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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짓는 늙은이
-황순원-
이년! 이백 번 쥑에두 쌀 년! 앓는 남편두 남편이디만, 어린 자식을 놔두구 그래 도망을 가? 것두 아들놈 같은 조수놈하구서……. 그래 지금 1)한창 나이란 말이디? 그렇다구 이년, 내가 아무리 늙구 병들었기루서니 2)거랑질이야 할 줄 아니? 이녀언! 하는데, 옆에 누웠던 어린 아들이, 아바지, 아바지이! 하였으나 송 영감은 꿈속에서 자기 품에 안은 아들이, 아바지, 아바지이! 하고 부르는 것으로 알며, 오냐 3)데건 네 에미가 아니다! 하고 꼭 품에 껴안는 것을, 옆에 누운 어린 아들이 그냥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러, 잠꼬대에서 송 영감을 깨워 놓았다.
송 영감은 잠들기 전보다 더 머리가 무겁고 언짢았다. 애가 4)종내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오, 오, 하며 송 영감은 잠꼬대 속에서처럼 애를 끌어안았다. 자기의 더운 몸에 별나게 애의 몸이 찼다. 벌써부터 이렇게 얼리어서 될 말이냐고, 송 영감은 더 바싹 애를 껴안았다. 그리고 훌쩍이는 이제 일곱 살 난 애를 그렇게 안고 있는 동안 송 영감은 다시 이 어린것을 두고 도망 간 아내가 5)새롭게 괘씸했다. 아내와 함께 여드름 많던 조수가 떠올랐다. 그러자 그 아들 같은 조수에게 6)동년배의 사내와 사내가 느끼는 어떤 적수감이 불길처럼 송 영감의 괴로운 몸을 휩쌌다.
송 영감 자신이 7)집증 잡히지 않는 병으로 앓아 누웠기 때문에 조수가 이 가을로 마지막 8)가마에 넣으려고 거의 혼자서 지어 놓다시피 한 9)중옹, 통옹, 반옹, 머쎄기 같은 크고 작은 독들이 구월 보름 가까운 달빛에 마치 하나 하나 도망 간 조수의 그림자같이 느껴졌을 때, 송 영감은 벌떡 일어나 10)부채 방망이를 들어 모조리 깨부수고 싶은 충동을 받았으나, 다음 순간 내일부터라도 자기가 독을 지어 한 가마 채워 가지고 구워 내야 당장 자기네 부자가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면서는, 정말 그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지그시 무거운 눈을 감아 버렸다.
날이 밝자 송 영감은 열에 뜬 머리를 수건으로 동이고 일어나 앉아, 애더러는 흙 11)이길 12)왱손이를 부르러 보내 놓고, 왱손이 올 새가 바빠서 자기 손으로 흙을 이겨 틀 위에 올려놓았다. 송 영감의 손은 자꾸 떨리었다. 그러나 반쯤 독을 지어 올려, 안은 13)조마구 밖은 부채마치로 맞두드리며 14)일변 발로는 틀을 돌리는 익은 솜씨만은 앓아 눕기 전과 다를 바 없는 듯했다. 왱손이가 흙을 이겨 주는 대로 중옹 몇 개를 지어 냈다.
그러나 차차 송 영감의 솜씨에는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더구나 조마구와 부채마치로 두드려 올릴 때, 퍼뜩 눈앞에 아내와 조수의 환영이 떠오르면 짓던 독을 때리는지 아내와 조수를 때리는지 분간 못 하는 새, 독이 그만 얇게 못나게 지어지곤 했다. 그리고 15)전을 잡는 손이 떨려, 가뜩이나 제일 힘든 마무리의 전이 잘 잡혀지지를 않았다. 열 때문도 있었다. 영감은 쓰러지듯이 짓던 독 옆에 눕고 말았다.
송 영감이 정신이 들었을 때는 저녁때가 기울어서였다. 왱손이도 흙 몇 덩이를 이겨 놓고 가고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바깥 저녁 그늘 속에 애가 남쪽 장길을 향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거리라. 언제나처럼 장보러 간 어머니가 언제나처럼 저녁때면 조수에게 장감을 지워 가지고 돌아올 줄로만 아직 아는가 보다.
