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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들어가는 말
우리는 이런 이야길 잘 듣는다.'성공 질주' 도요타! 조 후지오 도요타자동차 사장의 폭주!
과연 도요타가 얼마만한 매력과 표본을 가진 기업일까.기업의 전반적인 평가는 이익창출에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기업 문화와 풍토 역사를 알지 못하고는 이해되기 힘든법,그래서 나는
2004년 통신교육을 받으면서 내 나름대로 도요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경영실적 뿐아니라
독특한 특성등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아봄으로 북미의 도요타 신화나 그들 일본 현지관점에서
말하는 도요타의 산맥에 담담히 다가가야 할것이기 때문이다.너무나 과대 평가된 점이 있다면
그건 우리의 편견이 낸 산물일것이고 평가의 가치가 너무 많다면 그건 우리의 노력의 부족일
것임에 틀림없슬것이다. 앞으로의 내용은 각 언론사나 책자속의 도요타임을 밝힘으로 본인이
직접적으로 가감하는데 주의를 두었슴으로 본문에 충실하고 역주에 불성실함을 밝힌다.
A-1.도요타 자동차 신년 대담(중앙일보중심)
2003년 12월 27일 도요타 아이치현 본사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종무식을 했다고 전해진다.
2003년 사상 최대의 경영실적으로 세계 자동차 시장 2위로 올라선 것으로 자체 분석됐기 때문이다.
브레이크 없는'도요타 신화'가'아우토반(속도무제한 고속도로)'을 달렸다는 게 사내외 평가다.
이날 조 후지오 (張富士夫·67) 도요타 사장은 미리 발표한 신년사에서 전세계 26만여명의
직원에게 '우리의 상품이나 서비스가 세계 고객에게 인정받은 결과'라며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면서도 '세계시장의 경쟁은 더욱 뜨거워 앞으로도 단결을 통해 더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도요타 성장은 세계적인 성공 신화다. 특히 기나긴 경기침체로 몸살을 앓고 있던 일본에서 거의
유일하게 글로벌 경쟁력을 갖춰 세계적인 기업으로 우뚝 섰다.
중앙일보는 도요타 최고경영자인 조 후지오 사장과 지난해 말 서면 인터뷰를 통해 도요타의 성공
철학과 미래 비전을 들었다.
-2003년 경영실적을 평가한다면.
'당초 목표대로 전세계 판매 대수가 6백70만대를 넘어 사상 최대 기록을 세울 전망이다. 계열사인
다이하쓰자동차(미니차)와 히노자동차(트럭)의 판매실적을 합친 것이다. 2002년 6백만대 돌파
기록을 다시 갈아치웠다.'
-일부 언론에서는 도요타가 세계 2위로 올라섰다는데.
'아직 세계 자동차 업체들의 2003년 전체 실적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도요타는 이미 2003년
상반기(4~9월)만 볼 때 매출과 세후순이익이 8조2천2백억엔(약 80조원)과 5천2백억엔으로 집계됐다.
1백60개국 이상에서 3백17만대를 팔아 미국 포드를 제치고 GM에 이어 세계 2위에 오른 것으로
인정받았다.'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린 배경은.
'기본은 '도요타식 기업문화'다. 회사는 근로자를 끝까지 챙기고, 직원들은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 또 최고급 브랜드인 렉서스와 친환경차 프리우스 출시로 이미지가 첨단 고급화된 것도
미국 시장을 중심으로 먹혀들었다. 또 필요할 때 필요한 차를 만들어 제때에 판매하는 비용절감
시스템도 한몫 했다. 결국 경쟁업체보다 상대적으로 싸게 팔 수 있었다. '
-올해 경영 목표는.
'올해 자동차 생산 목표는 7백만대 돌파다. 2010년 목표는 세계시장점유율 15%(현재는 10% 수준)를
내걸었다. 이를 위해 올해 멕시코, 2006년 미국 텍사스등 해외 생산라인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도요타가 극복해야 할 문제는.
'현재 상황이 좋다고 안심하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다. 앞으로 대담한 경영혁신으로 세계
고객들에게 신뢰와 만족감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앞으로 도요타의 전략과 주력 모델은.
'도요타는 세계적인 기업이 됐다. 이제는 세계 각지의 시장 특성이나 요구에 맞춰야 한다.
특히 2004년은 신제품 출시를 위한 강도높은 프로그램을 진행할 것이다. 구체적인 전략은 밝힐 수
없다.'
-자동차 시장이 포화상태라는 지적이 있다.
'시야를 넓게 글로벌로 옮겨보자. 자동차라는 편리한 교통수단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직
많다. 21세기에는 본격적인 '글로벌 모터리제이션의 시대'가 올 거다. 도요타는 미래 전략으로
안전하고, 친환경적이며, 재미있는(Fun to Drive) 자동차를 만들어 세계시장을 주도할 계획이다.'
-중국 등 아시아 시장 전략은.
'새해부터 아시아·아프리카·남미 지역에서 활발한 판매 활동에 나설 계획이다. 올해 중국에서
현지 자동차회사와 '코롤라'를 공동 생산, 본격적인 시장 진입에 들어간다. 2010년께 아시아
시장점유율 10%를 실현하고 싶다.'
-2003년 한국에선 도요타의 임금 동결이 화제였다.
'도요타의 건전한 노사 합의는 양측이 현재보다 미래를 보기 때문이다. 노사는 임금을 업적만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일본 경제의 현재와 미래, 물가 등 주변 환경, 글로벌 경쟁력 등이 모두
고려된다.'
A-2.도요타 자동차 조 후지오 사장
1937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태어난 조 후지오 사장은 일본에서는 성공한 샐러리맨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60년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한 직후 도요타에 입사해 40여년의 자동차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엘리트 출신이면서도 입사 초기 15년을 생산현장에서 보내면서 '도요타 생산방식(저스트 인
타임)'을 주도했다.
조 사장은 88년 미국 첫 생산거점인 켄터기공장 건립을 맡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7년간 미국
법인 대표로 일하면서 전문경영인으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96년 일본 본사로 돌아온 뒤에도 98년
전무, 2000년 부사장, 2001년 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매년 발탁 승진했다.
도요타자동차에서 창업 2세인 도요타 쇼이치로 명예회장(豊田章一郞·79)이 정신적 지주라면,
오쿠다 히로시(奧田碩·72)회장과 조사장은 도요타 경영의 쌍두마차다. 오쿠다 회장은 95년
사장으로 취임, 99년 회장에 오를 때까지 개혁을 주도하면서 자동차 명가의 기틀을 만들었다.
지금은 게이단렌(經團連) 등 대외 업무에 전념한다.
따라서 현재 도요타 살림은 조사장이 이끌고 있다. 지난해 말'2003 도쿄 모터쇼'에 도요타
명예회장과 오쿠다 회장 등 최고 경영진들이 총출동했으나 스포트라이트는 그에게 집중됐다.
조사장은 '왜(Why)'를 수없이 외치면서 내일에 대한 위기감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생산 현장을 찾아다니며 근로자들과 대화한다. 아내 에미코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둔 그는 도요타 본사 인근 일본식 주택에서 살면서 골프와 낚시·음악감상을 즐긴다.
A-3.도요타 자동차의 소개
도요타자동차는 1937년 '도요타 자동 직기 제작소'에서 분리된 '도요타자동차공업'이 모태다.
도요타 자동 직기 제작소의 창업자로 일본에서'발명왕'으로 불렸던 도요다 사키치의 아들인 도요다
기이치로가 자동차를 맡았다.
도요타자동차는 47년 자동차 생산 1만대를 돌파하는 등 승승장구하다 50년 시련을 겪었다.
노조 파업으로 위기에 몰렸던 도요타는 1천5백명을 감원하는 구조조정을 거친 뒤에야 경영을
정상화시켰다.
이때 노사는 오늘날의 신화를 만든 경영철학 '공존과 타협' '상호 신뢰'의 교훈을 배웠고,
이후 노사 분규는 한 건도 없었다.
도요타는 57년 미국 판매법인을 설립해 수출 전선에 뛰어들었다. 59년 첫 해외 생산기지를
브라질에 구축한 데 이어 88년 미국과 캐나다, 99년 인도, 2001년 프랑스에 공장을 가동하면서
글로벌 경영에 나섰다.
도요타는 82년 도요타자동차공업과 도요타판매가 합병되면서 주식회사로 재출범했다.
또 89년 최고급 브랜드'렉서스'와 97년 세계 첫 하이브리드카(가솔린+전기차) '프리우스'를
출시히면서 세계 최고기술의 자동차 메이커로 발돋움했다.
렉서스는 5년여에 걸쳐 특급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야심작으로 세계시장에서 '최고의 차'라는
명성을 얻었다. 프리우스는 2004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올해의 차'로 선정됐다.
도요타는 현재 26개국 61개 생산라인(국내 15, 해외 46)에서 26만여명의 임직원이 일하고 있다.
2003 회계연도(2002년 4월∼2003년 3월)에 매출과 판매대수가 각각 16조엔(약 1백60조원)과
6백만대를 돌파했다.
A-3-1.2000년도 자동차 백과사전을 통해본 도요타 자동차(주)
ㅁ도요타 자동차(주) -( 豊田自動車 / Toyota Motors Corporation )
설립년도 1937년
본사 소재지 豊田市(도요타 시)
대표자 후지오 조(長 富士夫)
종업원수 69,753 ('98.3 기준)
총생산대수/승용차 3,165,805 / 2,669,975 ('98년)
경영지표 경영 결산 기준 '98.3
매출액(백만엔) 7,769,486
세후 순익(백만엔) 365,140
총자산(백만엔) 7,025,340
자기자본(백만엔) 4,874,155
자본,기술 제휴업체 - 다이하쯔(일,51.2%)- NUMMI(미,50%)- 히노(일,20.1%)- 國瑞汽車(대만,38.3%)
- Kiruloska(인도,74%)- 호주 도요타(100%)
2000년 들어 창립 67주년을 맞은 토요다는 일본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로 자동차 생산대수 세계 4위인 대기업이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성공을 거둔 비결은 뛰어난 경영전략과 사원들의 단합된 힘 그리고 위기 때마다 좋은 기회를
만나 새로운 발전의 계기로 삼은 점 등이다.
90년대 들어 일본의 거품경제가 가라앉으면서 잠시 어려움을 겪었지만, 계열관계를 강화하는 등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는 중이다.
자동차왕국으로 불리는 일본의 자동차역사를 이야기할 때는 토요다를 빼놓을 수 없다.
토요다는 일본 제1, 세계 4위(자동차 생산대수에서 GM, 포드에 이어 3위를 지켰지만 98년에 폴크스바겐에
밀려 4위가 되었다)의 자동차 메이커이기 때문이다.
토요다의 첫걸음은 섬유기계 제작으로 성공한 발명왕 토요다 사키치(豊田佐吉, 1869∼1930)에서 시작된다.
그의 뜻을 이어받은 아들 도요다 기이치로(豊田喜一郞, 1894∼1952)가 자동차산업에 뛰어들어
‘세계의 토요다’로 키워냈다.
1959년 토요다의 본거지인 고로모시는 토요다의 성공을 기념해 시 이름까지 도요다로 바꾸었다.
섬유기계로 출발해 2세에서 자동차로서 50년당시는 위기였지만 한국전쟁으로 기사회생한 토요다는 1920년을
전후해 자동섬유직기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바탕으로 자동차산업에 뛰어든 창업주 토요다 사키치는 1923년 발생한 관동대지진을 겪으며
도쿄대학을 졸업하고 토요다에 입사한 아들 기이치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진 같은 재난을 당하면 철도는 쓸모 없다. 지금 움직이는 것은 자동차뿐이다. 앞으로는 틀림없이
자동차시대가 온다.
나는 평생 섬유기계만 만들었으니 너는 자동차를 만들어라.”
1920년대 일본의 자동차산업은 미국의 식민지였다. 1925년에 설립된 일본 포드와 이듬해 세워진 일본 GM은
미국차 조립생산공장으로매년 2만대 이상의 차를 생산했다.
당시 일본차는 연간 300∼400대가 생산되었을 뿐이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은 기이치로는 미국과 유럽의
자동차공장을 둘러보고 외제차를 뜯어보면서 자동차 익히기에 열중했다.
1930년 사키치가 세상을 떠나고 경영권을 이어받은 기이치로는 33년 자동차부를 만들어 자동차생산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이 무렵은 일본 자동차산업의 태동기로 일본정부의 국산차 장려정책에 따라 이스즈와 닛산의 전신인
도쿄자동차공업과 자동차제조가 주식회사로 출발했다.
기이치로는 1930년 미국차를 바탕으로 2기통 엔진을 만들었고, 2년 뒤 이 엔진을 얹은 프로토타입을
제작했으나 품질이 뒤떨어져 양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1935년 미국차를 기본으로 양산 가능성이 높은 프로토타입을 다시 만들었다. 당시 유선형의 앞선
디자인을 자랑하던 크라이슬러 에어플로를 본뜨고 4기통 3.4X 45마력 엔진을 얹어 AA형으로 불렀다. 양산모델은
이듬해 4기통 3.0X 엔진을 얹고 선보였다.
섀시와 트랜스미션은 시보레 것이었다.
1937년 토요다자동차공업(주)이 독립하면서 현재 나고야 근처의 고로모에 대형공장을 세운다. 여기서 38년부터
42년까지 시보레의 1.5톤 트럭을 생산했다.
뒤이은 중일전쟁과 2차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토요다는 군용트럭을 만들었다. AA 이후 중단된 승용차 생산은
47년에야 다시 시작한다.
1945년 일본의 2차대전 패배는 자동차산업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전후의 어려움 속에서도 도요다는
47년 승용차 SA를 내놓았으나 미국차와 경쟁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적자가 누적되어 50년 봄에는 도산 위기를 맞았고 여기에 파업사태까지 겹쳐 도요다 기이치로는 사장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또 주거래 은행은 관리하기 편하도록 도요다자동차를 제작과 판매부분을 떼어 각각 다른 회사로
운영하게 했다.
쓰러져 가던 토요다를 기사회생시킨 것은 다름 아닌 한국전쟁이었다. 미군은 한국전쟁이 장기화되자 가까운
일본에서 군용트럭을 조달하기로 하고 새로 발족한 경찰예비대와 함께 도요다에 각각 1천대씩의 트럭을 주문했다.
토요다자동차의 실질적인 창업자 기이치로가 사장직에서 물러난 지 2주만에 일어난 기적이었다.
사장 복귀설이 나돌던 기이치로는 토요다자동차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52년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카롤라로 일본 모터리제이션 이끌고 , 오일쇼크 계기로 미국시장에서 성장하여 새롭게 태어난 도요다는 55년
크라운, 57년 코로나, 61년 퍼블리카를 차례로 선보이며 기반을 잡아간다. 이 차들은 같은 이름으로 60년대
국내에서 조립 생산되어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모델이다.
