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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귀향 - 안 유 환
“여보, 삼거리 복덕방에선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어요?”
현숙은 공구가방을 1톤 트럭에 싣고 시동을 걸고 있는 중수에게 물었다.
“우리 마을 재개발 착공이 확정되지 않아서 그런지 수퍼를 인수하려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애.”
중수는 머리가 부수수한 현숙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했다.
“값을 더 내리던지, 다른 복덕방에도 내놓으면 좋지 않을까요?”
현숙은 중수와 함께 몫이 좋은 자리를 찾아 수퍼를 옮길 계획을 하고 있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졸갑증을 내고 있다.
“조합결성이 되지 못하면 재개발이 무산될 수도 있는데 마냥 기다리지만 말고 우리도 다른 대책을 세워야 겠어.”
중수는 현숙의 마음을 다독였다. 서둘러 책가방을 메고 뛰어나온 정미와 영수가 아버지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그들은 각각 고등학교 2학년, 3학년이다. 중수는 등교하는 아이들을 공사장으로 가는 길에 버스 정류장에 내려 줄 것이었다. 마루의 벽시계는 7시를 넘어가고 있다. 현숙은 집안으로 들어가 밥상을 치우고 나와 수퍼의 셔터를 올렸다. 늘 하는 일이지만 오늘은 하루가 더욱 지겨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야야!”
수퍼 앞 비치파라솔이 펼쳐진 평상에 걸터앉으며 현숙이 내뱉는 소리이다. 누가 꼬집거나 때리는 것처럼 앉을 때나 일어설 때나, 누울 때나 일어날 때도 장단을 맞추듯, 구호를 외치듯 아프다는 소리는 시도 때도 없이 이어진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여인들은 집안 설거지를 하는 시간이라 아직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없지만 현숙은 가슴이 답답해 일찍이 평상에 나와 앉았다. 4월 초순이지만 날씨는 이미 초여름에 접어든 것 같다. 흔히 살이 많이 찐 사람을 두고 드럼통이라고 빗대지만 현숙은 아예 중세의 거대한 술통을 연상케 하는 몸매이다. 사람들이 물건을 사러 올 때면 마치 바퀴달린 술통이 가게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가 다시 평상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인다.
평상 옆 화분에는 금낭화가 주룽주룽 매달려 있고, 골목길과 맞붙은 창문 쪽으로는 영산홍, 문주란, 그리고 자잘한 분홍 꽃이 핀 선인장 화분이 비틀비틀 줄지어 놓여있다. 가게 외벽에는 하얀 페인트 판에 붉은 글씨로 ‘수도 및 하수도 공사/보일러 교체 및 수리’ 간판이 전화번호와 함께 붙어 있다. 남편인 중수는 보일러수리공으로 일한다. 일반주택과 낡은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이 지역은 2년 전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연초에 골목입구에 내걸린 ‘재개발 조합구성’은 현수막이 너덜해지기까지 아무런 후속 대책이 없다. 언젠가는 헐려야할 집이지만 현숙에게 이 수퍼는 오랜 꿈의 결실이었다. 현숙은 중수와 함께 오늘의 삶의 터전을 이루기까지 건강을 다 잃어버렸다.
몇 집 건너 뒤쪽으로 붉은 벽돌 교회당위에 높이 솟은 십자가를 쳐다보면 처음 믿음을 얻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러나 이곳에 수퍼를 열고는 10년이 가까워오지만 한 번도 서부교회에 발걸음을 한 적이 없다. 예배하러 교회에 가기보다는 틈만 나면 기도원을 찾을 때가 많았고 중수가 대신 시간을 내지 못하면 가게문을 닫기도 했다. 대학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아보았으나 이렇다 할 병명은 찾을 수 없었다. 현숙은 까닭 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흰돌 산, 원주 치악산, 포항 장사골, 청도 동산 기도원 등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름 있는 한약국을 찾아 집맥을 받고 좋다는 약은 다 먹어보았다. 요즘은 다리관절까지 좋지 않아 온갖 민간요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여전히 운신에 불편을 느끼고 있다.
