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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3일(목) 장터목대피소.
충격 상태에서 취사장으로 돌아와 끓고 있는 라면물에 스프를 1개 반 푼다. 벽소령에서 먹고 남은 고기를 구워서 통에 담아뒀는데 모두 라면에 넣고 함께 끓였다. 정말 맛있는 돼지고기라면이 되었다. 밥까지 함께 끓여서 김치랑 맛나게 먹었다. 먹는 동안 내내 따뜻하게 먹으려고 가장 약불로 켜놓고 먹었더니 식지 않아서 좋다. 벽소령에서 맛없게 라면을 먹게 되어 노하우가 생긴 것이다.
부부로 보이는 어느 분께서 함께 나눠먹자며 파절이를 얹은 삼겹살 한 점을 맛보라고 주셨다. 그래 이런 정이 있어야지. 아주 맛있었다.
내가 갖고 온 휴지를 벽소령에서 요령있게 사용하지 못해 거의 절반도 안남았다. 밥 먹은 뒷정리를 하다가 휴지를 옴팡 써버려서 넉넉하게 갖고 왔는데도 거의 다 써버리게 되었는데 대피소에서 휴지를 팔지 않아 난감했다. 그런데 벽소령에서 만났던 등산객분이 장터목에서 하루 잠만 자고 바로 내려갈꺼라고 하셔서 크리넥스 작은 거 여유분 1개를 받아왔었다. 아끼고 아껴서 뒷정리를 야무지게 해본다. 다음번에 올 때는 휴지를 더 넉넉하게 가져와야겠다. 사실 벽소령에서 라면 먹고 국물이 많이 남았는데 주변에 버릴 수가 없어서 휴지로 일일이 적셔서 뒷정리를 했던 것이다. 벽소령 화장실은 자연정화시설이었기 때문에 변기에 버릴 걸... 그 생각은 못했다.
면 위에 고기를 얹고 김치잎사귀 부분으로 야무지게 싸서 맛깔나게 먹으며 나의 대장과 직장에게 명령했다. 절대로 화장실은 안된다. 작은 것까지는 몰라도 큰 거...? 절대 NO!
벽소령은 전반적으로 쾌적한 반면 장터목은 이용하는 사람이 더 많아서인지 취사장에서 냄새도 많이 났다. 잔반통이 있어서 음식이 남으면 바로 버릴 수 있었는데 내 생각에 잔반통을 없애는 게 환경에 더 나을 것 같다.
실내에 들어오니 훈훈한 온기가 좋다. 바닥도 잠자기 딱 좋을 정도로 뜨뜻해져있다. 벽소령은 전기온도가 너무 뜨거워서 온도를 낮췄다 껐다 조절하느라 애먹고 시원한 바닥면을 찾느라 약간의 애로사항이 있었는데 장터목은 따뜻하게 잘 잘 것 같다.
소화시키느라 스트레칭 좀 하고 다음날 정상가는 시간과 전체 산행시간, 교통편 등을 알아보았다. 아직까지 버스편을 안알아보고 있었는데 중산리로 가면 원지정류소까지 나가서 대전으로 가야하고 백무동으로 가면 함양으로 해서 대전으로 가면 된다.
정상에서 다시 장터목으로 내려올 필요없이 하산하려면 중산리 방면 뿐이다. 원지정류소에서 티켓팅할 생각으로 앱에 들어가니 다 매진?? 이게 뭔일이지? 등산객이 많지도 않은 시즌인데 매진이라니... 혹시나 취소 티켓이 나올 것 같아 간헐적으로 새로고침해가며 앉아있으니 저녁 6시 35분 출발하는 티켓 한 장이 나왔다. 얼른 결제하고 9시 40분 취침!