밖을 내다보던 송 영감은 제 힘만이 아닌 어떤 힘으로 벌떡 일어나 다시 독짓기를 시작하는 것이었으나, 이번에는 겨우 한 개를 짓고는 다시 쓰러지듯이 눕고 말았다.
다음에 송 영감이 정신이 든 것은 아주 어두운 속에서 애가 흔들어 깨워서였다. 울먹이던 애가 깨나는 아버지를 보고 그제야 안심된 듯이 저쪽에서 밥그릇을 가져다 아버지 앞에 놓았다. 웬 거냐고 하니까 애가, 앵두나무집 할머니가 주더라고 한다. 송 영감은 확 분노가 치밀어, 누가 거랑질해 오라더냐고 밥그릇을 밀쳐 놓자 애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송 영감은 아침에 어제의 저녁밥 남은 것을 조금 뜨는 것처럼 하고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는, 애도 아직 저녁을 못 먹었을지 모른다고 밥그릇을 도로 끌어다 한 술 입에 떠 넣으며 이번에는 애보고, 맛있으니 너도 먹으라는 것이었으나, 자신은 입맛을 잃은 탓만도 아닌 무엇이 밥 넘기려는 목을 치밀어 올라오곤 해, 좀처럼 밥을 넘길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송 영감이 죽인지 밥인지 모를 것을 끓였다. 여전히 입맛은 없었으나 어제 저녁처럼 목이 메어 오르는 것은 없었다.
오늘도 또 지어 올리는 독을 말리느라고 처음에는 독 밖에 피워 놓았다가 독이 한 반쯤 지어지면 독 안에 매달아 놓은 숯불의 숯내까지가 머리를 더 무겁게 했다. 사십 년래 없이 숯내를 다 먹는 듯했다.
송 영감은 어제보다 더 쓰러져 넘어지는 도수가 많았다. 흙 이기던 왱손이가 이래서는 도무지 한 가마 채우지 못하리라고 송 영감에게 내년에 마저 지어 첫가마에 넣도록 하는 게 어떠냐고 몇 번이고 권해 보았으나 송 영감은 일어났다가는 쓰러지고, 일어났다가는 쓰러지고 하면서도 독 짓기를 그만두려고 하지는 않았다.
송 영감이 한번 쓰러져 있는데 16)방물 장수 앵두나무집 할머니가 와서 앓는 몸을 돌봐야 하지 않느냐고 하며, 17)조미음 사발을 송 영감 입 가까이 내려놓았다. 송 영감은 어제 어린 아들에게 거랑질해 왔다고 소리를 쳤던 일을 생각하며, 이 아무에게나 상냥한 앵두나무집 할머니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어제만 해도 애한테 밥이랑 그렇게 많이 줘 보내서 잘 먹었는데 또 이렇게 미음까지 쑤어 오면 어떡하느냐고 했다. 앵두나무집 할머니는 그저, 어서 식기 전에 한 모금 마셔 보라고만 했다. 그리고 송 영감이 미음을 몇 모금 못 마시고 사발에서 힘없이 입을 떼는 것을 보고 앵두나무집 할머니는, 정말 이 영감이 이번 병으로 죽으려는가 보다는 생각이라도 든 듯, 당손이를 어디 좋은 자리가 있으면 주어 버리는게 어떠냐고 했다. 송 영감은 쓰러져 있던 사람 같지 않게 눈을 18)홉떠 앵두나무집 할머니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어느새 송 영감의 손은 앞에 놓인 미음 사발을 앵두나무집 할머니에게로 떼밀치고 있었다. 그런 말하러 이런 것을 가져왔느냐고, 썩썩 눈앞에서 없어지라고, 송 영감은 또 쓰러져 있던 사람 같지 않게 고함쳤다. 앵두나무집 할머니는 송 영감의 고집을 아는 터라 더 무슨 말을 하지 않았다.
