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댓글 안장왕의 황후가 안장왕의 연애전 당시 데려온 백제처녀 한주가 아닙니까? 아무래도 안장왕 입장에서는 그렇게 아꼈을 거고 당연히 황후의 치맛바람이 거셌을 겁니다. 게다가 당시 고구려는 장수왕 이후 계속 태왕위 계승에서 정상적인 계승이 안 이루어졌고요. 문자명태왕이나 안원태왕, 안장태왕 모두 사망원인이 암살이라고 추정될 정도인데 당연히 귀족층의 세력이 강했을거고요 이들 귀족층 중 황후를 내세운 양원왕지지파와 그 동생 지지파로 나뉘었으니 내전이 터졌을 때 533년인가? 전사자만 2천이 그것도 패한 동생측에서 나왔죠. 아마 최소 3만 이상은 동원했을겁니다
모친의 힘이 성장후에도 강력하다는것은 현재도 느낄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길 군대에 가셔서 힘든훈련을 할때나 야간근무시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ㅎㅎㅎ 특히나 그 어머니가 돈과 권력을 배경으로한 어떤 강력한 집안의 딸이라면? 그 모친의 존재는 어마어마한것이죠. 그 어머님의 자신에 대한 지지는 곧 그강력한 집안의 지지가 될테니깐요...
그런데 문득 문자태왕~보장태왕까지 고구려를 보니 고구려는 결국 고대국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로마제국 공화정의 한계가 결국 귀족층간의 갈등이었듯이 고구려 역시도 귀족층간의 알력때문에 마지막 순간 붕괴된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장수왕때의 대규모 귀족숙청 그당시 신라로 투항하던 고구려스님이 온나라가 시체로 가득찼다고 했습니다. 그이야기는 그 숙청이 내전으로 까지 번졌다는 이야기가 되죠. 그리고 문자태왕이후에 귀족층의 반격이 시작되고, 안장왕, 안원왕때에는 귀족들끼리 내전을 일으키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죠. 이러한 상태는 멸망순간까지도 지속되죠. 참으로 아쉬운 일이라고 할수 있죠.
로마공화정의 한계는 귀족간의 갈등이 아니라 비귀족 측, 평민층과의 갈등 문제였습니다. 귀족간에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껏해야 개인적인 갈등 정도였던 것에 반해, 귀족층과 평민층간의 갈등은 서로 다른 계급간의 갈등문제였던 만큼 공동체의 분열과 내분의 위험을 안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가 원로원과 갈등을 빚었던 가장 큰 이유는 몰락귀족이었던 카이사르의 정치적 기반이 평민층 이었고 이에 따라 카이사르가 단행한 여러 정책들과 그 수단들이 평민층의 이해에는 부합되는 반면에, 귀족층의 이해와 기득권,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에서 정면으로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여후는 아들이 충격 먹어서 양위한 거고 가남풍은 아마 남편이 황제에 있었고 팔왕의 난인가로 남편보다 먼저 죽었고 측천무후는 제가 보기에 권력만 좋아한 또라이고 청의 서태후는 아들이 어린 나이로 죽고 광서제는 폐위되지 않았습니다..그저 감금된 정도..하긴 양원왕도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귀족들 눈치만 본 왕으로 보이네요..근데 보장왕 이야기 물어봤는데 양원왕 이야기네요..ㅋ
여후는 혜제의 아들인 유공을 즉위시키고(소제) 이 소제가 나중에 자신의 생모가 어떻게 죽은 것임을 알게되고 여후에게 복수하려다가 당했습니다. 이 소제의 뒤를 이어서 황위에 오른 것은 항산왕 유의(소제)입니다만 .. 혜제는 충격은 먹었고 1년 정도 앓았고 이후 주색에 빠졌습니다 .. 이런 혜제가 양위라뇨? 혜제는 양위한 적 없습니다만
꼭 남자들이 기록해서 왜곡된 시각이라 해도 도대체가 멀쩡한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여후나 측천무후도 정치 잘했다고 하지만 정상인처럼 보이지는 않는군요..우리나라도 문정왕후랑 명성황후 도대체가 정상인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꼭 그렇게 무리수를 둬가면서 해야 하나요? 여자가 정치하는 것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순리가 있는데 뭐 일부러 욕먹고 싶어서 그런 거 같군요..개인적으로 위에 열거한 사람들 중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뛰어난 정치가 따지면 여후,측천무후 정도는 평가할 수 있는데 그건 정치가로서지 도대체가 정상인처럼 보이지가 않습니다..
조선국왕 인종님 제 말 뜻을 잘못 이해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위의 여후나 가남풍, 풍태후, 측천무후, 서태후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 적이 없습니다만 -_ -;; 조선국왕 인종님이 여후 부분에 있어서 잘못 아시는 것 같아서 따로 올려드린 것이고 서태후 부분에서도 역시 그런 것 같아서 올린 것입니다 -_ -;;
첫댓글 안장왕의 황후가 안장왕의 연애전 당시 데려온 백제처녀 한주가 아닙니까? 아무래도 안장왕 입장에서는 그렇게 아꼈을 거고 당연히 황후의 치맛바람이 거셌을 겁니다. 게다가 당시 고구려는 장수왕 이후 계속 태왕위 계승에서 정상적인 계승이 안 이루어졌고요. 문자명태왕이나 안원태왕, 안장태왕 모두 사망원인이 암살이라고 추정될 정도인데 당연히 귀족층의 세력이 강했을거고요 이들 귀족층 중 황후를 내세운 양원왕지지파와 그 동생 지지파로 나뉘었으니 내전이 터졌을 때 533년인가? 전사자만 2천이 그것도 패한 동생측에서 나왔죠. 아마 최소 3만 이상은 동원했을겁니다
그리고 흔히 나이 많으면 어머니 힘이 필요없다? 전혀 아닐겁니다. 오히려 모친의 힘이 더욱 필요해지는 경우도 많지요. 당장 오양수산이나 동아제약 보세요. 완전히 어머니때문에 회사가 결딴나게 생긴 판입니다. 좀 빗나갔지만요.