14일(금)
오전 5시 기상. 원래는 9시에 출발할 계획이었는데 눈이 떠져버려서 말이다. 일출욕심이 없어서 느긋하게 가려 했는데 몸도 쑤시는 데 없고 컨디션이 나쁘지 않아 일어나버렸다. 장터목 화장실이 아직도 충격이어서 아무것도 안먹고 씻지도 않고 그냥 바로 짐 챙겨서 출발하려 한다.(출발전에 어쩔 수 없이 한번 갔다. 어젯밤에도 잠들기전에 한번 갔다오는게 좋겠다 싶어 갔고)
6시 35분 남편과 통화 한번 하고 아이젠과 랜턴 착용하고 출발.
눈 뜨고 일어나서 산행채비를 할 때에는 밥도 안먹고 바로 나설 꺼니까 6시면 출발하겠다 싶었다. 게다가 정상까지 이동거리가 약 1.6km 정도 밖에 되지 않으니 한 시간이면 가겠구나 했다. 일출 욕심은 없었으나 이왕 일찍 나서는거 정상에서 일출을 보자 했다. 그런데 배낭 패킹까지 마치고는 화장실 다녀오면서 보니 생각보다 바람이 쎄서 고어텍스 안에 옷을 하나 더 입어야겠더라. 이제 하산하는 일만 남았기에 여벌의 옷은 이미 패킹을 해서 배낭 저 아래에 들어가있는데 꺼내입으려면 배낭을 전부 다 끄집어내야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러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 밖에.
아무튼 바라클라바 뒤집어쓰고 랜턴 꺼내서 배터리 넣어 착용하고 스틱 길이 조정하고 신발끈 야무지게 매고 고글을 썼다가 밖이 캄캄하니 필요없겠네 해서 다시 케이스에 집어넣는 등 자투리 시간들이 더해져 35분에서야 출발을 한다.
천왕봉 가는 길은 장터목 대피소를 나서자마자 오르막으로 시작한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천왕봉까지는 오고가는 사람이 많아 눈이 다져져 있으므로 아이젠이 필수다. 출발부터 다리가 무거워 천천히 걷는다. 바람도 매섭네. 하지만 제석봉 덕분으로 덜 힘들고 참 좋았다. 많은 눈으로 제석봉의 고사목이 허리까지 덮여있었어도 특유의 그 분위기는 겨울이어도 알아보겠더라. 옛 기억이 새록새록 나긴 했지만, 겨울의 기억이 아니었기에 조금은 다른 느낌이었다. 바람 때문에 느긋하게 감상하고 살펴볼 겨를은 없었지만 왠지 고사목이 줄은 것 같았다. 하지만 제석봉은 지리산의 대표적인 풍경 아닌가. 예전에 나는 제석봉을 지날 때 으시시하면서도 장엄한 느낌을 받았었다.
제석봉을 오르는 중에 일출을 맞이하고 말았다. 몇 년 만에 보는 붉은 빛이다. 천왕봉 정상에 도착한 사람들은 멋진 일출을 보겠구나. 오늘 날이 좋으니 아주 굉장한 풍광이겠다. 주변이 어스름한 중에 붉은 빛이 짙게 번지는 걸 느끼니 아 이래서 사람들이 해 뜨는 걸 그렇게도 보려 하는구나 좋은 기운이 느껴지는 그런 빛이다.
제석봉을 지나 주능선을 따라 걷는 동안 어마어마한 눈이 쌓여져서 담장을 이루는 곳을 보았다. 와. 정말 엄청나구나. 바람이 미는 대로 쌓여져서 담장이 되었고 좁게 꾸불꾸불 곡선을 그리며 형성된 길을 따라서 걷는데 눈 담장이 내 어깨보다 높다.
사진을 찍어볼까 하고 눈대중을 해봤는데 광각이 아니면 이 느낌을 담을 수 없겠다 싶어 지나친 것이 지금은 좀 아쉽다.
저기 앞에 천왕봉 정상이 보이고 꼭대기에 사람들이 서성이는 것도 보이는데 좀처럼 거리가 줄여지지 않는다. 천왕봉 방면으로 아침에 출발한 사람 중에는 내가 가장 마지막인 것 같다.
철계단이 계속 이어지는데 예전에도 이 계단이 있었던가 싶다. 나일론 로프를 잡고 돌을 타고 올라가기도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끝없는 계단길이다. 내 기억이 정확치는 않아서 확신은 없지만 새롭다.