앵두나무집 할머니가 가자, 송 영감은 지금 밖에서 자기의 어린 아들이 어디로 업혀 가기나 하는 듯이 밖을 향해 목청껏, 당손아! 하고 애를 불러 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애가 뜸막 문에 나타나는 것을 이번에는 애의 얼굴을 잊지나 않으려는 듯이 한참 쳐다보다가 그만 기운이 지쳐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애는 또 전에 없이 자기를 쳐다보는 아버지가 무서워 아버지에게 더 가까이 가지 못하고 섰다가, 아버지가 눈을 감자 더럭 더 겁이 나 훌쩍이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송 영감은 독짓기보다 자리에 쓰러져 있는 때가 많았다. 백 개가 못 차니 아직 이십여 개를 더 지어야 한 가마 19)충수가 되는 것이다. 한 가마를 채우게 짓자 하고 마음만은 급해지는 것이었으나, 몸을 일으키다가 도로 쓰러지며 흰 털 섞인 노랑 수염의 입을 벌리고 20)어깨숨을 쉬곤 했다.
그러한 어느 날, 물감이며 바늘을 가지고 21)한돌림 돌고 온 앵두나무집 할머니가 찾아와서는 마침 좋은 자리가 있으니 당손이를 주어 버리고 말자는 말로, 말이 난 자리는 재물도 넉넉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 마음씨가 무던하다는 말이며, 그 집에서 전에 어떤 젊은 내외가 살림을 엎어 치우고 내버린 애를 하나 얻어다 길렀는데 얼마 전에 그 친아버지 되는 사람이 여남은 살이나 된 그 애를 찾아갔다는 말이며, 그때 한 재물 주어 보내고서는 영감 내외가 마주앉아 얼마 동안을 친자식 잃은 듯이 울었는지 모른다는 말이며, 그래 이번에는 아버지 없는 애를 하나 얻어다 기르겠다더라는 말을 하면서, 꼭 그 자리에 당손이를 주어 버리고 말자고 했다. 송 영감은 앵두나무집 할머니와 일전의 일이 있은 뒤에도 앵두나무집 할머니가 애를 통해서 먹을 것 같은 것을 보내는 것이, 흔히 이런 노파에게 있기 쉬운 이런 주선이라도 해 주면 나중에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 있어 그걸 탐내서 그러는 건 아니라고, 그저 인정 많은 늙은이라 이편을 위해 주는 마음에서 그런다는 것만은 아는 터이지만, 송 영감은 오늘도 저도 모를 힘으로, 그런 소리 하려거든 아예 다시는 오지도 말라고, 자기 눈에 흙들기 전에는 내놓지 못한다고 했다. 앵두나무집 할머니는, 그렇게 고집만 부리지 말고 영감이 살아서 좋은 자리로 가는 걸 보아야 마음이 놓이지 않겠느냐는 말로, 사실 말이지 성한 사람도 언제 무슨 변을 당할는지 모르는데 앓는 사람의 일을 내일 어떻게 될는지 누가 아느냐고 하며, 더구나 겨울도 닥쳐오고 하니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송 영감은 그저 자기가 거랑질을 해서라도 애를 굶기지는 않을 테니 염려말라고 했다.
앵두나무집 할머니가 돌아간 뒤, 송 영감은 지금 자기가 거랑질을 해서라도 애를 굶기지는 않겠다고 했지만, 그리고 사실 아내가 무엇보다도 자기와 같이 살다가는 거랑질을 할 게 무서워 도망갔음에 틀림없지만, 자기가 병만 나아 일어나는 날이면 아직 일등 호주라는 칭호 아래 얼마든지 독을 지을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이제 한 가마 독만 채워 전처럼 잘만 구워 내면 거기서 겨울 양식과 내년에 할 밑천까지도 나올 수 있다는 희망으로, 어서 한 가마를 채우자고 다시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이었다.
