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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빛 사랑, 적색 욕구
“스커트가 너무 짧잖아.”
정후는 현주의 드러난 다리 때문에 눈을 둘 데가 마땅치 않았다. 정후는 현주가 본사로 출장을 왔을 때도 가끔 그녀의 튀는 옷차림을 본 적이 있었지만 막상 허벅지가 드러나는 차림으로 옆자리에 앉으니 당혹스러웠다.
“본사에 패션쇼 하러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정후는 시동을 걸면서 다시 한 번 툴툴거렸다.
“이 정도가 어때서요. 예쁘게 하고 가면 더 좋죠, 뭐!”
오정태 전무가 부산에 왔을 때 서면의 T백화점에서 직접 골라준 투피스였다. 처음으로 입고 외출하는 차림이다. 스커트길이가 짧기는 했지만 그보다도 오 전무가 사준 옷을 입고 이정후 차장의 차에 동승했다는 게 맘에 걸리긴 했다.
“차장님은 앞만 보고 운전하시면 돼요. 후후!”
차안에 현주한테 풍기는 향수와 샴푸냄새가 가득했다.
“향수까지 뿌린 거야?”
한 번 코를 비튼 정후가 창문을 내리며 푸념했다.
“안 좋으세요?”
“난 머릿기름하고 향수냄새를 제일 싫어한단 말이야. 어휴, 머리 아파.”
“죄송해요.”
“다음부터 내차 타려면 향수 같은 거 뿌리지 마.”
- 핏! 매너하고는, 일부러 좋은 걸로 골라 뿌렸는데.
현주는 그래도 들뜬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부산공장에 출장 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이정후 차장과 함께 서울로 간다. 현주는 그와 함께 단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것에 무척 고무되어 있었다. 그와 데이트를 즐기는 것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토요일 오전의 고속도로는 구간별로 보수하는 지역을 빼고는 한산한 편이었다. 그가 앞차들을 속속 추월했다. 조용히 음악을 듣던 현주가 입을 열었다.
“원래 여자랑 둘이 있으면 이렇게 말씀이 없으세요?”
갑작스런 현주의 말에 정후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자랑? 나 참, 기껏 말한다는 게 고작…”
“너무 말씀이 없으셔서요. 흥분하지마세요.”
“흥분이라니? 내가 흥분했단 말이야, 지금?”
“저보다도 더 불편스러워 하시는 거 같아요.”
“천만에.”
“긴장하시는 것도 같고.”
“얼씨구!”
“우리, 담배 피우면 안 돼요?”
“우리? 담배? 점입가경일세.”
현주는 눈을 깜박이는 걸로 상황을 무마시키려 했다.
“김현주씨가 나하고 맞담배 필 군번이야?”
현주가 담배 피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후는 더욱 담배를 자제하고 있었다. 정후의 대꾸에 아랑곳없이 현주는 두 개비의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더니 하나를 정후에게 건넸다.
“죄송해요, 무례하게 굴어서.”
“전혀 죄송한 모습이 아닌데?”
하는 수 없이 담배를 받아든 정후는 운전석과 조수석의 창문을 내렸다. 현주는 고개를 돌려 조심스레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그 모습을 본 정후가 한마디 툭, 던진다.
“김현주씨는 연구대상이야.”
“왜요?”
“무언가 비밀이 가득한 느낌이 들거든. 구소련의 크렘린처럼.”
농담처럼 가볍게 말한 정후의 한 마디가 현주의 가슴을 따끔하게 찔렀다.
“연구하고 나면 실망하실 걸요.”
현주는 바깥으로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작은 소리마저 말미를 흐렸다. 분명히 농담으로 한 말일 텐데도 현주는 마음이 무거워지고 말았다.
“그럴 것 같아서 연구하고 싶지 않거든.”
“그럴 것 같다니요?”
“겉으로 튀어 보이는 사람일수록 내면은 지극히 평범하기 이를 데 없지.”
“쉽게 말하면, 빈 깡통이 요란하다는 거죠?”
“흐흐흐, 오버해서 해석하지는 마.”
“그게 그거 아녜요? 겉보기와 달리 속은 텅 비었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거 아니었어요? 차장님은 여자 기분 맞추는 데는 아주 둔하신가 봐요. 처음부터 옷차림에, 향수에 트집만 잡고.”
“여자 기분? 하하하!”
“여자란 생각이 안 드신다?”
“여자로 대우받고 싶어?”
정후는 고개를 돌려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현주는 입술을 잔뜩 삐죽였다.
“여자를 애들 취급하시면 큰 결례인 거 모르세요?”
“푸하하하!”
정후는 큰소리로 웃어넘기고 말았다. 현주가 표정을 풀면서 물었다.
“사귀는 분은 없나요?”
“사귀는 사람이라.”
“결혼을 생각하실 때잖아요.”
“후후후!”
대답 없이 굽은 도로를 유연하게 회전시키는 정후의 옆모습을 힐끔 쳐다보다가 현주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함께 여행을 해보니까 알겠네요.”
“뭘?”