통천문 즈음에 도착하니 정상부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맨 몸인 사람들도 있는 걸 보니 짐은 장터목에 놓고 가볍게 올라와 천왕봉 일출을 즐기고 다시 장터목으로 가는 것 같다. 아침은 장터목에서 드시겠지.
한겨울에 지리산을 산행한 적이 없어서 매번 내 기억은 봄, 여름, 가을의 것이라 겨울 풍경의 지리산이 참 낯설다. 특히 천왕봉 가는 길은 더 그런 것 같다. 통천문도 그렇다. 이런 구간이 있었던가. 약 20년만에 오는 거라지만 이런 독특한 길은 기억에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오전 7시 50분 천왕봉 도착. 해부터 봤다. 이미 높~~이 떠올라있다. 정상에 사람이 아무도 없을꺼라고 생각했는데 5-6명 정도의 사람들이 큰 바위 뒤편에 감쪽같이 서있었다. 아, 너무 평화로워보이는 정상부다.
옆에 서 있는 젊은이에게 사진 한 장을 부탁한다. 정성스럽게 찍어줘서 고마웠다. 중산리에서 올라왔나본데 매주 온단다. 지리산 동네에 사시는걸까.
정상 표지석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담담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먼 곳도 바라본다. 그저 평화로울 뿐이다.
구름에 싸여서 산 봉우리 부분만 살짝 보이는 모습은 저 곳이 섬인가 싶을 정도.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분이 정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차를 한잔씩 나눠주셨다. 맛이 좋고 차분해지는 걸 느낀다. 차를 내주시는 마음. 지리산 천왕봉의 감동을 더 깊이 느끼고 가라는 마음 같다.
하늘이 너무나 파랗다.
이제 내려가야지. 장터목으로 내려가 백무동 방면으로 하산할 수도 있으나 나는 왠지 되돌아가지 않고 천왕봉에서 바로 중산리로 내려가고 싶었다. 정상으로 올라올 수 있는 가장 빠른 코스이기 때문에 하산길 경사도 심하겠지만 특별한 이유없이 그리로 가고 싶었다.
예전에 2002년에 소정과 성삼재에서 대원사까지 종주 했을 때는 천왕봉에서 중봉 쪽으로 넘어가 치밭목에서 쉬었다가 하산했었는데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중산리로 하산을 한다. 이 길은 처음 가보는 길이다. '아마도' 그럴꺼다.
시작부터 아주 급경사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간다.
한참 앞서 내려가셨던 공단 직원분께서 표지판과 길을 정비하고 계시다. 나는 지리산을 내려가는 것이 아쉬운 것인지 터벅터벅 아주 천천히 음미하며 내려가는 중이다. 나도 모르겠다. 되게 밍기적거리고 있다.
천왕샘하단 전망대에서 산줄기를 감상하던 중에 동고새로 추정되는 아주 작은 새를 보았다. 안그래도 이번 종주 중에 새소리를 한번도 못들었다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하산 중에 몇 마리의 까마귀를 보았을 뿐인데 눈 앞에 의자 아래에서 작은 새소리가 들리는 거다. 먹이를 찾는지 총총 대며 왔다갔다 하는데 사진을 찍으려고 주섬주섬하는 동안 자꾸만 나에게서 멀어진다.
아까 사진을 찍어준 젊은이와 일행이 나를 지나쳐 내려간다. 지나갈 때 초콜릿 하나 주고 가는 데 뒷태가 지쳐보였던가? 감사했다. 지리산에 오면 마음이 활짝 열리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열린 마음을 기대하게 된다. 굳이 산에서까지 하나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할 필요 있나. 산에서 내려가 속세에 닿기만 하면 당장 모드전환일텐데 뭐 굳이 산에서까지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초콜릿 껍데기를 까서 바로 입에 쏙 넣고 맛있게 오물오물.