모친의 힘이 성장후에도 강력하다는것은 현재도 느낄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길 군대에 가셔서 힘든훈련을 할때나 야간근무시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ㅎㅎㅎ 특히나 그 어머니가 돈과 권력을 배경으로한 어떤 강력한 집안의 딸이라면? 그 모친의 존재는 어마어마한것이죠. 그 어머님의 자신에 대한 지지는 곧 그강력한 집안의 지지가 될테니깐요...
그런데 문득 문자태왕~보장태왕까지 고구려를 보니 고구려는 결국 고대국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로마제국 공화정의 한계가 결국 귀족층간의 갈등이었듯이 고구려 역시도 귀족층간의 알력때문에 마지막 순간 붕괴된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장수왕때의 대규모 귀족숙청 그당시 신라로 투항하던 고구려스님이 온나라가 시체로 가득찼다고 했습니다. 그이야기는 그 숙청이 내전으로 까지 번졌다는 이야기가 되죠. 그리고 문자태왕이후에 귀족층의 반격이 시작되고, 안장왕, 안원왕때에는 귀족들끼리 내전을 일으키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죠. 이러한 상태는 멸망순간까지도 지속되죠. 참으로 아쉬운 일이라고 할수 있죠.
로마공화정의 한계는 귀족간의 갈등이 아니라 비귀족 측, 평민층과의 갈등 문제였습니다. 귀족간에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껏해야 개인적인 갈등 정도였던 것에 반해, 귀족층과 평민층간의 갈등은 서로 다른 계급간의 갈등문제였던 만큼 공동체의 분열과 내분의 위험을 안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가 원로원과 갈등을 빚었던 가장 큰 이유는 몰락귀족이었던 카이사르의 정치적 기반이 평민층 이었고 이에 따라 카이사르가 단행한 여러 정책들과 그 수단들이 평민층의 이해에는 부합되는 반면에, 귀족층의 이해와 기득권,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에서 정면으로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전한의 여후본좌나 서진의 가남풍이나 북위의 풍본좌(풍태후)하고 당의 측천본좌, 청의 자희본좌 무시하십니콰? 이 여본좌들은 아들(심지어 손자) 황위에 올리고 내리는 것을 가볍게 했습니돠 ..
여후는 아들이 충격 먹어서 양위한 거고 가남풍은 아마 남편이 황제에 있었고 팔왕의 난인가로 남편보다 먼저 죽었고 측천무후는 제가 보기에 권력만 좋아한 또라이고 청의 서태후는 아들이 어린 나이로 죽고 광서제는 폐위되지 않았습니다..그저 감금된 정도..하긴 양원왕도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귀족들 눈치만 본 왕으로 보이네요..근데 보장왕 이야기 물어봤는데 양원왕 이야기네요..ㅋ
여후는 혜제의 아들인 유공을 즉위시키고(소제) 이 소제가 나중에 자신의 생모가 어떻게 죽은 것임을 알게되고 여후에게 복수하려다가 당했습니다. 이 소제의 뒤를 이어서 황위에 오른 것은 항산왕 유의(소제)입니다만 .. 혜제는 충격은 먹었고 1년 정도 앓았고 이후 주색에 빠졌습니다 .. 이런 혜제가 양위라뇨? 혜제는 양위한 적 없습니다만
동치제 즉위→권력장악→광서제→쿠데타, 광서제 유폐(사실상 폐위나 다름없음), 권력장악→이후에도 광세제는 사실상 권력에서 아웃 오브 안중(폐위시키려고 했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하지못함.) .. 사실상 황위에 올리고 내리는 것을 가볍게 한 케이스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봅니다만
꼭 남자들이 기록해서 왜곡된 시각이라 해도 도대체가 멀쩡한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여후나 측천무후도 정치 잘했다고 하지만 정상인처럼 보이지는 않는군요..우리나라도 문정왕후랑 명성황후 도대체가 정상인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꼭 그렇게 무리수를 둬가면서 해야 하나요? 여자가 정치하는 것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순리가 있는데 뭐 일부러 욕먹고 싶어서 그런 거 같군요..개인적으로 위에 열거한 사람들 중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뛰어난 정치가 따지면 여후,측천무후 정도는 평가할 수 있는데 그건 정치가로서지 도대체가 정상인처럼 보이지가 않습니다..
조선국왕 인종님 제 말 뜻을 잘못 이해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위의 여후나 가남풍, 풍태후, 측천무후, 서태후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 적이 없습니다만 -_ -;; 조선국왕 인종님이 여후 부분에 있어서 잘못 아시는 것 같아서 따로 올려드린 것이고 서태후 부분에서도 역시 그런 것 같아서 올린 것입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