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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9일 정릉에 있는 정릉감리교회(담임목사 한희철) 신앙강좌에 다녀왔습니다. 요즘 크리스천들이 장기려를 잘 모르니 이야기를 해 달는 강연 요청을 받았지만 내용 구성은 요즘 제게 중요해 보이는 점들 위주로 했습니다. 교회 측에 죄송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신종코로나 19 때문에 교회나 신자 모두 예민한 때라고 생각해 제게 요청한 1시간 러닝 타임을 지키는 게 제겐 가장 중요했습니다. 준비한 원고에서 일부 내용을 생략한 이유입니다. 강연 동영상 링크만 걸까 하다가 강연 중 말 실수가 걸려서 원고를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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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장기려'
-정릉감리교회 신앙강좌
-# 장기려와 정릉
장기려 선생님에게 정릉은 잊을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1940년 1월 정릉에서 성서조선으로 유명한 김교신 선생 집에서 동향이었던 함석헌 선생, 송두용 선생 등이 참석하는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당시 정릉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였습니다. 장기려 선생님의 삶과 신앙은 1940년 정릉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나만 잘 믿어 구원받으면 된다는 개인 구원 신앙에서 우리 사회가 함께 구원되어야 한다는 믿음의 전환이 바로 이 모임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장기려 선생님이 정릉에 또 다시 오셨는지, 오셨다면 몇 번이나 오셨는지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로부터 두달 뒤에 평양 기홀병원 외과 과장으로 발령이 나서 서울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김교신 선생은 1945년 4월에 돌아가셨습니다. 1940-1945년 사이 장기려 선생이 정릉을 방문했다는 기록을 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1940년대 김교신 선생 집 뒤는 산이었습니다. 개울에서 돌을 주워다가 집을 손수 지었고, 1500평의 땅에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했습니다. 2018년 4월에 김교신 선생 집이 있던 378-1번지에 김교신을 기념하는 공간이 생겼습니다(혹시 정릉 주민들이시라 다 아는 얘기를 새삼스레 했다면 양해를 구합니다).
-# 장기려와 감리교회
장기려 선생님은 열네 살 때 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장기려 선생님도 감리교 출신 크리스천이란 얘깁니다. 할머니 등에 업혀 나가기 시작한 첫 교회는 평안북도 용천의 장로교 소속 입암동교회였습니다. 개성에 있는 송도고보를 다닐 때는 남감리교회 소속의 교회를 다녔습니다. 당시 개성에는 세 개의 남감리교회가 있었습니다. 장기려 선생님은 세례를 받던 1925년 당시 개성에서 목회를 하시다가 훗날 감독에 된 정춘수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은 것 같습니다. 이건 제 추론이고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서울에서 지금의 서울대 의대를 다닐 때는 명륜동에 있는 장로교 소속의 연건동교회에 출석하다가 평양으로 가서는 다시 감리교단 소속의 신양리교회에 출석하셨습니다. 그러나 1944년에 신양리교회가 일본기에 절을 하고 동양요배를 하고 신사참배에 굴복하자 해방이 될 때까진 교회 나가기를 거부하고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 선택과 집중
<알쓸신잡> 장기려 편 동영상을 많은 분들이 보셨을 것 같습니다만 다시 보여드린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보신 장기려 선생님의 동영상이 선생님의 진면목이냐 묻는다면 저는 아니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물론 가난한 환자의 치료비를 대신 내고, 돈 없어 퇴원하지 못하는 환자에게 늦은 밤 시간에 병원 뒷 문을 열어놓고 도망가게 하고, 영양실조 걸린 환자에게 닭 두 마리 살 돈을 주라고 처방하고, 거지가 집에 구걸 오면 겸상 하게 하고, 추위에 떠는 거지에게 외투를 벗어 주고, 잔 돈이 없어 월급으로 받은 수표를 거지에게 주고, 통장에 남아 있던 1천 만 원을 자기 간병인에게 다 주고 떠나시는 모습도 훌륭합니다. 문제는 한국 사회든 교회든 그분이 돌아가신 지 25년이 지났는데도 매일 그 이야기만 하는 것이 저는 많이 아쉽습니다. 저는 지난 15년 동안 자주 장기려로 검색을 많이 했습니다. 목사님들의 설교는 두말할 것도 없고 언론에 나오는 기사나 칼럼들도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오늘 동영상에서 다룬 이야기들만을 무한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그런 이야기는 인터넷에 차고 넘치니 과감하게 생략하고 장기려 선생님의 또 다른 진면목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우리 시대는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그가 어떤 학교를 나왔고, 누구에게 배웠고, 어떤 자리에 있었느냐를 주로 봅니다. 스펙이 어떻냐가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인물 전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배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의 인생엔 그것 말고도 소중한 가치가 많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장기려 선생님이 서울대를 나와 서울대 교수를 지내고, 대통령상을 받고, 막사이사이 상을 받았다는 등등의 인터넷 검색 잠깐 하면 다 나오는 이야기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소개하려는 장기려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 장기려라는 사람
1) 1950년대 초반, 장기려 선생은 수술을 하다가 과실로 환자가 사망했습니다. 다른 의사 같으면 어떻게든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발뺌을 했겠지만 선생님은 경찰서에서 가서 자기의 실수로 환자가 죽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런 행동이 알려지면 선생님이 원장 자리에서 물러날 수도 있고, 병원 문을 닫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기려 선생님은 그런 상황에서조차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가장 혐오했던 것이 위선이었고, 진실이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이렇게 나오자 경찰은 “면허증 있는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다가 죽었는데 그걸 어떻게 하겠소. 할 수 없지 뭐” 하며 풀어주었습니다. 장기려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엔 이런 일이 많았습니다.