터벅 터벅 내려가면서도 내 눈에 뭐 하나라도 더 집어넣고 갈 태세로 멀리 능선도 한번 보고 오른쪽에 튀어나온 암벽도 한번 본다. 뭐라도 사진에 담을 만한 풍경이 있나 생각하며 그렇게...
잠시 난간에서 멈췄다.
눈 앞에 펼쳐진 무수한 산등성이들의 파노라마를 바라본다. 산줄기가 물결치는 이 모습이 그리워서 여기에 왔구나 내 눈에 기억해두자. 담아보자. 눈과 마음이 기억한다.
아쉬운 마음으로 천천히 내려간다.
한참을 내려온 것 같은데 법계사가 나올 때가 되었는데 안나타나네. 슬슬 배가 고프다. 배낭도 무겁고. 계단이 참 많은 하산길이다. 거리상 법계사가 얼마 남지 않은 전망 좋은 곳에 또 계단이 시작되길래 법계사는 패스하고 여기서 쉬자 하고 배낭을 내렸다. 아이구 좋다.
계단 구간에 눈이 없으니 아이젠을 벗어볼까. 어느 정도 내려오니 살짝 더워서 장갑 없이 맨손으로 스틱을 잡아도 될 정도이다.
계단에 앉아서 모카빵 남은 걸 뜯어먹고 있는데 한 사람 한 사람씩 올라오시는 분들이 있다. 지금까지는 올라오시는 분과 마주치면 '안녕히 가세요' 하고 인사했는데 오르막 구간이 너무 힘들면 인사하는 것도 지친다는 걸 알기에 여기선 인사안했다.
시간도 많은데 한참 쉬어볼까 배낭에서 셀카봉을 꺼낸다. 이번에 혹시나 쓸 일이 있을까 싶어 갖고 왔는데 이제 처음 써본다. 지난 번 향적봉에서 용준형이 우연히 주운 것을 내가 갖게 되었고 마음에 든다. ㅎㅎ 셀카봉이 있으니 멀찌감치 셀카를 찍을 수 있지 않은가. 너무 좋지 아니한가.
다만 카메라를 고정하는 부분이 단단치 않아서 주의가 필요하다. 생각없이 휘둘렀다가는 핸드폰이 요단강을 건널 수 있다.
아이젠 없이 계단을 내려가니 발이 편하고 좋다만 계단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신어야 했다. 바위 위에 살짝 얼음구간이 있고 그늘은 눈이 얇게 얼어 있어서 주의하며 걸어야 했기에 이러느니 다시 신자 했다.
오전 10시 법계사 도착했으나 그냥 패스.
로터리대피소가 공사중이고 임시화장실쪽은 쳐다도 보지 말라던 글을 본 적이 있어서 쳐다도 안보고 내려간다.
여기서 칼바위 쪽으로 내려갈까 순두류쪽으로 갈까. 보통 순두류로 내려가는 이유는 거기서 중산리탐방안내소까지 가는 순환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인데 시간을 보니 버스시간과 맞지 않을 것 같고 걸으려고 왔으니 내내 걷자 싶어 칼바위로 향했다.
내려가는 동안 칼바위 비슷한 느낌이 나는 바위를 보지 못했다. 뭐가 칼바위인지 모르겠더라.
한참을 내려가다가 더워서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고어쟈켓을 벗었다. 이미 내려오다가 한차례 중간티셔츠를 벗었는데 칼바위쯤 오니 조금 과장하면 초여름 느낌이랄까. 겨울왕국에 있다가 다른 계절로 넘어온 그런 기분이었다.
칼바위에서부터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데 한여름 산행인가 착각할 정도로 폭포수가 푸아~~악 처러러럭 하고 떨어진다. 볼만했으나 눈 앞에 조릿대가 시야를 가려 멋진 사진을 기대할 수 없어 나홀로 감탄사만 연발하고 지나쳤다.
아이젠을 완전히 집어넣었다. 눈길에서는 내 빙벽화가 와따시였는데 이제 중산리 계곡 완전 초입을 걸으려니 아이고 내 다리~~~ 곡소리가 나온다.