병명도 없이 늘 고통을 호소하는 현숙을 보고 미선 엄마가 기도원에 가보도록 권유했다. 미선 엄마는 서부교회 집사로 신유의 체험을 갖고 있었다. 만사를 젖혀놓고 한 주간 기도원을 다녀오면 현숙은 몸이 한결 가뿐한 것 같고 어떤 때는 병이 다 나은 것처럼 개운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며칠이 못가 몸은 다시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비만체중 때문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부터는 다이어트를 하려고 저녁 한 끼씩을 굶어 보았지만 틈틈이 간식을 하는 습관 때문인지 체중은 줄지 않았다. 나름대로 물만 먹으려고 결심을 해보아도 며칠이 못가 배고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음식조절에 실패함으로 몸은 이렇게 술통처럼 변하고 말았다.
주일날 성경책을 옆에 끼고 수퍼 앞을 지나 교회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남편의 고향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때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어린 자녀를 교육하기위해 교회에서 운영하는 어린이 집을 찾아갔지만 현숙은 그 교회에서 처음으로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요즘은 하루 종일 물건을 사러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하루해를 보내지만 그때는 한주일 내내 교회에 갈 날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돈을 벌기위해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가고 서로가 서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수입도 많아졌고 재산도 늘어났지만 기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교회 앞에는 한 달 전부터 ‘행복은 이곳에서 시작 됩니다’란 현수막이 내걸렸다. 이웃에 사는 철이네와 미순 엄마가 차례로 초청장을 내밀면서 이번 부활절에는 꼭 교회에 나가도록 손가락을 걸자고 졸랐다. 왜냐하면 언제나 대답은 쉽게 하지만 현숙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숙은 가게를 버려두고 잠시 나들이 할 짬도 없는데 교회에 나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친정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 외에는 나들이를 해본적도 없다. 기도원에 가는 것도 은혜를 사모하기보다는 병 낫기 위한 한 가지 생각뿐이기 때문에 며칠이 지나면 마음은 더욱 허탈해지는 것이 예사이다.
현숙의 고향은 우리나라 남한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구미공단지역이었다. 공단이 들어오기 전에는 드넓은 들판과 야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농촌에서 현숙은 자랐다. 조상 적부터 이어 내려온 농가의 3녀 2남중 맏딸로 태어난 현숙은 어릴 적부터 어린 동생들을 돌보았다. 동생들이 울면 업어주고 배고프면 밥을 찾아 먹였다. 가까스로 중학생이 되었지만 공부보다는 부모님의 일손 돕기에 바빴다. 엄마와 아빠는 별을 보고 집을 나가면 별을 보고 집으로 돌아올 때가 많았다. 모든 집안일은 맏이인 현숙이 돌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현숙이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 구미공단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넓은 들녘의 야산들이 깎여나가고 초등학교도 20리나 떨어진 먼 곳으로 옮겨졌다. 논밭이 많았던 사람들은 제법 보상비를 많이 받아 배후 신도시지역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현숙이네처럼 쥐꼬리만 한 보상비로 신도시 이주가 불가능한 사람들은 공단조성의 자투리로 남은 칠곡군 쪽 한구석에 모여 살 수 밖에 없었다. 신기동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조립식으로 집을 짓고 생활을 시작했다. 현숙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1학년도 끝내지 못하고 공단에 취직을 했다. TV부품을 만드는 일관작업가운데 간단한 납땜질을 하는 단순 노동이지만 그것은 어려운 집안 살림에는 적잖은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공휴일도 없이 거의 매일 밤10시가 되어야 귀가할 수 있기에 몸은 여간 피곤하지 않았다. 신도시에서 학업을 계속하거나 대구나 김천으로 유학한 한 친구들은 은행이나 회사의 사무원으로 취직을 하기도 했다. 어떤 친구들은 대학생으로 장래의 꿈을 키우지만 현숙의 꿈은 멀리 있지 않았다. 자랄 때 농사일과 가사에 시달리고, 커서는 여공으로 잠이 부족하리만치 피곤에 지쳐 살아온 현숙은 어떻게 하면 내 몸 하나 편하게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먹고 입는 것이 해결되면 보다나은 삶의 질을 찾아가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현숙은 언제나 힘든 삶을 좀 내려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현숙은 모처럼 공휴일에 어린조카 이발을 시키기 위해 지난달에 다시 문을 연 이발소를 찾았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이발사가 미소 띤 얼굴로 친절하게 맞아주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전에는 조카 이발을 시키려면 멀리 초등학교 앞까지 가야했다. 