2) 장기려 선생님의 1989년 9월 6일 일기는 매우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선생이 자신의 평생에서 가장 잊지 못하는 사람 1순위인 이경심 할머니의 138주기 생일 축하 파티를 청십자병원 식당에서 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추도일을 50년 기억하여 지키는 것도 어려운데 138주기 생일축하 턱이라니! 우리가 위대한 영웅이니 자신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느니 하는 사람에게도 못할 정성을 장기려 선생님은 이처럼 할머니에게 쏟고 가셨습니다. 적어도 장기려 선생님에게 할머니는 간디, 마틴 루터 킹, 케네디 대통령 이상이면 이상이었지 그 이하는 아니었습니다.
3) 고신대학 복음병원 옥상에 있는 장기려 선생의 유택 철재 책상에는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사진틀 두 개가 있었습니다. 왼쪽에는 한국 외과의사의 선각자인 선생의 스승 백인제 박사가, 오른쪽에는 선생 말년의 영적 멘토인 ‘종들의 모임’ 어네스트 로빈슨 선교사의 사진이 나란히 놓여 있다. 장기려 선생님은 어떤 의미에서는 스승 백인제 박사보다 훨씬 더 유명해졌습니다. 그리고 나이도 옛 선생보다 훨씬 더 늙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죽는 날까지 책상에 앉을 때마다 스승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로빈슨 선교사는 장기려 선생이 만난 사람가운데 무명이지만 영적 스승으로 깎듯이 모셔 서재 앞에 두었습니다. 선생님의 말년 일기에 로빈슨 선교사의 가르침은 수도 없이 언급됩니다. 장기려란 자신의 스승 앞에 이렇게 어린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4) 장기려 선생님은 평생, ‘바보’ 거절을 모르는 ‘예스맨’이란 닉네임을 달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장기려란 사람은 원칙을 타협하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사소한 규칙 때문에 경직되는 것과 달리 선생님은 꼭 필요한 원칙을 제외하고는 늘 상대방 입장을 먼저 헤아렸습니다.
공산 치하에서 김일성대학 부총장과 병원장이 교수로 청빙하기 위하여 찾아왔을 때 장기려 선생님은 주일 성수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다며 청빙을 거절했습니다. 수술을 할 때 기도를 하고, 김일성대의 의대 수업을 하면서는 자신이 크리스천이란 사실을 스스로 드러냈습니다. 거기다가 공산당 입당을 요청하는 의대 학장의 명령에 대해서도 그럴 수 없다고 맞섰습니다.
5) 서슬퍼런 전두환 대통령이 부산에 내려와 식사 초대를 했지만 거절한 일도 있습니다. 비서가 당일 연락을 했더니 선생은 선약이 있다며 대통령 식사 초대를 사양했습니다. 애들 말로 간이 배 밖으로 나왔던 거죠. 그날 장기려 선생은 일주일 뒤에 자기 주례로 결혼하는 부산 아동병원 정우영 박사 커플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결혼 주례도 아니고 결혼 1주일 전에 인사하러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현직 대통령의 식사 초대를 사양한 것입니다.
