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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진수(眞髓)를 찾는 구도자의 자세
-박헌오 시조집「시계 없는 방」평설
野城 이도현(국제펜한국본부 자문위원)
1. 서언
우촌(愚村) 박헌오 시인이 여섯 번째 시조집 「시계 없는 방」을 출간한다. 축하를 드린다.
박 시인은 충남 예산에서 낳고, 당진에서 자랐으며, 대전에 들어와 학교생활을 시작하고, 당시 학생잡지인 ‘학원’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학의 길로 들어선다.
1970년 지방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대전시 위민실장으로 재직할 당시 시조시인 이방남을 만나 시조를 쓰기 시작하여 1987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입상하고 1987년 시조문학지로 등단한다.
그 후 꾸준히 작품 활동을 계속하여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 대전시조시인협회 회장을 맡는다. 2009년 대전광역시 동구 부구청장으로 재직하면서 <대전문학관>건립을 추진하고, 2014년 대전문학관 초대관장으로 부임하여 문학관의 확고한 위상을 확립시켰다.
저서로는 1993년 첫 시조집 「석등에 걸어둔 그리움의 염주 하나」 1997년 두 번째 시조집 「산이 물에게」 1998년 자유시집 「우리는 하얀 솔잎이 되어」 2010년 퇴직 시집 「그 겨울 이야기」 2014년 시조집「뼛속으로 내리는 눈」 2015년 공저「현대시조창작집-이론과 실제」등을 펴냈다.
현재 대전문인협회 수석부회장,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을 맡아 봉사하고 있다.
영국의 계관시인 워즈워스(1770~1850)는 시를 쓰는 이유로 ‘쓰지 않고는 못 배겨 쓴다’ 하였고, 어느 평론가는 문학의 기능에 대한 질문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글을 쓴다’ 고 말하고 있다.
박 시인은 시조집 「시계 없는 방」서문에서 시를 쓰는 것은 '신의 영역인 조화로움에 합류하는 것, 해탈의 경지, 구원의 경지로 향하는 실마리를 찾으려는 것' 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앞의 두 사람과 견해를 달리 하여 종교적 안목에서 대답하고 있는 것 같다.
때문에 시인의 작품들은 편편마다 그 속에 삶의 진솔한 이야기가 들어 있고, 그 이야기들이 구도자의 자세로 절실하게 묘사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따라서 수록된 80편의 작품들은 4부로 나누어 크게는 인생과 종교에서 출발하여 자연, 가족, 예술, 해양, 조류와 어족, 그리고 꽃과 나비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소재에서 그들의 삶의 의미와, 생명의 존엄 그리고 가치에 관하여 진지하게 묻고 대답하고 있다.
박시인은 주일이면 성당에 나가 하느님을 만나고 기도하며 신앙인으로서의 자세와 자질을 닦는다. 또한 오랜 동안 대전광역시청 문화체육과장, 국장, 부구청장 등 공직 업무를 수행하면서 그간 몸에 익힌 성실과 겸손한 자세로 감사와 사랑을 실천하면서 봉사하고 있다.
그는 문학 이외에도 서예와 문인화 수업을 통하여 시와 그림을 함께 연마하면서 이른바 예술혼을 사르기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제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2. 마음을 여닫으며
바람이 들고 가다 내려놓은 여백 한 점
풀꽃이 등을 굽혀 건져놓은 이슬방울
들창을 열고 앉아서 화선지에 눕는 마음
빈 가지 뻗어 내려 꽃망울을 감추고
붓 끝에 달빛 찍어 망설이는 입춘절
가야지 마음뿐인 여정 간이역에 서있다.
긴 세월 비어있던 원고지 칸칸마다
보고 싶은 얼굴을 눈으로 그려 넣다
무상의 향기 공양에 날개 편 나비촛대
아무도 밟지 않은 순결한 마음자리
안개처럼 구름처럼 떠다니는 봄의 가객
문 열면 넘치는 은하 그 모두가 빈 몸이다.