크라운은 여러 번의 모델 체인지를 거쳐 지금도 토요다의 인기모델로 남아 있다. 코로나는 도요다의 입지를
굳힌 공신이었다. 데뷔 때는 1.0X 엔진을 얹었으나 64년 1.5X 엔진을 얹은 패밀리카로 자라 닛산 블루버드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된다.
60년대는 일본 자동차산업에 아주 중요한 전환기였다. 도쿄 올림픽이 열린 64년 일본은 연산 50만 대를 넘어
58만 대의 차를 만들었다.
이때 토요다 카롤라와 닛산 서니는 치열한 판매경쟁을 벌이며 일본의 모터리제이션을 이끌었는데, 사람들은
두 차의 머릿자를 따서 ‘SC전쟁’으로 불렀다.
도요다를 일본 제일의 메이커 자리에 확실하게 앉힌 카롤라는 그후 83년초 생산 1천만 대를 돌파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포드 T형(1천500만 대), 폴크스바겐 비틀(2천만 대)에 이은 세 번째 1천만 대 돌파모델이었다.
70년대 들어 토요다는 모델 수를 계속 늘려갔다. 70년에는 일본의 첫 스페셜티카 셀리카가 나왔고, 셀리카의
형제모델인 카리나로 카롤라와 코로나의 틈새를 메웠다.
토요다는 차종마다 엔진과 스타일을 조금씩 달리해 적극적인 마케팅 전략을 폈고, 70년 연간 생산 100만 대,
72년 생산누계 1천만 대를 돌파한데 이어 70년대 중반에는 일본 승용차시장의 33%를 점유했다. 이 시기에
해외시장에서도 행운이 따랐다. 도요다는 미국시장에 관심을 갖고 58년 크라운을 수출했으나 순발력과 내구성이
부족해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65년 코로나로 다시 진출을 시도했지만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 것은 68년
카롤라를 더하면서부터다.
카롤라는 미국 소형차시장에서 인기를 모았고, 73년 전세계를 덮친 오일쇼크로 작고 경제적인 차를 찾게 됨에
따라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한국전쟁에 이어 오일쇼크가 다시 토요다에게 호기를 준 것이다. 토요다는 75년
미국시장에 27만8천 대를 팔아 폴크스바겐을 앞지르고 미국내 수입차 판매1위에 올랐는데, 그 중 반 이상이
카롤라였다.
90년대는 가지치기로 모델 늘리는 전략, 계열관계는 강화, 생산능력은 줄이기로 ,미국시장에서 성공의 기틀을
마련한 토요다는 79년 2차 오일쇼크를 계기로 일본차 수입규제의 벽에 부닥친다. 토요다를 비롯한 일본
메이커들은 이에 맞서 81년부터 자율규제를 통해 미국시장을 공략하게 된다. 토요다는 일본차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88년 미국시장용 디비전 렉서스를 설립, 고급모델은 렉서스 브랜드를 붙여 판매한다.
특히 아발론은 미국에서 도요다의 이름으로 팔리는 차 중 가장 고급으로 인테리어와 장비를 철저히
미국식으로 꾸몄다.
미국 현지공장에서 생산되는 아발론은 국내에도 수입된 적이 있다. 그밖에 카롤라와 타코마 등을 생산하는
GM과의 합작공장도 84년부터 캘리포니아에서 가동하고 있다.
자동차 대중화가 이루어지면서 일본에서도 성능과 조종성을 앞세우는 퍼스널카 수요가 늘어났다. 이런 추세에
발맞춰 도요다는 80년대부터 새로운 엔진을 개발하고 MR2(84년), 셀리카(85년), 소아라(86년) 등의 새 모델을
선보였다. 또 연료분사장치, 안전 브레이크, 특수 서스펜션 등 전자장비도 크게 늘렸다.
90년대 들어서는 내수침체와 엔고의 영향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도요다는 차종 개발보다 마이너 체인지를 통한 가지치기로 모델을 늘리는 전략을 펴고, 93년에는 폴크스바겐과
아우디 판매점인 두오(DUO)를 설립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동남아에 불어닥친 IMF 한파와 일본 자동차시장의 침체로 수출과 내수가 함께 부진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자 닛산의 무게 줄이기와는 반대로 계열관계를 강화하는 공격적 전략을 펴기 시작했다.
토요다는 99년에 계열관계였던 경자동차업체 다이하쓰공업과 트럭업체 히노자동차공업에 대한 출자비율을
50% 이상 늘려 자회사화했다. 다이하쓰와 히노를 끌어들이면서 경차(토요다는 경차를 만들지 않는 메이커로
유명하다)부터 대형트럭까지 모두 갖춘 종합 자동차 그룹으로 재도약하게 되었다. 하지만 도요다는 연간 380만
대인 국내 자동차 생산능력을 99년부터 3년 동안 30만 대 정도 줄이겠다고 했다.
요코스카공장의 조립라인을 일부 폐쇄하고 본사와 모토마치공장의 라인도 축소할 방침이다.
토요다의 내수판매는 90년부터 계속 떨어졌지만 시장점유율은 40%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토요다는 미국의
렉서스를 중심으로 전세계에 38개의 해외판매망을 갖고 있다. 미국 현지에서만 연간 64만 대 정도가 팔린다.
토요다의 한국 공식수입업체인 토요다자동차는 토요다통상이 투자해 98년 3월에 설립한 TT코리아가 모태가
되었다. 토요다는 96년 6월에 진세무역을 통해 미국산 아발론을 소개한 적이 있다.
일본 메이커로는 처음으로 한국시장에 공식 지출했지만 반일감정과 미국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237대를 파는 데 그쳤다.
TT코리아는 미국시장에서 인기 높은 캠리를 들여왔지만 역시 판매가 부진했다. 한 가지 차종만으로는
한국시장을 공략하는 데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서울 강남과 전주, 두 곳뿐인 판매망도 판매에 걸림돌이었다.
새로 설립된 도요다자동차는 한국시장의 특성을 장기간에 걸쳐 면밀히 분석, 4가지 차종을 본격적으로
투입하기로 했다.
수입모델은 BMW 3시리즈의 라이벌이 될 IS200과 아발론의 수요층을 대신할 GS300, BMW 7시리즈와
벤츠 S클래스와 경쟁할 LS430, 그리고 럭셔리 SUV인 RX300이 선정되었다.
스포티 쿠페 셀리카도 곧 들여올 예정이다.
최근 GM, 포드 등 선진국의 대형업체에서 추진하고 있는 기업간 합병바람은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는 냉혹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생산대수 기준으로 1위 GM, 2위 포드에 이어 세계 3위였던
토요다는 98년 폴크스바겐에 3위 자리를 내준 데 이어 벤츠와 크라이슬러가 합병한 다임러크라이슬러가
최근 미쓰비시와 전략적 제휴를 선언함에 따라 5위 자리로 밀려날 위기에 있다.
그러나 토요다는 GM, 폴크스바겐 등과 차세대 저공해차 개발을 공동추진하기로 하고 인터넷 부품구매도
공동으로 추진하는 등 협력관계를 강화하면서 독자생존하는 방법을 택해 ‘빅5’ 자리는 굳건히 다질
것으로 예상된다.
휘발유 엔진과 모터를 결합한 세계 최초의 양산 하이브리드카 프리우스가 상징하듯 토요다는 양적인
크기만큼이나 높은 기술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판매의 토요다’라는 명성에 어울리는 뛰어난
마케팅이 어우러져 한국시장에서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을 일본 메이커가 될 가능성이 높다.
[사업내용]
승용차는 대중차인 1.3ℓ'Starlet'부터 대형고급차인 4.0ℓ'Century'까지 36개 차종을 생산하는 풀라인
생산 체제
1991년 최대 생산모델(594,367대)인 Carolla를 비롯하여 일본시장 판매 베스트5도 도요타가 차지하고
베스트20 모델중 11개모델을 차지하고 있다.
상용차는 6톤이하 중소형 트럭과 29인승 이하 중소형 버스등 25개 차종을 직접 생산하며, 경자동차는
'다이하쯔공업(주)'이, 대형상용차는 '히노자동차'가 각각 분담 생산한다.
[판매]
국내 판매 : 5개 계열점 311사, 영업점소 4,872개, 판매원수 11만5천명
해외 판매 : 수입업자 158사, 딜러 7,200사
[공장]
최종 조립공장 5개,부품공장 8개등 총13개 공장으로 모두 愛知縣에 소재(10개 공장은 豊田市에 위치)
국내 자회사인 다이하쯔, 히노, 도요타차체등 관련회사에 생산위탁
해외생산거점은 부품생산거점을 포함 22개국 29개 공장 보유
[특기사항]
- 80년대 전략의 최대 목표 : 국내시장에서 닛산, 혼다, 미쯔비시, 마쯔다의 추격을 피하고,
독주체제를 유지하면서 세계시장에서 포드, 닛산,푸조, 피아트,폴크스바겐,르노에 승용차 우위를
확보하고 GM을 추격한다.
- 90년대 국제화전략 목표 : 글로벌 10추진(세계 생산의 10%인 560만대 생산체제 →
일본 405만, 미국 70만, 유럽 75만대)
- 비자동차 사업부문의 매출이 18%인 1조3천억엔에 이르는 다각화를 강화하고 있으며, 이익잉여금이
12엔대에 이르는 '도요타은행'이라는 별칭이 있는 초우량기업 이다.
- 세계적으로 일본식 생산방식으로 알려져 있는 '간판방식(Just-In-Time)'을 창안 하였다.
A-4.도요타 경영의 특징
A-4-1.日經비즈니스(日) 2000.04.10일자의 내용
■ 위기전승 경영 : 서비스 사업 확대하고 자동차 부문 강화
지금 자동차 업계에서는 '밸류 체인'이라는 말이 일대 유행어가 되고 있다. 자동차 제조에서
물류, 판매, 판매금융, 애프터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자동차라는 상품에 관한 일련의 사업 중 어디에서
부가가치를 찾아내고 무게중심을 둘 것인지가 중시되고 있는 것이다.
美 제너럴 모터스(GM)社와 포드 모터社가 부품 부문을 분리하고 대신 인터넷 관련사업에 주력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제품제작 부문에서 주변 서비스 사업 부문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것이 시대적
추세다. 도요타자동차도 99년 말부터 2000년에 걸쳐 자동차 이외의 사업분야에 적극 진출하기 시작했다.
'DDI·KDD·IDO 합병, 도요타는 교세라에 이어 2대 주주로 부상', '결제기능이 갖춰진 도요타카드 발행',
'도요타 산하의 지요다(千代田)화재해상보험과 다이도쿄(大東京)화재해상보험 합병으로 자동차 보험에
강한 손해보험사 탄생', '도요타, 연내 금융 지주회사 설립' 등 일련의 움직임은 도요타의 서비스 분야가 G
M이나 포드보다 한발 앞서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요타는 과연 어떤 청사진을 갖고 있는 것일까.
자가와 다다아키(蛇川忠暉) 부사장이 얘기하는 서비스 사업의 구상은 한마디로 정보통신 네트워크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모든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통신 인프라는 DDI가 제공하고, 휴대단말기는 계열사인 덴소
등에서 만들고 있다. 고도 도로교통시스템(ITS)이 실현되면 자동차가 단말기가 될 수도 있다.
자가와 부사장은 '서비스 사업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자동차도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바일 중 하나다. 앞으로
'도요타 모터 컴퍼니'에서 '모터' 대신 '모바일'이 들어간 '도요타 모바일 컴퍼니'로 회사명을 바꾸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회사명에서 자동차가 사라지는 것이다. 주택, 정보통신 분야로 사업을 다각화했을 때부터 언젠가 그렇게 될
것이라는 소문은 있었지만 그 말이 이제 현실감을 띠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도요타가 자동차 사업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다각화 사업을 정보통신 네트워크로 연결, 크게 전진시키는 데 도요타의 목적이
있다.
한편 자동차사업과 관련해서는 현재 배기량 850cc급 엔진을 장착한 새로운 승용차를 개발중이다.
도요타의 이같은 구상은 소형자와 경자동차의 구분을 없애고 크게 보아 '작은 차'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이겠다는
전략의 일환이다. 이 경우 경차의 왕자 스즈키와 혼다기연공업(本田技硏工業)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도요타자동차의 이러한 계획은 20대 고객의 확보에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그 일환으로 도요타는 자체
경기장에서 자동차 경주 F1(포물러 원)을 개최, 스포티한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할 뿐만 아니라 혼다로부터
F1의 맹주라는 이미지를 탈환할 계획이다. 이것은 성숙시장인 자동차 시장에서 닛산에 이어 혼다까지 몰아내기
위함이다.
혼다 죽이기와 서비스 사업의 확대는 성숙산업 분야에서 살아남겠다는 도요타의 강한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일본 자동차 시장에서 도요타가 차지하고 있는 점유율은 지난 1월 43.3%, 2월 44.2%에 달했지만 '도요타자동차가
잘 팔리고 있다는 실감이 안난다. 혼다는 아직 무서운 존재고 닛산의 부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경영층부터 현장 노동자들까지 느끼고 있는 위기의식이다.
임원에서부터 현장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조직 전체가 안고 있는 위기의식의 원류는 지난 49년 도지라인
(초긴축 재정정책)을 실시할 때 자금줄이 악화돼 도산 직전까지 갔던 경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은행단은 판매회사의 분리 등과 함께 인원조정이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룹의 창시자인 도요타 사키치
(豊田佐吉)의 생각을 정리한 '도요타 강령 5조'에는 '가정적 분위기를 만들라'는 내용이 있어 도요타는
노동조합과 '인원조정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교환한 바 있다.
그 결과 도요타는 노동쟁의에 휩싸였고 창업자인 도요타 기이치로(豊田喜一郞)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임으로 등극한 이시다 다이조(石田退三)는 '쓸데없이 돈을 낭비하지 말라. 남는
돈은 모두 저축하라'고 강조했다. 도요타의 현재 보유자금이 2조엔에 달하는 것은 언제 경영위기에 빠질지
알 수 없으므로 최소한 2개월분의 단기채무 상환과 사원전원에 대한 퇴직금 지불을 염두에 둔 조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창업자들의 위기감도 흐려진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석유파동, 엔貨 강세, IT 혁명
등으로 위기감을 유지해왔다. 앞으로도 '자동차만이 아닌 도요타'라는 캐치플레이즈로 확장노선을 견지하면서
전사원의 위기의식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 강하고 거대해질수록 도요타의 또다른 고민거리는 커져만 가고 있다.
■ 혈연공동체 경영 : 인수방어 위한 자본의 논리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도요타에는 도요타(豊田) 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혈연적 측면이 아직
남아 있다. 그룹 창시자인 도요타 사키치의 가르침을 정리한 도요타 강령 5조에 명시된 '가족적 미풍'을 신봉하며
우직하게 지키고 있는 '혈연 공동체'인 것이다. 이것이 이 글로벌 기업그룹이 가진 또 하나의 얼굴이다.
