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에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 당찬 여성들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 스스로 왕을 선택하였고, 두 남편이 모두 왕이었던 특별한 삶을 살았던 우씨왕후가 있다.
권력을 가졌던 우씨왕후의 몰락
우씨왕후. 그녀의 연나부 우소의 딸이라고만 전해질 뿐, 이름은 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그녀는 서기 180년 고구려 9대왕인 고국천왕의 왕후가 되었다. 그녀가 왕비가 된 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왕실에 버금가는 강력한 연나부의 유력한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 덕택에 그녀는 왕과 신하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큰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190년 겨울 그녀에게 첫 번째 시련이 닥쳤다. 친척인 좌가려와 어비류 등이 권력을 믿고 백성들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다가 왕의 노여움을 산 것이다. 고국천왕이 그들을 죽이려고 하자, 좌가려 등은 연나부의 4대 가문과 함께 다음 해 4월 반란을 일으켰다. 심지어 이들은 왕성까지 공격했지만, 결국 왕의 군대에게 토벌당해 모두 죽거나 귀양 가고 말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국천왕은 농부 출신 을파소를 국상(國相)으로 등용해 새로운 정치를 펼쳤다.
우씨왕후의 권력도 반란 사건을 계기로 급격히 몰락했다. 게다가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따라서 왕의 사랑도 받지 못했다. 권력을 누리다가 그것이 박탈되었을 때 느끼는 소외감은 사람의 마음에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되며, 사람을 크게 변화시킨다.
그녀의 놀라운 선택
그녀에게 새로운 기회가 왔다. 고국천왕이 재위 19년 만인 197년 5월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왕의 병세를 잘 알고 있던 우씨왕후는 이때 아주 놀라운 판단을 했다. 그녀는 왕이 죽은 후 자신이 어찌 될 지를 이렇게 생각했다.
“태자가 없는 만큼, 다음 왕은 시동생들 가운데서 나온다. 다음 왕은 나를 궁궐에서 몰아낼 것이고, 나를 믿고 있는 연나부는 완전히 몰락할 것이다. 이를 막으려면, 내가 왕을 선택하면 되지 않겠는가!”
참으로 대담한 생각이고, 엄청난 배짱과 두둑한 배포였다.
우씨왕후는 왕을 모시는 사람들에게 입 하나 뻥끗하지 못하게 단도리를 하고 왕이 죽은 날 밤, 몰래 궁궐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밤에 몰래 찾아간 곳은 왕의 바로 아래 동생인 발기의 집이었다.
한밤중에 그녀의 돌연한 방문에 발기는 매우 놀랐다. 발기는 형수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몰랐다. 그녀가 왕의 죽음을 알리지 않은 까닭이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에 울기보다는 커다란 인생의 승부를 위해 발기 앞에 나타나 말을 꺼냈다.
“대왕에게는 왕위를 계승할 왕자가 없으니, 왕제께서 계승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씨왕후는 발기가 왕이 되는데 도움을 줄 터이니, 그 대가를 달라는 말을 한 것이다. 하지만 발기는 자신이 왕위 계승 1순위이므로, 형수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도리어 왕후가 밤늦게 자신의 집을 방문한 것이 예의에 어긋난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녀는 발기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곧장 발기의 동생인 연우의 집을 찾아갔다.
연우는 발기와 달랐다. 왕후가 자신의 집을 방문하자, 밤늦은 시간임에도 즉시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서 대문에 나아가 맞이하였다. 접객실로 안내한 후, 술과 음식을 내와서 연회를 베풀어 그녀를 기쁘게 해주었다. 우씨왕후는 연우가 자신에게 잘 대해주자, 그에게 의지하기로 마음을 먹고 말했다.
“대왕께서 돌아가시고, 아들이 없으니, 발기가 어른이 되어 마땅히 왕위를 이어야 할 터인데, 도리어 나에게 딴마음이 있다고 하면서 폭언을 하고 거만하게 대하는 등 무례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왕제(王弟)를 뵈러 온 것입니다.”
연우는 그 말을 듣고 더욱 정성을 다해 우씨왕후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노력했다. 시종을 시키지 않고 고기를 자신이 직접 썰어서 그녀에게 대접한 것이다. 그러다가 손가락을 다쳤다. 우씨왕후는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서 연우의 다친 손가락을 싸매 주었다. 이 일로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하게 되었다. 그녀는 궁궐로 돌아갈 때에 연우의 손을 잡고 돌아왔다.
다음날 그녀는 고국천왕의 유언이라고 꾸며서 신하들로 하여금 연우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도록 하였다. 연우는 고구려 10대 산상왕이 되었다. 우씨왕후는 스스로 왕을 선택해 자신의 새로운 미래를 열었던 것이다.
발기의 반란
연우가 왕이 되었다는 발기는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우씨왕후와 연우가 자신에게 돌아올 왕위를 훔쳤다고 생각한 그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왕궁을 에워싸고 크게 부르짖었다.