<빈칸 일기>전문
<빈칸 일기>전문이다. 박헌오의 시조는 빈칸에서 시작한다. 비어 있는 공간 곧 존재론적 명상에서 출발한다. 성경에도 나를 비우라고 하지 않던가. 화선지, 간이역, 원고지, 나비촛대, 은하 등 구사한 시어들이 모두 비어 있는 공간이요, 모두가 빈 몸이라고 노래한다.
일찍이 노자(老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에서 모든 존재는 도(道)에서 생기고, 도는 무(無)에서 출발한다고 하였으니 빈 곳이 있어 채워지고, 빈 곳이 있어 유용(有用)하고, 비어 있기에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곧 수레바퀴, 빈 그릇, 빈 방은 비어 있기에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인위(人爲)가 아니라 무위자연 속에서 무욕(無慾)의 경지에 들어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든 것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면 얼마나 가벼울까? 하얀 화선지에 먹을 찍어 달빛을 형상화한 한국화 한 폭을 바라보는 청정한 심경이다. 문 열면 넘치는 은하 그 모두가 빈 몸이다.
박시인은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시인은 무욕과 유연성의 경지에서 소요하며 구름처럼 떠다니는 자유를 만끽하는 여유 있는 하루하루의 일기(日記)를 쓰고 산다. 아니 그런 철학, 그런 인생관으로 자기를 비우고 세상을 살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
책 한 권 붓 한 자루 황토 내음 하얀 홑청
고요가 맛있고 별빛이 따습다
들창에 고개 내민 메꽃
들어오렴, 시계(時計)는 없다.
세상의 어딜 가나 낚으려는 바늘 끝
돋보기 두께는 상현달처럼 깊어지는데
새벽별 몰래 기다리다
잡아채고 숨는 방
가난도 허무 없고 문맹도 불편 없이
개울에 비가와도 가만히 흐르는 세월
풀벌레 왜 울어 쌌는지
낙화 보고 알았지.
누에가 뽕잎 먹듯 그리움 먹고 살다
가슴속 동전만한 달 야위다 종적 없고
살얼음 딛고 앉은 기도
먼 종소리 걸어온다.
오늘도 시 한 수 읽어주는 귀뚜라미
외로움 솔깃하여 이슥토록 듣는 길손
추녀 끝 오목눈이 새
들어오렴, 불도 안 켰다.
-<시계 없는 방 1>전문
<시계 없는 방 1>! 이 시집의 제목으로 내세운 대표적인 작품이다. 제목부터 희한하여 독자를 끌어들인다. 시계가 없는 방이니 물론 휴대전화도 꺼두었을 것이다.
오늘날 지식정보화사회에서 4차 산업혁명시대로 진입한지도 오래되었다. 인공지능, 로봇, 나노기술 등의 용어가 결코 낯설지 않다. 머리를 들면 초고속 디지털문명이 엄습하여 우리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다.
아름다운 미풍양속이나 전통, 도덕, 예절은 벌써 옛것이 되어 버렸다. 문밖을 나서면 잡아챌 듯 낚아가려는 불안한 바늘 끝 세상이 되어버렸다. 훈훈한 인정으로 살아가던 아날로그 시대는 사라진지 오래다.
그러기에 시인은 차라리 시계 없는 방으로 숨어버린다. 책 한 권, 붓 한 자루, 홑청 하나, 시 한 편만을 갖고 살고자 한다. 가난도 문맹도 아랑곳없이 소나기가 쏟아져도 오불관언이요, 일엽지추(一葉知秋)라 낙엽 한 장이면 가을이 오는 것을 알지 뭐 시계가 필요할까? 꽃 한 송이로 대화를 나누는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요, 이심전심의 경지이다.
마치 시공을 초월한 노장(老莊)의 무위사상(無爲思想) 속에 묻혀 자연과 더불어 살 뿐이다. 제주도 깊은 산방산에서 세한도(歲寒圖)를 그리던 추사(秋史)선생이나, 보길도 세연정(洗然亭)에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에 심취했던 고산(孤山) 윤선도 시인의 깊은 경지를 방불케 한다.
틀에 갇혀진 제도, 초고속으로 질주하고 있는 디지털 문명사회 속에서 차라리 눈치 안보고 간섭 받지 않으려는 생각이요 의지다.