그룹내 최고위층이 모이는 '아침의 모임'을 비롯해 그룹내에는 각종 모임들이 이뤄지고 있다. 쥬니어 모임,
고졸자의 모임, 대졸자의 모임, 여직원의 모임, 자위대 경험자의 모임 등등. 오쿠다 히로시(奧田碩) 회장은
'비공식적인 모임을 통해 공동체적인 사풍이 생겨나고 있다'며 이같은 움직임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인사도 도요타 가문의 혈연공동체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북미 지역에서 크게 성공을 거둔 고급차 브랜드
'렉서스'의 출발은 도요타 에이지(豊田英二)의 차남인 도요타 데쓰로(豊田鐵郞), 일본 시장에서 크게 히트한
소형차 브랜드 '비츠'의 개발은 셋째 아들인 도요타 슈헤이(豊田周平)가 각각 담당했다.
위기의식의 전승을 강점으로 내세워 온 이 혈연공동체의 최대 관심사는 인수방어다. 주식공개매입(TOB), 주식교환
등으로 인해 거대기업도 인수표적이 되는 오늘날 '도요타도 언제 인수당할지 알 수 없다'는 위기감이
그룹내에는 팽배해 있다.
5,000억엔 對 1조엔. 도요타자동직기의 주식 시가총액은 이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도요타 주식의 약 절반에
불과하다. 여기에 혈연공동체 붕괴 위기의 싹이 도사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룹 외부 기업이 도요타자동직기를
인수하고 同社가 보유중인 도요타 주식을 매각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이익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요타자동직기는 이전에 주식 매점 위기를 겪은 바 있다. 도요타자동직기는 도요타 주식의 5.2%를
보유한 대주주다. 약 2,700억엔을 투자해 도요타자동직기의 주식을 절반 이상 확보해 同社를 지배한다면
그 기업은 사실상 도요타의 대주주가 되는 셈이다.
청사진이 거의 완성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순수지주회사 구상'은 이러한 위기감의 발로다.
도요타 그룹 상위에 순수지주회사를 창설하고 승용차, 트럭, 부품 관련 자회사를 그 아래에 편입시키는
방법, 도요타 그룹 하위에 순수지주회사를 설립하는 방법 등이 논의되고 있다. 지주회사 산하로 들어가는
도요타자동직기 등은 관련법상 지주회사의 주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룹 산하 기업의 주식인수를 통한
간접적인 그룹의 주식 매점에 대한 불안은 사라지게 된다. 도요타는 연결납세 등 관련세제 조건이 정비되는
대로 1∼2년 내에 지주회사제 도입에 착수할 전망이다.
그러나 오쿠다 회장의 말처럼 혈연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혈연공동체 속에서 도요타 가문이
위기전승과 제품제작의 전통을 이어가는 구심력으로 남더라도 앞으로 영원히 우수한 인재를 배출해 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도요타가 내걸고 있는 자본의 논리는 '주주의 이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주회사 설립으로 공동체의 '헌법' 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도요타 그룹 경영진들은
앞으로 도요타 가문의 인재에 의지하지 않고 공동체 의식의 영속을 도모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 이질문화 흡수 경영 : 좋은 것은 흡수해 도요타式으로 변형
일본식 경영의 대표적 존재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도요타는 사실 물밑에서 최신 경영기법을 탐욕스럽게
흡수하고 있다. 원래 도요타에는 '일본식 경영'과 '구미식 경영'의 명확한 구별이 없었다. 美 펜실베니아
대학의 존 폴 맥더피 교수는 '도요타가 갖고 있는 것은 도요타式 경영뿐'이라고 분석한다.
실제로 여기저기서 구미식 경영을 흡수한 사례들을 볼 수 있다. 최신 경영지표로서 전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경제부가가치(EVA)도 그 중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방면에서 한발 앞서가고 있는 소니도 99년부터 이를
본격 도입하는 등 EVA는 일본에서도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도요타는 이미 3년전부터 투자판단을
위한 지표로 EVA를 이용하고 있다.
뛰어난 경쟁력을 갖고 있는 생산시스템 분야에서도 도요타는 세계 최강이라는 평가에 안주하지 않고 이질적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얼마 전에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미국의 명문 벤처기업 맥스저 테크놀로지社에게
생산공정의 개선 가능성 조사를 의뢰한 바 있다.
이질적 문화의 수용은 사실 도요타의 오랜 특기다. 도요타의 생산시스템이 2차대전 이전 美 포드의 방식을
흉내내는 데서 시작됐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지만, 도요타의 창업자인 도요타 기이치로가 애독했던 책이 포드
창업자인 헨리 포드가 저술한 '마이 라이프 앤 워크'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때 '기술의 닛산', '판매의 도요타'라는 평가가 있었던 것처럼 도요타는 기술자 확보 등에서 오랫동안
후진기업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지 못했다. 우수한 학생들은 긴자(銀座)에 본사를 둔 닛산자동차에 지원했으며,
중앙관료들은 같은 도쿄대학 출신들이 많이 모여있는 닛산에 기꺼이 정보를 제공했다. 이같은 갭을 메우기 위해
도요타 기이치로는 외부 인재의 등용과 사원의 해외유학을 추진해 '이질적 문화'로 핸디캡을 만회하려 했던 것이다.
도요타는 이질적 존재를 받아들이는 데 충분한 시간을 들이고 있다.
면밀히 관찰하고 준비한 후에야 이를 수용하는데, 그것은 이질적 존재를 도요타式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그룹
창시자이며 발명왕인 도요타 사키치는 '발명일기'에서 이 '침울지둔(沈鬱遲鈍)'의 철학을 설파했고 아들인
기이치로가 이를 이어받았다.
그 전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통신사업분야에서는 NTT의 대항세력 결집을 위해 15년이라는 시간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도요타도 정보통신 등 신규사업의 확대를 지향하고 있는 이상 인터넷 시대의 '지둔(遲鈍)'은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 합리편집증 경영 : 전사원이 문제해결 중독증
부사장인 이케부치 고스케(池 浩介)가 '도요타의 코어 컨피턴스'라고 단언하는 생산방식은 이제 생산부문에서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됐다. 그러나 99년 가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이 발행하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게재된
도요타생산방식에 관한 연구논문에는 '지금까지 도요타 생산방식을 채용하려 했던 기업은 많았다. 그러나 그
도입에 성공한 기업은 거의 없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자동차 메이커의 생산방식 연구부문의 일인자인 도쿄대학 경제학부의 후지모토 다카히로(藤本隆宏) 교수는
도요타 생산방식의 지도자로부터 '도요타 생산방식의 강점은 무엇인가. 초급자는 재고가 적다는 점을 꼽는다.
중급자는 문제를 찾아내 생산성 향상 및 품질향상을 강제하는 메커니즘을 지적한다. 그러나 상급자들은 문제를
찾아내 해결하는 작업을 거듭하는 동안 문제가 없는 상황에 불안을 느껴 모든 직원이 열심히 문제를 찾기
시작한다는 점이라고 얘기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후지모토 교수는 '수만명의 사원들이 이른바 문제해결
중독증에 걸려있는 상태라는 점이 바로 도요타의 장점'이라고 말한다.
도요타 생산방식은 생산부문의 효율화 뿐만 아니라 판매, 개발 등과 같은 여러 부문의 효율화에도 이용되고
있다. 96년 1월에는 유통과 판매부문의 생산성을 높이고 리드타임을 단축하기 위해 국내 영업부문 안에 업무개선
지원실이라는 부서가 발족됐다. 업무개선 지원실은 우선 중고차 부문의 현금흐름을 효율화하기 위해 딜러들이
인수한 중고차에 대한 정보를 정보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딜러들에게도 공개했다. 이것이 발전해 신규 자동차와
중고차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제공하는 'Gazoo'로 이어졌던 것이다.
신차개발기간 13개월. 지난 2월 시판된 소형 왜건형 자동차 'bB'가 달성한 경이적 기록이다. 그 비밀은 개발부문에
도입한 새로운 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설계부서를 중심으로 생산기술, 구매, 부품 메이커의 기술자 약 50명이
한 컴퓨터에 저장된 설계도면을 보면서 공동설계를 추진해 도면의 완성도를 높였다.
도요타 생산방식은 공정 과정에서 품질을 높임으로써 불량품 발생률의 억제를 지향한다. 위의 설계작업은 이러한
생산방식을 개발부문에 적용한 것이다. 그 결과 bB 시험제작 차를 만들지 않고 컴퓨터 상에서 모든 설계가 끝났다.
개발기간을 단축할 수 있었던 것은 최초 개발 단계에서 완성도 높은 도면을 만들자는 발상의 힘이었다.
이처럼 도요타 생산방식은 경영효율화를 위한 방법으로 사내 각 부문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생산부문에서 나타난 것처럼 도요타만의 강점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사원들의 편집광적인 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업분야가 글로벌하게 또는 주변분야로 확산되면서 도요타의 인재들도 필연적으로 다양화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집광적인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지 여부가 관건이다. 도요타 생산시스템이 '도요타 경영시스템'으로
승화될 수 있을지 여부는 어디까지나 '사람'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 인간중심 경영 :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난다
美 켄터키州에 위치한 도요타 서플라이어 서포트 센터(TSSC)에는 경영자문을 구하는 미국인 경영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오고 있다. 여기는 美日 자동차 마찰이 종식되던 지난 92년 도요타측이 미국에서 自社의
생산방식을 보급시키기 위해 개설한 곳이다.
센터의 장을 맡고 있는 오바 히로시(大庭元) 도요타 모터 매뉴팩처링 노스 아메리카社 부사장은 '도요타
프로덕션 시스템(TPS)을 배우기 전에 공장의 생산효율이 올라 잉여인원이 생기더라도 결코 인원감축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달라'고 강조한다. '성공적인 도입을 위해서는 TPS를 단순한 생산성 향상 시스템이 아닌 사람을
육성하고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체계적인 철학으로 생각해 달라'는 것이 그의 얘기다.
'작업은 누구나 똑같은 동작으로 가능하도록 철저하게 평준화하라', '작업 시점에서 품질을 확인해 불량품이
다음 공정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고 불량품이 나오면 라인을 세워 다시 만들라'는 오바 부사장은 '작업 개선의
기회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다면 작업자의 의욕은 크게 높아진다. 자발적으로 보다 좋은 제품을 추구하는 인재가
많은 회사는 강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의 발언은 자동차 업계의 일본대표로서 외국자본의 공세에도 흔들리지 않는 도요타의 비밀을 상징하는 것이다.
앞에서 얘기한 위기감의 전승, 혈연공동체 의식에 가까운 팀워크, 외부의 새로운 생각들을 흡수하려는 열의,
편집광적인 합리화 노력 등은 사람을 지키고 키우고 활용함으로써 완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요타 본사에는 이런 철학을 그룹 전체에 보급시키기 위한 '생산조사부'라는 조직이 있다. 이 'TPS敎의 총본산'을
만든 주인공은 도요타 자동차 공업의 전임 부사장인 오노(大野耐一)다. 현재 도요타자동차 사장인 조 후지오도
오노 전임 부사장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직계 제자다.
도요타 상점의 문을 연 1895년부터 헤아리면 도요타는 이미 100년이 넘은 기업이다. 현존하는 일본 국내의
100년 기업 중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이 된 곳은 도요타뿐이다.
그 도요타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도요타 특히 현장 직원들 사이에는 근면·성실이라는 고색창연한 개념을 미덕으로 삼는 정신이 남아 있다.
이 일본적인 정신은 도요타의 해외 현지법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근면·성실이라는 기질은 일본인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통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고 있다.
기업은 도구에 불과하며 이것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다. 사원 하나하나가 근면과 성실을 지향하면 기업은
강해지고 영속도 가능해진다. 100년 기업은 경영진과 사원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실현할 수 있는 세계인 것이다.
◆ 수정일자 : 2001. 10. 30
◆ 자료출처 : 1. 수입자동차 모터쇼 자료(http://www.importcar.co.kr)
2. 日經비즈니스(日) 2000.04.10
3. 기타 웹검색 자료
B.본문
앞에서 도요타의 2004년 신년 대담,조 후지오 사장,도요타 자동차의 연혁,도요타 경영의
특징등을 다른 사료들을 열거 너무나 간략히 알아 보았다.그렇다면 들어가는말에서 인용된것이 도요타
자동차와 기업에 대해 일반적인 이해가 될것이다.본문에선 구체적인 사료들을 모아서 펼쳐봐야
일본이 자랑하는 도요타의 실체를 파악할수 있슬것 같아 그 내용의 분석은 빼고 간추려 보도록한다.
도요타의 전략과 그 하부 노조간의 이해를 돕기 위해 편견없시 내용들을 가져왔다.도요타의
모습을 정확히 파악키 위해선 일본에 가야 하겠지만 많은 자료들을 모아 다시 보는것도 좋을
듯 싶어 일례를 하나씩 가져오기로 하였다. 기본적인것은 사측과 노측의 것을 원본에 입각
비교하는것도 좋을것 같아서 참고로하였다.년도별 전략과 성과 목표가 틀릴수있고 과거와 현재의 평가는
다를수 있다는데 그 촛점을 두고 기업의 사회공헌이냐,기업의 이익 창출이냐는 앞으로 우리가
많이 고민하고 고쳐나갈 부분일것이다. 일본적인것이 가장 좋은것인지는 우리 모두 다시 생각할
분명하고도 극명한 과제인것이다.
B-1.도요타 자동차의 국제화 전략
B-1-1. 80년대 도요타의 해외 시장별 판매, 서비스 강화방안
1. 북미
1) 기본목표 : 연간 100만대 판매체제 구축
2) 주요내용
a. 달러지원 : 81년 수주, 발주, 경리업무 등 업무를 지원할 수 있는 컴퓨터 네트워크를 전미
1000점에 도입
b. 판매금융체제 : 84년 Toyota Motor Credit사를 설립하여 판매금융체제강화
c. 소비자 서비스 : 85년부터 우수딜러 표창제도, 보수서비스 향상, 크레임 신속처리를 위 한
캠페인 실시
2. 유럽
1) 기본목표 : 일본차 1위 달성
2) 주요내용
a. 딜러망 강화 : 82년 딜러대회 개최, 85년 마케팅대회 개최
b. 판매지원 : 유럽 판매금융회사 설립(네덜란드, 영국, 독일)
3. 호주
1) 기본목표 : 연 15만대 생산체제 구축
2) 주요내용
a. 82년 현지 판매금융회사 설립
b. 국산화추진을 지원하기 위해 엔진부품 생산확대
4. 아시아
1) 기본목표 : 국산화 규제 대응
2) 주요내용
a. 태국 : 82년부터 하이럭스용 데젤엔진의 국산화 추진
b. 인도네시아 : 83년 상용차엔진 생산을 위해 자회사 설립
c. 말레이시아 : 82년 현지자본과의 합작사업 시작
5. 기타
: 브라질, 페루, 코스타리카, 우루과이 드에 KD거점 운영, 81년 중남미 지역 딜러 대회 개최,
남아공에서는 딜러지도체제 강화로 시장점유율 1위 유지
B-2. 도요타 자동차의 해외 전략 변화
B-2-1. 전략 변화 요인
80년대 중반까지 도요타의 해외사업은 판매사업의 일환으로서 현지생산사업이라하더라도 해당국의
규제에 대응하는 KD거점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의 환경변화는 과거의 해외전략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도요타의 해외 전략에 변화를 가져온 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85년 플라자 합의에 의해 급격히 진행된 엔고의 영향이다. 도요타 성장을 살펴보면 도요타가
강한 국제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미 수출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환경변화에 따른 기복을
보이고 있다. 도요타 차의 수출은 85년 198만대를 최대치로 89년에는 167만대로 감소하였다.
