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허(凌虛) 박민(朴敏)
樂民 장달수
약력
1566년(명종21) 진주 내동에서 태어남
10세 외조부 鄭角에게 글 배움
19세 생원 진사과에 합격
20세 수우당 최영경을 도동에서 만남
22세 수우당 댁에서 한강 정구를 만남
25세 한강에게 제자의 예를 갖춤.
38세 죽각 이광우, 일신당 이천경, 백곡 진극경 등과 덕천서원에 모여 강론함
51세 두류산을 유람하다.
54세 능허대를 쌓다.
57세 진양지 편찬을 논의함
65세(1630년) 세상 떠남
1708년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됨
1720년 정강서원에 배향
居則皆言莫吾知 살며 모두 나를 알아주지 못한다 하나
知之竟有底事爲 알아준들 무슨 일 할 수 있을까.
不如白石流水洞 깨끗한 바위 물 흐르는 골짜기에서
無願無求守吾痴 소원도 욕심도 없이 나의 어리석음만 지켜왔네
조선중기 진주 내동 선비 박민(朴敏)이 지은 시다. 그는 고향인 내동 독고산(篤古山) 우뚝한 바위 위에 높은 터를 쌓아 능허대(凌虛臺)라고 이름 지었다. ‘능허’는 허공에 오른다는 뜻이니, 어지러운 세상일을 끊고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한 삶을 보내겠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능허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광해군 때 인목대비 유폐 사건 등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가며, 이름을 세상에 내겠다는 생각보다 고향에서 벗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일생을 보낸 선비다. 위의 시가 그의 생각을 잘 드러낸 시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능허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사천시 축동면 반룡포에 있는 묘소가 전부다. 일반적으로 선비 집안에 있을 법한 재실이나 정자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능허가 생전에 올라 학문을 익혔던 능허대는 어딘가 있을 법도 한데 그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능허는 1566년(명종 21년) 12월 초8일 진주 남쪽 독고산 아래서 태어났다. 현재 삼계(三溪)란 마을이다. 약 200여 년 전 태안박씨(泰安朴氏)가 정착하여 마을 이름을 짓기를 서쪽에는 덕천강이 흐르고 북쪽에는 경호강이 남쪽에는 유수천이 흘러 세 강이 합친 곳이라 하여 삼계라고 하였는데, 지역 말로는 ‘삼가래’라고 말하는 곳이다. 능허의 선대는 개성에 살았는데 고려 말 6대조 비(斐)가 처자를 거느리고 충청도 청산현에 살다가 아들 상덕(尙德)에 이르러 진양정씨와 결혼하여 처가 곳에 살게 되며부터 이곳에 정착을 한 것이다.
능허는 어릴 때부터 글을 한 번 보면 외울 정도로 총명했다. 10세 때 외조부 정각(鄭角)에게 사서(四書)를 배웠다. 16세 때 관찰사 앞에서 바람 풍(風)을 시제로 시를 지어 보이니 관찰사가 감탄을 하고 제1등으로 뽑았으며 19세 때 생원 진사 양과에 합격할 만큼 재주가 뛰어났다. 20세 때 진주 도동으로 수우당 최영경을 만나러 갔다. 수우당은 남명 제자로 학식이 높은 선비였다. 수우당이 젊은 능허를 보고는 “그대는 타고난 자질 매우 뛰어나다. 하지만 늦게 태어나서 남명선생에게 배우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 하며 자질을 칭찬했다. 그 이듬해에는 역시 남명 제자인 각재 하항과 조계 유종지를 대각서원에 가서 만났다. 이때 각재와 조계는 능허를 늦게 만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할 정도였다.