하루는 송 영감이 날씨를 가려 22)종시 한 가마가 차지 못하는 독들을 왱손이의 도움을 받아 밖으로 내고야 말았다. 지어진 독만으로도 한 가마 구워 내리라는 생각이었다.
독말리기. 말리기라기보다도 바람쐬기다. 햇볕도 있어야 하지만 바람이 있어야 한다. 안개 같은 것이 낀 날은 좋지 못하다. 안개가 걷히며 바람 한 점 없이 해가 갑자기 쨍쨍 내리쬐면 그야말로 걷잡을 새 없이 독들이 세로 가로 터져 나간다. 그런데 오늘은 바람이 좀 치는 게 독말리기에 아주 알맞은 날씨였다.
독들을 마당에 내이자 독가마 속에서 거지들이, 무슨 독을 지금 굽느냐고 중얼거리며 23)제가끔의 24)넝마 살림들을 안고 나왔다. 이 거지들은 가을철이 되면 이렇게 독가마를 찾아 들어 초가을에는 가마 초입에 살다, 겨울이 되면서 차차 가마가 식어감에 따라 온기를 찾아 가마 속 깊이로 들어가며 한겨울을 나는 것이다.
송 영감은 거지들에게, 지금 25)뜸막이 비었으니 독 구워 내는 동안 거기에들 가 있으라고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전에 없이 거지들을 자기 있는 집에 들인다는 것이 마치 자기가 거지나 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가마에서 나온 거지들은 혹 더러는 인가를 찾아 동냥을 가고, 혹 한패는 양지바른 데를 골라 드러누웠고, 몇이는 아무 데고 앉아서 이 사냥 같은 것을 하기 시작했다.
송 영감도 양지에 앉아서 독이 하얗게 마르는 정도를 지키고 있었다.
독들을 가마에 넣을 때가 되었다. 송 영감 자신이 가마 속까지 들어가, 전에는 되도록 독이 여러 개 들어가도록만 힘쓰던 것을 이번에는 도망 간 조수와 자기의 크기 같은 독이 되도록 아궁이에서 같은 거리에 나란히 놓이게만 힘썼다. 마치 누구의 독이 잘 지어졌나 내기라도 해 보려는 듯이.
늦저녁 때쯤 해서 불질이 시작됐다. 불질. 결국은 이 불질이 독을 쓰게도 못 쓰게도 만드는 것이다. 지은 독에 따라서 세게 때야 할 때 약하게 때도, 약하게 때야 할 때 지나치게 세게 때도, 또는 불을 더 때도 덜 때도 안 된다.
처음에 슬슬 때다가 점점 세게 때기 시작하여 서너 시간 지나면 하얗던 독들이 흑색으로 변한다. 거기서 또 너더댓 시간 때면 독들은 다시 처음의 하얗던 대로 되고, 다음에 적색으로 됐다가 이번에는 아주 새말갛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 쇠가 녹는 듯, 하늘의 햇빛을 쳐다보는 듯이 된다. 정말 다음날 하늘에는 맑은 햇빛이 빛나고 있었다.
26)곁불놓기를 시작했다. 독가마 양옆으로 뚫은 곁창 구멍으로 나무를 넣는 것이다.
이제는 소나무를 27)단으로 넣기 시작했다. 아궁이와 곁창의 불길이 길을 잃고 확확 내쏜다. 이 불길이 그대로 어제 늦저녁부터 아궁이에서 좀 떨어진 한 곳에 일어나 앉았다 누웠다 하며 한결같이 불질하는 것을 지키고 있는 송 영감의 두 눈 속에서도 타고 있었다.
이렇게 이날 해도 다 저물었다. 그러는데 한편 곁창에서 불질하던 왱손이가 곁창 속을 들여다보는 듯하더니 분주히 이리로 달려오는 것이었다. 송 영감은 벌써 왱손이가 불질하던 곁창의 위치로써 그것이 자기의 독이 들어 있는 자리라는 것을 알고 왱손이가 뭐라기 전에 먼저, 무너앉았느냐고 했다. 왱손이는 그렇다고 하면서, 이젠 독이 좀 덜 익더라도 곁불질을 그만두고 아궁이를 막아 버리자고 했다. 그러나 송 영감은 그저,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그냥 불질을 하라고 했다.