이는 엔고에 의한 가격경쟁력의 상대적 하락이 주요인이었다. 대미 달러의 엔화가치는 85.2~88.11
간 113%나 급속히 절상되어 수익성이 크게 악화되었다.
둘째, 일본의 대미, 대유럽간 무역불균형 문제가 제기되었다. 기타 일본메이커와 같이 도요타도
그룹전체를 동원하여 엔고에 따른 코스트 부담을 흡수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80년대 말에
일본의 대미, 대유럽간 무역불균형이 국제간 교섭대상으로 부각되었다. 미,일간 무역불균형은
VER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대미 완성차 수출을 감소시킬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92년 EC통합을 앞두고 일본차의 대유럽수출, 더욱이 역내생산에도 어려운 조건이 부과될 움직임도
있었다.
셋째, 일본의 인력부족 문제는 타메이커보다 도요타에게 심한 영향을 주었다. 즉, 전반적인
인력부족 상황에서 도요타는 지역집중체제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불리했다. 80년대
후반 일본 자동차 시장은 복수보유현상과 세제개혁에 따른 중대형화로 수요가 호조세를 보였다.
그러나 도요타는 수출감소분을 국내판매로 전환해도 공급이 부족하여 88년, 89년에는 시장점유율이
떨어지는 결과가 나타났다. 인력부족은 이미 만성적인 것이 되었고, 90년초에는 국내 타지역에
신공장 건설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B-2-2. 해외사업의 근본적인 변화
80년대 후반의 환경변화에 따라 도요타는 기존의 해외사업에 대한 원칙을 근본적으로 전환하였다.
도요타의 환경인식과 전략상의 변화를 추측할 수 있는 포인트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근본적으로 수출환경이 악화되고 있어 기존처럼 해외사업을 유지한다면 가까운 장래에
도요타가 세계시장에서 성장할 수 없게 될 위험성이 높아지고 있다. 둘째, 아시아, 북미, 유럽
등에 생산거점을 구축하여 세계 각 시장의 공급체제를 다양화하고 융통성 있게 만들 필요가 있다.
셋째, 각 생산거점의 품질을 일본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생산방식을 이전할 필요가 있다.
계열부품업체의 진출을 촉진하고, 현지 부품메이커와의 제휴 등 주변환경을 정비하여,
도요타방식을 기초로 한 현지화를 추진해야 한다.
B-2-3. 해외생산체제 구축 계획
도요타는 해외 전략의 근본적인 전환에 따라 해외 현지생산체제를 크게 강화해 왔다. 국내
생산체제는 지역집중형에서 탈피하여 92년 큐슈와 홋카이도에 신공장을 가동했다. 그러나
근로시간의 단축, 생산 차종의 조정에 의해 국내에서는 400만대 생산체제가 계속 유지될 전망이다.
반면에 해외생산체제는 북미, 유럽, 아시아지역의 진출을 확대하여 200만대 체제를 구축할 계획이다.
95년 현재 생산능력을 확장하려고 하는 지역은 북미지역과 아시아지역이다. 특히 아시아지역은
최근까지 각국의 국산화규제에 대응하여 KD조립을 기본으로 하였다. 그러나 89년 이후 태국과
인도네시아를 주축으로 생산시설을 확장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TUV(Asia Utility)와
5K엔진을, 태국에서는 하이럭스 공급거점으로 육성하고 있다. 특히 태국은 생산규모를 확대하면서
일본으로부터의 생산이전과 일본을 포함한 제3국 수출도 계획하고 있다. 도요타는 아시아에서는
미쓰비시에 비해 후발업체지만 가장 급속히 생산체제 확장을 서두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새로운 생산거점으로는 현재 중국을 모색하고 있다. 중국으로의 진출은 15만~20만대 생산규모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에는 그룹사인 다이하즈가 천진기차에 기술제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타메이커보다는 중국진출에 유리한 입장이다.
B-3. 도요타 자동차의 국제화 전략
B-3-1. 세계시장 제품전략
과거 도요타의 해외 전략은 모델정책에 있어 일본 국내 시장이 기본이 되어왔다. 즉, 토요타 차는
항상 '만인형 모델'로서 세계시장에 적합한 보편성을 갖는 것을 중시해왔다. 그러나 경쟁이
전세계적 수준에서 격화됨에 따라 이러한 제품정책은 '스타일의 단조화'나 '몰개성'이라는 병폐가
생기고, 소지자의 개성화, 다양화 욕구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90년대 들어와
도요타는 현지 사정에 맞추어 각 모델에 역할을 부여하고, 그 역할에 대응하여 어디서 생산하고,
어디서 판매하는가,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를 결정하고 있다.
도요타의 새로운 세계전략을 승용차 모델 측면에서 분석하면 향후 완성차 수출차종, 선진국
현지생산차종, 개도국 CKD 조립차종이 각각 독자적인 역할을 갖고 있다.
차종 결정의 핵심은 수요의 성장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즉, 수요가 확대되는 시장과 차종을
중심으로 생산차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북미시장에서는 가장 생산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중형(Compact), 특히 4도어 세단을 현지생산하고 있다. 북미시장에서 아직 카롤라 등
소형(Subcompact)의 판매비중이 높지만, 90년대 성장차급을 중형으로 예상하고 있다. TMM에서
캄리를 생산하고 있고, TMMC에서도 현재 카롤라에서 캄리로 바꾸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유럽시장에서는 성장률이 높은 차급을 Segment C(Golf/Jetta, Peugeot 405급)로 판단하고 있다.
이 시장은 유럽의 각 양산업체들도 제품개발에 주력하는 시장으로 도요타는 코로나의 파생차종을
투입할 계획이다.
B-3-2. 생산거점간 상호보완체제
도요타의 주요 생산거점은 미국(TMM, NUMMI), 캐나다(TMMC), 영국(TMUK), 호주(TMCA), 태국(TMT),
인도네시아(TAM) 등이다. 도요타는 생산거점의 생산효율을 높이기 위해 거점간 네트워크 구축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미국과의 통상마찰을 해소하기 위해 일본차에 대한 수입을 제한하고 있는
대만으로의 수출과 일본으로의 역수입을 확대할 계획이다.
미국 TMM에서는 캄리 왜건을 일본과 유럽으로, 캄리 세단을 대만으로 수출하고 있다. 93년 미국제
승용차의 수출 실적을 보면 카롤라가 2만 7천대, 캄리가 2만 2천대에 이르고 있다. 향후에는
미국에서 생산할 Avalon(캄리 파생차)를 일본과 대만으로 수출할 계획이다. 영국에서는
Cardina E(코로나 파생차)의 수출도 계획하고 있다. 호주로부터는 캄리 세단을, 태국, 뉴질랜드,
말레이시아 등으로 수출하고 있어 호주는 아시아의 새로운 생산기지로 발전하고 있다. 한편,
아시아에서는 97년부터 아시아전용 소형차를 태국과 대만에서 생산하여 동남아시아와 중동으로
수출할 계획이다.
GM과 포드가 유럽에서 취하고 있는 풀라인 생산체제와는 달리 도요타는 거점간 네트워크를 통하여
각 지역에 풀라인으로 공급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일본메이커중에서 일본, 북미, 유럽
등 각 성격이 다른 시장에 대응한 제품을 개발, 투입할 수 있는 업체는 사실상 도요타, 닛산,
혼다에 불과하다. 도요타는 현지진출에는 늦었지만 닛산, 혼다에 앞서 생산 측면에서 네트워크화를
구축함으로써 경쟁업체보다 앞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완성차뿐만 아니라 도요타는 주요 부품의 상호보와 네트워크를 아시아지역을 중심으로 강화하고
있다. 아시아시장은 각국별로 보면 아직은 시장이 협소하지만 최근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아시아
각국이 BBC(부품상호보완협정)에 의해 역내 부품의 수출시 관세감면과 역내에서 국산 부품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부품산업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가솔린 엔진과 금형을,
말레이시아에서는 스티어링 기어를, 필리핀에서는 트랜스미션을 각각 특화생산하고 있다. 아시아
역내의 완성차 및 부품의 유통에는 각국의 이해대립의 문제가 있다. 도요타는 일본국내시장을
대립의 해결수단으로 제공하면서 아시아시장을 통합하려 하고 있다. 즉, 한 지역에서는
불가능하지만, BBC를 활용하여 아시아 전체 및 도요타의 국내외 생산거점간 수출을 통해서 일정한
생산규모를 확보한다는 전략이다.
B-3-3. 경쟁사간 네트워크
1. GM과의 제휴
84년 미국 GM과의 합작회사 NUMMI가 경영성과 측면이나 미국과 일본과의 무역마찰해소 측면에서
긍정적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면서 도요타는 자동차 최대업체인 GM과의 제휴를 강화하고 있다.
즉, NUMMI의 실험이 세계적인 업체간의 경쟁으로부터 협조로, 미, 일 상호 신뢰관계의 촉진제
역할을 한 셈이다.
88년에 도요타는 호주정부의 '신자동차정책'에 대응하기 위해서 미국에 이어 호주에도 GM과
50%씩 출자에 의해 합작회사 UAAI(United Australian Automotive Industries Ltd.)를 설립하였다.
UAAI는 호주의 승용차 생산, 판매 등에 있어서 합작사업을 총괄하는 특수회사로 도요타계 회사인
TMCA(Toyota Motor Automotive Ltd.)와 GM계 회사인 GMHA(GM-Holden's Automotive Ltd.)에 각각
51%, 30%를 출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합작회사 설립에 의해 기존시설을 이용하면서 자사 승용차를 상호 보완할 수 있게
되었다. 생산모델은 카롤라, 캄리, 코모도어등 3종류로 도요타측은 카롤라와 캄리를, GM측은
카롤라와 코모도어를 각각 분담하고 있다. 현지 생산차종은 양사 각 상표로 판매되고 있다.
2. VW와의 제휴
89년부터 독일 VW사의 하노버 공장에서 도요타의 픽업트럭 '하이럭스'를 89년 7500대, 90년 이후
연간 1만 5천대씩 공동생산하기로 하였다. 주요 합의 내용은 첫째, VW는 하이럭스를 자국내
라이센스 생산하는 한편 도요타를 통해 위탁생산한다. 둘째, 도요타는 하이럭스 생산에 필요한
기술을 제공하고, 부품을 공급한다. 셋째, 현지조달부품은 VW의 내제부품을 포함하여 가능한 한
초기년도에 50%를 지향한다. 이 계약에 따라 VW가 자사 브랜드 VW TARO로 1만대를 독일에,
5천대를 유럽지역에 판매하고 있다. 또한 연간 5천대분을 도요타가 OEM생산하여 유럽전역의
VW판매망을 이용해 판매하고 있다. 도요타자동차가 타메이커에 자사의 완성차를 공급하기는
이것이 처음으로 유럽지역의 판매강화를 위한 전략적 제휴의 전형적인 예이다.
향후 도요타와 VW는 동유럽 자동차 수요를 예상하고 독일에서 소형트럭의 공동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생산라인을 현재 연 1만 5천대에서 2~3년 후에는 3만 대로 배증시켜 증가분을
동유럽으로 수출할 방침이다. 도요타는 영국의 승용차 생산거점과 함께 VW와의 제휴로 유럽에서
상용차생산을 확대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3. 르노와의 제휴
도요타는 92년부터 미쓰이물산(지분 7.5%)과 함께 프랑스 르노의 콜롬비아 현지법인 'SOFASA'에
자본참가(17.5%)하여 랜드크루저와 하이럭스를 생산하고 있다. 도요타와 르노의 합작사업은 이
것이 처음으로 일부 인접국으로 수출하고 있다.
남미에서 르노와의 합작은 콜롬비아정부가 88년에 자동차 국산화 정책을 발표하고, 자동차수입을
금지함에 따라 중남미지역에서의 현지생산을 확충하기 위한 것이다. 93년 생산대수는 6228대로
양사는 중남미지역의 경제통합에 따라 생산거점으로서의 역할을 강화할 방침이다.
C.도요타의 '신일본적 경영'과 민주적 규제에 대한 97년 노동보고서
- 현장·지역에서의 새로운 변화와 도요타 총행동 -
사사키 쇼죠(佐佐木昭三) / 노동자교육협회 상임이사 (97년 김혜란 번역본)
이 글에서는 다국적 기업 도요타자동차가 전개하고 있는 최근의 '신일본적' 경영전략과
그것으로 인 해 크게 변한 직장 실태와 노동자 투쟁 및 도요타에 대한 민주적 규제운동으로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 는 '도요타 총행동'에 대해 소개한다. 도요타의 고수익과 그 내용
도요타자동차는 97년 5월 21일, 1997년 3월 기결산을 발표했다. 매상고는 전기 대비 14.4%
증가 한 9조1,047억엔, 경영수익은 전기 대비 82.1% 증가한 6,204억1,200만엔이다. 경영이익은
과거 3 차례 경험한 고수준으로 일본기업에서 9년 연속 1위이다. 본업의 이익을 보여주는 영업이익은
전기대 비 2.2배 증가한 5,170억5,800만엔이다. 마찬가지로 관련된 자회사 230개사(국내 123,
해외 108)와 특별주식분배법 적용회사 59개사(국내 43, 해외 18)를 포함한 연결결산도 매상고가
전기에 비해 14.2% 증가한 12조2,438억엔으로, 83년 연결결산 개시이래 최고를 기록했다. 경영이익은
68.3%증 가한 7,082억9,900만엔, 당기이익은 50.2% 증가한 3,859억1,500만엔으로 크게 증가했다.
이 고수익의 요인은 우선, 엔저(円低)로 이 기간의 환율이 평균 1달러=112엔으로 전기에 비해 엔 화
시세가 16엔 낮아져, 약 2,400억엔의 이익이 증가하였고, 이것이 영업수익을 대폭적으로 끌어 올렸다.
도요타에서는 엔화시세가 1엔 낮아지면 150억엔의 이익을 보고, 1엔의 엔고는 100억엔의 손해로 된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노동자·하청·지역주민을 희생으로 한 구조조정에 의한 '합리화'로 약 1,100억엔의
'합리화' 효과가 수익폭을 확대했다.