6)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두 분의 제자 의사 선생이 장기려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동상 제작을 위해 사진 찍는 사람과 함께 선생님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5분만 사진을 찍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길 들은 선생님은 한 손을 번쩍 들고, “내 동상을 만드는 그 놈은 벼락을 맞아 죽어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남에게 싫은 소리 안 하기로 소문난 선생이 어떻게 사람을 세워놓고 “저주를 받으라”는 극언을 할 수 있었는지, 실로 놀랍습니다.
-# 시대를 앞서 간 장기려
장기려 선생님은 자기를 가르친 선생의 삶을 따라 살지 않고 자기 시대의 문제들과 씨름하며 이렇게 앞장 서 나갔습니다.
1). 장기려 선생님은 일제 강점기 때인 1943년 우리나라 외과 의사로는 처음으로 간암의 설상절제술에 성공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 와 있던 일본 최고 의사도 실패한 수술을 약관 32살의 초년병 의사가 성공한 것입니다.
2). 장기려 선생님은 1959년에 또 다시 우리나라 최초로 간암에 대한 대량 절제 수술의 성공했습니다. 우리나라 외과 수술의 새 역사를 쓴 것입니다.
3). 선생님은 한국 전쟁 이후 그 어려운 상황에서 병원 월급을 직책이나 나이에 따라 책정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지급했습니다. 병원장인 자기보다 엠뷸런스 운전을 하는 직원이 더 많은 월급을 타게 만들었습니다. 자기는 아들과 단 둘이 살았고, 운전 기사는 대 식구였기 때문입니다. 장기려 선생은 이미 60년전부터 복음의 정신에 따라 진정한 복지를 실천했습니다.
4). 장기려 선생님은 또한 대한민국 정부조차 하지 못했던 의료보험제를 20년전부터 실시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병원도 못 가고 비통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현재 보건복지부가 시행하는 전국의료보험은 장기려 선생님이 시작한 의료보험을 인계 받고, 그걸 참고한 것입니다.
-# 장기려 답습
장기려선생기념사업회나 장기려 선생님을 따르는 제자 그룹에서는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와 씨름을 하는 게 아니라 아직도 장기려 선생님이 평생 하셨던 무의촌 진료, 외국 봉사 진료 등을 계속할 뿐인 것처럼 보여 안타깝습니다.
“만일 의사가 자기의 배운 것, 경험한 것(그것이 성공한 것이든지 실패한 것이든지)을 써 남겨서 후세에 전하지 아니하면 그는 동료들 중에서 기생충에 지나지 아니할 것이다”
-장기려
-# 장기려와 글쓰기
선생님은 회갑이었던 1971년부터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는 회고 글을 많이 썼습니다. 1976년에는 16편의 회고록을 썼고, 1988년 <부산모임> 종간호에 쓴 “예수님의 생애와 나의 회고”를 다시 썼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는, 예수와 자신의 생애를 비교하는 회고의 글을 쓴 것입니다. 한 달 뒤인 1989년에는 다이어리에 장문의 “한 늙은 의사의 이야기”를 다시 썼습니다.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선생님은 부산에서 평양 생활 10년을 회고한 글을 썼고, 북한에서 출석했던 평양산정현교회 시절의 회고글, 자기 믿음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주기철 목사와 오정모 사모에 대한 글, 직접 경험한 3․1운동과 8․15 해방에 관한 회고 글도 썼습니다.
솔직히 선생님의 글은 무미 건조하여 재미가 없습니다. 의사로써의 일만으로도 벅찼던 분입니다. 그런데 왜 늙어갈수록 그토록 글쓰기에 매달렸을까요?
선생의 글쓰기는 취미생활의 연장도, 뭔가 멋진 것을 남겨 보자는 욕망의 표현도 아니었습니다. 선생님 일기는 초등학생 일기 같기도 하고,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대개는 무표정한 사실의 나열이고, 주어와 동사로 이루어진 멋없는 글입니다. 매일의 진료를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했고, 누구를 만나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몇 시에 이발했는지를 꼼꼼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날 읽은 성경이 어느 곳인지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선생의 일기는 아니 뭐 이런 내용이라면 굳이 쓰시나 싶습니다. 그런데 읽고 거듭 읽다 보면 깨달음을 얻습니다. 어느 순간부턴가 하잖게 보이던 우리 일상이 매우 중요해 보이는 겁니다.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 평전 읽기와 멘토
“법학을 가장 잘 배우는 길은 훌륭한 전기를 많이 읽는 것”
-G. 라드부르흐
먼저 전기 읽기가 왜 우리 신앙과 삶에 중요한지 잠깐 살펴봅니다.