그러나 살 어름 딛고 앉은 기도와 먼 종소리, 마지막 수에서 오늘도 시 한 수 읽어주는 귀뚜라미 그리고 추녀 끝에서 불도 안 킨 채 방으로 들어오라고 마음 쓰는 오목눈이 새가 있다. 기도와, 시 한 수 읽어주는 귀뚜라미, 그리고 오목눈이 새가 박 시인에게 한 가닥 희망을 준다.
시계가 없는 방, 불도 키지 않은 방에서 시인은 기도와 묵상, 그리고 시 한 수로 자위(自慰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구도자적(求道者的) 길손이 된다.
할미꽃 빙빙 돌며/ 창(窓)을 찾는 푸른 집
나란히 들어간 이/ 문 잠그고 통 안 나온다.
세상의 자전 공전도/ 멈춰버린 땅 깊은 집.
문패도 감춰놓은/ 번지 없는 별자리
밤에만 내다보는/ 눈빛 총총 마주치고
한사랑 닦고 닦고서야/ 저리 빛을 안고 산다.
-<시계 없는 방 2>전문
<시계 없는 방 2>에선 이러한 화자의 생각이 한 굽 더 깊게 심화된다. 세상의 자전 공전도 멈춰버린 땅, 깊은 집에 들어가 문 잠그고 나오지 않는 죽음에 이르는 폐쇄된 공간속에 묻혀버린다. 그러나 둘째 수 종장에서 한 가닥 희망이 보인다.
‘한사랑 닦고 닦고서야 저리 빛을 안고 산다고’ 막을 내린다. 역설적인 화법인가? 죽음에서 건져 올린 구사일생의 한 가닥 밝은 빛이다.
그렇다면 ‘한사랑 닦고 닦는 방법’이 무엇일까? 시인은 삶이 무엇인지 경건하게 물으면서 참으로 고뇌하고 있음을 본다. 삶의 진수(眞髓)를 찾고자 하는 ‘한사랑 닦고 닦는 구도자의 자세’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따라서 작품<시계 없는 방 2>은 초고속으로 질주하는 오늘의 디지털시대를 살아가는 혜안(慧眼)을 제시하고 있다 하겠다.
아름다움 뒤에 숨은 한 슬픔이 보여요
된서리 밟혀서도 접지 못한 이파리
품속에 머문 눈물이 말라가는 꽃대궁
죽지 않는 생명 하나 뼛속에 간직하고
가지 않는 시계바늘 한 바퀴 돌려가며
피 없는 육신들이 서서 설원을 걸어가요
다시는 죽지 않고 죽은 듯이 살아서
걸어온 길 다 지운 그 하얀 높이만큼
빙점에 뿌리내리는 시린 세상 살아요.
-<설국(雪菊) 이후>전문
하얀 눈 속에 아름답게 피었다 진 국화의 슬픔을 본다. 된서리에 이파리도 접지 못하고 눈물이 말라가는 꽃대궁의 앙상하게 서있는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러나 그 꽃대궁은 아주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온 높이만큼 빙점에 뿌리 내리고 다시 사는 국화로 부활(復活)한다.
우리 인생도 영원하지 못하고 설국 이후의 국화처럼 슬픈 꽃대궁으로 죽어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빙점에 뿌리 내리고 다시 사는 국화처럼 인생도 부활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구원이요, 부활사상이다. 시인은 이러한 부활사상을 설국 이후의 꽃대궁에 환치하고 있다.
철없이 걸어가 삐거덕 열던 문
갈수록 무거워져 앞에서 망설인다
닫히고 닫히는 마음
감감하게 잠겨간다
살아온 거리만큼 멀어지는 종소리
방황 잠시 매놓고 성찰하여 털어 보면
참회의 눈물 알맹이
한없이 부끄럽다
자비의 문 나서면 세상은 빛의 둥지
눈 속의 복수초가 봄소식 펴 보이고
바람은 호수 위를 걸어와
겁에 질린 손 잡는다.