[97 아이치(愛知) 빅토리맵(Victory Map)]으로 본 도요타의 고수익
엔저와 구조조정을 통한 '합리화'를 요인으로 한 도요타 고수익의 실태를, 본인도 편집에 관여하고
있는 [97 아이치 빅토리맵]에서 보면, 그 내용이 분명해 진다.
내부유보는 4조4,692억8,100만엔이고, 그 중 별도의 임의적립금만 3조4,580억엔으로 초우량경영이다.
노동자 1인 당 내부유보액은 6,511만엔에 달하고, 전노련, 춘투공투의 임금인상 요구기준인 3 만
5,000엔(일시금은 6개월)을 수용한다 해도 그에 의해 잠식되는 비율은 불과 0.97%밖에 되지 않는다.
또 대기업·대자산가에 대한 다양한 세금우대조치에 의해 도요타가 감면받고 있는 세금만도 법인세
2,737억 6,000만엔, 법인사업세 963억6,000만엔, 법인주민세 566억7,000만엔으로 도합 4,267억
9,000만엔에 이른다.
여기서 도요타 경영자의 연간수입을 보면 회장인 도요타(豊田章一郞) 씨는 5억6,597만엔으로 이것은
도요타 노동자 평균임금(36세, 년수입 767만엔)의 73.8배에 달한다. 도요타 임원 8인의 연수입도
합계 12억5,928만엔으로 1인 평균 1억5,741만엔의 고액소득이다.
이전의 1달러=80엔에서도 고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구조조정에 의한 '합리화', 비용절감, 원가절감에
어쩔 수 없이 협력해 왔던 노동자와 관련 하청기업 및 하청업자의 고통과는 반대로 엔저와 '합리화' 에
의해 도요타는 막대한 고수익을 얻었다.
또 빅토리맵에서도 인원감축의 실태를 조사했지만, 도요타는 아이치에서 상당한 인원감축을 해왔다.
93년부터 96년까지 매년 감축된 인원을 보면, 93년∼94년 1,473명, 94∼95년 1,825명, 95∼96년
1,107명 도합 4,405명(90년부터는 6,619명)으로 아이치현에서 인원을 감축시킨 기업 가운데 단연
톱이다(2위는 브라더 판매의 2,081명).
도요타의 [비전 2005]와 21세기 전략
인원감축을 대규모로 추진했던 93년부터 해외진출과 역수입(逆輸入)이 증대했다. 도요타는 세계 24
개국 34개 공장에서 생산을 하고 있다. 도요타는 95년 '일미자동차구조협의'에 근거하여 북미에서의
생산·판매확대와, 아시아를 중요한 대상으로 한 '신국제경영계획(신국제비지니스플랜)'을 발표했다.
그 결과 북미와 아시아에서의 해외생산 속도가 빨라졌다. 그래서 직장에서는 93년 3월부터
'다카오카 공장은 부품공장으로 되는가?'(주력 카로라는 북미와 캐나다의 현지생산으로 이행)는
말이 나왔다.
또 도요타는 '국제경쟁력을 갖고 어떻게든 이기기' 위해 전차종별, 전부품별 비용절감과 원가절감을
집요하게 반복하여 행하고 있다. 자동차는 평균 20%, 부품은 40%의 비용을 삭감하려 하고 있다. 이것을
받아들인 도요타 그룹은 하청에 10%의 비용절감을 강요했다. 하청은 이 3년 사이 24%의 단가 를 절감했다.
그것 때문에 하청수익이 악화되고, 경영이 곤란해져 전업이나 폐업이 계속되었다.
도요타는 경영단체연합의 [기업행동헌장] 개정(96년 12월)을 받아들여, 92년의 기본이념을 [개정]
<자료1 참조>하고, 그것을 염두에 둔 [비전 2005], [하모니어스 그로스(조화로운 전체)]를 발표했다.
<자료 1> 도요타 기본이념
(1) 내외의 법 및 그 정신을 준수하고, 기업공개로 공명정대한 기업활동 을 통해 국제사회로부터
신뢰받는 기업시민이 된다.
(2) 각국, 각지역의 문화·관습을 존중하고, 지역에 근거한 기업활동을 통해 경제·사회의 발전에
공헌한다.
(3) 깨끗하고 안전한 상품의 공급을 사명으로, 모든 기업활동을 살기 좋 은 지구와 풍요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에 몰두한다.
(4) 다양한 분야에서의 최첨단 기술의 연구와 개발에 노력하고, 세계의 다양한 요청에 부응한
매력있는 상품·서비스를 제공한다.
(5) 노사 상호신뢰와 책임을 기본으로 개인의 창조력과 팀웍을 강화하여 최대한 높은 기업풍토를
만든다.
(6) 글로벌한 혁신적 경영으로 사회와 조화로운 성장을 이룬다.
(7) 열려있는 거래관계를 기본으로 상호연구와 창조에 노력하고, 장기적 으로 안정적인 성장과
공존공영을 실현한다.
(97년 4월 1일 개정)
이것은 도요타가 다국적기업으로서 국제경쟁에서 계속 승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생산거점의 해외이전,
세계 최적지 생산·조달, 해외부품조달의 확대, 역수입의 확대, 국내생산분산화, 복합(다각)경영의 추진
등으로 산업공동화를 추진한다는 것으로, 노동자와 하청, 지역주민, 도민에게 말할 수 없는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 핵심은 도요타 오쿠다(奧田) 사장의 '97년 연두교시(기간직 사외비)'와
'97년도 회사방침' '노무 뉴스'를 보면 잘 나타나 있는데, '신국제경영계획'을 포함해서,
'상품기획력의 강화' '기술개발력의 핵심 강화' '국내 시장점유율의 만회' '해외진출의 속도강화'
'신규사업의 개발·육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것을 [도요타의 구조개혁]이라고 하고 있다.
이 [구조개혁]에서는 도요타 창립 60주년을 맞이한 올해부터 10년을 '제2의 창업기'로 선언하고,
'이 10년이 도요타가 21세기에도 성장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가늠하는 기로'라고 하면서 종업원에게
다음을 요구하고 있다.
첫째 '국제 적인 관점에서 고찰하고 행동해서 사업을 지구규모'로 성장시키자,
둘 째 '개개인이 창조성을 발휘해서 일 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현상을 타파' 하자,
셋째 '경영환경 의 격변에 민첩하게 행동하고, 변 화의 조짐을 기민하게 관찰하여 재 빠르게 대응' 하자.
그리고 이것을 위해 대규모의 '조직개 혁'과 '신인사제도'를 추진했다. 또 한 도요타의 세계전략
수행을 위해 '개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시키' 고자 '기업내 교육'을 중시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국내생산 300만대 + α로 국내에서 250만대를 확보(96년의 생산대수는 341만대)하 고,
국내판매 점유율을 40%(96년 39.7%)로 하여 나머지를 수출분(96년 127만대)으로 세계 글로벌
10(자동차생산·판매에서 세계의 10%, 600만대)을 목표로 한다' 그러기 위해 '해외생산으로 확대한
부분은 해외생산에서 조달한다'는 것이었다.
도요타는 이 21세기 전략을 추진하기 위해 연합도요타노조와 96년 1월 [신노사선언]을 체결했다.
이것은 62년에 맺은 [노사공동선언]을 재평가하고, 도요타의 21세기 전략을 노사 일심동체로 전개하기
위함이었다.
아이치현 경제의 공동화(空洞化)와 도요타
중부통산국(동해 3현과 후지산, 이시카와현)의 광공업생산지수를 보면, 제조업에서 자동차관련 비율은
약 25%이고, 자동차관련 부품생산을 하고 있는 철강, 기계, 전기, 플라스틱 등을 포함하면 '자동 차'
비중은 대단히 높아 아이치현에서는 초특화되어 있다. 또 도요타 그룹은 중부전기 전체의 전력계
약 중 7%를 차지하고 있으며, 동방가스의 공업용 가스는 40%로 에너지 점유비율도 굉장히 높다.
일본은행의 경제관측에서도 도요타가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히 크다고 지적하고 있다. 지방자치
체의 세금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큰데, 아이치현 세무과에 의하면 법인사업세는 96년도
예산 3,554억엔 가운데 도요타 관련 10개사가 17.6%를 차지하고 있어서 그 영향이 대단히 크다고 말한다.
아이치현 상공금융과에 의하면 91년과 94년을 비교해 볼 때, 도요타자동차의 생산대수는 수출의 감소와
해외생산의 증대로 100만대 감소했는데 이것이 공업제조의 부가가치를 1조3,000억엔(12조 7,000억엔에서
11조4,000억엔으로 하락) 감소시킨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 수치는 하나의 업종이 사 라진(섬유는 8,000억엔)
것과 맞먹을 정도의 심각한 것으로 산업이 공동화되어 고용과 하청, 관련기 업의 경영악화, 지역경제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심각해지고 있는 도요타 노동자의 직장실태
현장의 노동자는 구조조정 '합리화'로 수입이 대폭 감소되고, 임금이 억제되어 힘든 생활이 계속되고 있다.
다카오카공장의 카로라 라인에서는 생산조정 때문에 연속2교대제가 1조 주간근무로만 되어 잔업도 거의
없어졌다. 교대근무수당, 심야할증수당, 잔업수당이 감소되어 10만∼20만엔의 수입이 줄었 고, 이러한
상태는 2년째 계속되고 있다.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급료명세서는 기준임금과 아주 약간의 잔업뿐인
벌거숭이 임금이다', '자녀도 18세로 되어 가족수당도 중단되었다', '매월 5∼6만엔이 절대적 으로
부족하다', '매월 저금을 찾아서 생활한다', '아내도 마침내 파트타임으로 되었다' '아내는 아이치 현이나
나고야시의 직원으로 함께 일하고 있지만 총지급액이 내 것을 상회한다', '일본 제일의 이익이 노동자와는
무관하다'는 목소리가 잇달아 나오고 있다. 생산부문에서 32년 동안 계속되어온 주야2교대 가 95년 5월부터
일제히 변경되어, 모든 회사가 연속2교대 근무제로 되었다.<자료 2> 이 제도의 도입 으로 2만6,000명이
새로운 근무에 들어갔고, 도요타는 심야할증수당을 대폭 감소할 수 있게 되어 연 간 48억엔을 '절약'했다.
<자료 2> 도요타 자동차의 연속2교대제(95년 5월 실시) [도표 생략]
노동자는 졸음이 못 견디게 몰려오는 '마(魔)의 시간대(오전 3시부터 6시)' 근무가 없어져 심야·
잔업수당이 감소되었고, 신체리듬과 가정, 지역에서의 생활이 어지러워졌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건강·
가정·지역생활의 파괴라는 새로운 고통과 곤란에 직면해 있다. 이것은 노동자 자신은 물론 아내와 가족의
희생으로 연결되고 있다. 2조(늦은 조)의 작업은 원래 오전 1시에 종료되지만, 2∼3월에는 아이치현
화재의 영향을 만회하 고, 소비세 대책과 연말의 바쁜 생산으로 1∼1.5시간의 잔업이 계속됐었다. 게다가
휴일인 토요일까지 출근―2조 출근을 위해 일요일은 잠을 자야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휴일은 없다―하게되어
심각 한 영향이 나타났다. 2∼2시 30분에 일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면 3∼4시가 된다. 그 때부터 목욕이나
식사 때문에 아내는 반드시 일어나 있어야 한다. 밤을 새야만 아침식사를 준비할 수 있고, 수면시간이
줄어들어 불규칙하게 되었다. 그래서 몸이 좋지 않다고 호소하는 부인들이 많다. 노동자도 장시간 노 동과
밤늦은 식사, 수면을 위한 음주 때문에 건강이 안 좋다고 호소하고 있다. 2년에 걸친 연속2교대 근무로 몸이
그전보다 훨씬 나빠졌다는 노동자가 매우 많아 졌다. 또 1조(아침 조)는 오전 6시 30분 에 라인이 개시되기
때문에 6시에는 회사에 나가있어야만 한다. 집이 직장에서 좀 떨어져 있으면 5시 에 출발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4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부인이 식사를 준비하려면 3시에는 일어나 야 한다.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왜 이렇게 비인간적인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건강을 위해서도, 아내 나 가정,
또는 인간다운 생활을 위해서도 연속2교대 근무는 견딜 수 없다고 호소하고 있다.
노동자의 '유동화'도 격심하다. 다품종소량생산으로 기민하게 변한 생산계획 때문에 바쁜 라인에 대 한 지원,
배치전환, 출향이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노동자는 수입이 감소되었기 때문에 지원수 당(8만엔), 심야수당
·잔업수당(8만∼10만엔)이 들어오는 바쁜 라인으로 지원 가거나 배치전환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도요타의 생산방식은 '수입감소를 지렛대'로, 변동하는 생산계획에 노동자 를 대응시켜 필요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인간 간판방식'으로, 노동자를 언제 어느 곳으로도 '유동화'해 서 활용하고 있다.
금년 4월부터 실시하고 있는 기능직계(생산현장) 신인사제도에서는 직제의 조장에게 모순이 집중되 고 있다.
'조직 키우기'(고참기술자를 크게 묶어 줄인다)로 5,247명(95년)이던 조장 중에 50세 이상은 거의
SX(고참숙련가, 부하 없는 조장)로 되어, 고된 라인에 투입되었다. 지금까지 책상에서 하는 일 이 주였기
때문에 과밀한 생산라인에서 작업하는 것이 여간 고통이 클 뿐 아니라 그들의 자부심도 크 게 손상되고 있다.
부하가 있는 새로운 조장은 GL(그룹 리더)이라고 부르는 35∼40세의 젊은 중진이 다. 그들은 노동기준량과
성적을 올리기 위해 ― 이것이 임금과 승진, 승격에 반영된다 ― 극히 의욕 적으로 그룹을 끌고 나간다.
여기에 들어가게 되는 SX는 GL의 지시하에 되지도 않는 라인 작업을 젊 은 노동자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따라가야만 한다. 게다가 SX는 주요라인이 아니라 부차적인 라인이나 일인(一人)직장에 배치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오늘날의 도요타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핵심적으로 일 해왔던 3,000명에 가까운 '부하 없는 조장'
SX(노조임원 중심이었던)를 인원감축의 대상으로 삼고 있 는 것이다.
현재 SX는 이러한 도요타의 방식에 대해 '회사가 싫다', '우리를 뭐로 생각하는 것이냐', '회사도 가혹하지만
도요타노동조합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며 분노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런데도 [워킹 프로그램]에서는
직제는 55세가 정년이지만 60세까지 라인에서 일할 수 있도록 '스스로의 노력으로 건강과 육체를 유지'
시키자고 말하고 있어서 '체력과 기력면에서 힘들어'진 중고령층 노동자는 생산라인에서 일하지 못하고,
직장을 사직해야 할 상황이 되고 있다.
93년 연말 일시금 감액저지투쟁에서 시작된 현장의 새로운 변화
도요타의 구조조정 '합리화'는 현장 노동자의 엄청난 희생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리고 그 가운데 도 요타
노동자는 큰 변화를 일으켰다. 그것은 93년 연말 일시금 감액반대투쟁에서부터 현저히 나타났다.