“일뿐만 아니라 분위기도 있으시네요. 일하실 때 느끼는 분위기와 또 다른 멋이 풍겨요.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같이 차장님을 좋아하나 봐요.”
“듣기 나쁘지 않은 말이군.”
일할 때 느끼는 강한 카리스마와 대조적인 정후의 부드러움이 현주에게 성큼 와 닿았다. 결코 이중적이지 않은 양면적 장점을 그에게서 보게 된다.
“차장님도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으세요?”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이 나이에 사랑도 안 해봤을 거란 거야?”
“차장님은…. 그럴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는데요. 호호! 무시하는 건 아녜요.”
“보기와 다르게 사람염장을 지르는 재주가 있군.”
“어떻게 보면 나무토막 같고, 어떻게 보면 바람둥이 기질이 엿보이기도 하고. 딱 판단하기가 애매해서 저도 물은 거였거든요. 호호호!”
“김현주! 너, 오늘 너무 막말하는 거 아냐? 나무토막? 바람둥이?”
정후는 손바닥으로 핸들을 탁, 탁 두 번 두들겼다.
“죄송해요. 전 조금 가깝다싶으면 표현에 구애받지 않는 습관이 있걸랑요.”
“꼬박꼬박 말은 잘 받아치는군.”
정후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뒷목을 주무르다가 물었다.
“가까워진 것 같아? 나랑?”
“저만 그런 건가요?”
“하하하! 알다시피 난 누구하고나 다 가까워.”
연수교육을 마친 그날, 우연히 합석한 자리에서 그의 친구들은 정후가 좋은 배필을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게 가장 큰 바람이라고 했었다. 현주는 정후에게 그런 사람이 있는 건 아닐까하는 호기심이 자꾸 생기는 것이었다.
“특별히 마음을 주고 있는 사람은 없나요?”
“하하하! 집요한 면이 있네. 엉뚱한 면도 있고.”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대학시절, 잠시 사랑이란 걸 해본 적이 있었다. 입학동기인 유지혜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외로움에서 벗어난 적이 있었지만, 그녀의 부모는 귀하게 자란 첫딸이 가난한 고아와 연애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지혜가 거리를 두려는 걸 알고 고시원에 파묻혀 지냈다. 다시 고독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건 지긋지긋한 일이었기에 툭툭, 먼지 털듯 속을 비워냈다. 고독을 잊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책에 매달리는 거였다. 공부를 할 때만큼은 세상이 평등했다. 유일하게 불행을 떠올리지 않게끔 하는 장치가 바로 공부였다.
공인회계사시험에 합격한 즉시 입대했다. 그 후, 현주의 물음이 뜻하는 마음을 주고 있는 사람, 없었다. 누구에게 줄 수 있는 여분의 마음을 지니지 못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정후는 현주의 물음에 털털한 웃음으로 비켜가며 카오디오에서 흐르는 노래에 맞춰 핸들을 토닥거렸다.
“핏! 재미없어라.”
“현주 남자친구는 뭐하는 사람이지?”
“네?”
“놀라긴.”
“아, 네! 잠깐 딴 생각 좀 하느라고…, 그냥 직장 다니는 평범한….”
현주는 정후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굉장히 사랑하나 보지? 이렇게 매번 서울까지 찾아가서 만나나?”
“…….”
“현주가 마음을 준 사내라면 꽤나 그럴듯한 사람일 거야. 하하! 그렇지?”
정후가 웃음까지 섞어가며 가볍게 물었으나 현주는 가볍게 대답할 수 없었다. 거짓말에 익숙하지도 않았지만 그와의 대화에 정태가 거론되는 것이 적어도 지금 이 차안에서만큼은 감내하기 어려웠다.
겨우 서울까지 동승하면서 직장상사와 부하여직원간의 서먹한 벽을 허무는가 싶었는데 정후는 터부시해야 할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 의도가 없는 물음이었겠지만 잠시 하늘로 오를 것 같던 기분이 일순간에 사그라졌다. 다행히 그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차창 밖으로 이름 모를 들꽃이 길게 도열해 있다. 침묵이 어색해서였을까. 현주는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미혼인 사람이 가정이 있는 상대와 교제한다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은연중 자신과 오정태 전무와의 만남을 합리화시키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는 아니었을까. 숨죽이며 감춰둔 비밀이 버거웠던 걸까. 현주는 말을 꺼내놓고도 괜한 입놀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후는 두부 썰듯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대다수 불륜이고 유희에 불과할 뿐이지.”
“어떻게… 그렇게 단정하세요?”
현주는 귀를 쫑긋하고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현주는 그걸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비록 미혼남녀는 아닐지라도 진심이 통하고 그리운 감정이 솟구친다면 그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현주를 힐끔 쳐다본 정후는 창을 내렸다. 바람이 시원했다.
“솟구치는 감정의 빛깔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 그 감정이 맑은 옥빛이면 사랑이고, 탁한 적색이면 추접스런 욕구일 뿐이지. 그렇지만 정상적이지 않은 관계에서 맑은 옥빛을 보기가 쉬울까.”