-<고해소의 문>전문
박시인은 가톨릭 신자이다. 가톨릭에서는 죄를 지은 신자가 그 죄를 뉘우치고 신부님을 통하여 하느님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다. 그 절차를 고해성사(告解聖事)라 하는데 여기서 화자가 고해소의 문을 두드리는 심경을 표현하고 있다.
첫수에서는 고해소 문을 열 때 무거워져 망설인다 하였고 둘째 수에선 참회의 눈물이 한없이 부끄럽다고 하고, 마지막 수에선 고해성사를 끝내고 자비의 문 나서면 빛의 둥지를 찾는다고 고백한다. 세상에 죄 없는 사람 어디 있을까? 그 죄를 성찰하고 신부님 앞에서 통회(痛悔)하고 고백(告白)하면 얼마나 후련할까? 겁에 질린 손을 어루만져 다독여 준다. 하느님과의 화평한 관계가 무너질 때 고해성사를 통해 회복한다고 한다. 기도와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은 결코 안이한 길이 아니다. 곧 믿음의 길이 평탄한 길이 아니고 용서와 화해, 통회의 아픈 수행 길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3. 바람과 파도의 변주곡
<가>
폭풍우가 물어뜯어 사나워진 바닷가
날개 꺾인 파도가 파들대는 외딴섬
싱싱한 달빛 그믈망
반짝이는 저 눈망울
넘어져 알을 낳는 바다의 비명소리
바람이 덮어주고 어둠이 품어주면
등대 불 손잡고 자라
재주 넘는 몽돌들
-<몽돌>일부
<나>
네 목 사주랴/네 머리를 사주랴
정결하게 말린 몸/장바닥에 걸렸구나
방망이 팍팍 두드려도/아파하지 않는 표정
어차피 막장에서/눈 비 다 맞았다고
얼었다 녹았다가/죽었다가 살아나
줄줄이 십자막대에 꿰어/쓰린 속을 달래준다.
-<황태>전문
<다>
파도가 업고와 내려놓은 작은 섬
관복을 벗어놓고 임 향해 올리는 절
무명 옷 갈아입고서/탐라도의 물결 되네
발 돋워 바라보면 화산 뱉은 한라산
천년의 오름 숲이 사투리로 꾸짖는 말
뱉어라 화산 뱉어 섬 되듯/가슴 불 뱉고 섬 되라
새벽별 싣고 가는 어부들의 푸른 눈
만선의 해가 뜨면 해녀들의 휘파람
구성진 ‘이어도 사나-’/배부르게 불러보라
<제주 관탈도>전문
제2부에선 바다를 소재로 한 작품을 수록했다. 앞으로 해양문학에 관한 관심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바다는 필경 섬, 바람, 돌, 파도, 어족 등을 떠올리게 한다.
작품 <가>에선 어느 외딴 섬의 바닷가를 거닐면서 몽돌 곧 조약돌과 대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바람은 불가사의 존재로서 형체도 없고 보이지도 않으면서 신출귀몰한다. 파도를 일으키고, 그 파도는 조약돌을 만들어 냈다. 유장한 세월을 넘놀면서 반짝이는 눈망울, 재주넘는 몽돌, 그리고 젖을 내놓고 지친 파도를 달래고 있는 모습으로 몽돌은 활유(活喩)한다.
몽돌은 천년 바람과 파도가 만들어 낸 예술품이다. 시인은 이를 지켜보면서 그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있다. 누가 이 아름다운 풍경화 한 폭을 시인에게 주었을까? 파도의 하얀 꿈과 낭만, 반짝반짝 빛나는 조약돌의 신비 그래서 지금 화자는 외딴 섬, 몽돌에 한없이 취해 해변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작품<나> 황태를 보자. 사전을 찾아보면 황태는 얼부풀어 더덕처럼 마른 북어라고 되어 있다. 북어는 여러 종류의 이름을 갖는다. 명태, 동태, 생태, 노가리, 코다리 등의 다양한 이름을 갖는다. 황태는 동해에서 잡힌 명태를 강원도 진부령에 덕장을 만들고 그 덕장에서 한 겨울 내내 눈과 비 그리고 해풍을 쐬면서 만들어 진다.
