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삶과사람과 일만 이천 번째 마지막 봉우리를 찾아 남한의 금강산으로

[한림]

일만 이천 번째 마지막 봉우리를 찾아 남한의 금강산으로

미시령에서 상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도 뚜렷이 선을 그었고

속초시내와 동해바다도 오수를 즐기는 듯 고요하다.

앞뒤좌우 사방팔방이 온통 수채화다.

역시 최고의 조망을 지닌 명품지역이다.

“이번 주말엔 금강산 갈까?”

“금강산? 정은이한테 입산허락 받았어?”

유래 만들기 나름일지도 모르겠다. 신선봉을 일컬어 금강산의 첫 번째 봉우리라고들 하지만 일만 이천 번째, 즉 금강산의 마지막 봉우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속초의 울산바위가 큰 덩치를 힘들게 이끌고 울산에서 왔으나 간발의 차로 금강산봉우리에 끼지 못하고 설악산에 속하게 되었다고 하니 울산바위보다 조금 앞선 신선봉도 남쪽에서 올라왔다면 울산바위를 제치고 말석으로 금강산자락에 합류했을 거란 해석을 하는 것이다.

한국전쟁 전, 38선 이북에 위치하여 북한 땅이었던 신선봉일대는 지난 2003년 설악산국립공원에 편입되어 북설악이라 불리고는 있지만 태초에 금강산줄기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들머리인 화암사 일주문의 현판도 엄연히 금강산 화암사이다. 화암사 삼성각에는 금강산 천선대, 상팔담, 세전봉, 삼선대 등 금강산의 이채로운 풍경이 그려져 있어 화암사가 12000봉, 80009암자 중 남쪽에서 시작하는 첫 봉이 신선봉이며 화암사가 첫 암자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적혀있다. 통일이 되면 남금강으로 명명되지 않을까싶다. 아무튼 비자 없이도,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허락 없이도 서울에서 두 시간 만에 달려와 금강산행을 하게 된다. 친구 병소와 동행하였다.

거대한 울산바위의 전신을 한 컷에 담다

화암사입구에는 큼지막한 바위들을 군데군데 닦아세워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을 적어놓았다. 불교의 가르침을 함축하여 표현하는 운문체의 짧은 시구를 게송이라 하는데 그 중 고승이 자신의 깨달음을 노래한 것이 오도송이며, 임종 전에 남겨놓고 가는 노래를 열반송이라고 한단다.

경내에 들어서자 웅장한 팔각정의 종각이 먼저 눈에 띈다. 팔각정을 받치고 있는 돌기둥 석조물도 대단한 공을 들인 조각품처럼 보인다. 대웅전 전면에 세워진 진신사리 9층 석탑과 미륵보살 석상도 화암사의 불교적 위상을 높이는 듯하다. 그러나 화암사는 바로 지척에 왕관모양의 수바위가 솟아있음으로 해서 사찰의 면모가 제대로 빛을 발한다.

일주문을 지나 성인대로 오르기 전 그런 수바위를 모른 체 지나칠 수 없다. 신라 진표율사가 창건한 화엄사華嚴寺는 1912년 건봉사의 말사가 되면서 화암사禾巖寺로 고쳐 부르게 된다. 그 연유는 인근 왕관모양의 수바위秀岩 때문이라 한다.

“수바위에 있는 조그만 바위굴을 지팡이로 세 번 두드려라. 그리하면.”

절의 위치가 민가와 멀어 이곳 스님들이 시주를 구해 공양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는데 그런 어려움을 감내하면서도 수행에 열심인 두 스님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그렇게 지시하는 것이었다. 그대로 따르니 노인이 말한 대로 쌀이 나왔다고 하여 벼 화禾자를 써 사찰이름을 바꿨다고 적혀있다.

수바위에서 울산바위의 전신을 바라본다

수바위에 오르자 화암사경내가 한눈에 잡힌다. 반대편 울산바위의 육중한 몸집이 병풍처럼 펼쳐져 눈을 사로잡는다. 또 뾰족 솟구친 달마봉도 뚜렷이 전신을 드러냈다.

“OK! 그 자리 딱 좋아.”

바위를 돌아가며 병소를 세워 구도를 잡는다. 울산바위의 전신을 정면으로 한 컷에 잡을 수 있는 명소 중의 명소라 하겠다. 조망을 우선시하는 산행이라 기상 좋은 날을 골랐는데 무척 다행이란 생각이다.

드문드문 갈색 가을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한 수림이 광활하다. 울창한 수림 위로 지금부터 오르게 될 상봉과 그 오른편으로 신선봉이 우뚝 솟아있다. 두 봉우리 사이에 낮게 패인 안부가 화암재이니 신선봉에서 다시 내려와 화암재에서 화암사계곡을 따라 하산하게 될 것이다.