21세기 사람들은 선생, 스승, 교사, 교수보다 멘토란 단어를 더 좋아합니다. 기존의 교사나 스승이나 교수 이상의 역할을 선생에게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멘토는 단순히 잘 가르치는 선생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는 선생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권위적인 스승이 아니라 신뢰를 바탕으로 상담해 주고, 놀아주고, 어머니처럼 어리광도 받아주는 인격적인 선생을 원합니다. 더 이상은 우상으로 떠받들거나 권위로 누르는 선생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참된 멘토는 “일상에 지친 나를 위로하며 해법까지 제시하지만 복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저는 정릉감리교회에서 2월의 신앙강좌 주제를 장기려 선생님으로 정한 이유가 위로와 해법을 제시하면서도 군림하지 않는 인격적 선생을 교우님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서가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창조 당시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저는 창조 당시의 인간성이 회복될 때만이 남자와 여자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흑인과 백인이, 많이 배운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차별 받지 않는 세상이 가능해진다고 믿습니다. 초대 교회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그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저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종과 자유자가 로마와 그 로마의 지배를 받는 유대인들이 형제와 자매라 부르며 평등을 실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크리스천들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계급, 성별, 민족성, 종교 등에 따른 차별을 초개같이 버렸습니다. 그랬으니 세상이 어떻게 전복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장기려 선생님은 북한의 수령 동지 앞에서 당당히 할 말을 했습니다. 최고 권력자 앞이라고 비굴하게 원칙을 굽히거나 천하고 약한 사람이라고 무시하거나 군림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다수 유명인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독재에 저항했지만 집에서나 자기 조직에서는 아랫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독재를 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친구가 되어 사람들을 감동시키지만 권력 앞에서는 비굴해집니다. 대통령이나 장관이나 국회의원과 찍은 사진을 자기 집무실에 걸어 놓고 자랑을 합니다. 한국 교회가 우리 사회로부터 개독교 소릴 듣고, 천박하기 그지 없다는 비난을 받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많은 수의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돈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 앞에 한 없이 비굴하면서 힘 없고 못 가진 사람들 앞에서 무자비하게 군림했기 때문 아닙니까. 우리가 장기려의 삶에서 정말 배워야 할 점은 강자 앞에서 용감하지만 약자 앞에선 겸손한 그의 균형잡힌 인격입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던 것은 어떤 사람을 대통령이든 거지든 행려병자든 모두가 똑 같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선생의 가장 훌륭한 점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저는 서슴없이 ‘신분이 높든 낮든 모든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였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제가 책 제목을『장기려 그 사람』이라고 붙인 것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했던 모습이 그 분의 어떤 업적보다 훨씬 더 소중한 가치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한 장기려 선생님은 우리 시대 대한민국의 그 어떤 성도보다 헐벗고, 굶주리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하듯 병을 치료하고,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었습니다. 장기려의 영성은 세상에 보잘 것 없는 사람을 귀하게 대한 바로 그 지점에서 가장 높이 날았습니다. 존 스토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가장 큰 야망은 예수님을 닮는 것이다. 장기려 선생님이 그렇게 살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간절한 희망 또한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길 희망합니다.
-# 공존
우리 사회는 2002년 대선을 분기점으로 세대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고, 단순하던 좌와 우의 이념적 갈등도 극좌와 좌파 사이, 진보와 개혁 사이, 그리고 냉전적 수구와 합리적 보수 사이의 싸움으로 더 한층 복잡해졌습니다. 특히 요즘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취향의 문제 앞에서도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나 인간에 대한 예의 또한 너무 쉽게 포기하는 일을 도처에서 목격합니다.