신기동에도 조그만 이발소가 있었지만 주민수가 줄어들어 문을 닫았고 미용실도 떠나버렸다. 이태동안 방치되어있던 마을 이발소를 얼마 전에 인수한 사람이 새롭게 단장하고 일을 시작한 것이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이발을 위해 멀리까지 가는 불편을 덜 수 있게 되었다. 이발소 새 주인은 손님이 많지 않고 수입도 얼마 되지 않을 것이지만 얼굴빛은 늘 밝았다. 나이는 좀 들어 보여도 이발사가 총각인 것도 마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발사의 집은 신도시에 있었다. 그는 참 부지런한 것 같았다. 아침7시쯤 되면 오토바이로 이발소에 도착하여 창문을 열고 앞길을 깨끗이 쓸고 물을 뿌렸다. 노인들에게는 특별히 이발비를 반값으로 할인해주어서 마을에도 좋은 평이 돌았다. 현숙이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서면 이발소 앞에서 그를 만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오토바이로 출근하는 그를 보고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현숙은 친척들이 선을 보라는 말을 할 때마다 이발사 얼굴을 떠올리며 소개하는 신랑감이 농촌총각이라는 이유로 쉽게 거절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발사와 결혼하면 농촌이나 공단에 매달리는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이듬해 가을 현숙은 공단친구들의 축하와 부러움 속에 이발사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과 함께 여공의 생활도 접었다. 중수가 출근하고 나면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옛날에 함께 살았던 친구들을 찾아가 수다를 떨기도 하고 여성월간잡지를 사다 읽기도 했다. 잡지에는 현숙이 바라던 모든 것이 들어있었다. 철따라 커튼을 아름답게 바꾸기, 베란다 화단 가꾸기, 봄이 오기도 전에 유행할 패션이 현숙의 눈길을 끌었다. 흑백TV 아침연속극을 보다 가계부를 쓰고 오늘 저녁반찬을 무엇으로 할까 생각하다보면 하루해가 저문다.
결혼한 지 6개월이 지나면서 중수는 일찍이 출근하고 저녁은 집에서 함께 먹던 삶의 패턴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았다. 출근시간이 오전10시가 넘을 때가 많고 어떤 때는 이발사를 기다리던 사람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그런 일이 조금씩 늘어났다. 퇴근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배가고파 주전부리를 하며 남편을 기다리지만 술이 취해 들어온 중수는 밥 생각이 없다고 말하며 그대로 스러져 잠들기도 했다. 어떤 때는 인사불성이 되어 자정이 가까워 들어올 때도 있었다. 중수는 평소에는 별로 말이 없는 편이지만 술이 거나해 집에 들어왔을 때는 말이 많았다. 그는 여태껏 집안일을 함께 의논하기보다는 혼자서 결정하고 통보하는 식이었다. 이날은 모처럼 술도 마시지 않고 일찍 들어왔다.
“여보, 당신 참 수고가 많아. 힘들지?”
중수는 현숙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내가 힘들게 뭐 있어요. 당신이 수고가 많지.”
현숙은 뭔가 고민하는 듯한 중수의 얼굴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당신이 보기에는 어떤가? 난 아무래도 이발사 체질이 아닌가봐. 건강하나는 괜찮은 편이었는데 몸이 점점 안 좋아지는 것 같애.”
힘없이 말을 내뱉는 중수의 얼굴은 몹시 수척해 보였다.
“내 생각에는 당신이 술만 좀 줄인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현숙은 술과 불규칙한 생활이 남편의 건강을 해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혼 초창기만 해도 중수는 출근할 때 도시락을 싸들고 가서 점심을 해결했지만 이제는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을 시켜먹을 정도로 형편이 나아졌다. 공단 쪽에도 신기동 이발소에 대한 좋은 소문이 나서 이발 손님도 조금씩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수의 출근 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공단 쪽 사람들은 주로 저녁 때 이발을 했지만 신기동 사람들의 이발시간은 대체로 이른 아침이었다. 일찍 이발을 하고 멀리 떨어진 논밭으로 가고, 결혼식에 참석할 때도 날이 밝기를 기다려 이발소를 찾았다. 중수가 마을사람들의 이발시간을 맞추지 못하면서 너도 나도 불편을 호소했다. 결혼하고 나서 이발사가 너무 변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이 귀에 들어올 때마다 현숙은 애를 태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현숙은 어머니 마음으로 남편을 받아주고 감싸주었지만 직업에 대한 애착은 시들해지는 것 같았다. 한 달에 한번 월요일에 쉴 때도 종일 잠만 잤다. 결혼한 지 1년도 채 못 되어 단란했던 가정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성큼 다가오는 어느 날, 중수는 느닷없이 현숙에게 여행을 제안했다.