얼다가, 녹았다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황태 고유의 맛을 낸다. 한겨울 비바람이 만들어 낸 예술품이다. 황태찜, 황태탕은 술꾼 들 만의 고유한 단골 메뉴를 이미 초월하여 만인이 찾는 귀한 먹거리로 식탁에 오른다.
시인은 첫수에서 ‘방망이 팍팍 두드려도/아파하지 않는 표정, 그리고 둘째수에선 줄줄이 십자막대에 꿰어/쓰린 속을 달래준다고’ 고 표현하고 있다.
황태를 황태로만 보지 않고 인격을 주어 황태의 덕을 의인화(擬人化) 하고 있다. 두드려 맞으면서도 아파하지 않는 표정, 줄줄이 십자막대에 꿰어 쓰린 속을 달래주는 황태의 덕을 성인(聖人)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는다.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아파하지 않고, 십자가에 매달려 인류를 구원한 거룩하신 예수님의 희생을 황태를 빌어 찬양하고 있는 가작이다.
작품<다>에서 관탈도(冠脫島)는 추자도와 제주도 사이 제주해협에 있는 작은 무인도를 가리킨다. 낚시 천국으로 불리는 이 섬은 옛날 제주도에 오는 유배자들이 제주도에 도착하기 전에 이 섬에 와서 의관을 벗어놓은 섬으로
이름지어졌다.
첫수에서는 유배자들이 관복(冠服)을 벗어놓고 임금을 향해 큰절을 올리고 무명옷(白衣)으로 갈아입고 탐라도의 물결이 된다 하였고, 둘째 수에선 화산(火山)을 뱉아 한라산이 솟듯 유배자들 가슴속 울화를 뱉고 섬 되라고 하며, 마지막 수에선 만선의 해가 뜨면서 ‘이어도 사나’ 제주 민요를 노래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예나 이제나 죄를 지으면 인과응보(因果應報), 곧 응분의 벌을 받는다. 유배자들이 관복을 벗어 놓고, 또는 사약을 받으면서 임금을 향해 절을 올리며 임종했다. 이러한 역사속의 아이러니한 관행은 이미 사라졌으나 그 희비가 교차하면서 여운으로 남는다.
도시는 거인이다
걸신들린 식충이다
가시가 목에 걸려 컥컥대며 먹어댄다
시멘트, 매연과 오폐수에 뒤틀리는 오장육부
유한한 삶의 궤적
인정하지 않은 육욕
핍박받는 우주와 더럽혀진 영혼의 집
불안한 혼돈의 미래 성찰조차 잊었다
-<도시의 포식>첫수와 셋째 수
<도시의 포식>첫수와 셋째 수이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하는 시 점에 발맞추어 인구의 도시집중은 시작되었다. 도시인구는 팽창하고 농촌은 텅 비어 한적한 마을이 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도시는 쾌적한 기능을 잃고 매연과 오폐수에 오염된 채 몸살을 앓고 있다.
첫수에서는 걸신들린 식충으로 컥컥대며 먹어대기에 시멘트, 매연과 오폐수에 뒤틀리는 오장육부라 묘사한다. 셋째 수에서는 매연과 오폐수로 인해 인간의 영혼까지 더럽혀져 미래가 걱정이 된다고 우려한다.
지구를 정화하자. 각종 굴뚝에서 뿜어내는 연기, 자동차들이 뿜는 매연, 인간이 함부로 버리는 오폐수에 뒤틀린 오장육부를 살려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이 걱정하는 것처럼 병들어 가는 지구를 치유하고, 오염된 도시를 깨끗이정화 해야 한다.
4. 정한의 샛강
물총새 편히 살라
산을 들여 놓다
천창(天窓)을 내던 목수
하늘을 들여놓고
단꿈의 희망을 안고
혼자 와서
문 여는
달
-<호수>전문
작품<호수>전문이다.
시조는 단수(單首)에 묘미가 있다. 단수 안에 우주를 담는다 하였다. 이 작품은 호수 속에 산을 들여 놓고, 하늘도 들여 놓고, 달이 혼자 와서 문을 연다. 그러니 진정 우주를 담고 있지 않은가?