장기려 선생님은 가장 보수적인 고신대학 복음병원에서 수십 년 동안을 교수와 병원장을 지냈습니다. 북한에선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선생을 배출한 보수적인 산정현교회에서 장로였습니다. 그런 교단 소속이면서도 당시 한국 교회가 거의 이단시하고, 독재 정권이 눈엣 가시처럼 여기던 함석헌 선생 등과 32년간이나 성서 모임을 계속했습니다. 보수 기독교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고신대 소속의 장기려 선생이 대표적인 반정부 인사일 뿐 아니라 퀘이커교도였던 함석헌 선생과 계속 친분을 유지하였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함석헌 선생과 처음 첫 만남을 가졌던 1940년 이래, 공산 치하에서든, 6․25전쟁 중이든, 또는 군사정권 하에서든, 심지어는 함석헌 선생이 ‘분홍색 스캔들’로 진보 진영의 일부 인사들로부터 외면을 당할 때조차도 한결같이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스승 유영모 선생마저도 버렸던 함석헌 선생을 장기려 선생은 죽는 날까지 친구로, 또한 결정적인 재정 후원자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함석헌 선생 주변의 진보적인 인사들은 장기려 선생이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지 않았고, 보수적이란 이유로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그 점은 선생 주변의 친구나 후배나 제자들도 마찬가지여서 선생이 너무도 정치적이고 신앙적으로도 혼란스러운 함석헌 선생을 가까이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25) 두 분이 걸어온 길은 달랐지만, 함석헌과 장기려는 평생을 함께 한 신앙과 삶의 동지였습니다. 저들의 다름은 인간의 존엄을 훼손할 수 없었고, 취향은 본질을 흔들 수 없었습니다. 요즘의 아수라 같이 변해버린 정치판을 보면서, 그리고 지엽적인 차이로 상대방의 인격까지 죽이려드는 우리 사회의 천박한 싸움들을 보면서 이념에 갇히지 않았던 선생님의 사랑과 상대의 잘못을 너그러이 품어주는 여유와 품격이 그립습니다.
-# 다시 받은 세례
장기려 선생님은 일흔여덟의 나이에 40년 이상 출석했던 산정현교회를 떠나 ‘종들의 모임’이란 조그만 신앙 공동체로 옮겼습니다. 이 결단이 있기까지 선생님은 4년 6개월 동안을 심사숙고했습니다. 선생이 ‘종들의 모임’을 선택하자 아들 부부는 물론 평생 의사 친구였던 전종휘 박사와 많은 제자들과 지인들이 극구 만류했습니다. 그들은 ‘종들의 모임’을 혹시 이단이 아닌가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기려 관련 논문이나 전기를 쓰는 작가나 연구자들에게 ‘종들의 모임’은 일종의 금기였습니다. 1988년 9월 4일에 장기려 선생은 세례를 다시 받았습니다. 장기려 선생을 사랑하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장로로 시무하던 부산 산정현교회를 떠나 ‘종들의 모임’이란 신앙 공동체에 나간 것은 알았지만 그 어른이 세례를 다시 받은 건 몰랐습니다. 선생님은 두 번째 세례에 대해 일기에 이렇게 적어놓았습니다.
"세례를 베풀고, 세례를 받다."
두 번째 세례는 수십 년을 한 교회에서 동거동락한 교인들과 완전히 헤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단 모임에 가입했다는 뜻이니 고신대학교, 그리고 사회 각계 각층의 크리스천들로부터 외면을 각오해야 결단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엔 꽤나 무감각해졌지만 두 번째 세례는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삶과 죽음을 결정 짓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유럽 여러 나라의 제세례파 교인들은 국가 권력의 도움으로 종교개혁에 나선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을 매우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요즘은 이들을 아나뱁티스트들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종교와 국가권력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이 봉건 제도를 반대하고 무기 소지를 거부하고, 교회가 가진 특권에 저항하고, 자유, 양심, 인간의 존엄성을 요구했습니다.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이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를 통해 회개와 거듭남 없이 교인이 되는 가톨릭의 악습을 끊어내지 못하자 저들은 다시 세례를 받으며 당시 종교와 국가 권력에 저항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선택에 당시 국가 권력과 종교 권력은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습니다. 그들이 잡히면 고문을 당하고, 산채로 화형에 처하거나 물에 수장시켜 죽였습니다. 그들을 죽이는데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따로 없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수십 년 동안 전쟁을 벌였지만 그들 앞에 아나뱁티스들이 나타나면 전쟁을 중단하고 합세해서 저들부터 잡아 죽였습니다. 그들은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 영국, 미국, 러시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에서 450년 동안 무려 4000여 명이나 되는 순교자를 냈습니다.
물론 우리 시대엔 대한민국에서 성자, 바보 예수 소릴 듣는 장기려 선생이 다시 세례를 받았다고 순교 당할 위험이 없다는 사실을 장기려 선생은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적 목숨은 모르겠으나 사회적으로, 교계에서 완전히 매장당 할 것이란 사실은 충분히 에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기려 선생은 그런 조리돌림이나 낙인 찍히기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장기려 선생이 두 번째 세례를 다시 받은 이유입니다.
장기려 선생님이 제도권 교회를 포기하고 선택한 종들의 모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모임을 소개하는 것이 이 강연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장기려 선생님이 종들의 모임을 선택한 것은 그가 평생 기도하고 꿈꾼 참된 교회개혁이 예수님 당시 신앙을 그대로 실천하는 저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