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史記 12회 》
☆七顚八記의 覇者,晉文公☆
진(晉)나라는 기원전 1042년에 周나라 武王의 둘째 아들 우(虞)가 진(晉)을 분양 받아 다스리기 시작한 제후국입니다.
이 晉나라의 24대 제후가 文公입니다.
이 文公이 천신만고 끝에 晉의 군주에 오르고 패자(覇者)된 과정을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헌공(獻公)은 아버지 무공(武公)이 죽은 뒤 계모를 아내로 맞아들여 신생(申生)을 낳았고 북쪽의 흉노족(北狄) 여인을 전쟁중에 포로로 잡아 아내로 삼았는데 그여인 몸에서 딸 한명과 중이와 이오라는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 중에 중이(重耳)가 나중에 문공이 됩니다.
헌공은 또 서쪽 오랑캐라고 하는 서융(西戎)의 공주 2명을 얻어왔는데 언니 여희에게서 해제(奚齊)를 얻고 동생 소희에게서 탁자(託子)를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헌공에게는 신생, 중이, 이오, 탁자 등 네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왕조든지 자식이 많으면 왕위 계승 문제로 다툼이 있게 마련인데, 진헌공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원래 태자는 장남인 申生인데 그의 계모(여희)가 헌공이 자신의 나라(서융)을 멸망시킨 것에 앙심을 품고 태자 신생이 음식에 독약을 넣어 자신에게 보내왔다고 모함을 하여 헌공으로 하여금 아들을 죽이게 하니, 태자 신생은 아버지 헌공의 명으로 자결하였습니다.
상황의 위급함을 느낀 북적(北狄) 여인의 소생인 중이는 적(翟)나라로 이오는 양(梁)나라로 탈출하였습니다.
중이는 망명생활 중에 여희측에서 보낸 자객으로부터 테러를 당하기도 하며 19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였습니다.
한편 晉나라에서는 여희의 소생인 해제(奚齊)를 태자로 봉했으나 반대측 사람들에게 암살 당하고 그의 母 여희는 자살하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헌공이 죽게 되자 晉나라에서는 중이를 군주로 모시려고 하였으나 중이가 사양하였으로 동생인 이오가 군주에 오르니 그가 혜공입니다.
혜공은 같은 배(胚)에서 태어난 兄 중이를 죽이라는 암살조를 보냈는데, 중이는 이를 피하기 위해 齊나라, 曺나라, 松나라, 楚나라 등 여러나라로 떠돌아다녔습니다.
마지막 정착한 곳이 楚나라였는데, 초나라 성왕과 진(秦)나라 목공(穆公)의 도움을 받아 혜공의 후임자 회공을 치고 晉나라 군주의 자리에 올라 문공이 되었습니다.
晉나라를 다스리게 된 중이(문공)는 망명생활 중에 터득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나라를 안정되게 발전시켰으며 크고 작은 전쟁을 통해 영토도 넓혔습니다.
그리고 불과 5년 만에 전국의 패자(覇者)가 되어 하늘에 올리는 제사를 주관하는 제주(祭主)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전국 제후들 중에서 覇者만 천자를 대신하여 하늘에 올리는 제사를 주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천토회맹(踐土會盟)으로 晉文公이 치음 시작한 것입니다.
#문공의 아버지 헌공이 계모를 아내로 맞이 한 이유는 원래 그 계모가 제환공의 딸이며 헌공의 신부감으로 거래가 되었는데, 시아버지 될 무공이 중간에서 낚아채는 바람에 끽소리 못하고 있다가 아비가 죽은 뒤에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그런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당나라 측천무후는 태종 이세민의 후궁이었는데 아들 고종이 자신의 왕비로 맞이들였고, 당현종은 자신의 18번째 아들 수왕의 처 양옥환을 빼앗아 귀비로 삼았으니, 그녀가 그 유명한 양귀비입니다.
#晉文公이 망명생활을 할 때 몸종처럼 수발을 들어주었던 개자추(介子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망명생활 중 못먹어서 허기진 문공에게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먹였습니다. 그러나 문공은 그 공을 잊어버리고 개자추를 공신의 반열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 일이 생각나서 개자추를 찾았으나, 그는 늙은 노모를 모시고 산 속으로 숨어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계속 찾아도 나오지 않자 문공은 산에 불을 지르면 나올 것이라 생각하고 불을 질렀는데도 나오지 않아 잿더미를 뒤적이다 보니, 시커멓게 탄 잿더미 속에서 모친과 함께 숯덩이가 된째로 발견되었습니다.
문공은 자신의 잘못을 탓하며 통곡하면서 앞으로 오늘은 모든 백성이 불을 피우지 말고 찬밥을 먹으라고 선포를 하였습니다.
바로 그날이 지금까지 내려오는 한식(寒食) 날이라고 합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시원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