호수 안에 비친 산, 하늘, 달의 영상을 이렇듯 표현한 솜씨는 시조의 경을 넘어 예술의 경으로 치달은 장인(匠人)의 솜씨임에 틀림없다. 초, 중, 종 3장 6구 12소절로 구성된 단수의 절제미(節制美) 곧 시조의 멋과 맛을 조화시킨 가작을 여기서 만난다. 그러기에 시조를 시의 꽃이라 하지 않던가?
특히 종장의 행갈이가 「단꿈의 희망을 안고/혼자 와서/문 여는/달」로 표기되었다. 혼자 와서 문 여는 달이니 ‘달’을 혼자 두었다. 신선한 착상이요, 그림 같은 기법이다. 시조는 대개의 경우 종장에 주제를 숨긴다. 때문에 시조를 종장미학(終章美學)이라고도 한다.
이 작품은 마치 송나라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방불케 하는 작품이다.
달빛 걸친 버들이 하늘하늘 불러내나
풀피리 불고 가는 물소리가 잡아끄나
온 동네 금슬 자랑에
손 못 놓고 활보한다.
걷다가 만나는 벗 상기되어 피는 웃음
청둥오리 피해가는 깜찍한 버들치 떼
매미가 폭염 다 쫓아도
정이 달아 땀이 솟네
-<버드내>일부
대전광역시엔 도심을 흐르는 세 개의 하천이 있다. 대전천, 유등천, 갑천이 바로 그것이다. 그중 유등천이 버드내가 아닌가. 버드내는 안영리에서 시작하여 산성동, 복수동, 유천동 중심을 흘러 삼천동으로 흐른다.
사람들은 하천 인도를 따라 걷는다. 여름이면 인산인해를 이룬다. 첫수에서는 금슬 좋은 부부가 자랑하느라 손을 못 놓고 활보한다 하고, 둘째 수에서는 걷다가 우연히 만나는 벗에 웃음꽃이 피고, 청둥오리 피해 달아나는 버들치 떼와 매미가 폭염을 쫓아도 정이 치달아 땀이 솟는다 하였으니 얼마나 가경인가?
버드내의 전원 풍치를 동영상으로 찍어 낸 한 폭의 활동사진이다. 박시인은 이곳 전망 좋은 강변, 파라곤 아파트에 살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아침저녁으로 감상하며 걷고 즐기고 있다.
한 올 한 올
입술 적셔
이어낸 만리(萬里) 정성
잉앗대 산을 넘고
날줄씨줄 강 건너
뒤틀린
무르팍으로
짜 올리는 사랑 한필
-<모시>전문
베틀에 올라 앉아 피륙을 짜는 여인의 곡진한 정성과 사랑을 육화한 작품이다. 어쩌면 이렇듯 곱게 삼은 모시올 같은 시조를 뽑아냈을까? 박헌오 시인은 시조를 씀에 마술처럼 뚝딱하면 궁전 한 채 지어낸다. 놀라운 발상이며 그 여운이 만리에 닿는다. 이것이 시조의 멋과 유려한 가락이요, 한국시의 고향이며 선명(善鳴) 그리고 울림이다. 이렇듯 함축된 언어로 실감나게 표현할 때 그 울림은 배가 된다. 근자에 없는 보기 드믄 절창이다.
<가>
까치설날 손주들이
불어놓은 오색 풍선
가슴 끈 풀어지면
푸르륵 날아갈까
빈 마루
가장자리에
다시 불어 매어 놓네
-<고무풍선>전문
<나>
쪼그리고 앉아서/불 때시던 어머니
무쇠 솥에 지그르르/흐르다 타는 눈물
구들장 긴 세월을 데워/삼남매를 키우셨다.
날 저문 초막에/불 꺼진 아궁이
가족들 기대던 벽/허물어져 누웠고
냉골만 앙상히 남아/가슴으로 흐른다.
-<아궁이>전문
작품<가>는 <고무풍선> 단시조 작품이다.
섣달그믐 날 손주들이 불어 놓은 오색풍선이 끈이 풀어져 날아갈 까봐 빈 마루 가장자리에 다시 바람을 불어서 끈을 매어 놓는다는 할아버지의 손주 사랑 단상이다. 「빈 마루/가장자리에/다시 불어 매어놓네」라는 종장이 단순한 소품 같지만 그 상(想)이 만리에 이른다. 작품은 여운이 있어야 오래도록 머리에 남는다.
