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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인문학으로 바라본 체벌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기획되어, 진행되었던 강연의 원고들을 엮어 만든 것이라 한다. 실상 ‘인문학 강연’은 현장에서 행해지는 강연으로서는 의미가 있지만, 그 원고들을 모아 책으로 엮으면 현장감이 사라지기 때문에 독자들의 기대를 충족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은 강연의 내용 그대로 엮은 것임에도, 기획 의도가 충분히 살아나고 비교적 충실한 내용을 유지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아마도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찬반이 갈리는 ‘체벌’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연과 출간을 기획한 단체는 ‘세이브 더 칠드런’이라는 국제적인 어린이 구호단체이다. 문학과 역사 등 모두 5개의 영역에 걸쳐, 여전히 가정이나 학교 등지에서 행해지는 ‘체벌’에 대한 문제 의식을 공유하고자 기획했다고 한다.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체벌’은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당수의 사람들은 때로는 ‘체벌’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특히 교육 현장에서 ‘체벌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교사들이 적지 않다는 보고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아마도 교사의 입장에서 학생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싶다는 의도에서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학생들은 교육 현장에서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서, ‘체벌’로 ‘단속’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해야만 한다. 이른바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가정이나 학교 등지에서 행해지는 체벌은 그저 폭력 행위를 미화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이 책에는 ‘체벌이라 쓰고 폭력으로 읽다’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우리의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들 사이의 갈등은 상호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데서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대체로 강압적인 부모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식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기보다, 아직 미성숙한 존재로 부모의 관리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다. 자식을 키워본 다음에 주위의 부모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부모는 절대적으로 자식을 이기려고 하지 말라고. 그러한 상황에서 부모는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식들은 대부분 부모의 입장을 고려해서 ‘져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결국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갈등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책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기획의 변’에서 ‘성인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질책하거나 사과를 요구할 수 있지만 회초리를 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다. 즉 어린 아이들도 하나의 인격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체벌’이라는 문제는 지극히 부적절한 방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체벌’에 대해서 문학, 역사, 여성, 심리 그리고 종교적인 차원에서 접근하여 다루고 있다. ‘동화 속의 맞고 때리는 아이들’(김지은)에서는 우리가 접하는 동화를 통하여, 아이들을 둘러싼 폭력적인 세상의 실체에 대해서 진지하게 문제를 던지고 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동화작가인 청중과의 질의와 응답을 통해서, 작품에 그러한 문제를 어떻게 형상화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류는 아동을 어떻게 대했는가’(김한종)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그동안 역사적으로 어린이를 약자이자 미성숙한 존재로 바라보았던 상황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하여 필자는 ‘어린이 이기 이전에 사람’이며. 그들을 ‘사회적 존재로 볼 때 중요한 것은 어른이 바라보는 어린이가 아니라 지금껏 어린이가 해온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4.19’ 당시 시위에 나섰던 초등학생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면서, 만약 우리 아이들이 그러한 시위에 나선다면 걱정을 먼저 앞세우는 것이 어쩌면 현재 우리들의 시각이라고 여겨진다. 결국 ‘체벌’의 문제 역시 ‘근본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한국 사회가 아이들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여성 문제로 접근한 ‘아동의 다른 이름은 여성이었다’(송란희)에서는, 여성과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가정 폭력’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가정에서 행해지는 대부분의 폭력은 매우 오랜 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자신이 당한 폭력을 사람들에게 쉽게 증명할 수 없다고 한다. 최근 한국 사회를 이끌었던 ‘미투 운동’의 와중에서 접했던 가해자들의 논리를 통해서 그 어려움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가정폭력을 수사하는 경찰관들조차 가해자의 입장과 논리를 대변하는 모습에서, 피해자들은 심한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러한 가정 폭력의 문제를 프로파일러의 입장에서 분석한 글이 바로 ‘아동학대범, 우리와 다른 괴물인가’(표창원)라는 내용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범죄자들이 대부분 어린 시절 학대를 경험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아동 학대가 초래하는 성격과 정서 조절의 문제점에 대해서 분석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리하여 학대와 체벌의 종착점은 범죄자일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폭력과 체벌의 힘이 차지하고 있는 곳에 원래 있어야 할 것은 관심과 사랑과 대화’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일견 사소해 보일 수 있는 부모 자식 사이에 발생하는 폭력과 학대로 인한 귀결점은 뒤늦게 아주 심각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종교와 체벌’(구형찬)은 종교학자의 입장에서, 체벌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종교계의 문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종교적 권위에 힘입은 성직자들의 발언이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클 수밖에 없으며. 때로는 그것이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심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최근 주요 뉴스를 장식했던 성직자들의 신도에 대한 ‘성폭력’이라는 문제가 문득 떠올랐다. 저자는 체벌의 문제를 종교 자체가 아닌, ‘종교문화’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러면서 ‘체벌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침묵하는 다수야말로 체벌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한번 ‘체벌’이 불가한 이유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는 기회가 되었다.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누군가 자신에게 체벌을 가할 때, 과연 그것을 온전히 ‘사랑’으로 받아들일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아이들을 훈육과 관리의 대상이 아닌 인격적 독립체로 대한다면, ‘체벌’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심정으로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저자들이 강조한 것처럼 체벌 금지의 필요성에 대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있게 고민하고 인식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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