93년 춘투에서 연말 일시금은 연간협정으로 결정되었었다. 그런데 도요타는 기업의 수익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가을에 0.1개월치의 감액을 제안했다. 이것은 도요타에서 20억엔, 도요타 그룹에서는
40억엔으로 합계 60억엔을 노동자로부터 탈취해서 회사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도요 타의 투쟁적인
노동자는 즉각 '이것은 수입이 감소되어 고통스러운 생활실태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노 사가 이미 협정한것을
파기한다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인정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연합도요 타노조에 조합원으로서
'감액절대반대'를 끈질기게 제기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노동자의 '감액절대반대' 요구가 확산되도록 활동을
넓혀 나갔다. 또 애노련(愛勞連), 지역노련 등이 중심이 되어 노동기준국, 노동기준감독서, 자치체,
상공회의소, 도요타 등에 이의를 제기하고 지역에서 선전행동을 전개하는 등 공동투쟁을 확대해 나갔다.
그 때문에 매스컴도 '도요타의 방법은 문제가 있다'고 보도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장 노동자의 목소리와
사회적 여론에 의해 도요타 노조는 '감액절대반대'의 입장에서 현 장 서명운동과 집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노동자는 '거짓말쟁이는 도둑놈의 출발이다', '(이것이) 세계의 도요타가 보여주는 것인가',
'나도 허락하지 않지만 엄마는 더욱 분노하고 있다', '약속한 것은 지켜라!'고 외쳤다. 결국 압도적인 현장
노동자의 목소리와 사회적 여론에 밀려 도요타는 감액제안을 철회했다.
20억엔의 감소가 불가능해지자 도요타는 다음해인 94년 춘투에서 도요타노조에 최대한 자숙하는 춘투를
요구했다. 그에 대해 현장에서부터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요구를 결정하는 평의원회에서는 만장일치가
무너져 반대 26표, 유보 8표가 공공연히 나와 이례적인 결과가 발생했다. 그것도 본사나 동경본사
화이트칼라에서부터 일어난 반란이었다. 또, 현장집회나 블럭집회에서도 '자숙요구는 비정상 적이다'는
목소리가 확산되었다.
93년 연말 일시금 감액철회와 94년 자숙춘투요구에 대한 반란은 도요타의 민주적 규제를 추구해온 도요타
총행동에 대한 기대와 연대로 이어져, 도요타 노동자의 새로운 변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95년 연말 '일시금 감소저지'와 96년 도요타 오쿠다 사장의 '임금인상 동결거부'
일경련은 96년 춘투에서 '임금인상 동결' 방침을 결정했다. 그러나 도요타자동차의 오쿠다 사장은 같은 날
'일본에서 1, 2위의 이익을 올리고 있는 회사가 임금인상을 하지 않는다면 경제에 미칠 영향 이 어떨지
문제가 있어서 임금인상 동결은 곤란하다'고 부정했다.
그 배경에는 93년 '연말 일시금 감액제안'에 대해 감액을 단념시키고, 94년 '춘투자숙요구를 인정하 지 않았던'
흐름이 착실히 확대되어 왔던 사실이 있다. 도요타는 95년에 춘투에서 결정되었던 연말 일 시금을 재차
감액하고자 했었다. 노동자의 재빠른 운동과 지역공투로 '이 정도로 크게 변화한 '합리화' 에 협력해왔는데
일시금만 왜 감소되는가', '연간협정에서 결정된 것을 또 감소하겠다는 의도인가', '도 대체 회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라며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확대됐었다. 도요타가 제안을 철회 한 요인은 바로 현장
노동자의 '감액을 인정할 수 없다'는 목소리에 있었다.
그러나 한편 이것은 '신국제경영계획'(북미에서의 현지생산 확대와 미국의 자동차 부품수입 확대)과
도요타의 21세기 전략을 추진하기 위한 구조조정(산업공동화, 고용유동화, 종신고용 다시 생각하기,
능력·업적반영형 임금으로 전환하기 위한 철저한 인사·조직개혁)에 노동자를 협력시키고자 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즉, 노사일체를 강화하는 '신노사선언'에 노동자를 끼워넣고, 국내 시장점유율 40%를
확보하기 위해 차를 바꾸거나 신차를 구입하는 소비자로부터 '소비를 저하시켜 불황을 지속시키는 것 이
도요타다'라는 사회적 비난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다.
97년 춘투 - 8만엔의 위로금 지급과 100엔 인상된 9,400엔 타결
97년 1월 7일 도요타는 사장의 연두교시에서 전사원 7만명에게 '창립60주년 협력위로금'으로 평균
8만엔을 지불한다고 했다. 60억엔 가까운 '특별 임시보너스'였다.
도요타는 왜 노조와의 협정에도 없는 위로금을 지불했는가. 그것은 그 동안 발전해온 현장운동과 지역공투,
특히 96년 12월 혼다(本田)가 '예상을 뛰어넘는 실적을 성취하기 위해 분발해온 사원에게 보 답'하기 위해
평균 7만엔을 지급한 사실 때문이었다. 투쟁적인 노동자의 '도요타의 거대한 이익을 노 동자와 하청·
지역으로 환원하라'는 목소리가 현장에서 커지고, '(노동자를) 구조조정 '합리화'에 협력 시켜, 혼다 이상의
막대한 이익을 올렸으면서도, 혼다는 7만엔을 지불했는데, 도요타는 그것을 노동자 에게 환원하지 않는다'는
목소리에 눌려 내린 결단이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그 동안 일시금이 감액되어 왔는데 겨우 그것뿐인가', '엔저 효과 2,400억 중 60억뿐인가'
라는 말이 나왔다. 사실 일시금은 90년의 연간 6.2개월부터 매년 하락하여 현재 5.8개월 로 되어 있다. 임금도
자숙요구와 저임금 회답으로 거의 인상되지 않았다. 게다가 연속2교대근무의 도 입으로 심야교대수당과 잔업수당이
대폭 감소되었고, 사무·기술계는 재량노동(뉴 타임)으로 무보수 노동이 많아졌다. 임금격차도 능력주의의
철저한 적용으로 부장의 경우 최대 350만엔부터 700만엔까 지 차이가 난다. 기술계 직제의 공장 계층은 수입이
월 15∼20만엔 감소되었고, 노동자도 8∼10만엔 이 감소되었다.
그래서 '벌거숭이 임금' '조합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회사는 노동자의 생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분노가 터져나왔고 이것이 위로금을 주게된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97년 춘투에서 도요타 노사는 회답 직전에 9,300엔으로 채결하기로 합의되어 있었다. 그런데 도요타
사측이 일방적으로 100엔 더 올려주었다. 그러자 도요타노련 위원장은 '감동'해서 감격에 가득 차 눈물을 흘렸다.
도요타는 노동자의 불만과 분노를 '눈물만큼의 성의 = 100엔을 보임'으로써 '신노 사선언'을 한 노조의 체면을
세워준 셈이다.
현장 노동자는 이 결과에 대해 '처음부터 조합원의 목소리도 듣지 않고 1만3,000엔이라는 최저 요구액을
마음대로 결정하더니 이제는 그것보다 더 낮은 초저액 타결이라고!, 결코 인정할 수 없다', '만 족할만한
인상을 이끌어내지는 않고 회계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가, 처음부터 충분한 임금인상을 획득 할 생각이 없었다',
'조합은 요구를 제출해서 어떻게 해서든 최대의 액수를 획득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무리를
해가며 일을 한 덕분에 회사는 큰 이익을 올렸는데 이것이 그 대답인가', '회 사는 성의가 없다,
노조집행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조합이 단번에 OK한 태도가 기분 나쁘다, 우 리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조합은 모르고 있다', '100엔 구슬치기 장난은 그만 두라, 매월 5∼6만엔이 부족한 생활은 변하지
않는다'며 반발했다. 사택의 부인들도 '9,000엔 정도로는 도저히 살 아갈 수 없다. 나도 파트타임으로 나가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더 올려라', '9,000엔은 말도 안 된다'며 불만에 가득차 있다.
현장의 투쟁적인 노동자는 '조합원은 손해를 보든 보지 않든 노동과 생활을 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회사의 회답을
간부만의 판단으로 단번에 타결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현장에 내려와서 철저하게 토 론하고 최종타결은
전원투표로 해야 한다'는 노동자의 말을 소개하면서 노동조합운동 본래의 모습인 '요구를 통해 단결'할 것을
호소했다. 그것은 지금 많은 노동자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초과밀 노동 '시간단축요구 거부'와 동요하는 96년 노조대회
96년 춘투에서 임금은 8,700엔밖에 인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노조가 무엇보다 먼저 준비하여 대대 적인 캠페인을
벌렸던 '20분 노동시간 단축요구'도 '가까운 장래에 노력'한다는 거부의 회답으로 끝났었 다. 이것에 대해 노동자의
불만과 반발도 매우 컸다. 이것은 현재의 초과밀노동·장시간노동의 실태를 조금이나마 개선하고, 노동시간
단축을 원하는 노동자들의 절실한 요구였다.
'마른수건을 쥐어 짠다'는 도요타의 생산방식은 이제는 '쥐어짠 수건도 곧 젖기 때문에 또 쥐어짠다'
는 것으로 에스컬레이트되고 있다. 도요타에서는 비디오와 스탑워치로 '동작분석'을 하여, 철저하게
작 업의 '여유시간'과 '낭비'를 없앤 결과 대중차 생산라인의 사이클 타임(1 공정)이 45초로 되어 있다.
이 것은 철저하게 일의 낭비를 제거하고, 생리적 한계의 극한까지 노동할 것을 추구하는 초초과밀 노동으 로
'화장실 갈 시간도, 물마실 시간도 없는 거의 극한의 상태'이다. 이러한 노동밀도는 주야간 동일하 게 8시간
계속되고, 잔업이 있으면 9∼10시간까지 이어진다. 필자와 함께 공장견학을 한 독일의 연구 자는 '도요타에서는
모두 뛰면서 일을 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노동하는 방식이 아니다'라고 그 가 혹성에 놀라워했다.
이글쓴이가 조사한 라지에타 라인의 사이클 타임은 60초에서 49초로 되었고, 한동작 당 0.8초, 한 공정 의
보행거리 25m, 일일 보행회수 450회로 총보행거리는 11.25㎞이다. 핸들매인샤프트 제작공정의 과밀노동
실태는 사이클 타임 44초, 그 사이 동작수 50회, 보행거리 27m, 걷는 시간을 제외한 한 동 작 당 시간은
0.5초, 일일 반복회수 700회(이하 잔업 포함)로 총동작수 35,000회, 그 보행거리는 19 ㎞이다.
이후 핸들매인샤프트의 사이클 타임은 1년 사이에 43.18초에서 41.56초로 되어 극도의 과밀노동으 로
되었다. 이것은 작업에 여유가 있었서가 아니라 '반보라도 걷는 거리를 단축해서 조금이나마 동작 을 축소한다'는
'도요타 생산방식'의 수법으로 '한계없는 과밀화'를 한 결과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낭비 를 제거한 과밀
노동실태는 라지에타 라인이나 핸드매인샤프트 공정만이 아니라 도요타의 모든 생산현 장에서 행해지고 있다.
카로라 생산을 감소한 다카오카공장에서는 인원을 1/2로 감소했기 때문에 1인당 노동부담과 행동범 위가 넓어져
이전보다 더 과밀해졌다. 생산을 감소해도 노동강도를 강화한다는 것이 바로 '도요타 생 산방식'이다.
때문에 이 초과밀 노동은 도요타노조의 조사에서도 '일하는데 피로를 느낀다'(78.1%), '일을 그만두 고 싶은
생각이 있다'(78%), '일에 충실할 마음이 없다'(63.3%)로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재직 중 사 망도 5년
사이(88∼93년) 290명으로 연간 50∼60명이 사망(과로사를 가능한 포함한 것)하였다. 휴 직기간 만료자도
40∼50명(그 중에 7∼8명이 그후 사망)이다. 더욱이 과밀노동은 '여유를 빼앗고' 살 아있는 인간의 노동을
0.1초까지 추구해서 노동자의 목숨과 건강을 단축시키고 있다. 따라서 사소해 보이지만 '20분 시간단축'은 매우
절실한 문제이다. 그러나 회사는 'NO'라고 답했고, 노조는 별달리 획득할 방법도 없는 상태였다.
현장집회에서는 '춘투타결이 부결되거나, 보류되어야 한다', '조합은 노동자의 요구대로 활동하지 않 는다',
'이런 조합에는 조합비를 내고싶지 않다'고 말하는 노동자가 많다.
이러한 현장 노동자의 목소리가 반영되어 96년 조합의 정기대회는 크게 동요되었다. 조합간부에 대 한 비판이
계속되어 떠들썩한 대회가 된 것이다. 즉, 저임금 인상의 회답에는 '캐나다로 출장가서 3개 월 있었는데 일본의
임금이 세계 제1은 아니다', '지금 조합원의 생활실태를 집행부는 이해하고 있는 가', '충분한 임금인상을
획득할 수 있는 체제인가', '조합으로서 자립성을 보여라'는 등 사무·기술계 대의원으로부터 비판이 잇달아
제기되었다. 시간단축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이고, 대규모 집회도 했는데 '가까운 장래에
노력'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간단축으로 풍요로운 삶'이라더니 어처 구니가 없다', '집행부의 지도성이
문제다'라고 엄중하게 비판하였다. 그 때문에 간부인 에모토(得本) (자동차총련 회장) 씨는 '나의 지도력이
부족했었다'고 이례적으로 자기비판을 하고 머리를 숙이지 않 을 수 없었다.
투쟁적인 노동자에 대한 큰 기대와 문제제기 받는 노동조합
도요타에서는 회사파가 아닌 노동자가 연합도요타노조의 간부가 되기가 매우 어렵다. 임원으로 입후 보하기
위해서는 추천인을 50인 확보하지 않으면 안된다. 추천인으로 이름을 쓰면 회사와 노조로부터 여러가지 압력이
들어오기 때문에 용기와 결의가 요구된다. 특히 추천인을 얻어 입후보해도 선거활동 이 대단히 제한되어 있어서,
도요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이름을 새긴 포스터를 붙이고, 입회 연설회 에서 연설하는 정도이다. 게다가
연설회는 현장 노동자가 참석할 수 없고 거의 직제=노조임원이 참가 한다. 따라서 요구와 정책을 폭넓게
선전하기에는 큰 제한이 있다. 이것에 비해 회사가 지시한 노조추 천 임원은 조합기관지를 통해 선전활동을 할 수 있다.