거지들이 날이 저물었다고 독가마 부근으로 모여들었다.
송 영감이, 이제 조금만 더, 하고 속을 죄고 있을 때였다. 가마 속에서 갑자기 뚜왕! 뚜왕! 하고 독 튀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송 영감은 처음에 벌떡 반쯤 일어나다가 도로 주저앉으며 이상스레 빛나는 눈을 한 곳에 머물린 채 귀를 기울였다. 송 영감은 가마에 넣은 독의 위치로, 지금 것은 자기가 지은 독, 지금 것도 자기가 지은 독, 하고 있었다. 이렇게 튀는 것은 거의 송 영감의 것뿐이었다. 그리고 송 영감은 또 그 튀는 소리로 해서 그것이 자기가 앓다가 일어나 처음에 지은 몇 개의 독만이 튀지 않고 남은 것을 알며, 왱손이의 28)거치적거린다고 거지들을 꾸짖는 소리를 멀리 들으면서 어둠 속에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다음날 송 영감이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자기네 뜸막 안에 누워 있었다. 옆에서 작은 몸을 오그리고 훌쩍거리던 애가 아버지가 정신 든 것을 보고 더 크게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송 영감이 저도 모르게 애보고, 안 죽는다, 안 죽는다, 했다. 그러나 송 영감은 또 속으로는, 지금 자기는 죽어가고 있다고 부르짖고 있었다.
이튿날 송 영감은 애를 시켜 앵두나무집 할머니를 오게 했다. 앵두나무집 할머니가 오자 송 영감은 애더러 놀러 나가라고 하며 유심히 애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마치 애의 얼굴을 잊지 않으려는 듯이.
앵두나무집 할머니와 단둘이 되자 송 영감은 눈을 감으며, 요전에 말하던 자리에 아직 애를 보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앵두나무집 할머니 된다고 했다. 얼마나 먼 곳이냐고 했다. 여기서 한 이삼십 리 잘 된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보낼 수 있느냐고 했다. 당장이라도 데려가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 앵두나무집 할머니는 치마 속에서 지전 몇 장을 꺼내어 그냥 눈을 감고 있는 송 영감의 손에 쥐어 주며, 아무때나 애를 데려오게 되면 주라고 해서 맡아 두었던 것이라고 했다.
송 영감은 갑자기 눈을 뜨면서 앵두나무집 할머니에게 돈을 도로 내밀었다. 자기에게는 아무 소용없으니 애 업고 가는 사람에게나 주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앵두나무집 할머니는 애 업고 가는 사람 줄 것은 따로 있다고 했다. 송 영감은 그래도 그 사람을 주어 애를 잘 업어다 주게 해 달라고 하면서, 어서 애나 불러다 자기가 죽었다고 하라고 했다. 앵두나무집 할머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하다가 저고리 고름으로 눈을 닦으며 밖으로 나갔다. 송 영감은 눈을 감은 채 가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눈물일랑 흘리지 않으리라 했다.
그러나 앵두나무집 할머니가 애를 데리고 와, 저렇게 너의 아버지가 죽었다고 했을 때, 송 영감은 절로 눈물이 흘러내림을 어찌할 수 없었다. 앵두나무집 할머니는 억해 오는 목소리를 겨우 참고, 저것 보라고 벌써 눈에서 썩은 물이 나온다고 하고는, 그러지 않아도 앵두나무집 할머니의 손을 잡은 채 더 아버지에게 가까이 갈 생각을 않는 애의 손을 끌고 그곳을 나왔다.
그냥 감은 송 영감의 눈에서 다시 썩은 물 같은, 그러나 뜨거운 새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러는데 어디선가 애의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눈을 떴다. 아무도 있을 리 없었다. 지어 놓은 독이라도 한 개 있었으면 싶었다. 순간 뜸막 속 전체만한 공허가 송 영감의 29)파리한 가슴을 억눌렀다. 온몸이 오므라들고 차옴을 송 영감은 느꼈다.
