어와서, 도마 복음 하나 쓰는데 레퍼런스가 200권이 넘어요. 대단한 사람이죠? 그걸 다 자기가 갖고 있대요. 그 책을. 엄청나게 공부한 거예요. 그걸 근거로 대어서 기독교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 무슨 가치가 있어? 이렇게 공격을 한다니까요. 왜? 우리도 인본주의 안에서 못 벗어나고 있으니까.
내가 뭘 해야 되고 내가 구원 얻어야 되고 내가 천국 가는 거예요. 다. 불교에서도 ‘내가’ 해탈하는 거거든요. 내가 브라만에게 합일 되는 거거든요. ‘내가’ 말만 조금 다르지 불교와 기독교가 뭐가 다르냐는 거예요. 노자와 장자, 기독교 뭐가 다르냐는 거예요. 우리는 알잖아요? 다른 걸. 우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알아가는 거고 그 하나님에게 은혜 받는 거예요. 내가 나 계발해서 해탈에 이르는 거 아니라니까요. 내가 열심히 도덕적 윤리적 착한 일 내놓아서 구원에 이르는 거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나는 내 밖에 있는 어떤 존재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 그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폭로당하는 거예요. 인정하는 거예요. 그 속에서 내가 비어지고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 착한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분명 내가 노력하는 것으로 보이고 내 안에서 착한 일이 나오는 것처럼 보여요. 그래서 밖에서 볼 때는 열심히 노력해서 착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도올도 기독교는 그런 거라고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아닌 거 알잖아요? 하나님이 하시고 하나님이 끝내신다, 라는 걸 우리는 알잖아요? 그거 붙들지 못하면 여러분은 기독교인 아니에요.
베뢰아 사람들이 의문을 품고 말씀을 확인하는 잣대로 썼던 거, 성경이었죠? 여러분 어떤 신비한 현상이나 삶의 기적등을 통해서 믿음을 공고히 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인 거예요. 그건 우리를 부인시켜가지 않고요 우리의 옛 자아를 더욱 더 공고하게 다져줘요. 나는 봤어. 나는 경험했어. 근데 너는? 이렇게 된단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믿음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자꾸 뭘 보여주면 내 믿음이 더 공고해질 거라고 생각하시는데 믿음은 그렇게 공고해지는 게 아니라 여러분 안에 들어있는 믿음이 옛 사람이 벗겨짐으로 확인이 되는 거라니까요. 따라서 여러분은 뭐 대단한 거 자꾸 보려고 하시면 안 된단 말입니다.
여러분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그룹들과 화염검으로 막아버렸잖아요? 그리고 그 생명나무 실과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어떤 무리들에게 역동적으로 찾아가서 그들에게 뚫고 들어가는 방식으로만 자기를 드러내세요. 생명나무는 이제 더 이상 인간들이 찾아가서 따먹을 수가 없어요. 좁은 길 좁은 문이에요. 너무 좁아서, 협착해서 찾는 이가 없어요. 드물어요. 그런데 휘장을 찢고 생명나무가 걸어 나오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라니까요. 근데 이 세상 모든 종교가 지금 생명나무를 지키고 있는 그룹과 화염검을 고난으로 수도로 선행으로 찢겠다고, 부수겠다고 지금 난리를 피우는 거예요. 기독교조차도 그래요. 은혜를 알기 전에 손발부터 움직이려고 한다니까요.
여러분 그런 면에 있어서 성도에게 필요한 건 경험이나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그 말씀이신, 그 약속이신 그 언약이신 예수가 우리에게 뚫고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말씀이지 체험이나 경험이 아니라니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기적이 아니에요. 생명나무가 나를 뚫고 들어와야 돼요. 근데 그분이 말씀으로 오셨다니까요. 그래서 여러분에게는 그 하나님의 언약만 있으면 돼요. 약속만 있으면 돼요. 그 약속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와서 우리를 뒤집어엎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새 언약이에요. 에스겔서 37장, 예레미야 31장. 단단한 마음을 부드럽게 뒤집어엎어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이. 그게 오순절날 성령 강림으로 상징화하여 보여진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들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못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애를 써서 믿음을 키워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거예요.
