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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산책'

클로드 모네 ‘산책’, 1875
La Promenade, 100x81cm, 캔버스에 유채,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던 모네와 그의 아내 카미유
모네의 첫 번째 부인은 카미유 동시외(Camille Doncieux)이다. 1865년 둘은 화가와 모델로 처음 만났다. “귀부인이 아니면 함께 잘 수 없다”고 호언하던 모네의 댄디즘은 카미유 앞에서 무너졌다. 모네와 카미유는 동거에 들어갔고 아이를 가졌다. 모네와 카미유의 사랑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가난한 화가를 사랑한 카미유는 비극적 삶을 살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모습은 모네의 그림 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모네는 르아브르에서 부모와 친척이 보내오는 자금으로 돈 걱정 없이 그림에 전념할 수 있었지만 카미유를 만난 뒤로 시련이 찾아왔다. 당시에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고 아무 여자와 눈이 맞아 결혼을 한다는 건 부모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모네의 경우는 결혼도 하기 전에 아기까지 생겼다. 가문의 입장에서는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경우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말을 듣지 않는 아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기 위해 금전적 지원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뚜렷한 수입원이 없던 모네는 막막했다. 가난에 찌들어 카미유는 부득이하게 파리를 떠나야만 했다. 집세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에게 엥겔스가 그랬듯이, 곤경에 처한 모네를 먹여 살린 사람은 친구인 프레데리크 바지유였다. 마네나 모네의 경우와 달리, 바지유도 드가처럼 여성을 예술가에게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생각했다. 바지유는 모네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친구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1879년 마네와 드가가 다소 소원해져 있던 시절, 이들은 독자적인 합동 전시회를 기획하지만, 모두가 근교로 휴가를 떠나는 바람에 계획은 연기되어버렸다. 농촌을 혐오했던 드가만이 파리를 지키고 있었다.
즐겁게 휴가를 떠날 때만 해도 그들 모두는 잠시 전시회를 연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닥쳤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들은 전란을 피해 도망가거나 아니면 국민방위군에 참가해야 했다. 그리고 치욕적인 프랑스의 패전과 파리코뮌의 경험은 인상파 화가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그 중 하나가 바지유의 전사였다. 모네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바지유의 죽음은 분명 인상파 화가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신혼여행 중 아름다운 아내를 그린 실험적인 작품

이런 비극적인 미래를 알지 못했던 모네는 1870년 여름 트루빌의 해변에서 달콤한 신혼여행의 한때를 즐기고 있었다. 거기에서 모네는 카미유에 대한 실험적인 그림들을 몇 점 완성했다. 모네의 그림을 보면, 아무도 곧 닥쳐올 전쟁의 포연을 예상하지 못한 듯 트루빌의 해변은 평온하다. 그 중에서도 ‘트루빌 해변의 카미유’라는 그림을 보자. 그림에서 양산을 들고 있는 여인이 바로 카미유이다. 마네가 베르트 모리조를 열심히 그린 것 못지않게 모네도 카미유를 열정적으로 화폭에 담았는데 이 그림도 그 중 하나이다. ◀‘트루빌 해변의 카미유’ 1870

이 그림에서 모네는 서서히 발전하고 있는 자신만의 기법을 비로소 드러내고 있다. ‘피크닉’이나 ‘정원의 여인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색한 분위기는 더 이상 없다. 거칠게 마무리 작업을 한 것처럼 보이는 그림이지만 ‘흘끗 보기’라는 인상파 특유의 미학이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정원의 여인들’ 부분 1867
트루빌의 해변에서 느낄 수 있는 해풍과 왁자지껄한 관광객들, 그리고 해안선을 따라 밀려와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투박하게 묘사되어 있다. 카미유는 양산을 비켜들고 있으며 얼굴을 얇은 천으로 가리고 있다. 햇볕에 얼굴이 타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시 여성들 사이에 유행했던 패션이다. 이런 모습은 1875년에 그려진 모네의 걸작 ‘산책’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이 작품의 모델은 카미유와 그의 아들 장이다. 화사한 햇살이 사물에 부딪혀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을 하나로 엮어 자수처럼 수놓은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모네의 기법이 도달한 경지의 높이를 알 수가 있다.
일상적 순간에 대한 ‘흘끗보기’가 도달한 그림의 높은 경지
‘산책’ 역시 ‘트루빌 해변의 카미유’의 경우처럼 평범한 생활 속의 일상적 순간에 대한 ‘흘끗 보기’를 표현한 것이다. 모네와 인상파 화가들에게 일상은 무궁무진한 예술의 순간을 감추고 있는 역동적인 공간이었다. 이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빛이었다. 이렇게 빛과 일상성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산책’만큼 정확하고 선명하게 보여주는 경우는 드물다. ‘산책’과 ‘트루빌 해변의 카미유’ 사이에 가로놓인 시간적인 차이는 만만하지 않다. 모네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기간 동안 런던으로 피신한다. 거기서 모네는 존 콘스터블 같은 영국의 풍경화가들을 연구했다.

‘트루빌 해변의 카미유’는 야외에서 직접 카미유를 모델로 앉혀 놓고 그린 그림이다. 캔버스에 모래가 잔뜩 묻어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해풍에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카미유는 해변에 앉아 있다. 작렬하는 태양과 하얀 스커트와 스카프가 바람결에 나풀거리는 느낌이다. 가난하지만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할 수 있다는 모네의 기쁨이 묻어난다. 그로부터 5년 뒤에 모네는 비슷한 마음을 담아서 ‘산책’을 그렸다. 여전히 그는 가난했지만 카미유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영감의 원천이었다. 카미유는 이로부터 4년 뒤에 세상을 떠난다. 향년 32세. 골반에 생긴 종양 때문이었다. 가난 속에서 안타깝게 죽어가는 아내의 모습을 모네는 마지막으로 화폭에 담았다. 모든 것은 이렇게 시작되었다가 끝이 났던 것이다. ▶‘임종을 맞은 카미유 모네’ 1879
글 이택광(문화비평가, 경희대 영미문화과 교수) 부산에서 자랐다.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문화연구에 흥미를 느끼고 영국으로 건너가 워릭 대학교에서 철학석사 학위를, 셰필드 대학교에서 문화이론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21>에 글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시각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치사회 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영미문화 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