“당신 못난 남편 만나 신혼여행다운 여행도 해보지 못했는데, 우리 다음 주간에 제주도에 며칠간 다녀오면 어떨까?”
바쁠 때 남편 일을 도와주던 친구에게 그동안 이발소를 맡길 수 있다고 말했다. 모처럼 여행에 대한 생각 때문인지 중수의 얼굴은 뭔가 좋은 일이 생긴 것같이 밝아보였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면 이따금 전에 보지 못했던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중수의 의중이 어떻다 할지라도 현숙은 난생처음인 제주도 여행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여성잡지를 읽으며 생각하던 꿈들이 현실로 성큼 다가서는 것 같아 기대감을 더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비행기도 타보고 야자수가 늘어선 제주도는 육지에서 볼 수 없는 환상적 풍경이었다. 성산 일출봉, 외돌개, 여미지, 만장굴, 천지연 폭포 등, 가는 곳마다 여러 쌍의 신혼부부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현숙은 신혼여행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2박 3일은 정말 꿈꾸는 것처럼 지나갔다. 제주도 여행 마지막 날 섭지코지를 돌아내려올 때였다.
“여보, 우리 이발소를 처분했어. 좀 더 좋은 자리를 찾아봐야 겠어.”
중수가 불쑥 내뱉은 말이다. 현숙은 이발소가 한층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너무도 뜻밖이었다. 이유는 수고한 만큼의 수지를 맞출 수 없고 적은 수입이 목마르다는 것이다. 인수자는 남편의 일손을 거들던 친구의 아버지라고 했다.
“······”
현숙은 할 말을 잃었다. 여행에 들떠있던 기분은 싹 가라앉았다. 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었다. 즐겁게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서 남편에게 따지고 들 수도 없었다. 충격이 너무 크면 아무런 생각이 없어지는 것인가? 현숙은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고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그러나 금방 생활에 어려움이 닥치지는 않았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발소를 처분한 돈으로 생활을 꾸렸다. 추워지는 날씨와 함께 집안 곳곳에는 찬바람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자리를 물색한다던 중수는 차일피일 하고 있었다. 믿고 의지하던 남편을 불신하면서 현숙은 잔소리가 늘어났고 중수는 술을 마시는 날이 더욱 많아졌다. 무엇보다도 남편의 건강이 말이 아니었다. 남편이 고민하는 모습은 참으로 안쓰러웠다. 마침내 현숙은 자기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여보, 고민이 있으면 다 털어놓아요. 무얼 더 감출게 있어요?”
나란히 잠자리에 누운 채 현숙이 내뱉는 말을 듣고도 중수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잠이든 것도 아니었다. 현숙은 남편 쪽으로 돌아누우며 말없이 널따란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잠들기 전에는 언제나 중수가 아내의 젖가슴이 제자리에 붙어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더듬던 일을 오늘은 현숙이 하고 있는 것이다. 현숙은 남편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그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여보,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다는 것 알지?”
침묵을 깨고 중수는 아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이때까지 현숙에게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은 입 밖에 내본 적이 없는 남편이었다.
“그럼, 알고말고. 신기동 마을에 다른 친구들도 있었지만 당신이 유독 나한테 눈길을 두고 있을 때부터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어. 내 친구들이 얼마나 나를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 당신 모르지?”
현숙은 중수의 고민이 무엇인가 들어보고 싶어 쉽게 맞장구를 쳤다. 뜻밖에도 중수는 고향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고향은 구미공단에서 멀지않은 영동이었다. 요즘도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비단숲강 마을이 중수의 고향이다. 설이나 추석에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을 뵈러 갈 때마다 현숙은 요즘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외아들인 중수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했었다. 입대하기 전에는 건축공사장의 데모도로 일한 적도 있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와서는 한동안 외삼촌의 이발소에서 심부름을 하며 이발을 배웠다. 젊은이들의 취직이 어려웠고 제대를 하고나서 농사일을 계속한다는 것이 중수는 마음에 내키지 않아 어머니의 권유로 외삼촌과 함께 2년 남짓 일했다. 바리캉으로 아이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어른들의 이발도 조금씩 손에 익혔다. 무엇이나 손쉬운 것은 없었다. 이발사는 사람들이 즐겁게 노는 날이 더 바빴고 점심시간이나 저녁식사시간을 전후해 이발소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 식사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다. 중수가 처음 이발을 배울 때는 호기심과 함께 약간의 성취감도 있었으나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은 여전히 일손이 부족하여 농사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면서 중수는 아버지를 돕기로 마음먹었다. 중수는 군대생활을 하면서 어느 정도 철이 들었고, 다른 일들도 경험해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아름다운 고향마을에서 농부로 일생을 보내고 싶었다. 때마침 4H운동의 물결이 농촌의 미래에 한 가닥의 빛을 비춰주고 있었다. 다수확 벼 품종이 개발되고 특용작물을 통해 농촌의 수입도 짭짤해지고 있었다.