믿음은 완료가 되어서 우리 안에 이미 침노가 되어서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건 이러저러한 선행이나 종교적 열심, 신비한 체험 등에 의해서 믿음을 성숙시켜가는 게 아니라 어떻게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이 들어오게 되었으며 왜 이러한 방식으로 이렇게 믿음이 수여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철저하게 경험하고 배우는 거예요. 그걸 알다보면 나에게 그런 은혜를 허락하신 그 아버지를 어떻게 하면 내가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는 거고요. 그게 하나님의, 성령의 열심으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열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삶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의 의의 마일리지로 쌓이지 않는 변화에요, 그거는.
그렇게 말씀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더 많이 알아가겠다고 하는 그 열심을 구도적 열정이라고 하는 거고 어떤 다른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 등을 체험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겠다고 하는 것을 불신앙이라고 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신비주의. 그러니까 신비주의는 불신앙이에요. 불신앙. 난 봐야 내 믿음을 확인할 수 있고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불신앙.
눅 13:26-28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님을 직접 보고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셨던 수많은 ‘본 자들’이, 도마의 처음 모습이에요. 수많은 본 자들이 예수님에게 쫓겨나고 있죠? 보는 것, 경험, 체험은 절대 믿음을 산출할 수 없단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적이나 신비한 현상들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전부 가짜라는 말이 아니에요. 저도 예전에는 가끔 하나님께서 정말 떨리는 기적으로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해요. ㅎㅎ. 어떨 땐 저도 아주 답답해 죽겠어요. 하나님은 왜 이렇게 침묵하시나? 그 타향 만 리, 이국 만 리 먼 땅에 가서 설교를 하는데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서 그건 아니죠! 하고 하는데 그 손가락을 뚝 분질러버렸으면 좋겠는데 ㅎㅎ. 너무도 건강하게 그곳을 나가시고. 전혀 도와주지 않아요. 그럴 때마다 아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렇게 일을 하시나? 답답할 때가 있어요. 이렇게 불쌍한 교인들 앉혀놓고 뭔가 정말 기적적이고 대단한 일을 한 번 빵 보여주시면서 김성수 목사가 말하는 게 옳아! 이렇게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안 해주신단 말에요. 그렇게 요즘도 어떤 때는 하나님의 침묵이 참 야속하기도 해요.
근데 성경을 공부하면 할수록 눈에 보이는 현실과 현상들이 저의 믿음에 어떤 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더욱 더 그냥 명료하게 확인되어져간다, 라는 것을 알게 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게 되면 여러 가지 신비한 현상들이나 눈에 보이는 기적들로 우리의 신앙을 돈독하게 하려는 시도를 하게 돼요. 그리고 지금도 성숙되어져 가고 있다, 라는 지금의 우리의 모습 속에서도 그 둘은 동시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를 안 보여주시고 도와주지 않으면 원망스럽기도 한 거예요. 아닌 것처럼, 또. 이런 말 하면 꼭 저만 나쁜 놈 되가지고.
그렇게 우리는 여러 가지 신비한 현상들이나 눈에 보이는 기적들로 우리의 신앙을 돈독하게 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지만 결국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만이 우리의 믿음을 주관한다, 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는 것으로 자라가는 거예요. 다른 말로 완료된 하나님의 복이 우리를 침노해 들어와서 우리를 시작부터 끝까지 부수고 다시 창조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내는 것이 구원이다, 라는 걸 깨닫고 점점 다른 외부적 증거나 나의 열심을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자로 환골탈태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 과정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의심 많은 도마에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복에 의해 완성된 주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믿는 도마가 되는 것. 손가락으로 후비려고 왔다가 하나님의 은혜의 공격으로 인하여 그냥 그 자리에서 완료된 믿음을 선물 받는 ‘믿음의 도마’가 되는 게 신앙생활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의심 많은 도마’ 그러지 말고 ‘의심 많은 나’ 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여전히 의심 많은 나. 그런데 내 안에 이렇게 나는 의심 많고 손가락으로 후벼 봐도 못 믿을 놈인데 하나님께서 완료된, 종결된 당신의 열심으로 그렇게 완성하신 복, 선물로써의 믿음을 나에게 심어줌으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에 이른 것이다, 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더 꼭 붙들면 되는 거예요.