그러는 송 영감의 눈앞에 독가마가 떠올랐다. 그러자 송 영감은 그리로 가리라는 생각이 불현듯 일었다. 거기에만 가면 몸이 녹여지리라. 송 영감은 기는 걸음으로 뜸막을 나섰다.
거지들이 30)초입에 누워 있다가 지금 기어 들어오는 게 누구라는 것도 알려 하지 않고, 31)구무럭거려 자리를 내주었다. 송 영감은 한옆에 몸을 쓰러뜨렸다. 우선 몸이 녹는 듯해 좋았다.
그러나 송 영감은 다시 일어나 가마 안쪽으로 기기 시작했다. 무언가 지금의 온기로써는 부족이라도 한 듯이. 곧 예삿사람으로는 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데까지 이르렀다. 그런데도 송 영감은 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덮어놓고 기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마지막으로 남은 생명이 발산하는 듯 어둑한 속에서도 이상스레 빛나는 송 영감의 눈은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열어젖힌 곁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늦가을 맑은 햇빛 속에서 송 영감은 기던 걸음을 멈추었다. 자기가 찾던 것이 예 있다는 듯이. 거기에는 터져 나간 송 영감 자신의 독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송 영감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단정히, 아주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렇게 해서 그 자신이 터져 나간 자기의 독 대신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백민」(1950. 4)
♠핵심 정리
▷갈래 단편 소설, 순수 소설
▷배경 시간적 - 가을(구체적인 연대는 나오지 않았음)
공간적 - 어느 시골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문체 간결체
▷표현 대화에 의한 장면 제시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 서술자가 직접 인물의 심리, 정황
을 설명하며 주인공의 내면 심리를 면밀히 담아내고 있다.
▷주제 사라져가는 것을 일으켜 세우려는 한 노인의 집념과 좌절
♠구 성
▷발단 아내가 조수와 함께 달아난 것을 알고 분노하는 송 영감
▷전개 송 영감은 자신의 병과 당손이의 문제로 고심하며 독을 빨리 지어내려 이를 악문다.
▷위기 빨리 독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과는 달리 송 영감은 병들어 눕는 횟수
가 늘어가고 보다 못한 앵두나무집 할머니는 당손이를 부유한 집에 보내자고 함
▷절정 독을 굽던 송 영감은 자신의 독들만 터져나가는 것을 보고 마침내 쓰러짐
▷결말 당손이를 보내고서 가마 속에 들어가 죽음을 맞는 송 영감
♠등장 인물
▷송 영감 자신을 버리고 달아난 아내에 대한 배신감, 그 아내를 앗아간 조수에 대한 질
투와 분노로 독을 굽는 인물
▷당손이 송 영감의 아들
▷앵두나무집 할머니 방물장수로 인정 많은 노인. 당손이를 부유한 집에 주선하여 보냄
♠줄 거 리
아내가 젊은 조수와 도망친 뒤, 송 영감은 자신의 병과 아직 어린 아들 당손이 문제 때문에 살아 갈 길이 막막해진다. 생계에 대한 걱정 때문에 조수가 지어놓고 간 독들을 차마 깨부수지 못한 송 영감은 아픈 몸을 이끌고 바삐 손을 놀리지만, 손이 떨려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일하다 쓰러지기를 반복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이는 엄마를 기다리는 듯 집 바깥쪽을 서성이고 이를 본 송 영감은 다시 이를 악물고 독을 짓는다.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던 사이 앵두나무집 할머니가 가져다놓은 밥을 보고 공연히 노여워하던 송 영감은 곧 화를 풀고 아이와 더불어 밥을 떠넣는다.
다음날 역시 송 영감은 병 때문에 제대로 독을 짓지 못하나 여전히 한 가마를 채우고 말겠노라고 고집을 피운다. 앵두나무집 할머니가 다시 찾아와 병을 걱정하며 내미는 조미음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던 송 영감은 당손이를 좋은 자리에 보내자는 이야기에 벌컥 화를 낸다. 양식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송 영감은 다시 독 짓는 일을 서두른다.
