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려고 하는 거지!
여러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그래선지 <녹두 영감 죽었네>가 예전 같지 않다. 예전처럼 재미있기만 하지 않고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처음 ‘녹두 영감’ 이야기를 봤을 때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잔인한 영화나 드라마를 유독 못 보는 내가 옛날이야기에서만큼은 잔인한 걸 즐기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움칫 놀랐다. 그렇지만 어느새 이유가 뭘까 궁금하기보다 이런 이야기 더 없나 살피고 있었다. 그림 형제의 <노간주나무>도 <콩쥐 팥쥐>의 젓갈 각편도 즐기고 <조마구>의 어머니 고기도 즐긴다. 예전의 나는 <녹두 영감>도 즐겼다. 그런데 오늘 나는 <녹두 영감>이 재미있으면서도 불편한 감정을 함께 느낀다. 예전에 걸리지 않던 부분이 살짝 걸린다.
갓난아기를 삶아 먹는 부분이 먼저 걸리고, 녹두 영감을 놀리고 죽게 만드는 토끼가 걸린다. 갓난아기 부분을 읽을 때마다 예전과 다르게 움칫하며 의식하게 되고, 토끼와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녹두 영감이 안 되어 토끼가 얄미워진다. 여러 생각이 드는 요즘이고, 그래서 내 상황과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예전에 미처 몰랐던 부분이 올라오는 것인지, 단순히 예민하게 주변을 살피다 보니 잠시 드는 불편함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공부 모임 전날 저녁에야 급히 몇 번 읽고 정리되지 않은 채 아침에 글을 쓰려니 당연하다. 고민이 부족한 탓이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
어린이. 청소년문학을 한다고 꼭 집어 말하는 어도연을 왜 십년 넘게 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고 있다. 철부지였지만 안 거쳐도 되는 학생운동 고생길을 왜 자처했는지도. 의무감 때문이었다고 생각했었다. 시대의 부름이었고, 역사적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어린이 책을 고르고, 읽고, 느끼며, 알리는 것.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 소명 의식을 갖고 제대로 하자고.
주말에 91년 열사가 된 친구 추모위 운영위가 있었다. 한 후배가 운영위에 자기 집을 개방하고 상다리 휘어지게 한 상 차려 선후배를 맞았다. 운영위는 아니지만 가까이 사는 덕에 나도 함께했다. 수십 년째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배가 물었다. 왜 학생운동을 했냐고. 뜻밖의 질문에 다들 할 말은 많았겠지만, 선뜻 아무도 말을 못 하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불쑥.
“행복해지려고!”
질문 한 선배는 윤경이가 정답을 말했다고 했지만, 정작 나는 놀랐다. 거창하게 역사의 부름 앞에 부끄러운 자 되지 않으려 몸부림쳤는데, 한 번도 행복해지려고 투쟁의 한길에 나섰다고 생각한 것 같지 않은데 나도 모르게 그리 튀어나왔다. 먼저 말했으니 뒤에 생각했다. 이게 진심이었던 것 같다고. 어도연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어린이책 보는 어른으로서의 소명 의식 이전에 행복해지고 싶은 갈망이 있었던 것 같다.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과거에도 지금도 행복해지고 싶은 소망으로 혼자가 힘드니 조직 속에서 함께하고 있는가 보다.
나는 무척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회 모임을 1년에 한두 번밖에 빠지지 않던가, 아예 개근한다. 십여 년 지회 책 모임 하며 책을 읽어가지 않은 적이 다섯 번을 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게 얄밉기도 하다는 얘기를 듣고 고집 세게 내 생각을 주장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연차가 오래되지 않았을 때는 말이 많다고 했지만, 연차가 제법 되고 선배가 되니 책과 감상에 대해 디테일하게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이 후배에게는 부담이라는 걸 자꾸 까먹는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었는데 내 마음만 살폈지, 다른 마음은 뒷전이었다. 행복해지려고, 함께 행복해지려고 어도연을 하는데 나만 행복하고 다른 이가 행복하지 않다면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리라. 남에게 부탁을 잘 하지 않는 나는 남의 부탁도 관대히 들어주지 못한다. 누군가 가끔 훅 치고 들어올 때면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래서 정해진 패턴대로 성실함을 가장해 뚜벅뚜벅 걷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즈음, 성실함을 넘어서서 너그럽지 못한 마음 그릇 탓임을 알았으니 조금이라도 노력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타고난 기질이 가치판단을 중요히 여기고, 원칙적이라는 명리학 해석을 거듭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걸어야 함을 다시 기억하는 7월이고싶다.
말놀이는, 말놀이 모둠은 서울지부 강사 모임 공부 중 가장 즐겁고 나로 돌아가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예전에 추억 놀음이라며 자꾸 옛 기억을 판다고 자책하던 내가, ‘릴케’를 통해 내 심연, 본성을 찾아가는 과정임을 깨닫고 합리화를 넘어 자긍심을 갖게 된 경험도 했으니 깨달으면 실천하자. 비록 더디고 힘들더라도 조금씩 전진하자. 그래야 함께 행복하니까.
<녹두 영감 죽었네>가 걸리는 것은, 질주하던 내게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고마운 손길들이 고맙게 느껴지지 않는 솔직함에서 오는 것이고, 이야기를 즐기기보다 ‘어디 한번 걸리기만 해봐라.’ 하는 심보가 남아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녹두 영감이 되어 토끼한테 억울하게 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은 체 꾀를 내어 토끼를 잡고 끓여 먹으려던 마음을 깜빡했기 때문에.
“녹두 영감, 어리석은 욕심 탓에 그리 되었오. 한 치 앞만 보지 말고 멀리 보며 함께 갑시다! 녹두 망치는 토끼라도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