그때 우리에게 평강이 임하는 거죠 왜? 지난주에 우리 공부한 거죠? 하나님이 다 하시니까. 테텔레스타이, 내가 다 이루었다. 그게 바로 평강이라 그랬어요. 예수가 다 이루었다. 예수님이 다 하셨다, 가 평강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두 번 인사하셨잖아요.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후, 하고 숨을 불어넣으셨죠? 그게 창세기에서의 죽은 흙을 향한 하나님의 창조의 행위였잖아요. 이게 바로 구원이야. 그러니까 너희들 평강해. 라고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불안해하지마,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베드로야 너 세 번 나 부인했지? 불안해하지마. 제자들아 네가 다 도망갔었지? 불안해하지마. 원래 니들은 그냥 죽은 흙이야. 내가 너희들을 후 불어, 생기를 넣어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그러니까 평강이 있을지어다! 샬롬!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세 번째로 오늘 본문에서 또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이야기 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도마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도마야, 네가 손가락으로 아무리 내 흉터를 후벼도 너는 못 믿어. 그러나 내가 복으로써 내가 완료하고 종결시킨 믿음을 너에게 심어줄 거야. 그래서 너는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될 거란다. 그러니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거기서 평강이 있는 거예요. 우리에게 짐이 지어지면요 요만큼이라도 지어지면, 구원에 있어서, 절대 평강하지 못해요. 어떻게 평강해요?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또 전도하러 가야해요. 싫은데도 또 계속 웃어줘야 되고. 아, 우리 집에는 막 꽃도 사오고 그래요. 빵도 사오고. 짐이에요, 그건요, 짐. 평강 아니죠? 우린 그래도 착해서 그렇지 진짜 물 끼얹고 소금 끼얹고 그런 사람들. 분명히 어저께 소금 맞았는데 또 가야 돼. ㅎㅎ. 평강이에요? 덜덜덜덜 떨려요. 그래도 복 받을라고 가는 거예요. 나중에 오는 세상에서 마이클 잭슨이 살던 그런 집에서 살게 해준다니까. 지금 조금 손해보고 투자해서 나중에 영원히 잘 살자. 그게 기복주의에요, 여러분. 그런 거 없어요. 절대 믿지 마세요.
요 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그죠? 평강이 있을지어다. 또 나오죠? 여러분에게 평강이 있으세요? 은혜를 아는만큼 평강이 있을 수 있어요. 아니면 불안해요. 그리고 수시로 내가 이러고도 구원받은 사람이 맞나? 이런 생각에 시달리게 돼요. 샬롬,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을 누리세요, 여러분. 예수께서 완료시켜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다니까요.
야고보서 1장 6절을 보면,
약 1:6-8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보세요, 믿음과 의심이 나오죠?]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자, 8절을 보면 두 마음을 품은 자는 모든 일에 정함이 없다, 그러죠? 거기에서 정함이 없다는 게 안정됨이 없다, 라는 뜻이거든요. 평강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게. 두 마음을 품으면. 그러니까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의심을 하는 자는 두 마음을 품은 잔데, 사람이 두 마음을 품게 되면 안정이 없다, 평강이 없다, 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상식이나 견해를 동등하게 올려놓고 보는 것, 이게 두 마음이에요.
다시 한 번요.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과, 말씀과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견해나 상식을 동등하게 올려놓고 보는 거예요. 예를 들면요,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서 내게 와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걸었는데 내가 어떻게 중력의 법칙을, 만유인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이 물위를 걸을 수 있지? 난 빠질지도 몰라, 라는 베드로의 견해가 동등하게 두 마음으로 존재할 때 베드로는 빠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올인 할 때 내가 비로소 물위에 서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고걸 의심이라 그래요.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의심을 해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죽는 날까지 두 마음을 갖고 살아요.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다 올인을 해요? 나는 올인을 해도 내 안에 있는 마귀가 나를 미혹하여 또 두 마음을 품게도 만들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죽는 날까지 두 마음을 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요 다른 마음이 잠식되는 거예요. 조금씩, 조금씩 점령당하는 거예요, 먹히는 거예요. 그리고는 결국 이 믿음에, 하나님이 완료시켜준 믿음에 의해 요 내 육의 마음이 잡혀 먹히는 거죠.
보세요. 도마가 두 마음을 갖고 와요. 분명히 예수님께서 나는 삼 일만에 부활할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과 나는 보지 않으면 안 믿을 거야, 갖고 와요. 우리는, 교회는 평생 그런 마음으로 삽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완료시킨 그 복이, 믿음이 그 도마의 두 마음, 다른 마음을 완전히 그냥 박살내버리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믿는 도마로 만들어버리시는 거예요. 그게 도마의 이야기인 거예요.