비교라도 하듯, 조수가 지어놓은 독과 자신이 지은 독을 나란히 세워놓고 구워내던 송 영감은 자신이 지은 독들만 차례로 튀는 소리를 낸다는 것을 깨닫고 쓰러진다.
이튿날, 송 영감은 앵두나무집 할머니에게 당손이를 좋은 자리에 보내줄 것을 부탁하고 가마 속에 들어가 자신의 깨어진 독들을 대신하듯 죽음을 맞는다.
♠작품의 이해와 감상
1950년 「백민」에 발표된 황순원의 ‘독 짓는 늙은이’는 실제로는 1944년에 씌어진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는 구체적인 연대를 밝힐 아무런 단서도 없이 독 짓는 한 노인의 장인적(匠人的) 집념과 고뇌를 그리고 있다. 젊은 아내의 배신과 독 짓기의 실패에 좌절하고,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온 일터인 가마 속에서 비장한 최후를 맞는 송 영감의 삶에서 우리는 진한 감동을 받는다.
이 작품의 사건들은 특별한 배려 없이 시간 순서로 전개되지만 작품의 서두, 곧 발단 부분이 독특하여 플롯의 독특함을 보이고 있다. 즉 “이년! 이백 번 쥑에두 쌀 년! …… 그래 도망을 가? 것도 아들놈 같은 조수놈하구서…….”에 독자의 호기심과 흥미를 충격적으로 자극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일까?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까? 독자는 첫 줄부터 사건의 전개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을 갖게 한다.
독자는 다음 단락에 와서야, 송 영감의 아내가 왜 누구하고 도망을 갔으며 송 영감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등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 그러면서 독자들은 앞으로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까 하는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작품에 더 가까이 접어들게 된다. 이것이 이 작품의 독특한 구성 방식이다.
또 표현의 방식도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서술과 묘사를 중심으로 한 표현이 바로 그것인데, 이 작품에는 대화를 통해서 제시되는 장면이 거의 없다. 물론 대화도 최대한으로 억제되고 있지만, 모든 사건의 진행은 물론 인물의 내면 심리까지 서술자가 설명적 진술 혹은 서사적 묘사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이 작품의 초점은 독 짓는 늙은이 송 영감이 어린 아들 당손이를 데리고 어떻게 살아가게 되느냐에 모아지고 있다. 송 영감은 이미 쇠잔한 몸에 지병까지 있어서 더 이상 독을 굽지 못할 형편임에도, 어린 아들과 살아갈 일을 생각하며 끝내 독을 한 가마 구워내려고 하지만 이미 몸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송 영감이 독을 구울 때, 독 가마 부근에 있는 거지들의 모습이며 마음씨 착한 이웃 앵두나무집 할머니가 끓여다 준 밥이 아니면 연명할 수도 없는 병든 처지, 자기와 같이 살다가는 거랑질할 것이 두려워 도망갔음에 틀림없는 아내 등 송 영감을 둘러싼 환경들은 송 영감이 스스로 아들을 키워갈 수 없도록, 또 독 짓는 늙은이로서 마지막을 장식할 수밖에 없도록 그 원인들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송 영감이 아들을 앵두나무집 할머니에게 넘겨 주는 행위는 개연적인 사건에서 필연적인 것이 되며, 현대 문명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소멸되어 단절되어 가는 전통적, 본능적 삶의 종말이라는 주제가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전통적인 가치 체계의 붕괴를 겪는 세태에 대항하려고 하는 한 노인의 집념과 좌절을 보여 줌으로써, 격변하는 사회의 한 단면을 재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이 탐구하는 것은 들이닥친 현대 문명 속에서, 문명 이전의 순수한 삶을 다음 세대로 이어 주지 못하는 한 자연인의 종말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이것이 어느 특정한 한 개인의 삶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것을 암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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