바닥창이 딱딱해서 걸을 때마다 진동이 온다. 발바닥이 뜨겁다. 언제 끝나지?
정상부에서 3시간 정도면 하산이 완료될 줄 알았는데 너무 밍기적거렸나. 정신력으로 버텨야 한다. 인내심을 발휘해라.
내 뒤로 내려오시는 한 분도 엄청 지치시는지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쉬엄 쉬엄 간다. 배낭은 내가 더 무거운데...
스틱이 없었다면 이 하산길을 어떻게 내려갔을까. 12시 5분 법계교 앞 탐방안내소 도착. 겨우 간신히 도착을 했구나. 걸음을 완전히 멈추고 배낭을 내려놓고 계단에 앉아 신발을 벗었다. 아유 내 발바닥.
맨 발로 딛으니 너무 시원타. 내가 계곡에 들어갈 줄 알았는지 계곡금지 경고판이 곳곳에 보인다. 저기에 발을 넣으면 피로가 엄청 풀릴꺼야..
양말도 벗고 계단 난간을 붙잡고 집중해서 정성스런 스트레칭을 한다. 움직일 때마다 안아픈 데가 없구나. 가져오기로 했으나 무게 때문에 포기한 경등산화가 아른거린다. 그걸 신었으면 날라다닐텐데...
무엇보다 엄지 발가락이 너무 아프다. 왼발이 더 큰지 왼쪽이 아프다. 가져온 스프레이 파스를 뿌려본다. 한 20분을 그러고 있다가 다시 배낭매고 출발. 중산리 버스정류소까지 임도를 따라 한 1.8km 내려가야 하는데 정신무장이 필요해보인다. 평지는 걸을 만한데 내리막은 고역이지만 내려가야 정류소가 나온다.
어제 지도에서 식당 몇 군데를 확인했기 때문에 중산리정류소에 가면 산채비빔밥 같은 거나 뭐 아무거나 요기거리에다 지역막걸리를 꼭 먹어보리라 했다. 지금은 거의 그것만 생각하며 걷는다.
다행히 한 쪽에 데크길이 있다. 조금 편하게 걷다가 데크가 사라지면 양지바른 길로 걷다가 차가 오면 갓길로 피했다가 다시 양지쪽에서 걸어내려갔다.
누군가가 중산리정류소에서부터 걸어올라온다. 분위기가 그런 것 같다. 차가 있다면 저 위에 주차장으로 주차하지 저 아래에 주차하고 걸어서 올라올리 없다. 버스를 타고 온 게 분명해. 매트리스가 배낭에 매어있는 걸 보니 지금 장터목으로 오르는 것 같은데 너무 늦은 것 아닌가. 20대로 보이는 남자분인데 젊음이 느껴진다. 걷는 속도도 남다르군. 벌써 저 위로 가고 있네. 보기 좋지 아니한가. 나도 젊으니까 걸어서 내려간다지...
20여분 내려가니 중산리정류소가 보인다. 정류소 코앞까지 가니 매표기가 나온다. 오후 2시 20분 출발하는 티켓을 사놓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중산리맛집'이라는 식당을 향해 걷는다. 다리가 무지 아팠지만 곧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을 꺼라는 기대로 가게 앞까지 걸어갔는데 웬걸 문이 안열린다. 믿을 수 없게도.
아,, 영업을 안하는구나.
매표기 옆에 있는 기사식당을 향해 다시 걷는다. 기사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한 분이 식사 중이시다. 영업 중이라는 걸 확인했으나 사장님이 손님이 온 걸 모르시는 것 같아서 '식사 되나요?' 하고는 테이블에 앉았다.
사장님이 오셔서 '뭐 드실래요?', '막걸리 하고요...' 주문을 하려는데 '막걸리는 없어요' 하신다.
'막걸리 없어요?'
오늘은 막걸리가 안들어왔단다. 그것 때문에 왔는데 그게 없으면 소용이 없는데...