작품<나>는 <아궁이>전문이다. 박시인은 지금, 구들장 긴 세월을 데워 삼남매를 키우신 자기 어머니를 추억하며 울고 있다. 쪼그리고 앉아서 아궁이에 불 때시던 어머니는 무쇠 솥에 지그르르 흐르는 밥물이 눈물이 되어 타고 있었던 과거를 회억하고 있다. 그것은 자식 사랑의 뜨거운 눈물이었다.
둘째 수에서는 지금은 아궁이에 불이 꺼진 채 벽은 허물어지고 냉골만 남아 가슴으로 흐른다고 통회(痛悔)한다. 아궁이는 자식 사랑의 용광로였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모두 아궁이에 자식 사랑의 불을 때다가 언젠가는 홀연히 저세상으로 떠나신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필자는 필자의 어머니가 자꾸만 떠올라 동병상련(同病相憐), 눈물이 흐르고 머리가 숙연해 지고 있다.
5. 화조의 무도회
조롱(鳥籠) 속 바람에도/ 산을 넘는 마음둘레
한 종지 물빛에도/ 호수를 그리는 꿈
초록의 단정한 차림/ 비구니 새 한 마리
아름다운 전설들이/깃털 끝에 매달렸고
눈빛에 어린 고독/별빛 맺힌 이슬방울
문 열고 날려 보내도/되돌아와 앉는 애증
-<파랑새>전문
박시인은 새를 사랑하고 꽃을 좋아한다. 새장 속에 갇힌 파랑새를 노래하고 있다. 첫수에서는 새장 속에 이는 바람을 산을 넘는 마음이라 하고 한 종지의 물도 호수를 그리워하는 꿈이라 하여 갇혀 있는 파랑새의 꿈을 확장해 주고 있고, 종장에서 암컷 한 놈을 초록빛 비구니 곧 여승으로 환치하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오랫동안 주인과 애증(愛憎)이 길들여져 파랑새가 날려 보내도 날아가지 않고 되돌아온다고 노래한다. 새도 다독이고 길들이면 식구가 되는 모양이다.
<가>
적실 듯 녹는 살빛
태울 듯 솟는 향기
오색별 징검다리
촘방촘방 건너다
아뿔싸!
헛디딘 발목
초승달에 걸렸네
-<춘란(春蘭)>전문
<나>
밟히고 밟힌 자리/ 엉금엉금 부여잡고
수줍은 무릎으로/ 피나도록 일어서서
하늘에 부끄럽지 않은/ 꽃 가슴을 열었다.
바람에 맡기는 맘/ 개울에 내주는 몸
정과 한 다 비우고/ 혼의 날개 펴는 꽃씨
가득히 비움에 이른 수행(修行)/ 사뿐히 앉는 영토
-<민들레>전문
작품 <가>는 봄을 알리는 보춘화(報春花), 난초잎을 초승달에 비유하고 있다. 적실 듯 살살 녹는 살빛, 태울 듯 솟는 향기가 오색별 하늘 징검다리를 건너다 발목을 헛디뎌 초승달에 걸렸다는 상상이다. 감각적이다.
이른 봄 초저녁을 반짝 물들이고 사라지는 초승달의 이미지와 연약한 듯 향을 뿜는, 적실 듯 녹는 춘란의 살빛 이미지가 교차하면서 묘한 정감을 일으킨다. 꺾일 듯 모락모락 솟는 연초록 난향이 지금 미닫이를 열고 있다.
작품 <나>는 민들레의 일생을 묘사하고 있다. 첫수에선 밟히고 밟힌 자리, 고통과 수모를 극복하고 무릎 꿇고 기도로 일어나서 하늘에 떳떳한 꽃가슴을 열었다 하고, 둘째 수에선 몸과 마음 다 비우고 정과 한까지 다 비우고 혼의 날개인 꽃씨로 날아, 비움에 이른 수행(修行)을 하다 자기 영토로 내려 앉는다고 맺고 있다.