중수의 혼기가 꽉 차면서 생각지도 않았던 어려움이 닥쳤다. 부지런히 일하고 농사가 잘되면 모든 것이 잘 풀릴 줄 생각했으나 결혼할 배우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모든 농촌 총각들이 겪는 공통의 고민이었다. 부천 산업단지나 구로공단이 생겨나면서 시골에 박혀있던 아가씨들은 공장의 일자리를 따라 너도나도 앞 다투어 도회로 나갔다. 멀지않은 곳에 구미공단이 생겨나면서 시골에서는 신부감을 찾아보기 더 어려웠다. 가까스로 중매가 연결되어도 중수가 고향을 지키며 농부로 살아가겠다는 소신을 밝히면 즐겁게 얘기하던 아가씨는 입을 닫았고 돌아가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중수는 젊은 오기로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부모님이 더 답답해했다. 어서 외아들을 결혼시켜 손주도 안아보고 싶을 뿐만 아니라 아들을 짝지어주는 것이 부모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어머니는 더욱 성화였다. 어떡하든 결혼을 시켜야 한다면서 친지들에게 두루 청을 넣어보았지만 농촌으로 들어오려는 아가씨는 없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처럼 결혼을 하려면 아가씨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중수 아버지와 어머니가 의논하고 만들어낸 결혼대책이 아들을 도시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외삼촌과 의논하고 수소문하여 구미공단 신기동에 오래도록 문을 닫고 있던 이발소를 인수하게 된 것이다. 중수는 마음에 내키지 않아 반대했지만 ‘정 그렇다면 결혼을 할 때까지 만이라도 이발사로 일하도록 하라’고 어머니는 애걸하다시피 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결혼하기위해 이발소를 차렸지, 이발사로 살고 싶지는 않았어.”
중수는 풀죽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현숙은 감쪽같이 속은 것이 분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동안 현숙은 죽어도 농촌에는 살고 싶지 않았고 농촌총각과 결혼하기보다는 이발사와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다 그 뜻을 이루어 만족해하고 있었다. 중수는 현숙이 동의하면 지금이라도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현숙은 중수의 진솔한 고백을 듣고도 자기생각을 고집할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고향마을의 아름다운 모습과 인자한 시부모님을 생각하면 농촌생활도 못 견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발소를 처분한 돈이 바닥나기 전에 중수는 현숙과 함께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다. 이듬해 가을에 현숙은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다. 그 다음해는 예쁜 딸도 얻었다. 논밭에 뿌린 씨앗이 자라듯 아이들은 잘도 자랐다. 농사일은 중수가 도맡아 하기에 현숙은 어릴 때처럼 농촌생활이 그렇게 고달프지는 않았다. 한가하게 여성잡지를 읽을 때면 다시금 신혼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세 살, 네 살 되면서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자녀교육에 대한 문제였다.