롬 8:30-32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조금 아까 야고보서에서 읽었을 때 두 마음을 품고 의심하는 자는 아무것도 못 받는다, 그랬어요. 의심을 품고 기도하면은 하나님이 절대 안 준다, 란 뜻 아니에요. 진짜 의심 안 품고 기도했는데도 안 준 적 있죠? 꼭 줄 거 같아, 이번에는. 그래갖고 의심 없이 기도했는데 안 준 적 있잖아요? 근데 의심하고 기도했는데 준적도 있어요, 그죠? 어떨 땐 기도 안 했는데도 줘. 그러니까 그런 공식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란 말에요, 이게.
이 말은 믿음으로 구하지 않는 자, 의심 하는 자, 두 마음을 가진 자는 절대 아무것도 못 받는다. 그런데 로마서에서 보면은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 예수를 선물로 받은 자는 그 아들과 함께 어찌 모든 걸 안 주시겠냐? 그래요. 그러면 거꾸로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걸 다 주시기로 결정한 분이에요. 그러면 그 두 마음이 어떻게 된다? 반드시 하나로 합쳐지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 되는 거예요, 이제. 그 자리로 끌려가는 걸 신앙생활이라 그래요. 그럴라면 내 소원이 자꾸 부정되고 기각되는 거예요. 여러분의 일이 잘 되는 게 그게 하나님의 복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춰가는 거지 내 뜻에 하나님을 맞춰가는 게 아닌 거예요, 여러분.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 받은 사람들은 두 마음을 품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얻어내지 못하는 그 지경으로는 절대 못 가게 돼요. 분명히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그쪽으로 우리가 통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경험이나 체험이나 상식이나 노력 등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오히려 기각이 되고, ‘나는 보면 믿을게요’, 가 아니라 보는 것 자체가 기각이 돼요. 기각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목적이 되고 우리의 뜻이 되는 곳으로 우리가 지어져 가는 거예요. 우리가 본 것이 우리의 믿음을 성숙시켜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게 기각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보이지 않는 믿음이 우리를 끌고 가는 그 자리로 우리가 가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점점 사물이나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게 되죠. 이 세상에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 등으로 규정해놓은 선이라는 개념도 하늘나라의 관점으로 바뀌어지게 되고요 이 세상의 가치와 힘의 소유로 등급이 매겨지는 신분과 처지를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지게 돼요. 왜? 눈에 보이는 게 이제 나에게 다른 관점으로 보이게 되거든요. 어차피 모든 사실은요, 팩트라는 건 보는 사람의 관점에 의해서 그 사람에게 재해석 돼서 들어갑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물 컵에 물이 반이 있을 때 어떤 사람은 어, 반이나 있네? 어떤 사람은 어, 반밖에 안 남았어? 이렇게 보잖아요?
똑같은 팩트를 보는데 자기가 가진 관점에 의해, 세계관과 가치관에 의해서 그 팩트가 각자의 것으로 재해석 되잖아요. 마찬가지인 거예요. 똑같은 팩트, 사실이 일어났는데 나의 관점이 바뀌면은 하나님이 나에게 복으로 주신 그 믿음에 의해 내 다른 마음이 점령당해가기 시작하면은 여러분에게 닥친 현실이 다르게 인식이 돼요, 여러분이. 옛날에는 이 현실이면 목매달아 죽어야 되는데 이 믿음이 내 다른 마음을 먹고 나니까 아니에요, 그래도 행복해. 너무 기뻐. 너무 좋아요. 아니 죽은 흙이 어떻게 기뻐해요? 설마 그런 질문을 하는 분 안 계시겠죠? 난 이제 아주 그냥, 별의별 질문을 다 받아봐 가지고 설교를 못하겠어, 아주. 기쁨이 있어요. 평강이 있단 말입니다. 안식이 있어요. 그거를 우리가, 그걸 누리는 거예요. 새로운 관점에 의한 그 팩트의 인식에 의해서.
그때 우리는 진정으로 본다, 라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는 거예요. 보는 건 도마처럼 예수님의 흉터에다가 손을 넣어보는 그런 경험으로, 그런 체험으로 보는 게 아니라 우리는 인제 믿음의 눈으로 다른 걸 본다니까요. 다른 걸 봐요.