조그만 꽃 민들레를 예사로 보지 않고 그의 일생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면서 무릎 꿇고 기도로 일어나는 강인한 의지와 몸과 마음 다 비우고 혼으로 다시 피는 거듭나는 민들레의 삶을 조명한다.
박시인은 이러한 민들레의 일생을 비우고 다시 일어나는 거룩한 성자(聖者)의 삶으로 상승시키고 있다.
작품 <가>가 순수한 예술의 경지에서 아름다움을 노래한 작품이라면 작품 <나>는 종교적 안목에서 사물을 깊게 통찰하고 수행의 아픔을 함께 고뇌하고 예찬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줄지어 뛰어가는
갑사댕기 지느러미
신선이 꿈을 낚는
정겨운 수중궁궐
연화경
뻐끔뻐끔 외며
어동(魚童)들이 등교한다
-<어군(魚群>전문
화자는 지금 어항 속을 들여다보면서 물고기들이 연화경을 뻐끔뻐끔 외우면서 등교한다고 하고 있다. 참 재미있는 동시조 한 편을 본다. ‘갑사댕기 지느러미’ ‘정겨운 수중궁궐’ ‘뻐끔뻐끔 외며’ ‘어동(魚童)들이 등교한다’ 등의 시어처럼 그들에게 인격을 주어 동영상으로 표현한 솜씨가 보통을 넘어선다.
특별히「연화경/ 뻐끔뻐끔 외며/어동들이/등교한다」의 표현은 일품이다. 시는 직접 말하지 않고 그와 속성을 함께 한 유사한 다른 사물로 구체화 할 때, 그 시는 더욱 돋보인다.
6. 결어
이상 시조집에 수록한 작품을 대강 살펴보았다. 모두 주옥편이다.
작품 ‘빈칸 일기’에서는 노장(老莊)의 무위사상(無爲思想)에 심취하여 시인 자신을 비우고 있었고, 시조집 제목으로 내세운 ‘시계 없는 방’에선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혜안(慧眼)을 찾고 있었다. ‘설국(雪菊) 이후’와 ‘고해소의 문’에선 인간과 종교를 넘나들며 인생의 목적,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 깊이 질문하고 있다.
자연을 사랑하고, 오염과 폐수로 병들어 가는 도심을 아파한다. 시인이 살고 있는 쾌적한 강변, 버드내를 찬미하며, 어머니, 손주 등 가족의 소중함을 노래하고, ‘파랑새’ ‘춘란’ 에서는 살아 숨 쉬는 미물에 까지 인격을 부여하고 있었다. ‘황태’ 와 ‘민들레’ 에선 그들의 일생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들을 성자(聖者)의 삶으로 대우한다.
박시인의 작품 속엔 삶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그 이야기에서 삶의 진수(眞髓)를 찾고자 고뇌하며 시인은 구도자가 된다. 그러기에 그의 언어는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춤을 춘다. 날카로운 눈으로 대상을 관찰하며 그 표현은 구체적이고 사실적이어서 실감을 더한다. 지성과 영성으로 걸러진 그의 작품은 막힌 데가 없이 경(境)을 열고 격(格)을 세우고 있다. 때문에 천의무봉(天衣無縫), 억지로 꾸민 데가 없이 진솔하다.
박헌오 시인은 우리 시조를 사랑하고, 시조를 전승하고자 앞장선다. 천 년을 이어온 우리 고유의 전통시! 시조를 쓰고, 시조를 지켜야 민족문화를 일구고, 시조를 갈고 닦아야 한국혼을 빛낼 수 있음을 귀감으로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대전권 시조시단은 물론 전국 시조문단을 이끌어 가는 동력으로 이 땅에 시조의 중흥과 시조의 세계화를 위하여 분명 견인차 역할을 감당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제 박 시인은 인생의 정점에 서 있다. 그간 쌓아 올린 경륜과 세상을 경영하는 넓고 큰 안목으로 밝은 미래가 활짝 열리기를 기원한다. 더욱 건승하시고 문운이 함께 하시기를 빌어 드린다.
2017년 12월, 초록마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