능허가 20대 젊은 시절에 남명 제자들을 만나서 학문을 토론한 것은 남명 학문을 계승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다. 남명 제자인 한강 정구가 함안 군수로 부임해 진주 도동에 있는 수우당을 방문하러 온 적이 있는데, 능허도 수우당과 같이 한강을 만나 학문에 대해 묻기도 했다. 뒤에 능허는 한강을 찾아가 정식으로 제자의 예를 갖추고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25세 때의 일이다. 스승으로 모셨던 수우당이 기축옥사에 연루돼 억울하게 목숨을 잃자, 도동으로 찾아가 “강가에 해 떨어지고/ 시든 풀은 산언덕에 어지럽구나/처창한 선생 집터에/가을비만 속절없이 내리누나”라 시를 읊으며 옛 정을 그리워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당하여서는 인동(仁同), 선산(善山) 등지로 옮겨 살다가 난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전란으로 인해 소실된 태안박씨 족보를 다시 편찬했다. 38세 때는 지역 선비들과 덕천서원에 모여 학문을 토론하였고, 48세 때는 침류정(枕流亭) 터에 서실을 세웠다. 침류정은 독고산 아래 남강 위에 있던 정자로 능허의 증조부 호은공 박인이 연산군 때 숨어살던 곳이었다. 박인은 진양지 효행 편에 이름이 오른 인물로 연산군 때 부모상으로 삼년상을 치르지 못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3년 동안 여막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아니한 효자였다.
능허가 침류정이 있던 터에다가 정자를 세워 남호서실이라 하고 남쪽에 종미당(鍾美堂)을 지어 선비들과 학문을 토론했다. 이때 금산 선비 부사 성여신이 두 아들을 보내 배우게 했다. 부사 아들 순(錞)은 능허의 사위다. 서쪽에는 대를 심어 숲을 만들고 대숲 아래 솔을 심어 단을 쌓아 선비들과 강론하기도 했다.
54세 때는 독고산 아래에 능허대를 만들었다. 그 곁에 나무를 심어 시간이 있으면 거닐고 시를 읊으며 즐겨 돌아오기를 잊었다 한다. 이는 마치 옛날 소동파가 적벽에서 놀며 허공에 의지하고 바람을 타고 가는 듯 하여 그칠 바를 모르겠고,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서 학이 되어 신선으로 오르는 듯 한 느낌을 노래한 심정과 같다 할 수 있다. 일찍이 제자 한사람이 부귀한 사람을 이야기하며 부러워하는 뜻이 있는 것을 알고 명예와 이익, 화려함은 본래 쓸데없는 것이니 한 덩이 구름이 저기 있다 생각하고 시험 삼아 관찰해 보라고 했다.
57세 때 고을 선비들과 진양지 편찬을 의논했다. 진양지가 임진 계사년 난리에 불탔기 때문에 이때에 부사 성여신, 창주 하증, 봉강 조겸, 하협 등이 청곡사에 모여 편찬을 한 것이다. 정묘호란 때 능허는 영남우도 의병장으로 근왕병을 일으켰다. 인조가 피난 가자 경상우도 여러 고을이 왕을 구하려 의병을 일으켰는데, 능허를 장수로 추대하였던 것이다. 화친으로 말미암아 적과 싸우지는 못했지만 그 기개만은 높이 살만하다. 1620년 세상을 떠나니 향년 65세였다. 부사 성여신이 장례를 주관하고 조은 한몽삼이 명정을 썼는데, 유명조선(有明朝鮮) 성균진사(成均進士) 능허박선생지구(凌虛朴先生之柩) 라고 했다.
숙종 무자년에 손자 창윤(昌潤)의 벼슬로 인하여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증직되고 이어 경자년에 지방 사람들 뜻으로 정강서원에 위패를 모셨다. 퇴계학맥을 이은 입재 정종로는 그의 묘지명에 이르기를 “진실로 강직하고 진실로 정의로워 그 덕성을 이루시니 아아 반룡포의 소나무 잣나무가 푸르고 푸르구나. 어찌 공경하지 않으리오. 위대한 분의 무덤이로다”고 했다.
남명 제자 부사 성여신은 “남명선생을 사숙하는 여러 사람 중에 만약 사색에 깊이 빠지고 순수하게 익숙하여 뛰어나 월등한 이는 오직 朴行遠이 그렇다”라 했다. 행원은 능허의 자다. 이처럼 뒷사람들이 능허의 인품과 학식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나, 현재 능허의 유덕을 기릴 만한 재실 하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