현숙은 조기교육의 중요성을 잡지에서 읽으면서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해 보았으나 대책이 없었다. 마을에는 초등학교도 십리쯤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유치원이나 어린이 집도 없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갔고 노인들만 남아있는 마을에 어린이집이 필요할리 없었다. 현숙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좀 떨어진 면소재지 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어린이집을 찾았다. 중수의 경운기로 20분 거리이지만 시간을 잘 맞추면 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었다. 아이들이 4살 5살 되면서 교회어린이집에 입원을 시켰다. 그러나 현숙이 바라는 유치원교육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집은 아이들 교육보다는 성경이야기와 교회노래를 많이 들려주며 전도에 목적이 있는 것 같았다. 이름부터가 선교원이었다. 그래도 종교적 색깔만 빼면 어린이들의 양육에는 유익한 점이 많았다. 30여명밖에 안 되는 원아들의 어머니들이 모일 때는 자녀교육에 대한 정보를 교환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교사들의 자상함과 친절함이 현숙의 마음에 들었다. 어린이 주일이나 성탄절에 원아들의 발표회가 있을 때면 현숙은 중수와 함께 빠짐없이 참석했다. 한때는 교회를 막연히 경원했으나 자모들과는 물론 교사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현숙은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아무도 자기를 그처럼 소중히 여기며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현숙이 교회에 빠지는 날이면 어머니들은 잊지 않고 전화로 안부를 확인했다. 스스로도 자기에 대한 관심이 깊지 않았던 현숙에게 그러한 관심은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교회 밖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신앙생활이란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는 것! 현숙에게는 신앙이 그렇게 마음에 다가왔다. 1년 뒤에는 세례교인이 되었다. 한 가지 큰 문제는 남편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한 가지는 미래에 대한 생각이었다. 신앙이 들어가면서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자녀들의 장래에 대해서도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현숙은 남편을 따라 돌아온 고향을 다시 떠나고 싶었다. 현숙은 매일 잠자리에 들면 중수에게 두 가지를 졸랐다. 하나는 중수가 자기와 함께 교회에 나가는 것. 또 하나는 아이들이 더 자라기 전에 교육환경이 좋은 도시로 나가자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했다.
중수의 고향을 떠나 올 때를 생각하면 현숙은 가슴이 아프다. 나이가 들어 부양이 필요한 노부모님을 두고 아이들 교육환경을 개선하려고 도회로 떠나온 것은 불효라는 말로밖에 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때까지 중수는 부지런히 일하여 특용작물로 소득을 올리고 정말 등 따시고 배부른 가정이 되어있었다. 취나물을 주로 재배했으나 오미자 단지와 곰취 나물을 하우스 재배하여 많은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현대문명을 등지고 있는 불비한 교육환경이 현숙에게 갑갑함을 더했던 것이다.
중수와 현숙이 처음으로 수퍼 문을 열었던 곳이 지금 살고 있는 D시의 변두리 지역이다. 요즘 한창 재개발과 신개발 지역을 확대해가고 있지만 아직은 옛날 마을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생활은 다소 불편한 지역이다. 마을 안쪽에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지만 아이들을 위한 과자나 간단한 문방구류를 팔고 있을 뿐이었다. 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노부부는 가게 일이 힘에 부쳤고 시설을 확장할 여력도 없었다. 중수는 복덕방을 통해 이 가게를 인수하고 리모델링을 했다. 생선·채소류를 비롯한 식료품 코너도 신설하고 ‘상록수퍼’라는 간판도 새롭게 달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 멀리까지 나가지 않아도 웬만한 생필품들은 이 수퍼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현숙은 수퍼를 지키고 중수는 틈을 내어 트럭으로 새벽시장을 보아 왔다. 한차례씩 산지에서 채소류를 대량으로 받아오기도 했다. 중수가 이곳에 들어온 뒤부터 서서히 개발붐이 일면서 주변의 땅값도 들먹였다.
지난봄엔 경매에 나온 단독주택을 하나 구입해 전세로 내주기도 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다보니 몸이 견뎌 내지를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숙은 쳇바퀴 돌듯 매일 가게 안팎을 맴돌았다. 수퍼를 시작한지 5년을 넘기면서 현숙은 술통처럼 체형이 굳어지고 병명도 없이 여기저기 아픈 곳이 나타났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마을입구 도로변에 현대마트가 들어섰다. 투자를 많이 한 대형마트와 현숙이네 수퍼는 경쟁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손해를 보며 장사를 계속할 수도 없었다. 오래된 단골 소님들도 새로 생긴 마트를 찾아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손님은 줄어들고 몸은 아프고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여러 가지를 팔던 품목을 줄여보아도 수퍼를 지키는 시간을 줄일 수는 없었다. 주변이 차츰 발전하면서 이제 상록수퍼는 처음 노부부가 운영하던 가게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현숙은 칠곡에 혼자 살고 있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새털구름이 흩어진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황혼 빛을 받고 있는 서부교회 십자가가 오늘은 현숙에게 점점 더 크게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영수 엄마, 내일 부활절엔 꼭 교회에 나갑시다.”