제가 다른 그림 하나 보여드릴게요. 한번 보세요. 이건 아이디언 하트의 그림인데요. 이것도 도마의 의심이에요. 근데 여기 보시면 아까 그 사람 그림하고 조금 다르죠? 요기선 도마가 어딜 보고 있어요? 아까는 흉터만 보고 있었잖아요? 현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흉터를 만지고, 그것도 자기가 만지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이렇게 끌어다가 만지게 하는데 눈은 예수님의 눈을 보고 있어요.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다면 내 안에 지금 예수가 사시는 거거든요. 그렇잖아요? 갈라디아 말씀처럼.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예수의 눈을 통하여 세상을 봐야 돼요. 그게 진짜 보는 거라고요. 그런데 자꾸 우리가 어떤 현실, 사실, 기적, 체험 이런 걸 그냥 육신의 눈으로 보는 걸 자꾸 내가 어떤 내 신앙에 도움이 될 것이다, 라고 착각하는 거 아니에요. 아침에 일어나서 낙엽에 이슬이 맺혀있는 것만 보고도 예수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성도에요. 꼭 일어나서 십자가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야 야, 나한테는 진짜 기똥찬 체험이 일어나는구나. 이게 아니라. 처 푸른 창공만 봐도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심지어 화장실에 앉아서도 어떻게 인간의 몸은 이렇게 신묘막측한가? 를 깨달을 수 있는 게 성도인 거예요. 그게 예수를 통하여 보는 거예요. 근데 우린 자꾸 우리가, 이 세상이 만들어놓은 가치관과 세계관에 의해 뭔가를 자꾸 보고 거기에서 도움을 얻으려고 하니까 계속 이 모양인 거예요.
아니에요, 여러분. 도마는 바로 우리 자신이에요. 우린 그렇게 의심 많은 자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바꾸세요. 관점을 바꾸세요. 그래서 결국은 고린도후서 5장의 바울의 고백을 받아내죠. 이제는 내가 다시는 모든 사람을 육체대로 알기로 하지 아니하노니. 예수님도 똑같은 말씀하셨죠? 어디서? 간음한 여인 앞에서. 너를 정죄하던 자가 어딨느냐? 다 갔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내가 너를 기소하지 않는 한 세상 그 어떤 누구도 너를 간음한 여자로 기소할 수 없어.
세상 사람들은 먼저 살다간 사람들이 틀로 만들어놓고 규정하여 만들어놓은 그것을 채우는 걸 가치 있고 성공한 삶이라고 착각을 하고요 거기에 묶여 살아요.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나는 없는 거예요. 타인이 만들어놓은 틀 속에 내가 어떻게 끼워 들어가서 내가 되어지는지 내 밖에 있는 것이 나를 형성해가는 거예요. 근데 예수님이 너 그런 거에 끌려 다니지 마, 라고 하는 거예요. 간음하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너를 기소하지 않는 한 너는 간음한 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눈으로 봤을 땐. 하나님이 용서하신 자가 어떻게 간음한 자일 수가 있느냐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도 다른 이들을 볼 때 그렇게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는 거예요.
우리 모두가 간음하는 자에요. 지금 세상과 진짜 우리의 남편인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과 다 간음하고 있잖아요. 아닌 사람 자신 있게 손들어보세요. 진짜로. 그런데 누구보고 간음한 자라고 욕을 해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살인한 자다. 나 살인 한 번도 안 했다는 사람 손들어보세요. 천 명 죽이나 한 명 죽이나 살인자는 똑같애요. 형벌은 사형입니다. 그럼 여러분이 누구보고 저런 나쁜 놈, 살인자, 살인마 이런 소릴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우리가 바로 그런 악당이에요.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 나라의 왕 대접해주신다고 하니까. 나는 그렇게 평가 받아도 되고 다른 사람은 그렇게 평가 받으면 안 된다. 이건 아니잖아요? 다른 이들도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그리고 그들도 그러한 과정들을 통과하면서 성숙되어져 가고 있는 거예요. 자기의 믿음 없음. 자기의 도마다움을 폭로당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는 중인지 모르는 거예요. 함부로 다른 이들을 판단하거나 그러지 마시고 도마 속에 나를 넣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나를 찾아오신 예수의 은혜를 깊이 깨달으시면 돼요. 의심 많은 도마가 되지 말자, 그런 유치한 얘기 하지 마세요, 인제. 아셨죠?
기도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