망설임 없이 가게를 나왔다. 좀 멀지만 아까 내려오면서 봐두었던 막걸리집이 있어서 이를 악물고 올라갔다. 한 100m 정도 밖에 되지 않았겠지만 그때 내 상태로는 엄청난 거리로 느껴졌는데 거기도 문을 닫은 것이다. 절망적이었다. 눈물이 나왔을까?
할 수 없다. 정류소 옆에 있던 CU편의점으로 갈 수 밖에. 도로 올라온 길을 내려가 편의점 앞에 따뜻하게 해를 받고 있는 나무테이블에 배낭을 내려놓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여러 종의 막걸리가 있었으나 지역막걸리로 보이는 모르는 브랜드가 있어 두 병을 집어들었다. 하나는 집에 기념으로 가져가야지. 김밥 1줄과 함께 결제 후 나와 테이블에 앉았다. 기념으로 사진을 남길까 싶어 한 장 찍었다.
지리산 단성 막걸리. 예쁘게 찍긴 찍었는데 내 눈에 유통기한이 들어온 것이다. 어제까지네? 그때 약간 눈에 뵈는 게 없었기에 집에 기념으로 가져가기로 한 한 병만 환불하고 하나는 먹자 싶어 한 병을 들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사장님, 날짜가 지났으나 한 병은 그냥 먹으려고 하고요 한 병만 환불해주세요.
사장님이 카드기로 가서 환불을 해주려고 어쩌고 하고 있는데 사장님의 어머님으로 보이는 분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상황을 파악하시곤 '날짜 지난 건 팔 수 없어요' 하시는 거다. 그게 맞지만 나는 이미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러나 안파시겠다고 하니 어쩔텐가.
두 병을 다 환불하고 대박막걸리를 한 병만 산다. 익히 그 맛을 알고 있는 대박막걸리라니... 실망감이 크다. 지역막걸리 한번 맛보겠다는 데 중산리 분들에게 내가 실망을 크게 했다. 편의점 사장님은 외지인이 틀림이 없다. 그냥 그럴 것 같다.
이것도 기념으로 찍었다. 한 잔을 컵에 담아 마시는데 오잉? 왜케 맛있어? 너무 맛있는 거다. 아,, 참 좋구나. 해는 따땃하지 기분도 좋지 산행은 최고지 조금 섭섭하긴 하지만 막걸리도 맛있었다. 보통은 첫 잔만 맛있고 그 다음 술맛은 조금씩 떨어지는 데 날씨가 추워서인지 내가 당떨어진 상태라서인지 모르겠으나 첫잔부터 끝잔까지 맛났다.
삼양라면 남은 거 한 개 뿌셔서 라면스프 뿌려 오도독 오도독 씹으며 버스를 기다렸다. 중산리쪽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걸로 아는데 오늘이 금요일인데 왜 식당이 문을 닫았을까 막걸리는 왜 안들어왔을까 궁금한 게 많았다.
버스가 시간맞춰 도착하여 탑승. 원지정류소에 금세 도착했다. 산청이라는 곳에 처음 와보는데 진주도 가깝고 대전도 가까운 편이다. 원지정류소 창구에 가서 혹여나 대전 가는 티켓 나온 게 있나 물어봤더니 다 매진이다. 6시 35분에 출발하는 차표를 끊어놨는데 더 빠른 시간대에서 취소표라도 나온 게 있나 싶어 물었던 것.
지금 3시 정도 밖에 안되었으니 목욕탕이나 갈까 싶다.
정류소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계시다. 산행 간식이 많이 남아서 어르신들께 사탕이나 맛밤 드리니 감사하게도 받아주신다. 배낭을 뭘 그렇게 무겁게 매고 다니냐며 걱정 비슷한 타박을 주신다.
목욕탕 갈 요량으로 몇 가지를 배낭에서 빼고 있는데 우연히 천주교팀분들을 만났다. 아니 이 시간에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반갑기도 하고 보통 인연이 아닌가보다 생각되기도 했다. 신부님과 수사님, 어머님 세 분은 바로 오는 버스를 타셨다. 사진 찍은 것들이 몇 장 있어서 이메일로 보내드리기로 했는데 다음에 겨울지리산에서 또 우연히 만나게 될까?
