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 진찰
이장규(전 원자력병원장)
어느 한 백발 노신사를 진찰한 적이 있다.
"노가다들하고 쇠주깨나 퍼 마셨으니 아마 망가진 데도 많을 것이오. 죽을병은 없는지 잘 보아 주시오."
모든 검사 성적으로 보아 '망가진' 데는 별로 없었다.
"진찰비는 얼마요?"
"외상으로 치부해 두겠습니다."
내가 일하고 있는 연구소는 너무나 비좁아 한때 대일청구권자금으로 들여온 연구기기가 병실까지 잡아먹었고, 그나마 모자라 복도는 마치 전시장같이 되는 형편이었다. 즐비하게 늘어선 궤짝들을 보고 어느 신문 기자는 '귀중한 장비 사장'이라고 대서특필 했다.
환자들, 특히 마지막 살길을 찾아 여기에 오는 환자들은 하루에 2백 명을 헤아렸다. 그들은 앉을 자리가 없어 가족들 팔에 매달려 간신히 몸을 지탱했고, 그런 모습을 보는 내 가슴은 늘 아팠다.
앞서 진찰받은 그 노신사는 정부 예산을 주름잡는 주무장관이자 부총리인 T 씨.
T 장관 권유에 따라 차관, 차관보, 국장, 과장까지 모두 건강 진단을 받았다. 그들 건강은 내가 요구하는 연구소 신축을 위한 서류에 도장 하나 찍을 만한 기운은 모두 가지고 있었다.
연구소 확장 계획서를 들고 찾아간 나를 보자 차관은 국장을 불러 서릿발 같은 엄명을 내렸다.
"자네 까만 선배이시다. 신축을 위한 돈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드리도록!"
차관 역시 까말 정도는 아니었지만 내 중학교 후배였다.
경제기획원 회의실 예산 최종 심의회.
내가 들어서자 T 장관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아, 선생님, 이거 웬일이세요. 선생님도 돈이 필요하십니까?"
회의장 가운데 앉은 T 장관 우측에는 과학기술처 장, 차관과 우리가 자리 잡았고, 좌측에는 한때 나한테 꾹꾹 배꼽을 눌렸던 '돈 보따리' 들이 기라성같이 앉아 있었다.
"여러분은 경제기획원장관인 나를 굉장히 높은 벼슬아치로 알고 있소. 나도 그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여러분에게 선심을 쓰고 싶소. 하지만 지금 처해 있는 나라 형편이…."
우리가 요구한 예산은 무참하게 깎여 나갔다. '돈 보따리'들이 모두 사디스트로 보였다.
내 차례가 왔다.
장관은 차관에게 눈짓을 했고, 그 눈짓은 국장에게 인계되었다. 국장과 장관은 잠시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차관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저도 보았습니다만 연구소 사정은 참 딱하더군요. 그러나 신규 사업은 일체 불허한다는 상부 지시라…. 내년엔 기채(起債)라도 해서 꼭 도와 드릴까 합니다."
차관은 힐끔 나를 쳐다보았다.
분명한 식언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장관님! 전 번 외상 진찰비를 청구하겠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회의장에는 잠시 서먹한 공기가 흘렀다.
"외상 진찰비? 허허허…. 암, 드려야지. 얼마요?"
"1억 원 입니다."
호주머니에서 돈 꺼내는 시늉을 하던 T 장관은 순간 파안일소. 좌중에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 웃지 않았던 사람은 단 하나, 나.
아, 돈! 그게 도대체 무엇이기에 오늘 또 나는 그 가족들 팔에 매달려 있을 가련한 암 환자들 모습을 보아야만 하는가.**
** 범우사 刊 이장규 수필집 <외상진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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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짧지만 굵은 글이네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옮겨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