수바위에서 조금 더 오르면 시루떡바위가 나온다. 바위 몇 개를 겹겹 얹어놓은 시루떡모양의 바위인데 역시 쌀과 관련지어 명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곧이어 신선대라고도 불리는 성인대가 나온다. 신선들이 내려와 노닐었다는 바위이다.

“그야말로 신선들이 즐기기에 모자람이 없는 경관이군.”

고성과 속초일대 동해바다가 길게 펼쳐있고 영랑호와 청초호도 소담하게 물을 담고 있다. 가까이 내려다보이는 수바위 지붕에 아직도 햅쌀이 흩어져있을 것만 같다.

성인대에서 이어진 바윗길을 따라 낙타바위에 이른다. 낙타가 다리를 접어 앉은 형상이다. 거대한 울산바위의 부분암각들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멈추는 곳마다 시간을 지체할 수밖에 없을 만큼 멋진 풍광들을 보게 되지만 그래서 더욱 한곳에서 오래 머물기엔 시간이 벅차다.

다시 구불구불하게 인제로 넘어가는 미시령옛길을 정겨운 마음으로 내려다본다. 지금 올라가는 신선봉과 남쪽으로 설악산 황철봉(해발 1381m)사이의 안부에 해당한다. 2006년 미시령터널이 개통되면서 해발 826m 정상의 미시령휴게소가 철거되고 새로운 공사가 한창이다. 백두대간 생태홍보관과 전망대 등을 조성하는 중이라고 한다. 속초와 고성 쪽의 영동과 인제 쪽의 영서를 넘는 3대 주요고개인 미시령, 한계령, 진부령이 이젠 드라이브 코스쯤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되고 말았다.

비가 온지 꽤 오래 지났는데도 움푹 팬 바위에 그득 물이 고여 있는 게 이채롭다. 올라선 성인대에서의 조망 중 백미는 수바위에서 보는 것보다 살짝 몸을 비튼 울산바위의 전신모습이다. 북설악에서 울산바위를 가장 멋지게 조망할 수 있는 장소답다.

외설악 멀리 달마봉이 아스라하고 울산바위가 몸을 비틀었다

울산바위 뒤 왼쪽으로 달마대사의 둥그스레한 머리와 닮은 달마봉이 보인다. 어찌 보면 북한산 인수봉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아직도 못 가본 설악산 미답지 중의 한 곳이다. 비탐방구역으로 설악문화제가 개최되는 10월 중에 딱 하루만 개방이 허용된다.

“가지 못하게 막은 곳은 더 가고 싶어져.”

“특히 설악산의 금줄은 몰래 넘어서고 싶은 충동이 마구 생기지.”

산행을 즐기는 산객의 주관적 생각일 것이다. 토왕성폭포, 용아장성, 만경대, 황철봉 등 상사병을 앓게 하는 구간들을 허용하지 않는 생태계보전이나 위험구간통제 등의 명분을 모르지 않지만 보다 융통성 있게 검토한다면 무조건적인 입산통제 말고도 대체방안이 있을 것으로 본다. 철로 끊긴 철길을 내처 달리는 열차처럼 백두대간의 곳곳 출입금지구간을 숨어서 이어가는 게 현실이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이들에게 사실상 산행금지구간은 지켜야할 규범이라기보다 어렵지 않게 넘을 수 있는 일종의 장애물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두대간이 존재하는 한 규범이나 법규준수의 기대가 요원할 걸로 단정한다면 개방을 원하는 고정관념이 강하기 때문일까.

2017년 6월 15일 용아장성 암반지대 속칭 개구멍바위에서 59세의 등산객이 40m 절벽 아래로 추락해 숨졌다는 보도를 접한바 있다. 인간이 욕망을 지니면 목숨을 건 위험도 감수하려하고 법을 위반해서라도 채우려하는 속성이 있다. 자연공원법의 규제적 법조항을 내세운 계도, 통제, 과태료부과 등은 최선의 해법이 아니란 게 개인적 견해이다.

“금강산에 와서 네 조국의 법제도를 비판하다니. 국경 넘어 러시아 알타이산맥에 갔으면 국가체제를 비판하겠구먼.”

견해를 들은 병소가 신랄하게 빈정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북설악은 촛농이 줄줄 흐르는 촛불이다

달마봉 뒤편에서 오른쪽으로 쭉 이어져 대청봉까지 솟구친 화채능선의 외설악전경은 그야말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화채능선 또한 비탐방지역이다. 이 지면에서 공개하려니 머뭇거리게 되지만 몰래 금줄을 넘어 다녀온 권금성부터 집선봉, 칠성봉, 화채봉의 능선 길은 그야말로 눈부신 산길이었다. 설악 곳곳 잠시도 시선 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조망을 만끽했었다.

“문이란 건 닫혀있을 때보다 열렸을 때 더 문 같아.”