남녀 간의 에로스를 승화시킬 수만 있다면 부처되기도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거란 말에 공감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욕구에 연연하는 부처는 말이 되지 않는다. 정후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맑은 옥빛에서 출발해 끝까지 그 순수함을 지키고 싶었다.
“그립기 때문에 만나고, 만나서 함께 잘 수 있는 건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전, 사랑하는 사람끼리 함께 자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 상대가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건 사랑의 이미테이션이라고 봐야겠지. 사랑을 가장한 욕구의 발산, 쾌락을 위한 불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거지.”
현주의 이의제기에 정후는 단호하게 자신의 생각을 쏟아냈다.
“인간이 만든 가장 고귀한 단어가 사랑이야. 그 사랑을 전도되어버린 쾌락이라든가 절제 없는 욕구 따위와 혼동한다면 그건 사랑을 비하시키는 거야. 사랑을 욕되게 하면 벌 받아.”
그렇게 거침없이 표현하고서는 “내 생각일 뿐이야.”라며 마무리했다. 정후는 남녀 간의 진정한 사랑은, 함께 가정을 꾸려 가족을 이루는 거라고 생각해왔다.
가족이 없이 외롭게 살아왔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개념 지은 사랑이 육체나 탐하는 추잡한 욕구와 동일하게 취급되는 게 용납되지 않았다.
- 괜한 얘기 꺼냈나봐.
현주는 마치 나무라듯, 설교하듯 말하는 정후의 가차 없는 어투에 할 말을 잃었다. 반론을 제기하고도 싶었으나 더 이상 말을 이을 수도 없었다. 오정태 전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지만 그와의 관계가 설령 사랑이라 해도 둘의 관계를 정후에게 인정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 전무의 부인을 친 고모처럼 생각하는 그였다. 그의 단정처럼 탐닉을 위한 그리움이고, 쾌락을 위한 불륜임을 강하게 부인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잠시 생각에 골똘해 있는데 정후가 던진 한 마디는 예리한 활촉처럼 현주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 사람이 유부남이야?”
정후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가볍게 핸들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현주는 호흡이 가빠왔다. 창밖에 시선을 고정시킨 현주가 아무런 대꾸도 없자 정후는 긍정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내 말이 좀 거칠었군. 내 짧은 상식에서 파생된 주관일 뿐이니까 담아두지 마.”
위로인지 비아냥거림인지 구분되지 않는 정후의 말이 현주에게는 곪은 상처가 건드려진 것처럼 쓰라렸다. 참으로 호된 아픔이다. 그의 말은 마치 자신의 비밀을 모두 파악하고 서서히 그 비밀의 중심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들렸다. 송곳을 비틀어 후벼 파는 것처럼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 탁한 적색…, 절제 없는 욕구…
침대에 느긋하게 누운 정태의 벗은 몸을 천천히 마사지하고 부드럽게 애무하다가 땀에 젖은 채 몸을 섞어 불꽃같은 쾌락에 빠지고, 흥건하게 묻어난 정액을 닦아내던 많은 날들이 현주의 뇌리를 훑고 지나갔다. 정후의 말대로 그건 탁한 적색을 띤 욕구에 다름 아니었다.
- 오정태 전무는 내게서 탁한 적색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외에도 또 다른 가치를 느끼는 그 무엇이 있을까. 내가 그에게서 진정 얻고자 하는 건 도대체 뭘까.
햇살이 창창한데도 하늘색이 잿빛으로 무겁게 낮아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낮아진 하늘이 현주의 머리를 짓누른다. 현주는 그동안 깊이 인식해보지 않았던 의문들을 하나씩 떠올리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김현주! 기분 풀어. 대화소재가 너무 무거웠나보다.”
정후는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일에 유연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 사실 생각과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것보다 훨씬 어렵기는 했다. 보다 일찍 현주본인의 이야기였음을 파악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흘깃 조수석을 쳐다보았는데 차창에 비친 현주의 뺨에 한줄기 눈물자국이 보인다. 정후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 젠장! 이게 무슨 경우람. 여직원을 울리다니.
정후는 쉼터에 차를 정차시키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 이럴 땐 어떡해야 하지. 이걸 어떻게 수습시키지.
시동을 껐다.
“우는 거야?”
어깨에 손을 얹고 얼굴을 살피려 했는데 현주가 홱, 몸을 돌린다. 정후는 당혹스러웠다.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내는 현주의 옆모습을 보고 안됐다고 느끼면서도 정후는 문득 울기까지 해야 하는 슬픔의 실체가 궁금해졌다.
“내 말에 서운했으면 사과할게. 한 번만 봐주라.”
정후는 몸을 돌려 손바닥을 비비면서 현주를 달랬다. 그제야 현주는 쑥스러운 듯 몸을 돌려 정후의 어깨를 밀어 자세를 바로 잡게 했다. 멋쩍게 웃는 정후의 표정이 푸근하면서도 아이 같다고 느껴졌다. 신중하지 못한 처신으로 그를 난감하게 만들고 말았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를 기만한 것 같아 현주는 죄지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