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의 은자(隱者), 몽상과 탐미 -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 이승희 / 문학동네시인선(2024)
서승현
이승희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에서는 죽음본능이라 할 수 있는 물속으로의 침잠이 눈에 띄게 많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성 중에서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생명이 없는 무기물로 환원시키려는 죽음충동, 죽음본능을 가리켜 타나토스라고 불렀다. 인간의 본능 중에 죽음본능은 쾌락원칙 너머에 존재하는 본능으로 에로스의 반대편에 위치한다. 죽음본능은 과거 회귀적이다. 유기체로 탄생하기 이전의 세계, 곧 특별한 죽음본능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유기체 이전의 상태는 비유기체, 즉, 무생물 상태이다. 이것을 죽음본능으로 본다면 무생물 상태는 정신적 긴장감이 제로상태인 것이다. 긴장이 제로화한 상태는 열반원칙에 해당한다. 열반원칙은 정신적 긴장의 감소가 제로에 해당하므로 가장 안온하고 평화로운 상태인 것이다.
유리창 안과 밖은 무엇이 다를까 삶의 안과 밖은? 물속과 물 밖은? 유리창 안과 밖처럼 물속의 안과 밖과 그 경계선을 생각해 본다. 물속은 인간이 살아서 거주하지 못한다. 그 경계에 시인의 응시가 있다. 그 응시는 물속과 물 밖을, 삶과 죽음을 오가며 경계를 지운다. 시인에게 경계를 지운 물속은 곧 마음의 처소, 내밀한 슬픔이 깃든 애착의 기의로 탈바꿈한다. 사람들은 때론 내려놓는 것을 열망한다. 공포영화를 보거나, 추락하는 기구를 타면서 간접적으로 우리는 아래로, 음지로 향하는 것이다.
이 시집에서 특이한 점은 이미지의 독자성을 ‘물’과 식물, 죽음의 삶에 근간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물은 죽음의 거처이자 죽음의 삶을 살게 하는 시공간이다. 물은 인간으로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 곧 죽음의 상태에 대한 원초적 본능을 일깨우는 대상이 된다. 그것은 곧 현재적 삶에서 죽음과 삶에 대해 도치된 시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시적 상상력의 어떤 지점을 포착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죽음의 삶이라 함은 여러 작품에서 시적 화자가 이 세상에는 부재하는 존재, 죽었지만 살아있는 것처럼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는 존재, 죽음과 삶을 동시에 사는 이중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죽어서도 혼으로 존재하는 유령처럼 보인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죽은 시적 자아는 내밀하고 섬세한 정서적 슬픔을 간직한 채 시 속에 현존하면서 죽음과 삶의 경계를 허물기도 하고 버드나무의 속성에 물들기도 하면서 채송화가 부음을 듣고 문상 와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많은 작품들이 물과 식물, 꽃, 죽음, 여름, 슬픔 등 시적 대상이 된 사물들을 응시하는 가운데 죽음의 삶에 대한 상상력이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연못 가 버드나무에선
바람이 불 때마다
몇 마리의 물고기가 툭툭 놓여났다
공중을 물들이며 스르르 잠기는 물고기
나는 그것을 며칠씩 바라보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버드나무처럼 웃는데
공중으로도
물속으로도
잘 잠겨들었다
공중과 물속이 서로를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
버드나무는
물속에 잠긴 발등을 오래 바라보며
고요하다
이게 버드나무의 마음이라면
연못 속에서도
나뭇잎에서도
물고기들이 태어나고 자란다
어느 저녁
나도 툭 놓여나겠지
밤이 연못 속으로 고이고
물속은 한없이 깊어지고
나를 데려다준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 텐데
살아있는 것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할 때
-「초록 물고기」 전문
‘공중’과 ‘물속’은 다른 세계이다. 물과 땅의 경계인 연못가에 버드나무는 두 세계를 동시에 살고 있다. 주로 물가에 서식하는 버드나무는 뿌리를 얕은 물속에 두는 경우가 많다. 연못가에서 연초록 잎이 피어날 때 수면 위로 어리는 반영이 아름다운 능수버들의 휘어진 가지는 물속으로 드리워지기도 하며 수생식물과 어울려 공생하기도 한다. 시인은 버드나무를 바라보면서 ‘공중으로도 /물속으로도 / 잘 잠겨’ 드는 어떤 사람, 공중과 물속이 서로를 잘 이해하는 것 같은 ‘내가 좋아하는 어떤 사람’을 떠올린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 언제나 버드나무처럼 웃는데 / 공중으로도 / 물속으로도 / 잘 잠겨’든다고 한다. 응시의 대상인 버드나무는 물속과 공중을 모두 허용하고 있다. 경계선의 삶, 곧 이중적 삶이 주는 포용성을 버드나무로부터 가져 온다. 놓여나지 못하던 공간 속 한계는 연못에 떨어진 버드나무 잎이 물고기로 상상되면서 환생의 생명성을 얻고 물속을 유영한다. 버드나무에게서 떨어진 잎은 곧 죽음이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몽상 속에서 물에 떨어진 버드나무 잎을 물고기로 살려낸다. 죽음충동 끝에서 되찾는 삶의 쾌락본능이다. 모체인 버드나무의 마음은 공기 속에서나 물속에서나 경계 없이 잘 어울리기를 바라는 것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 ‘버드나무처럼 웃’으며 공중으로도 물속으로도 잘 잠겨드는 마음일 테니까. 따라서 물속과 물 밖을 오가며 경계 없이 이루어지는 매혹적인 몽상은 이쪽저쪽 편 가르기 하는 세상에서 죽음과 삶, 심리적 관점과 생물학적 관점의 경계를 무화시킨다. 물은 현생의 죽음 너머 버드나무 이파리를 물고기로 환생시키는 시공간이 된다. 화자 자신마저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던 존재에서 나뭇잎처럼 ‘툭 놓여’ 지고, 죽음의 삶, 이중으로 사는 동안 원초적인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기다려 본다는 추측은 이쪽저쪽으로 갈라진 세상, 죽음마저 삶으로 수용하고 싶은 원형의 세상을 버드나무의 마음을 통해 간접화 시키고 있는 듯하다.