그때의 추억을 더듬으며 뚱딴지같은 생각을 하다가 머리를 긁적거린다. 멋진 광경들을 실컷 조망하고 엉뚱한 발상을 해보다가 상봉을 향해 보폭을 빨리 한다. 화암사와 성인대로 갈라지는 길부터는 길이 거칠다.

미시령옛길과 그 너머 백두대간 마등령으로 이어지는 황철봉 너덜지대를 시야에 가득 담으며 암릉구간을 올랐다가 길을 놓치고 말았다. 우회로를 찾느라 20여 분을 소모했다. 산에서는 길을 잃어 헤맬 때 가장 땀이 많이 난다. 긴장으로 인해 체력소모도 더 커지는가보다.

“등산의 꽃은 알바인 거 알지?”

푸념도 못하고 뒤만 따라온 병소에게 얼렁뚱땅 얼버무리며 미안함을 빗겨간다. 곧바로 상봉에서 내리뻗은 암벽이 멋진 자태를 드러낸다. 능선 오른편, 그리 크지 않은 송림이 쓸려 내려갈 듯한 바위들을 받치고 있다. 그 골짜기 위로 바람이 치고 올라와 더욱 불안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엷은 구름이라도 찌를 양 꼿꼿이 뻗은 각진 바위들은 강인해보이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두루 이룬 비탈단애는 오히려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오밀조밀 모인 모양새가 잘 단합된 부락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려니 지나치는 이에게 부락촌장은 바람 같은 목소리로 넌지시 충고를 한다. 참 강함은 부드러움이요, 겸손은 어우러진 결속이라오.

미시령에서 상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도 뚜렷이 선을 그었고 속초시내와 동해바다도 오수를 즐기는 듯 고요하다. 앞뒤좌우 사방팔방이 온통 수채화다. 역시 탁월한 조망을 지닌 명품지역이다.

상봉과 신선봉주변에서는 6.25전사자 유해발굴의 흔적을 보게 된다. 아무리 지나간 역사일지라도 이처럼 멋진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곳에 총을 난사하고 포탄을 터뜨려 아비규환의 전쟁터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슬그머니 부아가 돋는다.

“저분들이 산화하면서 이곳이 북에 넘어가지 않았으니 감사해야겠지.”

돌무더기를 만들어 정상을 표시한 상봉에 가늘고도 신선한 바람이 분다. 납작한 돌 하나에 1239m의 숫자를 적어놓았다. 거의 매일 운무가 끼고 운해가 흐르는 곳이라는데 오늘은 안개 한 점 없다.

산정부터 붉게 물들어 하강하는 설악의 단풍을 보노라니 가슴이 울렁거린다. 대청봉 아래로 천화대와 공룡능선까지 흐릿하나마 눈에 들어오자 가슴이 벅차다. 저기서 보는 이곳은 그리 볼품없어 금세 눈 돌리겠지만 여기서 보는 저 너머는 쉬이 눈을 거두지 못하게 한다. 설악이 얼마나 멋진 곳인가를 거듭 새기게 한다. 자신을 태워 주변을 밝히는 촛불, 북설악은 촛농이 줄줄 흐르는 촛불이다.

다시 날카로운 암반지대를 내려섰다가 올라서면서 신선봉(해발 1204m)에 닿는다. 지도상 해발 1212m로 표기된 암릉봉우리 신선봉은 12·12사태를 빗대 전두환봉이라 지칭하기도 한다는데 어떤 이유로도 그의 이름이 위대한 금강산 봉우리에 덧붙여진다는 게 불쾌하다.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가 의상봉이나 원효봉의 명칭을 물리라며 벌떡 일어나지는 않을까. 도로나 공원, 명소에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붙이는 건 존경받을만한 의인을 기억하며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고자하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물리적 자연훼손만 훼손일까. 대자연의 명예도 함부로 깎아내리면…….

“그만 하자.”

“그래, 이처럼 멋진 천상의 바위에 올라 비틀린 역사를 더듬는 것 또한 할 일이 아니지.”

다시 550m 거리의 화암재로 되돌아간다. 화암재계곡으로 내려가는 숲길은 단풍이 물들어 낙하하는 중이다. 오솔길과 애추崖錐 바위더미길이 반복되기는 했어도 비교적 수월하게 화암사 주차장에 당도했다.

금강산의 첫 봉우리이자 마지막 봉우리를 잘 다녀오긴 했는데 역사와 법률, 정치와 군사, 체제와 이념이 뒤엉킨 장소에서 빠져나온 느낌이다.

머잖은 날에 이곳 북설악이 설악산과 금강산을 잇는 종주산행의 쉼표장소로서 가교역할을 하길 소망하게 된다.

“그런 날이 오겠지?”

“그저 기도할 뿐이지.”

때 / 가을

곳 / 화암사 1주차장 - 화암사 - 수바위 - 성인대 - 상봉 -화암재 - 신선봉 - 화암재 - 화암사계곡(신평리계곡) - 임도 - 원점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