교회에서 부활절 준비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미순 엄마가 현숙에게 새끼손가락을 꼬부려 보이며 말했다.
“미순 엄마, 내일은 급히 고향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다음에는 내가 꼭 나가지.”
현숙이 이곳에 이사 온 후로 “다음에-” 라고 말한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사실은 교회에 나가고 싶어도 입고나갈 마땅한 옷이 없었다. 머리손질도 해본지 오래된 모습을 교인들 앞에 드러내고 싶지도 않았다. 지난날 살기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에서는 벗어났지만 생활패턴이 갑자기 바뀌지는 않았다. 중수는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허구한 날 현숙이 가게를 지키고 앉아있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중수가 신개발지 아파트 배관공사를 맡아 일하면서 형편은 더욱 좋아졌다. 그런데 현숙의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된 것이다. 몸이 아픈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마음을 짓누르는 어두운 그림자이다. 몸도 마음도 평안이 없었다. 마음은 늘 구름 낀 날씨처럼 어둡고 무언가 불안하기까지 했다. 마치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옹벽아래 자리 잡고 있는 집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현숙은 틈만 나면 중수의 고향마을과 교회를 생각했었다. 부활절엔 색깔을 칠한 삶은 달걀을 아이들과 온 교인들에게 나누어주며 함께 할렐루야 찬송을 불렀던 그때, 그 평화를 잃어버리고 허우적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환영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현숙은 미순 엄마가 주고 간 부활절 초청장을 다시 꺼내어 읽어본다.
‘평화를 찾는 사람에게’
“사람이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찾아 듭니다.”(로마서8:6)
‘행복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불러주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로마서8:30)
현숙은 ‘사람이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찾아듭니다.’란 말씀을 입술로 되뇌어 보았다. 현숙과 중수가 오래도록 마음을 써온 것은 모두 육체적인 것이었다. 현숙은 마을 사람들이 저녁준비를 위해 수퍼에 들릴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가게문을 닫았다. 그리고 현숙은 현대마트 건너편에 있는 미용실을 찾아가 머리를 손질했다.
“여보, 오늘은 당신이 새사람 같네. 신혼여행을 한 번 더 가야겠어!”
늦은 저녁식사를 하며 남편이 농담을 던졌다.
“하하하-. 내일 바로 떠나도록 합시다.”
현숙도 웃으며 받아넘겼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우리 수퍼를 새롭게 리모델링을 하는 것이 좋겠어. 뒷마당 쪽으로 매장을 확장하고 점원도 두어야겠지. 오늘까지 당신 혼자서 수고가 너무 많았잖아. 마음만 먹으면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중수의 제안은 진지했다.
“수퍼를 계속하려면 아무래도 대책을 강구해야겠지요.”
현숙은 중수의 말대로 수퍼를 확장하고 시설을 개선하면 현대마트로 빼앗긴 마을 고객들도 다시 돌아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중수는 언젠가 수퍼가 팔리기만 하면 신도시 아파트 단지 내의 매점을 구입할 수도 있다는 뜻을 비쳤다. 두 사람은 잠자리에서 아이들 진학문제를 비롯해 늦게까지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현숙은 이제 두더지 같은 생활을 좀 벗어나고 싶었다. 살기위해 일하는지 일하기 위해 사는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여보,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현숙은 잠자리에 누운 중수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말을 꺼냈다. 현숙도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의 속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오랜 세월 고락을 같이 해왔다.
“그럼, 아다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언가?”
남편은 얼른 맞장구를 치며 물었다.
“나, 이제 그만 수퍼에서 놓여나고 싶어요.”
현숙은 이렇게 말하고 나니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은 것처럼 몸과 마음이 후련했다.
“······”
수퍼를 새로 확장하려던 계획을 갖고 있던 중수는 가슴에 얹힌 현숙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일이 부활절이잖아요. 갑자기 내가 처음 믿음을 얻었던 교회에 다시 가보고 싶어요. 오랜만에 부모님도 뵙고······.”
현숙은 하루 종일 생각하던 속마음을 남편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칠곡의 어머니 얼굴도 함께 떠올렸다. 중수도 언젠가는 장모님을 비단숲강 마을로 모셔와 함께 살고 싶은 꿈을 키우고 있었다. 중수는 말없이 현숙을 꼭 껴안았다. 오늘까지 미뤄오던 현숙의 한 가지 소원도 들어주고 싶었다.
(부산크리스천문학 2014년 제2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