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멸망 이후의 세계라는 이름의 소설을 참 재미있게 읽었었다.
이름 그대로, 온 세상이 멸망한 자리에서 홀로 살아남아 단 한 지점만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내의 이야기.
분명 마음이 죽었음에도 살아가는 자들은 존재한다. 정말 육체의 죽음이 찾아오지 않는 한 멸망 이후에도 삶은 존재하고, 다양한 순간들이 존재한다.
황폐한 대지 위로 불어오는 생명의 숨길이 덫없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정말 몸이 죽지 않는 한 일상 속 작은 멸망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변화라는 봄을 맞는다.
여시아문에서 아케가라수 스님은 기요자와 스님 밑에서 제자로 지내며 단 한 번도 긍정받은 적이 없다고 하셨다.
끝없는 자기 파괴.
머뭄을 느끼는 그 순간 이를 내려놓는 마음가짐.
마치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바람처럼.
멸망은, 그 자체로 무엇도 보이지 않는 고독한 땅은.
인생을 놓고 본다면 반드시 필요한 경험의 땅이기도 한 듯하다.
내가 최근에 읽은 은하영웅전설이라는 책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정말 심도있게 다루는 작품이었다.
역사와 정치 사상, 전쟁과 대립 관계를 끊임없이 그려내는 이 책은 뜻을 품은 인물들의 죽음이 주변 인물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를 보여준다.
등장인물 뿐만 아니라 독자도 함께 마음 두던 인물들의 죽음.
때로는 명예롭게 지울 수 없는 각인을, 때로는 허무하게 이해할 수 없는 뜻을 남기고 사라지는 사람들.
그들의 죽음을, 자신에겐 멸망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당연히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분명 있었음에도 없어진 자리를 의식하며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다른 선택을 내리곤 한다.
심지어는 거대하게 받아들이던 우상이자 부모, 친구이자 스승의 죽음으로 인해 스스로의 본 모습을 지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본 모습이랄게 어디있나.
그저 그렇게 변해가는 것 뿐이지.
죽지 않는 한, 육신을 입고 오감으로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거기서 온갖 감정과 뒤따른 선택들을 해 나가는 한, 사람은 변해 나가겠지.
그래서 내가 느끼기로, 이야기는 도피처가 되어서는 안된다.
결코 그래선 안된다.
그저 보고싶은 것만을 그리고, 듣고싶은 것만을 노래하고, 읽고싶은 것만 쓰면 거기에 정녕 내가 있을까.
나는 그런게 싫다.
그런 이야기만 읽고싶지 않다.
나는 지기 위로, 자기 위안, 자기 만족, 자기 합리화같은 것들을 혐오한다.
왜냐하면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나를 나로 있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저 온전히 마주하는 것.
어떻게든 하려 하기 전에, 우선 맞닥뜨리는 것.
솔직히,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당장 이 글을 쓰는 것도, 스스로가 못난 글을 쓰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심정이 끊임없는 제약을 만든다.
정확힌 내가 못난 사람이 됐을 때의 주변 시선, 반응 하나 하나를 받아들일 용기가 나질 않는다.
내게 있어선 그것이 정말 멸망처럼 느껴지고, 맞닥뜨릴 수 없는 겁의 대상과 같다.
막상 해보면 괜찮네 싶은 일상의 여러 부분들을 직접 살아내는 것.
자꾸 다짐만 하지 말고, 용기를 좀 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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