“형이 죽으면 왕위는 아우에게 돌아가는 것이 예의거늘, 어찌 너는 형제의 순서를 뛰어넘어 왕위를 훔쳤느냐. 이 어찌 큰 죄가 아니냐. 이것은 반역인 것이니라. 연우야, 속히 나오너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가족들까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연우는 궁궐의 문을 닫고 발기를 상대하지 않았다. 고구려 사람들도 고국천왕의 유언이 있어서 연우가 왕이 된 것이라고 믿고 발기를 따르지 않았다. 발기는 궁성 앞에서 무력시위를 해도 상황 변화가 없자, 분노한 나머지 자신의 가족들과 자신을 지지하는 소노부의 3만 가구와 함께 요동 땅으로 달아났다. 발기는 후한의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군사를 빌려 연우를 공격하고자 했다. 공손도는 선뜻 3만 군사를 빌려주었다. 발기가 어떤 것을 대가로 주기로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공손도의 입장에서는 고구려가 내분으로 약해지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할 일이다. 게다가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일부 땅이라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너무 분노한 탓에 발기는 스스로가 고구려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발기가 외적의 군대까지 빌려 고구려를 공격하자, 백성들의 마음은 돌아섰다. 고국천왕의 막냇동생 계수가 이끈 고구려군은 후한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궁지에 몰린 발기를 발견했다. 계수는 형 발기에게 한때의 분함을 참지 못해 나라를 멸망시키려는 행동을 한 것을 꾸짖었다. 발기는 비로소 부끄러움을 느끼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두 번째로 왕후가 된 우씨왕후
연우가 산상왕이 되고, 발기의 반란마저 진압하는 데는 우씨왕후와 그녀가 속한 연나부의 공이 컸다. 산상왕은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그녀를 놀랍게도 자신의 왕후로 삼아버렸다. 즉 우씨왕후는 산상왕과 재혼을 한 것이었다.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은 왕이었고, 두 번째 남편도 왕이었다. 우씨왕후는 2대에 걸쳐 왕후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인류 역사상 극히 드문 일일 것이고, 혹 다른 나라에 이와 같은 일이 있었을지라도, 우리 역사에 있어서는 유일한 일이다.
우씨왕후는 이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녀는 고국천왕의 왕후일 때보다 더욱더 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다. 산상왕은 우씨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왕위를 계승할 둘째 부인을 얻고자 했다. 하지만 우씨왕후가 두려워 쉽게 후궁조차 얻지 못했다. 산상왕은 주통부인을 얻어 아들인 교체를 낳았지만, 그 과정에서 우씨왕후의 엄청난 질투에 시달려야 했다. 산상왕이 죽은 후, 교체가 동천왕이 되었지만, 우씨왕후의 권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우씨왕후는 자신의 자식이 아닌 동천왕에게도 못된 짓을 많이 했다.
우씨왕후가 권력을 쥐자, 연나부도 덩달아 권력을 장악하게 되어 국상은 연나부의 명립어수가 차지했다. 중천왕, 서천왕은 모두 연나부에서 왕비를 택했다. 연나부의 전성시대를 그녀가 만든 것이었다. 그녀는 연나부의 실질적인 수장(首長)이었으며, 왕을 능가하는 최고의 권력을 누린 한 시대의 여걸이었다.
우씨왕후의 선택은 비난받아야만 할까?
[동사강목]을 비롯한 조선시대 쓰인 역사책들은 그녀에게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고 있다. 유교의 윤리관에서는 친족관계에 있어서 가장 엄격하고 조심스러운 사이가 시동생과 형수 사이이기 때문에, 그녀의 재혼은 짐승의 짓이라고 평가했다. 그녀는 음란하고 사악한 여자이며, 인륜을 무시한 패륜 행위를 저질렀기에 극형에 처해야 마땅하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고구려 시대에는 그녀의 결혼에 대해 큰 비난이 없었다. 그것은 고구려에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형사취수혼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부여와 흉노에도 있었다. 전쟁이 많은 나라에서는 남성들이 전쟁에 나가 죽는 경우 과부가 많아지게 된다. 과부는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하기 십상이다. 이들을 그냥 놔두기보다는 살아 있는 동생과 재혼을 하게 하면 다시 여성은 아이를 낳을 수 있고 생계를 꾸려가며 노동력을 발휘할 수 있다. 옛날에는 결혼이 집안과 집안의 결혼이란 의미가 강했다. 과부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다면, 죽은 남자의 집안에서는 한 명의 여성 노동력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계속해서 여자를 남자 집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해 죽은 남자의 동생으로 하여금 형수를 책임지도록 하는 풍습이 생긴 것이다. 노동력 확보, 여성 출산력 보존, 여성 생활보장 측면이 결합되어 생긴 풍습이다. 인류 혼인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풍습이기도 하다.
그녀의 결혼이 조선시대 유교적 가치관이나, 현대인의 가치관에서는 비난받아야 할 결혼이지만, 고구려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우씨왕후의 막내 시동생 계수, 명재상 을파소 등은 발기가 아닌 연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지지했다. 그녀의 결혼은 고구려 사회의 한 단면을 드러내 주는 것이지, 오늘의 기준으로 비난할 대상은 아니다.
그녀는 질투심이 강해 남에게 못된 짓도 많이 했다. 또한 그녀가 왕을 선택한 사건으로 인해 형제간의 불화가 생기고, 발기의 반란으로 고구려의 영토 일부가 후한에게 빼앗긴 일도 생겼으므로, 그녀의 선택이 결코 옳았던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남성들보다 더 대담하고 신속한 결정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꾼 당찬 여성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평강공주가 스스로 온달을 남편으로 선택해 어렵고 힘든 길을 걸어갔듯이, 삼국시대에는 우씨왕후처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며 살았던 당당한 여인들이 살았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