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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요약 >
1. 신경성 폭력 : 신경성 폭력이란 단백질 아닌 지방의 축적에 의한 폭력, 즉 항체 없는 폭력으로서 긍정성 과잉 및 심리적 경색에 의한 폭력을 의미
⇒ 보드리야르의 폭력론 비판 : “긍정성 과잉(내재된 폭력)과 부정성(바이러스성/면역적)이 결합”된 보드리아르의 폭력 이론은 모순적
2.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 오늘날의 세계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이행되면서 그저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이 내맡겨진, 노동하는 인간으로 전락
⇒ 에랭베르의 주권적 인간론 비판 : 에랭베르의 주장처럼 오늘날의 인간은 “상위의 존재 없이 오직 자기자신에게만 소속되는” 니체의 주권적 인간과 비슷한 점이 있음. 하지만, 긍정성의 과잉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기력하게 내던져져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니체의 주권적 인간과 다름
3. 깊은 심심함 : 긍정성 과잉으로 인한 자기 착취는 멀티태스킹으로 이어짐. 멀티태스킹은 인간만이 할 수 있었던 깊은 심심함, 즉 사색적 삶을 포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진화 아닌 퇴화라고 볼 수 있음
⇒ 폴 세잔에 대한 우호적 회고 : “인간은 언젠가 사물의 향기도 볼 수 있다.”
4. 활동적 삶(한나 아렌트의 “활동적 삶” 비판) : 노동사회는 집단화가 아니라 개별화를 통해 성과사회, 즉 활동하는 사회로 변모했음. 개인의 활동적 삶이 절대화되면서 오히려 사색적 능력이 상실되고 히스테리와 신경증이 발생했는데, 이런 사실을 한나 아렌트는 거꾸로 이해함
⇒ 한나 아렌트의 주장 : 근대사회의 인간은 집단적으로 노동하는 동물로 전락해 행동의 모든 가능성을 상실. 자신을 버리고 집단으로부터 벗어나 사유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함
5. 보는 법의 교육 : 오늘날의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법, 즉 현재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분노의 능력을 상실한 채 단지 산만하고 짜증을 잘 냄. 사유(≒보는 법)가 계산으로 변질되면서 단순한 긍정기계, 또는 자폐적 성과기계로 전락함
6. 바틀비의 경우 :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서 "바틀비의 행동은 쓸 수 있지만 쓰기를 거부함으로써 존재와 무(無) 사이의 경계를 해소한 ‘탈창조’ 행위다”라는 아감벤의 존재신학적 해석에는 무리가 있음. 바틀비의 행동은 규율사회에서 탈진한 인간의 병리학적 모습이며, 성과사회의 표징인 우울증의 증상과 실패에 대한 불안은 바틀비에게 나타나지 않음
★ 6장(바틀비의 경우)은 전체 맥락에서 별로 필요하지 않은 부분 : 아감벤을 본격적으로 비판하기 전에 예비로 흠집을 내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
7. 피로사회 : 성과사회는 도핑사회로 이행하면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을 야기. 한트케는 자아의 논리에 따른 개별적 고립화 경향을 해소하고,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피로의 종교를 구상함. 한트케의 피로란 자아를 개방하여 세계가 그 속으로 새어 들어갈 수 있는 상태를 만듦으로써 성과사회에서 파괴된 “이원성”을 복구하는 피로로서 근본적 피로, 휴식을 부르는 건강한 피로를 의미함. 즉, 성과사회에서 만들어진 고독하고, 세계가 없는, 또는 세계를 없애버리는 피로가 아니라 “세계를 신뢰하는” 치유적 피로임
★ 피로사회의 결론은, 성과사회에 지친 자신을 지나치게 지지고 볶아서 오히려 더 큰 고립을 유발하는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말고, 이런 고통스런 책을 발제하는 일처럼 적당히 지지고 볶음으로써 휴식이 필요한 근본적 피로를 유발하는 귀쫑 같은 공동체를 만들어 내자는 얘기로도 확대 해석할 수 있음 (★ 부분은 저자의 의도를 벗어난 개인적 의견)
8. 우울사회
(1) 피로사회의 결론 부분에 등장하는 치유적 피로는 카프카가 『프로메테우스』에서 상상한 상처를 아물게 하는 피로임. 반면 자아 피로는 (규율사회의 부산물로서 금지와 억압에 의해 유발된) 무의식이 사라지고, 세계가 없는, 세계를 지워버리는, 개개인을 고립시키는 나르시시즘적인 피로임
(2) 나르시시즘은, 프로이트의 초자아나 칸트의 도덕적 의무(신, 양심)가 사라진 상태에서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보상과 불안의 해소를 위해 끊임 없이 달려가는 것
(3) 자기애(自己愛)는 타자를 폄하하고 거부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이고, 히스테리는 심적 억압과 금지라는 무의식에 의해 만들어진 특이한 성격이고, 멜랑콜리는 부재하는 타자와의 부정적인 관계 같은 어떤 상실의 체험 뒤에 오는 것이며, 슬픔은 자신의 에너지를 쏟았던 상대방을 잃을 때 발생하는 것임. 반면, 나르시시즘은 자기애와 멜랑콜리와 슬픔의 대상인 타자도 없고, 히스테리의 원인인 무의식도 사라지고, 에너지도 대부분 자신에게 쏟음으로써 (에너지 투입이 별로 필요 없는 SNS 등에서의) 모든 타자와 친구가 될 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성격 자체가 없어진 상태
(4) 에랭베르의 갈등론 비판 : 에랭베르는 개인과 사회의 정체성을 만드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던 갈등이 사라짐으로써 개인과 사회가 통일성을 잃고 우울증에 빠졌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우울증을 경제적 맥락(성과사회의 등장)의 고려 없이 심리학과 병리학 관점에서만 파악한 나머지 정신분석학적인 치유의 가능성을 열어 두었음. 하지만 우울증은 금지와 억압에 의해 형성된 무의식이 아니라 성과사회에서 자기 스스로 탈진함으로써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적 방법으로는 치유할 수 없음
(5) 인간이 자기 스스로 탈진하는 원인은 자본의 전일적(全一的) 지배라는 합의된 폭력과 타인 아닌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파괴적 강박 때문임. 금지와 억압에 의해 만들어진 무의식 세계에서 자기를 지배하는 것은 초자아였지만, 타인과 무의식이 사라진 나르시시즘의 세계에서 초자아 대신 자기를 지배하는 것은 긍정화되고 유혹적인 이상(理想) 자아임. 이상 자아를 향해 달려가는 자신의 행위는 자유로운 행동이라고 생각되므로 완전히 녹초가 될 때까지 스스로 멈추려 하지 않음. 즉, 이런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임
(6)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이론 비판 : 아감벤은 공동체의 왕따인 호모 사케르의 존재야말로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힘이고 정치의 근원적 현상이라고 파악했음. 하지만 성과사회에서 착취자(주인)와 피착취자(노예)는 더 이상 구별되지 않으며, 모든 인간은 호모 리베르(공동체의 주권자)이면서 동시에 호모 사케르(공동체의 왕따, 죽여도 좋은 자)가 됨. 이상 자아를 향해 달리다가 스스로 호모 사케르가 된 인간에게 삶을 감싸던 서사성은 완전히 벗겨지고(ex. 털 깎인 양, 팬더), 이제 지킬 것은 자아의 몸밖에 남지 않음. 성과사회와 도핑사회가 도래하면서 주권자의 목적은, 목적없는 공허한 합목적성(예컨대, 약물에 의존한 건강과 생명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