또 비밀투표도 준수되지 않아 직장단위에서 직제=노조임원의 감시하에 아무 것도 없는 테이블에서 기입하고
투표한다. 선거제도도 연기명제로 과반수 득표가 없으면 한 사람도 임원으로 될 수 없다. 개 표도 노조와
그들이 추천한 선관위에 의해 비밀개표되는 비공개적이고, 비민주적인 선거이다. 바로 이 러한 상황에서
노사일체의 도요타노조임원이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조사한 노조임원은 공 공연하게 '회사의
지시로 임원으로 되었고, 노조활동의 중심은 정당의 선거활동이다. 퇴임후 승진, 승 격이 빠른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요구를 통해 단결해서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에 대한 기대와 지지가 확실히 확대되고
있다. 96년의 노조임원선거는 93년부터 나타났던 거대한 변화를 상징하는 드라마가 몇 차례 있었다.
이전까지는 추천인 50인을 확보하는 것이 필사적인 싸움이었지만 96년은 상황이 크게 바뀌었 다.
현재 기능계 현장, 그 중에서도 직제(공장, 조장, 반장)는 감소된 수입과 앞으로의 전망 때문에 크 게
고통받고 있다. 투쟁하는 노동자는 직제의 꼭대기인 공장(지금까지 조합원)에서부터 추천을 획득하 는 움직임을
대규모로 전개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노동자의 활동을 방해하거나 탄압해 왔던 직제가 회사와 조합의 모습에
분노하여 회사파가 아닌 자천후보에게 공감과 지지를 보내는 새롭고도 극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뒤에서 지지한다', '끝까지 하라', '기대하고 있다. 믿는다'고 격려를 하거나, 악수를 하면서 추천인
연서명을 써주는 직제는 '이것은 혈판장(血判狀)이다.', '확실히 믿는다'라고 말을 건네 는 등, 감동적인
드라마가 연출되었다. '부하 없는 조장' SX는 전례없이 과밀한 라인작업으로 녹초가 되어, 회사와 노조에 대한
비판을 공공연히 하며 기대와 공감을 표하고 있다. '노조임원을 싸우는 노 동자로 대체하라, (지금의 노조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조합이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투쟁하는 노동자는 이러한 직제를 포함하여 많은 노동자의 지지로 50인 추천서명을 제출했다. 노동 자의 절실한
요구를 전면에 내걸고, '요구를 통해 단결하고, 실현을 위해 모두 투쟁하자'고 당당하게 호소하는 자세에
기대와 공감이 확대되고 있다. 또 직제를 포함한 많은 노동자로부터 상담도 밀려오고 있다.
비민주적으로 활동이 제한된 가운데서도 회사측에 가담하지 않고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는 6만명의 조합원
가운데 5,000표 가까운 지지를 획득했다. 또 이번 선거의 특징은 3,000표의 백지나 무효표가 던져졌다는
것이다. 6만의 조합원 가운데 회사와 지금까지의 노조 방식에 공공연히 'NO'라고 의사를 표시하는 노동자가
8,000명(13.3%)이나 나온 충격은 도요타와 노조에 심각한 사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도요타가
8만엔의 위로협력금을 주고, 노조와의 합의를 뛰어넘는 100엔의 추가인상을 가능하게 했던 이유였다.
97년 춘투 당시 에모토 씨가 JR(금속노협)의 토론회에서 '연합도 요구실현을 위해 대규모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고, 국회농성이나 대중집회를 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도 도요타 나 도요타그룹
노동자의 운동과 지역공동투쟁의 확대, 전노련·춘투공투가 '일치된 요구로 함께' 행동 하여 연합계를 포함한
일본노동조합에 투쟁하는 흐름을 크게 진전시켰기 때문이다.
여성보호규제철폐와 도요타의 '신일본적 경영' 전략
경단련 회장을 좌장으로 둔 일본의 선도기업 도요타는 '인건비·비용절감'으로 고수익을 올리기 위해 과밀하고
가혹한 야근교대제에 여성노동자를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노동기준법의 여성보호규정(심야· 휴일금지, 잔업규제)
철폐를 추진하였다. 연합에서도 내부의 반대를 누르고 철폐의 추진력으로 된 것 이 자동차총련·도요타노련이다.
도요타는 '인건비가 높고, 건강상 문제가 많은 40∼50대 정규남성 노동자를 줄이고 인건비가 싸고, 유동화가
쉬워' 단기간 교대가 가능한 여성노동자나 젊은 기간공, 파견노동자로 바꾸어 가는 도요타 '신일본적 경영'이라는
고용·인사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도요타 공장에서는 현재 약 400명 가까운 여성 노동자가 노동밀도가 높은 주력 생산라인과 부차 라 인
그리고 주변·보조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또 연속2교대제의 늦은 조 근무(13시40분∼22시30분)도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여성보호규제 때문에 늦은 조의 근무는 밤 10시 30분까지만 일할 수 있어서 여성노동자가 귀가한 후에는
직제(반장)가 투입되어 새벽 1시까지 일을 하게 된다. 물론 잔업이 있으 면 2시30분까지 일한다. 도요타는
'이 비효율을 없애고, 끝까지 여성으로 가동'시키기 위해 그 '최대의 장해인 여성보호규정을 철폐시키'고자
여기저기서 온갖 활동으로 철폐의 추진력이 되고 있다. 도요타 는 '여성보호철폐'의 '확실한 주범'이다.
그리고 지금 도요타는 생산라인에 젊은 여성노동자를 대규모로 투입할 수 있도록 검토·계획하고 있다.
도요타 구주에서는 여성노동자 50명이 이미 자동화된 생산라인에서 2교대의 늦은 조 근무(13시40 분∼22시30분)에
들어가고 있다. 이들은 종업원의 약 3%이다. 도요타 구주는 수년 내에 5%를 목표 로, 장래는 생산라인의 대부분을
'인건비가 싼' '파트 여성노동자로 도입'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특 히 그 사이 도요타 구주는 노동기준법이
개정되도록 관계부서에 적극적으로 공작을 했다.
도요타는 처음에는 젊은 여성노동자를 주변·보조업무와 부차 라인에 투입하다가 1년이 지나면 주 요라인에
투입하고 있다. 그리고 여성 노동자 전문담당 직제가 정기적으로 일, 생활, 건강 등의 상황 을 체크, 조사하여
대량의 '젊은 여성노동자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현장에서는 '주요 생산라인의 일을 배우는 속도는 남성보다
느리지만 한번 습득하면 끈기있고 민첩하게 일을 하고, 불량품 비율도 남성보 다 매우 적다'고 평가되고 있다.
여성노동자가 쉬거나, 밤 10시 30분부터 대체되어 그 라인에 들어간 직제는 이렇게 힘든 노동을 여성이 잘 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고 있다. 또 젊은 여성노동자 는 수년(3∼5년)이 지나면 직장의 남성과 결혼하거나,
힘든 노동 때문에 전직 또는 사직하기 때문에 5년을 전후로 '유동화' 된다. 도요타가 본격적으로 젊은 여성
노동자를 주요 생산라인에 대규모로 투입 하는 것도 최근의 일이다. 99년 4월 여성보호규제철폐시행을 목표로
인사부는 '프로젝트팀을 편성'할 것을 결정했다.
노조는 회사와 함께 '여성심야근무 전면해금', '여성보호규정의 철폐'를 추진하기 위해 정기대회에서 여성
노동자에게 '남녀평등한 여성의 업무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철폐가 필요하다'고 발언을 하게 하고, 집행부가
기다렸다는 듯이 '여성보호철폐를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답변한 뒤, 연합을 강력하게 움직여 왔다.
최근에는 바쁜 라인에 젊은 기간공(파견·계약사원, 기간공은 현재 2,500명)이 도입되 고 있다. 그들은 이전에는
주변·보조업무가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ME화·자동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 어 주요생산라인·부차라인에 많이
도입되고 있다. 이렇듯 생산라인에 정규남성 대신 여성과 기간공으 로 대체하려는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 도요타
관련 000에서는 현재 4,000명 이상의 기간공과 1,000 명 정도의 파견근로자가 일을 하고 있다. 또 사무·
기술계는 파견사원·계약사원의 도입을 눈앞에 두 고 있다.
이것과 함께 기능계 생산현장에서는 '조직의 거대화'로 부하 없는 조장을 대량으로 만들어, 라인이나
현장작업에 종사시켜서, 퇴직이나 사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또 '조직의 거대화'나 짧은 교대(일정시간으로 공정을 교대) 등으로 40∼50대와 20∼30대 노동자를 중고령층
노동자 조직과 젊은 노동자 조직으로 편성해서 경쟁시키고, 같은 조에서도 중고령층과 젊은 노동자를
경쟁시키고 있다. 그것이 조정이나 인사고과에 반영된 임금체계의 개인별 능력주의와 함께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중고령층 노동자를 직장에서 추출하고, 여성 노동자, 계약사원, 파견사원으로 대체하 려는
도요타의 '신일본적 경영' 전략이다. 이와 같은 움직임에 대해 직제를 포함한 중고령층 노동자는 불만과
분노를 터뜨리며, 요구를 내걸고 싸우고 있는 노동자에 대한 기대와 공감과 지지를 보내면서 함께 움직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일본 공산당이나 전노련이 제기한 '해고규제법'(안)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중고령층 노동자에게 확산되어, 도요타로 하여금 '2001년까지 현재의 고용인원을 유지' 한다고 말하게 하였다.
97 도요타 총행동과 민주적 규제
도요타의 구조조정 전략에 대해서 민주세력은 기업윤리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고, 민주적 규제를 실천하기
위해 도요타 심포지움(15회)과 도요타 총행동(16년)을 계속해 왔다.
이 운동의 주체는 도요타와 도요타 그룹에서 투쟁적인 노동자, 西三河국민대운동실행위원회(西三河 지역의
37개 노동조합·민주단체), 애노련·서삼하블럭·지역노련, 민상(서삼하지역)·애상련 등으로 지금까지의 요구,
정책, 투쟁의 성과와 운동은 글의 마지막 참조자료에 게재해 놓았다. 그리고 그것은 항목마다 본인의 방식대로 정리했다.
지금까지 서술한 도요타 현장의 새로운 변화는 투쟁적인 노동자 운동과 지역의 민주세력이 함께 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이 글에서는 최근의 요구, 정책과 운동을 소개한다. 97년의 도요타에 대한 요 구항목은 <자료3>에 게재하였다.
<자료 3> 도요타에 대한 요청서
도요타자동차주식회사
이사직 사장 오꾸다(奧田) 앞
아이치현노동조합총연합
전노련西三河三河블럭협의회
豊田·加茂노동조합총연합
岡崎·額田지역노동조합센타
서삼하남지역노동조합총연합
[군사비를 감소해서 삶과 복지, 교육의 충실을]
국민대운동西三河실행위원회
요구서
21세기를 눈앞에 둔 일본의 경제를 국민이 풍요로운 방향으로 재건하기 위 해 도요타자동차를 비롯한 일본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이 점점 중요하 게 되고 있다.
우리들은 지난 2월 16일 '제15회 도요타심포지움'을 개최했다. 이번 심포지 움은 아이치 화재로 인한
안전문제와 사회적 혼란을 초래한 도요타의 '간판방 식' 즉, 효율·생산제일주의 경영 방법이 문제로 되었다.
이에 도요타에서 일 하고 있는 노동자, 하청업자의 절실한 목소리로서, 귀사가 인간존중의 생산시 스템으로 전환할 것을
강력히 요청한다. 귀사의 21세기를 향한 신국제경영계 획, 이것을 추진한 '하모니어스 그로스(조화로운 전체)'의
생각과 철저함은 지 역경제를 공동화시켜 하청업자의 경영부진·도산·실업 등 심각한 상황을 가 져올 것이 예측된다.
귀사의 '기본이념'이 '인간과 지구에 공헌하는 기업'이라고 말한다면 이러한 문제에 진지한 대책을 마련하여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97년 춘투도 중요한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귀사는 97년 3월 기결산에서 경영이익 6,200억엔으로 공전의 수익을
올렸다고 보도되었다. 또 내부유보도 4조4,000억엔이나 축척하고 있는 귀사는 이번에야말로 '일본경제의 조타수'
로 서, 국민 전체의 구매력 향상과 활성화를 위해서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충 분히 완성하기 위해서도 적극적인
임금인상을 해야 한다. 우리들은 노동자, 하 청업자, 지역 생계와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요구를 하나로
모았 다. 귀사는 이것을 받아들여 성의있는 개선책을 3월 31일까지 서면으로 회답 해 줄 것을 요구한다.
1. 지역경제와 고용안정에 관한 사항
귀사가 실시·계획하고 있는 생산거점의 해외이전, 해외에서의 부품조달 등 은 산업의 공동화와 지역경제를 위협하는
원인으로 되고 있다. 귀사는 사회적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경단련의 기업헌장을 준수하여, 계획단계에서부터
자치 체와 하청관련기업을 포함한 주민에게 분명하게 밝히고, 합의를 얻을 때까지는 일방적인 실시를 행하지 않아야 한다.
2. 하청, 중소영세업자의 보호에 관한 사항
① 중소업자가 생활할 수 있는 하청단가를 보장할 것
② '하청중소기업진흥법', '하청대금 지불지연 방지법'을 엄격히 지키고, 하 청업자의 경영과 생활을 보호할 것
③ 말단의 하청업자까지 정확한 생산을 예정할 수 있도록 발주의 급감, 급 증에 의한 영향을 없앨 것
④ '간판방식'을 개선하여, 여유있고 인간적 생산체제로의 전환을 도모할 것
3. 임금·노동조건의 개선에 관한 사항
① 잔업·심야수당이 없어도 생활할 수 있도록 기본급을 대폭 인상할 것. 또 초임금에 대해서도 대폭적인 인상을 할 것
② 유럽과 같은 노동시간단축을 하고, 연2교대에서도 그 날 중에 일을 끝낼 수 있도록 1일 노동시간을 7시간으로 할 것
③ 노동기본법 39조를 준수하여 연휴의 강제사용을 중지할 것
④ 아이치 화재이후, 이상한 생산체제가 계속되고 있는데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노동실태를 개선할 것
⑤ 회사가 계약한 '단체생명보험'의 내용을 종업원 및 그 가족에게 공개할 것
⑥ 귀사의 모토마치공장에서 근무한 오모리(大森美樹雄) 씨를 노동성 통지 172호에 의거하여 빨리 원직복직시킬 것
⑦ 여성의 보호규정을 지키고, 고용의 확대를 꾀할 것
4. 기타
현재 진행되고 있는 'TOYOTA ECO-PROJECT'에 대해서 리사이클 가능 율의 인상과 함께 현재의 리사이클율에 대해서도
목표를 설정하여 인상할 것
요구항목은 도요타 심포지움에서 토의된 내용을 수렴하고, 노동자, 하청기업, 지역주민의 실태를 포
함한 것으로 도요타 총행동은 도요타가 성의있게 답할 것을 요청했다. 직장의 새로운 변화, 지역 공동
투쟁의 발전, 도요타 회장이 경단련 회장으로 취임하여 사회적 지위가 커진 만큼, 도요타는 최근 3년
동안 도요타 총행동실행위원회의 요청행동과 요구항목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대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도요타에서는 '춘투 때가 되면 반드시 드러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오전부터 쭉 기다리 고 있었습니다.'는
식으로 공손히 얘기했다. 이전에 본사에 한발짝도 들여보내지 않고, 요구서를 '습득 물' 취급하여 격렬하게 응답했던
것과는 커다란 차이였다. 그러나 교섭에서는 '수락할 수 없다', '견해 가 틀리다', '관계부처에 보내겠다'고 하며
성의있는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요타 전체의 동향 을 보면, 요구내용은 확실히 투쟁의 전진과 함께 실현되어 가고 있다.