배낭은 정류소에다가 맡기고 가까운 금강블레스사우나로 향했다. 가는 길에 느낌 팍 오는 별미식당, 초원식당에 꽂힌다. 낙지볶음, 김치찌게, 동태찌게... 요기다가 소주 한 잔 촥~~~ 을매나 산행의 마무리로 훌륭한가. 아쉽다.
목욕탕 7천원으로 어제 장터목대피소에서의 찝찝함을 날렸다. 열탕이 있고 미지근한 온탕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온탕에 들어가 포옥 담그고 있으니 목욕탕을 갈 생각한 나 자신 마이 칭찬해.
시간에 맞춰서 다시 정류소로 왔다. 버스는 정확히 10분 늦게 정류소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35분이 넘었는데도 버스가 안들어오니 마음이 덜컹 했다. 목욕하고 오니까 몸은 천근만근 피곤해오는데 아까 막 떠난 버스가 그건가 싶었다. 정류소 매표소에 물으니 차가 좀 늦게 오는 일이 자주 있다고 해서 마음이 놓였지만.
버스 트렁크에 배낭을 넣어놓고 올라타니 진주에서 젊은이들이 꽉 탔다. 내 한 자리 비어있더라. 대전 사는 사람들이 진주에 일터가 있는 걸까? 진짜 궁금해서 집에 돌아와 검색해봤는데 알 수가 없었다. 궁금해서 옆에 앉은 사람들, 뒤에 앉은 사람들을 쳐다보기도 했는데 다 젊은 사람들이라는 공통점 밖에는 발견하지 못했다.
버스에서 잘 자다 잠에서 깨어 운전하시는 기사님이 운전 잘 하나 부릅 뜨고 지켜보는데 기사님이 원지에서 10분 늦게 출발해서인지 운전이 거칠더라. 차선에 거추장스러운 승용차가 있으면 비키라고 어찌나 바싹 붙으시던지 차선 변경도 거칠고... 조금 무서웠다.
여하간 복합터미널에 무사히 잘 내려 다리를 절뚝이며 집에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소로 걸었다. 속도를 낼 수 없어 천천히 걸었지만, 정류소 근처쯤에서 102번이 텅텅 빈 채로 들어가는 뒤태를 본 순간 달렸다. 걷기보다 달리는 게 쉬운걸까?
덕분에 집에 빨리 도착했다. 4일만에 남편과 조우하여(왠지 서먹했다) 집 근처 바다횟집으로 가 못다한 산행뒷풀이를 맛나게 했다.
등반기를 쓰는데 4일이 걸렸다. 뭔가 잘 안써진다. 너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그 감동이 글로 잘 전달이 안된다. 틈틈이 사진을 더 자주 찍고 그때그때 메모를 조금 더 해놓을 걸 싶다.
겨울 지리산을 사랑하게 되었고 앞으로도 다른 계절은 몰라도 겨울에는 꼭 가련다. 사람이 적기도 하고 여유있게 지리산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장터목에서는 안 잘 것 같다.
산행기간 : 2025년 2월 11일(화) ~ 2월 14일(금)
이동거리 : 26km
내용 :
▶11일 음정마을~벽소령대피소 약 8km
▶12일 대설주의보로 통제됨
▶ 13일 벽소령대피소~마른재~덕평봉~칠선봉~영신봉~세석대피소~촛대봉~삼신봉~화장봉~연하봉~장터목대피소 약 9.6km
▶14일 장터목대피소~제석봉~천왕봉~법계사~칼바위~중산리정류소 약 8.1km
비용 :
· 대전복합T→함양시외T 13,200원
· 함양시외T→음정행시외T 5,100원
· 대피소이용료 3박*12,000원=36,000원
· 대피소 물 구입 3,000*3회=9,000원
· 중산리정류소→원지정류소행 버스료 4,700원
· 원지정류소→대전복합T 15,900원