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서른, 빈들교회 지하사무실에서
기우는 젊음 즈음, 대전시 은행동 구(舊) 도청 앞 경찰서 골목으로 50미터쯤 꺾어진 '풍년 갈비' 맞은편으로 정지강 목사께서 좌장이신 '빈들교회'의 지하실에서 거(居)하던 시절이다. 1층에는 시위전력 미발령교사 장재인, 최영애 부부가 세 살짜리 아들 장호와 살고 있었고 그 아래 지하실로 해직교사 단체인 '민주교육실천협의회' 사무실과 풍물패 '터'가 있었다.
1985년, 그해 여름, 국가보안법을 포함한 17명의 교사가 해직의 길로 가게 되었고 그중 7명이 대전, 충남 소속이었다. 국어교사였던 나 역시 무크지 『민중교육』에 단편소설 「비늘눈」을 발표하고 담장 밖으로 쫓겨났다. ㅈ신문 8월 12일자 보도를 그대로 인용하면 그 소설은 "사립학교에 임용하려던 교사가 기부금 제안에 회의를 느끼고 포기함"이었다. 경찰서의 설명에 의하면 "사립학교 채용 금품수수'란 게 애당초 없으니 그게 허위사실 유포요, 국가혼란을 유발하여 적을 이롭게 하여 이적행위와 연결된다는 도표였다.
나와 조재도, 송대헌은 각각 그렇게 소설, 시, 르뽀를 발표했고 류도혁 선배는 무크지의 좌담 참여가 이유였지만 전인순, 황재학 등은 농촌학생들의 시를 수록했다는 죄목이었고 그리고 발령 6개월 된 전무용 선생은 충북의 민병순 교장 선생님 원고를 전달한 이유로 이차구차 엮었으니 황당한 일이다. 또 있다. 로뽀를 수록한 복학생 졸업반 이재무는 임용기회를 영원히 박탈당했다.
나이 서른의 미혼, 해직교사였던 나는 대전역 육교 밑 성지학원과 검정고시학원을 동시에 전전하면서 새새틈틈이 지하 사무실로 들락거리는 중이었다. 대흥동 근방 학원 강사이던 최교진 선배가 운영비의 대부분을 쏟아 부었고 김진호, 류도혁, 송대헌, 조재도, 황재학, 전인순, 전무용 등이 쌈짓돈을 갹출했다.
시국은 폭폭했지만 그나마 사무실 문을 열고 밥 한 공기씩 추렴해주는 벗들이 있어서 조금은 울분을 덜어낼 수 있었다. 해직교사 1호였던 김흥수, 『삶의 문학』동인들인 이은봉, 이은식, 임우기, 이재무, 윤중호, 정영상 등이 찾아와 밥상에 술병을 얹어주며 '민주주의와 빵과 통일과 사랑'을 주제로 격론을 벌이기도 했다. 서울 지역 해직교사인 김진경, 유상덕, 고광헌, 이철국, 심임섭 등이 출간을 의논했고 공주사대 선후배인 김지철, 정양희, 이우경, 배현준, 서미원 등이 찾아와 현장 문제를 토로하기도 했다.
구성원마다 캐릭터가 달랐다. 최교진 선배는 구치소에 들락거리면서도 생글생글 경비를 책임지는 스타일이었다. 송대헌은 범생이 롤모델답게 기획서 작성과 유인물 제작에 몰입했다. 김진호는 책방 '글 천지'를 접고 복사집으로 바꿨으며 전인순은 출판사 편집장으로 초지일관 교열에 빠졌고 조재도는 시 창작과 일을 병행했다. 문제는 시국의 중압감에 젖어 소통의 공감보다는 진실게임처럼 토론과 공박으로 스스로의 상처에서 허덕이는 점이다. 신군부 정권과 운동권의 치킨게임으로 가슴에 유서를 품고 싶던 즈음이었고.
그리고 여자를 만났다. 지하 사무실 옆으로 풍물패 '터' 창단식이 있던 날이다. 우리 해직교사들보다 몇 년 후배 그룹인 풍장꾼들이 오그르르 모여들었고 나도 막걸리 몇 사발에 얼큰했던 것 같다. 맞은편 대각선으로 생머리 여자 하나가 보이는데 얼핏 '저 여자가 내 아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그게 운명이다. 그미 박명순은 민교협 사무실 간사로 채용이 되었고 나는 서울 동아일보사 임시직으로 옮기면서도 전화통화를 던지곤 했다.
언제부터였나, 용두동 시외버스 정류소에서 종촌행 막차로 빠이빠이 작별의 손을 흔들고 홍도동 숙소까지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그미의 단발머리가 길바닥에 좌르르 쏟아지는 것이다.
'6월 항쟁' 전후, 빈들교회 지하 사무실은 정신없이 바빠졌다. 국민운동본부와 대학생들의 발걸음이 잦아졌고 그만큼 감시망도 촘촘해졌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후보 단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직선제의 설렘으로 프린트를 나르고 유인물을 박았다. 그러다가 선거 일주일 쯤 남은 시점에서 덩치 큰 각목 사내들이 들이닥쳤고 우리 사무실은 초토화가 되었다.
대흥동 성당 앞에 진을 친 집권당 트럭에서 대학생들이 유인물 한 뭉치를 받은 게 시초이다. 자기네 편이 아니라는 걸 눈치 챈 사내들이.
"거기 섯! 붉은 앙마놈."
고래고래 쫓아왔는데 하필 대학생들이 민교협 지하 계단으로 도망친 것이다. 송대헌 등 해직교사들이 집기를 쌓아 출입문 봉쇄 바리게이트를 설치했으나 발길질 한 방에 우당탕탕 날아가 버렸다. 각목이 터지고 시뻘건 난로 뚜껑이 비행접시처럼 어른거렸다. 그 날짜 대전 신문에는 '민정당원과 해직교사들의 난투극'으로 기사화시켰으나 우리들은 진짜 단 한 대도 때리지 못했다.
그날 밤 송대헌이 포장마차에서. "내가 때렸지. 내 아랫배로 놈들의 주먹을 때렸고 내 옆구리로 걔네들의 각목을 때렸지." 구치소에서 목발을 짚고 나온 최교진은 목발을 빼앗긴 채 얻어맞은 후. "나이를 먹을수록 싸움을 잘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부은 발등을 쓰다듬었다. 겨드랑이 사이로 전신주 그림자가 우울히 흔들리는 '태풍 전야의 겨울'이었다.
후보단일화의 실패로 대통령은 집권당의 승리로 돌아갔다. 대학생들은 도청 앞에 모여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며 투표함 사수를 결의했으나 노태우 후보가 당선 결정되면서 어두운 골목길로 총총히 몸을 감췄다.
그리고 세월이 빛의 속도로 흘러 강산이 서너 번 바뀌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의 시인 정영상이 심장마비로 먼저 떠났고 윤중호와 유상덕 선배는 췌장암으로 하늘나라에 안착했다. 빈들교회 1층에서 밥상을 차려주던 장재인, 최영애 부부와 아들 장호는 세상을 떠났다. 주말부부로 살던 최영애 선생과 장호(4세)가 교통사고로 강물에 잠기자 장례식 마지막날 장재인도 유서를 쓰면서 벗들 모두 『섬강에서 하늘까지』의 영화 스크린으로만 남게 되었다. 남은 벗들은 교육자가 되고 작가나 출판쟁이가 되었다가 정념퇴임의 경계에서 오르내리니 가없는 세월이다. 지금은 가끔씩 가물가물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