97년의 요구항목 내용을 보도록 하자.
첫째, '지역경제와 고용의 안정'에 관해서는, 경단련의 기업행동헌장을 지키고 사회적 책임을 담당할 것을
일관되게 추구해 왔다. 이것에 대해서 4월 21일 회사와 도요타노조와의 '97년 회사방침에 관한 간담회'에서
도요타는 '기업행동현장'의 개정(96년 12월)을 받아들여 도요타의 기본이념(92년 1월)을 수정하였다.
그 핵심은 기업행동헌장의 정신인
1)국내외의 법 및 그 정신을 준수한다.
2)국제화의 진 전과 함께 현지의 문화와 습관을 존중한다.
3)안전·환경대응의 포괄적인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협력한 다.
4)노사상호 신뢰·책임을 존 중한다.
5)사회와 조화로운 성장 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특히 도요타 회장은 경단련으로서 도 '기업행동헌장이 지켜지도록 세 미나나 강습회를 개회'(6월 10일) 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둘째 항목 '하청, 중소영세 업자의 보호'에 있는 '하청 2법'을 엄정히 준수하고, 하청기업의 경영 과
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움직임 으로 어느 정도 표현되고 있다. 지 역에서 함께 해온 운동의 결과 아 이치현은
이 3년간 현하의 1,000 개사를 넘는 대기업(도요타, 도요 타그룹의 대기업은 모두)에 대해 '하청중소기업의
배려와 하청거래 의 적정화(의뢰)'를 요구하는 문서 를 지사명으로 발표하여, 철저히 '하청 2법을 준수'하고
'하청의 진 흥을 도모하'도록 했다. 그 때문에 도요타와 도요타그룹은 지도행정 기관인 중부통산국으로부터
'하청 2법'에 대한 연수와 '법을 철저히 준수하기 위한 지도'를 받았다. 그 리고 단가의 적정화와 하청으로부 터
일을 되돌려 받아 내부 생산하 던 것을 일부 하청에 되돌려주도 록 했다. 또 문제가 있으면 개별적 으로
중부통산국이 하청기업 또는 업자와 상담도 하고, 필요한 조사 와 지도를 하도록 했다. 또 2월 아이치정기(精機)의
화재로 도요타 라인이 정지된 후 다시 증산하기까지의 과정에서 하청에 발주 정 지, 생산의 급격한 감소, 급증
등으로 큰 희생을 발생시킨 것에 대해서도 도요타가 '1월부터 3월까지 도요타에 납품한 부품을 1% 할증해서
구입'하도록 했다. 이것도 그 사이의 '하청단가 인상, 이익의 사 회적 환원'을 목표로 한 운동과 하청업계로부터
'도요타의 사정 때문에 이렇게 힘들게 일하고 있는 것 에 대해 성의를 보이라'는 목소리가 압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셋째, '임금·노동조건의 개선'에 관해서는 이미 지역에서 함께 해온 운동이나 현장투쟁으로 새롭게 변화를
보이고 있는 상황과는 약간 다른 최근의 운동성과를 소개한다.
아이치의 화재로 라인이 멈추어 회사사정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도요타와 도요타그룹은 '라인이
멈추었으니 반나절 연휴로 쉬어라', '오늘도 라인이 멈추었으니 연휴로 쉬어라'며 근기법을 위반하는
부당한 처리를 했었다. 이것에 대해 도요타의 투쟁적인 노동자는 즉각 노동기준감독서, 노동기준국에
소송하여 기업에 대한 지도요청을 했다. 기준국은 '감독서가 도요타의 인사담당을 불러 지도했다',
'연 휴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구체적 사실이 있다면 사실에 입각하여 올바로' 하겠다고 하여 기업의 위법
행위를 저지시켰다.
도요타자동차와 도요타그룹에서는 무보수 노동이 횡행하고 있다. 그러나 요구를 통해 단결하고, 투 쟁적인
노동자가 있는 현장에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도요타에서는 라인이 가동되기 전 준비작 업시간으로
항상 1일 5분에서 1주일 30분 정도 더 일을 하고 있다. 도요타그룹의 풍전공기(豊田工機) 는 QC활동 등으로
공짜노동을 해왔던 것을 노동자 운동으로 작년 12월에 총액 3,200만엔의 잔업수 당을 받았다.
노동시간 단축과 연2교대에서도 그 날 중에 일이 끝날 수 있도록 '1일 노동시간을 7시간'으로 하는 요구는
과로사를 없애서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고, 가족과 함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 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고도 절실한 지역전체의 요구이다. 또 잔업과 심야수당이 대폭 감소되어 '벌 거숭이 임금'으로 되었기
때문에 '대폭적인 기본급 인상'도 절실한 요구이다.
이미 사회문제로 되어 있는 것으로서, 기업이 종업원의 생명에 보험을 걸고, 종업원이 사망하면 기 업의 이득으로
되는 '단체생명보험'에 대해 정보공개를 요구했지만 도요타와 도요타그룹은 일절 회답하 지 않고 있다.
재직 중 사망, 과로사, 산재사망이 많은 도요타 관련기업에서 이 문제의 추적은 중요하 다. 노동자의 끊질긴
투쟁으로 일본전장(日本電裝) 노조만이 단체생명보험 가입 사실을 인정했다. 본 래 종업원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 계약내용의 공개는 기업의 의무로써 당연히 공개해야 한다.
현재 도요타는 대규모 구조조정 '합리화'와 비용절감, 원가절감의 강요로 산재사망, 헬리콥터 사고 등
안전문제와 품질저하·불량품의 증대가 문제로 되고 있다. 아이치현 화재로 도요타의 라인이 생산 정지되었던
경험은 수익과 생산효율을 최우선시해온 도요타의 '간판방식'이 어떻게 사회적 혼란과, 노 동자, 하청, 지역사회에
큰 희생을 가져오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도요타의 비용절감'은 거꾸로 '지역 사회의 비용 증대'로 되어
도요타의 기업윤리와 사회적 책임이 첨예한 문제로 되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들의 도요타에 대한 요구·정책의 실현을 위한 운동과 투쟁이야말로 다국적화한 거 대기업
도요타의 사회적 책임을 분명하게 해서 노동자·국민이 주체가 되어 민주적으로 대기업을 규제 할 수 있는
큰 힘이라는 것이 우리 모두의 확신이다.
참고자료·문헌
97년 오전사장 연두교시(경영기획부 기간직원 사외비로 취급)
제 93회 정기주주총회 첨부자료(도요타자동차 96년 7월)
도요타 크리에이션(도요타자동차 사보)
노무 뉴스(도요타자동차 인사부기획실 SX, SL이상 배포대상)
조장회 회보 1997(도요타자동차조장회 97년 2월)
평의회 뉴스(전도요타노동조합연합회 도요타자동차노동조합)
{はあい(화합)}(도요타자동차노동조합 월간지)
일경,중부경제,조일,매일,중일,적기 등 각신문 도요타관련 기사
제15회 도요타 심포지움 자료(97년 2월)
자동차산업노동자와 지역노조교류집회자료(제1회 95년, 제2회 96년)
제7회 대기업·관련노동자 전국교류집회자료(97년 1월)
직장의 실태나 운동, 투쟁은 각 운동단체의 자료와 인터뷰 조사
도요타에 대한 민주적 규제의 운동 - 도요타 총행동에 대한 졸고
이것이 도요타의 과밀노동 실태다({노동운동} 95.12.)
도요타의 횡포로 진척된 지역경제의 쇠퇴({노동운동} 94.8.)
'도요티즘과의 투쟁'-{노동자의 권리, 인권과 다국적기업의 민주적규제-아시아·태평양노동조합심포지움}
(전노련편, 94.7. 공저)
'도요타에 대한 투쟁과 요구·정책' - {변모한 세계기업 도요타}(신일본출판사. 94.5. 공저)
.하청의 목을 조른 도요타의 낮은 비용 전략([적기평론판] 93.5.)
'도요타총행동의 투쟁과 성과' - {도요타그룹의 신전략}(신일본출판사. 90년 공저)
.한/노/정/연
C.끝맺고가는 말
우리는 작년 2003년의 삼성의 도요타 배우기의 열풍에서뿐아니라 모든 기업의 발로로 50년 무 분규 어쩌구
저쩌구,최대 글로벌 기업으로의 성장.전 세계가 도요타 배우기 열풍에 쌓였었다등. 한마디로 벤치마킹의 열풍에
들어갔있었던건 아닐까. 우리가 도요타 열풍의 실례적인 기사하나를 보자.
【나고야=박찬흥기자】 일본의 고도(古都),‘나고야’(名古屋)에서 50분정도 차로 이동하면 도요타시(Toyotacity)가
나온다. 이곳이 바로 세계 3대 자동차 메이커인 도요타 본사와 12개 공장이 모여있는 ‘도요타 왕국’이다.
1959년, 아이치(愛知)현의 현지사가 도요타 덕택으로 도시가 급성장하자 아예 지명을 ‘Toyotacity’로 바꾼 것은
유명한 일화다.
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도요타 본사에 도착하면 사옥 앞에 창업자인 ‘기치로 도요타’의 흉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일본의 기계·금속공업 역사를 바꿔놓은 위대한 발명가, 기치로 도요타. 그의 흉상을 보고 있으면
파란만장했던 도요타의 역사가 온몸으로 전해지는 듯 했다.
도요타는 일본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지난해 영업이익 1조엔(10조원)을 돌파한데 이어 올해는 매출 15조 5015억엔에
영업이익 1조2716억엔을 목표로 하는 ‘초 매머드기업’이다. ‘렉서스’ 브랜드로 BMW, 벤츠 등 세계의 명차와
당당히 어깨를 겨루는 글로벌 기업이 바로 도요타다.
도요타는 ‘가이젠(改善)’과 같은 용어를 일본어 발음 그대로 세계에 통용시킨 일본형 경영 모델의 상징이기도
하다. 일명 ‘도요타 방식(TOYOTA WAY)’으로 알려진 비용절감과 생산성 향상은 세계 경영학 교과서에서 단골
메뉴가 되었다.
‘마른 수건도 다시 짠다’는 도요타의 생산방식을 배우기 위해 여러 나라에서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아 도요타는
최근 아예 경영전문컨설팅 회사를 독립시켰다. 우리나라의 삼성·LG 등 대기업들도 수십년동안 도요타를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고 있다.
도요타는 장기고용 보장과 ‘가이젠’ 등 철저히 일본식 경영모델을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누구보다도
앞서 세계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도요타의 자국 내 매출 비중은 40%정도며 나머지는 해외에서 올릴 정도로
글로벌화된 기업이다.
특히 도요타는 무분규로 일본의 ‘10년 불황’을 극복한 기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회사는 50년 넘게 무분규를
기록하면서 노동경쟁력 면에서 세계 최고수준을 보이고 있다.
올 3월 말 기준, 도요타는 연간 매출액 15조5000억엔(약 155조원), 영업이익 1조2700억엔(약 12조7000억원)을
올렸다. 이렇게 엄청난 흑자를 냈는데도 노조는 임금인상을 자진해서 포기했다.
도요타 본사에서 만난 우치야마다 다케시(內山田 竹志) 차량기술본부 전무는 “도요타도 50년대 극심한 노동쟁의를
겪었지만 그 폐단을 절감하고 노사화합의 전통을 만들었다”며 “이제 도요타에서 파업이란 과거의 ‘역사’”
라고 말했다.
대신 회사는 고용안정으로 종업원들에게 보답하고 있다. 아라이 마사유키(荒井正行) 아시아부 부장은 “나라에
따라 고용문화는 다르겠지만 도요타는 모든 종업원들에게 만 60세까지 장기고용을 보장하고 있다”며 “이 때문에
모든 직원들이 10년, 20년 후의 미래를 설계하면서 편안하게 회사일에 전념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노력 없이 결실을 맺을 수는 없는 법. 다케시 전무는 “눈 앞의 이익을 위해 해고를 단행하는 기업은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면서 “장기 고용으로 숙련된 도요타의 노동자야말로 진정한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일본 기업들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중시하는 글로벌 경제법칙을 잇따라 도입하고 있지만, 도요타 경영진은 장기 고용제를 고집스럽게
지켜 나가고 있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우치야마다 전무는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무서운 경쟁자로 떠올랐지만, 앞으로 노사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것”이라며 “한국 자동차 회사 노조들이 강경하게 나오는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노사가
서로 양보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이라고 말했다.
현대차,기아차 등 국내 완성차 업체들이 해마다 파업을 벌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볼 때, ‘도요타의 50년 무분규’
는 커다란 교훈을 줄 만하다.
현재 세계 자동차시장은 총성없는 전쟁터를 방불케하고 있다. 경쟁력을 상실한 기업은 도태되고 사멸되는 것이 요즘의
자동차시장인 것이다.
‘일본을 움직이고, 세계를 움직이는’ 도요타 자동차. 이제 우리 기업들도 도요타를 벤치마킹,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는데 역점을 둬야할 때다.
참으로 기업들이 혹하기 좋은것이 도요타 방식의 업무 효율일것이다.아니 권위적인 규제 아니라하며 아닌것, 그것이
갖는 고집스러움이 세계를 놀라게 한 그로벌로의 한발 다가섰슴이니.참으로 아이러니 하지 않는가.어느 CEO 공식
만찬에 일본인 경제학자를 불러 무분규,무노조에 대해 그리고 압도적인 회사 지지에 대해 연설해줄것을 위임하고
초정하였는데,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사와 노가 일체가 되어 그런 성과가 나왔던것이 아니라 일본식 사고와 혈연에
비롯한 독특한 위기 의식에서 탄생된 신화일뿐이라고 말했다 한다.
분명 도요타의 신화 창조가 갖는 의미는 후발 주자인 우리에겐 너무나 좋은 벤치 마킹의 모델일것이다.그러나
그 내면에 숨은 민족적 자질과 역량의 평가를 마친후 우리에겐 우리만의 공식과 노력으로 도요타의 글로벌 아성을
무너트리는데 역점을 두어야 할것이다.10년 불황이니 50년의 무분규니 자진 인금인상 포기니 이런 것들이 도요타를
키웠슬리는 만무하고,개발 노력과 근면 그리고 세계의 벽을 무너뜨릴 대운의 계획을 차근히 성취하였스리니 우리는
남의 것에서 똑같은것을 가져오려하지 말고 새로운걸 발견하고 가치있는 자신과 가족과 사회와 국가로의 전환
인식의 발상을 높이는데 도요타의 실례를 활용하여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