코끝이 수면에 닿을 듯 했다. 물 밖에서 물고기들이 버드나무 잎 속으로 하나둘 들어가고 있었고, 또 다른 잎에서는 버드나무 잎에서 놓여난 물고기들이 하나둘 물속으로 잠겨들기도 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처럼 혼곤했다. 버드나무에 바람이 불면 물속과 물 밖이 마주보며 함께 흔들렸다. 오래전 연인처럼 반짝였고 세상에는 오직 그 모습만 있는 것 같았다. 세계의 끝은 아닐까 생각하다가 따스하고 무료해서 마치 내가 살아있는 것 같았다. 몇몇 사람들이 찾아와서 물가에 오래 서 있었다. 알 것 같은 사람이 있었고,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아주 멀리 바다를 지나가는 배처럼 깜박이며 알 수 없는 이국의 말로 이야기했다. 내가 물속에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버드나무 아래에서 버드나무 잎사귀에 부서지는 햇살을 보고 있다. 눈부셨다. 눈부신 이것이 아름다운 것일까 생각했다. 한 번도 눈부신 적 없는 생이 자꾸 어딘가로 가려 했을 때 나는 햇살을 보고 슬펐다.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을 나눌 수 없으니까. 누구도 그래서는 안 되는 거니까. 아직도 아름다움이 뭔지 알 지 못한다. 아름다운 것은 내 것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나는 어떻게든 있고 싶었는데 나는 어떻게도 없었다. 버드나무 잎사귀 하나 허공으로 툭 떨어진다. 이제 끝인 줄 알았는데 아직도 가야 할 곳이 남았을까. 밖은 여전하구나. 버드나무는 잠을 자면서도 물속과 물 밖의 풍경을 꼭 쥐고 있다.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물속으로는 어떤 길도 보이지 않는다. 멀리서 흔들리고 있을 촛불을 향해 나는 물속을 지나가고 물속은 나를 지나간다.
-「버드나무는 잠을 자고」 전문
물은 유연함과 부드러움, 거울의 반영성과 공기의 유동성, 상승과 하강, 인간의 내면과 상상력을 반영하는 상징이다. 그에게 물은 현실 속 자연이자 초월의 대상이고 때로는 슬픔을 저장하는 침잠의 장소이면서 재탄생의 신비를 내밀하게 풀어놓는 장소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것은 내 것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나는 어떻게든 있고 싶었는데 나는 어떻게도 없었다’는 소외와 부재는 세상 끝, 벼랑을 향한다. 그래서 침잠한 장소, 물속이라서 ‘밖은 여전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물속에서 영원히 살지는 않는다. 슬픔이 바닥을 치면 다시 솟아오르는 힘을 가진다. 시인은 ‘물속으로는 어떤 길도 보이지 않’기에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독백한다. 물속의 칩거를 끝내고 ‘멀리서 흔들리고 있을 촛불을 향해 나는 물속을 지나가고 물속은 나를 지나’ 가는 귀가의 행로는 슬프지만 아름답고 고적하지만 삶에 대한 희망을 다시 한번 가지게 한다.
당신은 빠진 머리카락을 화단에 심었다.
다 자랄 거야 다 잘 될 거야
비가 오면 비를 맞자 밤이 되면 밤을 맞고 벽처럼 서 있어 보자 비를 비라고 불러 보았으니까 밥을 밥이라 불러 보았으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그런 거 밖에 없으니까 괜찮지 않으니까 우린 오랫동안 맨발이었으니까 그러니까 화단에선 꽃이 필 테고 우린 구석에 쌓인 그릇처럼 늙어가겠지 그건 좋은 것이겠구나 서로의 속을 걸어 다닐 수 있을테니, 아무것도 안 하면서 골목 끝에서 오직 기다릴 수 있으니
여름에 잘라 심은 버드나무에서 연두의 혀가 식구처럼 태어난다 자꾸만 태어나면 어쩌지 버드나무 아기들이 생기면 어쩌지
노랫소리가 들려
만져 볼래?
손바닥 위에서 꿈틀대는 애벌레 같아
모든 노래는 오늘만 살아서 슬퍼
슬프다는 말을 데려와 잘 재워주자
여름이 지난 것을 모르도록
날마다 안녕이라고 말해주자
다 자랄 거야 다 잘 될 거야
우리 식구가 될 때까지 이불을 끌어다 덮어줘야지
읽으려고하지마이게다니까다만이제막생기는슬픔만이새로운것이니까설명하지마유령이면어때죽은듯이입을맞대고살아있는척노래를부르자물속을지나는누군가를깨우러가자어떠한노력도하지말고그렇게하자
-「유령에게」 전문
현실적으로 수생식물이나 물고기가 아니면 살아있는 인간에게 물속에서의 삶은 죽음이다. 시인은 시적 화자를 몽상 속에서 죽은 삶을 살고 있는 이중적 존재로 만들고 그 거처를 물속으로 정하여 물 밖 세상을 엿보기도 한다. 이처럼 죽음의 삶을 사는 도치는 유령이나 영혼이기에 가능하다.
파꽃이 피었으므로 여름은 환상이다 여기저기서 온갖 부고들이 날아들었고 나는 소풍을 가듯 문상을 간다 개종한 나무들처럼 잘 차려입고 구름의 모양을 따라 해보는 것이다. 그만 죽어도 좋을 거 같다는 말은 굳이 안 해도 되는 것이니까 이 생의 모든 부고들이 어여뻐서 견디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눈감아 주자 가르침 따위 주지 말자 다만 더는 멀어지지 말자고 쓰고 마침표까지 찍고 이해받지 못한 생이면 어때 괜찮아 여름이잖아라고 말해도 되니까. 그러니까 여름은 아무도 모르게 종점이다 종점이어서 늙은 플라타너스를 키우는 것이다 당신이 때로 아주 종점이나 될까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건 잘 살았다는 말 어디든 끝에 닿았으니까 아주 행복하다는 말 그러므로 또 그런 끝을 쥐고 있는 이를 만나면 말해주어야 한다 여름이니까 괜찮아.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면 아무 데도 가지 말라고. 이젠 없는 방향들을 따라갈 수 있으니 어떤 절망이 이리도 한가로울 수 있을까 싶다면 그건 이미 당신이 여름을 만났다는 말. 거기서 뭐하냐고 누가 물어보면 아,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면 되고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고, 그래서 좋으냐고 물어보면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만큼 좋은 건 없어요라고 말할테니 그러니 이제 좀 반짝인들 어때 여름이잖아.
「여름이니까 괜찮아」 전문
시적화자는 물에서 위안을 얻듯 여름에서 위안과 다독임을 차근차근 얻어나간다. 여름이니까 괜찮다고, 만병통치약처럼, 업을 대신 업고 가는 업받이처럼 관대한 여름에게 모두 걸머지우고, 막다른 종점에서 늙은 플라타너스를 키우기도 한다. 왜냐하면 파꽃이 핀 여름은 모든 게 용인되는 환상이니까. 그래서 ‘눈감아 주’ 고 ‘가르침 따위 주지 말’고, ‘이해받지 못한 생’이나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라 말해도 괜찮다고 스스로 위안한다. ‘여름’은 갈 곳 없다는 생각, 벼랑 끝에서 되려 아무 방향으로나 갈 수 있다는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는 그 무엇이다. 이것은 죽음본능을 넘어서는 것으로 시인에게는 물과 여름이 벼랑의 막다른 끝, 폐허와 슬픔의 바닥에서 그 무엇을 다시 열어주는 역설의 시공간, 경계를 넘어서는 초월의 시점이 되고 있다. 시인이 시적 화자를 죽음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그 무엇들, 응시의 대상들은 작고 보잘것없고 소외된 존재들이 대부분이다. 아프고 버거운 삶을 사는 쓸쓸하고 애처로운 사람들과 풍경을 바라보는 일, 그것을 시인은 삶과 죽음의 자리를 바꾸어서 수분 많은 담채화처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물과 버드나무와 여름과 여타 다른 식물들과 시적 화자의 독백을 따라가며 시 한편 한편을 되새김질해 보는 것은 지극한 마음의 행로를 더듬어 보는 순례의 시간이었다.
시와사람, 24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